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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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아내 열전≫ - 시대의 변화를 헤쳐나간 여성들의 발자취를 더듬다 - 백승종- [보도자료]
- 2025-01-03
≪조선, 아내 열전≫ - 시대의 변화를 헤쳐나간 여성들의 발자취를 더듬다 - 백승종
아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내 생각을 알지 못하네
나를 꾸짖고 나무라더니 문을 꽝 닫고 나타나지도 않네.
_이색, 〈이천의 밭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목은시고》
조선의 여성, 특히 ‘아내’로 지칭되는 이들의 삶이 구속적이고 순종적이기만 했을까? 조선 역사를 보면, 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조선의 ‘개국’도 큰 사건이었고 사화와 당쟁, 거듭된 외침을 겪으며 역사의 강은 몇 번이나 굽이쳤다. ‘아내’들의 모습도 역사의 굽이마다 달라졌다.
명료하고 담백한 필치로 동서양 역사를 전달하는 이야기꾼 백승종 교수는, 조선사의 결절점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아내의 변화된 삶을 증언한다. 때론 남편의 술친구로, 때론 남편의 ‘지기(知己)’로, 때로는 독립적인 문필가 또는 예술가로 살아간 아내들이다. 이 책은 조선의 여성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고정관념에서 탈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시대의 변화를 읽고 자신들의 생존방식을 새롭게 정의한, 조선 시대 아내들의 이야기다.
시작하는 글
마침내 ‘아내의 역사’를 쓰다
1
○ 우연히도 나는 역사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 많은 사람의 과거를 깊이 들여다보는 직업을 가져서일까? 고생 끝에 일찌감치 세상을 뜨신 어머님이 그리울 때도 많고, 태어나자마자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나를 구해주신 할머님이 생각날 때도 적지 않은 편이다.
•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분들의 모습이 내가 공부하는 역사와 겹쳐 보일 때가 늘어난다.
• 어머님과 할머님도 이 땅의 여성이요, 아내로 사셨다. 그분들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쉽게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 어머님과 할머님의 삶을 나름대로 짐작하는 가운데, 나는 수년 전 한 가지 다짐을 하였다.
• 우리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아내의 목소리를 찾아서 기록하자.
• 아내의 역사는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나의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다.
2
○ 날마다 이용하는 역사적 문헌 속에서 나는 아내에 관한 단편적인 서술을 조금씩 모았다.
• 공부는 속도는 느렸으나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점차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이 윤곽을 드러냈다.
○ 첫째는 조선의 아내는 다양한 생존 전략을 펼쳤다는 점이다.
• 세상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 전략을 거듭 수정하였다고 생각한다.
• 가령 성리학이 조선의 지배 이념으로 확립되자 일부 사대부 여성은 성리학적 지식을 쌓은 지식인이 되기도 하였고, 하나뿐인 목숨을 버려서라도 사회적 인증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 또는 그와 정반대로, 남성의 지배에 순종하는 듯하면서도 가정의 실권을 쥐기도 하였다.
• 평민 여성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밟은 이가 적지 않았다.
○ 둘째는 역사 속 아내들의 능동적인 역할이 인상적이었다.
• 아무리 남성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더라도 아내는 자신이 속한 작은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관철할 때가 적지 않았다.
• 모든 아내가 가정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삶의 조건이 아무리 나빠도 아내가 순순히 항복하거나 무조건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는 말이다.
○ 끝으로, 역사에는 상호성의 원칙이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ㆍ조선 시대에도 남성과 여성은 상대를 날카롭게 관찰하였고, 사회문화적 여건이 바뀔 때마다 상대에게 새로운 역할을 주문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아내의 역할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조금씩 새로 정의되곤 하였다.
○ 한마디로 아내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나는 그들의 생존 전략, 재량권 그리고 아내와 남편, 개인과 사회의 문화적 상호작용에 주목하기로 마음먹었다.
3
○ 이 책은 14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5세기 동안에 일어난 아내의 역사를 모두 열다섯 개의 이야기에 담았다.
• 아내에 관한 전기적 기술이 대부분이지만 여성에 관한 시대의 담론을 따져 본 것도 몇 편이 있다.
• 책을 다 읽고 나면, 독자 여러분은 아내의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고려 말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과 그의 부인 안동 권씨이다.
• 나는 권씨 부인의 모습에서 고려 여성을 재발견한다.
• 그가 가진 불교적 사유도 나에게는 특별한 느낌을 주는데, 그는 남편 이색과 함께 청운의 꿈을 이루고 점차 병들고 시들어간다.
• 말년에는 왕조 교체의 회오리를 만나 급격한 추락을 경험해,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 그다음에 만날 주인공은 조선 초기 훈구파를 대표하는 문인 서거정과 그의 아내 선산 김씨이다.
• 그는 남편과 알콩달콩한 결혼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의 삶에는 고려의 유풍이 진하게 남아 있다.
• 15세기까지도 아내의 역사는 고려 시대와 유사점이 많았던 것 같다.
