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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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1, 2-20세기의 봄≫ 조선희 장편소설- [보도자료]
- 2024-08-31
≪세 여자-20세기의 봄≫ 조선희 장편소설
애도의 궁극이자 여성으로서의 오연한 자부심!(신수정, 문학평론가)
이 소설의 세 여자가 살았던 때는 역사의 가장 음침한 골짜기, 비유나 풍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헬조선’, 조선이라는 이름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세 여자의 인생이 늘 지옥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우리는 지금 연봉이나 승진 문제로 우울해 하지만 이 여자들은 현실의 것들을 그닥 개의치 않았고 목숨조차 가벼이 여겼으며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애드벌룬처럼 떠오르던 20세기 초반에 그들의 인생은 지옥 속에서도 가끔 봄날이었다.
세 여자는 상해에서, 경성에서 20대를 함께 보낸 후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장소로 흩어졌지만 늘 우리 근대사의 극명한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가령, 주세죽이 스탈린 치하에서 한인 강제 이주의 참담한 현장에 던져졌을 때 허정숙은 연안에서 모택동에게 혁명전략을 배우고 있었고, 고명자는 경성에서 친일잡지의 기자 노릇을 했다. 해방공간에 허정숙과 고명자는 38선의 북쪽과 남쪽에 있었고, 허정숙은 김일성의 측근이었고, 고명자는 여운형 옆에 있었다.
이들은 혁명의 여정에서 남편을 잃고,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고, 아이를 잃고, 마침내 시베리아에서, 평양에서, 경성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식민지 조국의 국민이 되어 일상은 깨지고 생활은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세 여자는 자연스레 삶을 역사에 ‘올인’했고, 재산도 버렸고 애인과 가족도 버렸고 더 버릴 것이 없을 때는 목숨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세 여자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다. 상황과 역할에 충실했던 그런 여자들이, 20세기 초, 이곳에, 살았었다는 것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평론가 신수정에 따르면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애도의 궁극이자 여성으로서의 오연한 자부심으로 읽히기도 한다.
〈줄거리〉
1924년 허정숙은 동지였던 임원근과 결혼했고, 고명자는 애인이었던 김단야의 권유로 모스크바 유학을 떠난다. 1925년 발생한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이른바‘101인 사건’으로 이들 세 여자와 남자들은 혹독한 시련을 맞이한다. 이 사건으로 허정숙과 주세죽, 임원근, 박헌영은 투옥되고, 김단야는 조선을 빠져나가 모스크바로 향한다. 곧바로 풀려난 허정숙은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 임원근과는 부부의 연을 정리한다. 임원근이 감옥에 있는 동안 또 다른 활동가 송봉우와 재혼하면서 허정숙은‘조선의 콜론타이’라는 별명과 함께 이 시대 스캔들 메이커가 된다.
1928년, 주세죽은 뒤늦게 출옥한 박헌영과 함께 일제경찰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한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들 부부의 품에는 북행길에 낳은 딸 비비안나가 안겨 있었다. 부부는 모스크바에서 자리 잡고 있던 김단야, 고명자와 함께 ‘정치망명가들을 위한 집’에 살며 박헌영은 레닌대학에서,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한다.
1929년 김단야와 고명자는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다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김단야 홀로 상해로 떠나게 된다. 몇 달 후 체포된 고명자는 심한 고문과 회유 끝에 전향을 선택하고 이로 인해 이후 양쪽 모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며, 한때 친일잡지인 ≪동양지광≫에서 일하기도 한다.
주세죽과 박헌영은 1932년 딸 비비안나를 모스크바 보육원에 놓고 당 재건운동을 위해 상해로 갔으나 1933년 박헌영이 체포돼 국내로 이송되면서 이들 부부는 기나긴 이별을 맞는다. 1934년 딸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온 주세죽은 이곳에서, 역시 홀로 남은 남편의 친구이자 동지인 김단야와 재혼한다. 훗날 주세죽은 ‘상황이 우리를 같이 살게 만들었다’고 그때의 선택을 회고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7년 귀국한 허정숙은 한국 최초의 전국적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를 이끌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 이후의 서울여학생운동을 지원하다 투옥된다. 허정숙은 1932년 출감 뒤 태양광선치료소를 운영하다 세 번째 남자 최창익과 함께 중국 무한으로 넘어가 조선의용대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다.
비록 식민지 조국이었지만 경성의 여성동우회에서 뜻을 모아 활동하던 때가 이들에겐 봄날이었을까. 1930년대 후반부터는 서로 너무도 다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격랑의 시대를 맞는다.
1937년 김단야가 일제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면서 세죽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5년 유형에 처해져 중앙아시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를 떠난다. 모스크바 보육원에 있는 딸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한 세죽은 설상가상 단야와의 사이에 낳은 6개월 된 아들도 유형 길에 잃게 된다.
1945년, 세 여자는 각각 서울과 중국 연안,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명자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하고, 허정숙은 의용군들과 함께 사상의 고향인 평양으로 향한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의 청사진을 그리던 것도 잠시, 남쪽은 친탁 반탁을 둘러싼 좌우 대립으로, 북쪽은 만주빨치산 출신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연안파, 소련파 등 정파 간 권력싸움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고명자와 허정숙은 이런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온몸으로 시대를 겪어낸다. 주세죽은 조국의 해방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스탈린에게 유형 해제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써보았지만 아무 답변을 듣지 못한다.
남북 모두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던 중 김일성이 남조선해방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키면서 세 여자의 운명은 또 한 번 요동치게 된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던 고명자는 엎치락뒤치락하는 전쟁의 와중에 서울에서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북쪽의 문화선전상을 맡아 전쟁의 후방을 책임졌던 허정숙은 민족끼리 서로를 갉아먹는 전쟁의 참상 앞에 숱한 회의에 휩싸이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허정숙은 북측에서 요직을 담당하며 김일성 곁에 있었으나 동지들의 숙청 과정과 독재로 진화해가는 일인자를 바라보며 부침을 겪는다. 주세죽은 전쟁이 끝나고 북쪽의 부수상으로 있던 전남편 박헌영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보지만 끝내 외면당하고 만다. 그 이유가 불안한 본인의 입지 때문이었는지, 김단야와 주세죽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 결국 세죽은 1953년 딸 비비안나를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다가 병이 악화돼 생을 마감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1991년 허정숙이 북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절 방문을 담당했던 탈북자 