○ 하지만 세 번째 이야기가 전하는 아내의 역사는 이전 시기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 성리학의 거장 점필재 김종직은 아내 창녕 조씨를 “훌륭한 선비”라며 극구 칭찬한다.
• 우리의 주인공 조씨 부인은 남편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지로서, 여성 선비의 모습을 보였다.
• 아내의 역할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난 셈인데, 이런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자연적인 변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 많은 사람이 강력한 의지를 지니고서 사회 전반의 ‘성리학적 전환’이라는 거창한 사업을 추진한 결과였다.
○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은 성리학적 가치를 보급하는 데 앞장선 인물, 특히 세종과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활동에 주목한다.
• 그들이 개입한 두세 가지 사건을 들여다보면, 성리학적 도덕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던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아내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아마 16세기였을 것이다.
• 미암 유희춘의 아내 송덕봉은 남편의 ‘지기(知己)’로서 남편과 함께 시를 주고받았다.
• 그는 우리의 막연한 예상과는 달리 활달하고 재기발랄한 아내의 모습을 선보인다.
•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시대를 살았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라는 여성 작가도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 알다시피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고, 그러했기에 그 아내들도 문화예술의 주역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 16세기에는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지식을 과시하는 여성이 가장 호평을 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연달아 일어났고, 이제 세상의 흐름은 크게 달라진다.
• 국가가 존망의 갈림길에 서자 대의명분에 투철한 새로운 유형의 아내가 기림을 받는다.
• 문장가 상촌 신흠의 아내 전의 이씨는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조선 시대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그 시절에는 평민과 노비의 아내까지도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이 많다.
• 미수 허목이 남긴 많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경직된 조선을 만난다.
• 17세기 조선 사회는 당쟁도 매우 심해서 아내의 운명도 그 영향을 받는다.
• 명재 윤증이 기술한 파평 윤씨의 전기를 읽노라면 역사의 수레에 여러 번 치이면서도 끝까지 삶의 의미를 탐구한 한 아내를 만난다.
○ 그다음 세기가 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 지식사회 일각에서는 경직된 성리학적 이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어난다.
• 실학자 성호 이익은, 여성과 가족의 삶에 주목하고 얽힌 현실 문제를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풀어갈 방법을 연구한다.
• 그는 자신이 편찬한 백과사전을 통해 개혁의 의지와 방향을 모색한다.
○ 또 다른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지배층의 위선이 극에 달했다며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 그는 당대에 유행처럼 번지던 ‘열녀병’ 즉, ‘남편 따라 죽기’ 현상의 본질을 파헤친다.
• 박지원의 비판을 통해, 모든 문제의 핵심은 과부가 처한 사회경제적 위기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 청장관 이덕무는 박지원의 관점을 계승해, 그 문제와 더욱 정열적으로 씨름한다.
• 그는 아내의 역사를 왜곡한 근본 문제인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답을 찾아 나선다.
• 그가 여성 교육이라는 새로운 의제를 들고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 다산 정약용은 여러 실학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생활고에서 벗어나려는 실질적인 방법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에 옮긴다.
• 이야말로 실학적 문제 해결 방법의 총결산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 드디어 19세기가 되면 아내의 역사에 새로운 활력이 생긴다.
• 우리의 주인공 예안 이씨는 추사 김정희의 아내인데, 김정희는 어리광을 부리는 도련님 풍의 남편이다.
• 그는 연하의 아내 예안 이씨와 마치 현대의 연인처럼 재미있게 살아간다.
• 그들의 생활을 관찰해보면, 16세기의 부부관계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이다.
•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김정희가 현실을 중시하는 합리적인 고증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 그는 낡은 성리학과 결별하고,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한 지식인이다.
• 그의 아내 예안 이씨 역시 새로운 세상이 밝아옴을 가슴으로 느끼고 능동적으로 대응한 것이라 믿는다.
○ 이 책은 혜강 최원기라는 혜성의 이야기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그는 여성도, 가정도, 과학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의 소유자이다.
• 자연과학적이기도 하면서 사회과학적인 인식으로 아내와 여성의 문제를 바라보았으니, 그의 시선은 근대적이라 하겠다.
• 최한기가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서적을 열심히 구해서 읽고, 마침내는 자생적 근대주의자로 변신하였다는 사실은 지성사의 멋진 한 장면이다.
• 그의 새로운 관점이 아내의 역사에 이채를 더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백승종, ≪조선, 아내 열전≫, 시대의 창, 2022
☞ 백승종 : 역사학자. 독일 튀빙겐대학교를 시작으로 서강대학교, 독일 보훔대학교 등에서 역사, 문화, 종교, 문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풍부한 역사 지식으로 《도시로 보는 유럽사》, 《상속의 역사》, 《신사와 선비》 등을 저술하였고, 한국의 전통사상을 재해석해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선비와 함께 춤을》 등도 썼다.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으로 각각 한국출판평론학술상,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그는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등에 수년간 칼럼을 썼으며, 방송과 강연을 통해 시민과 함께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는 지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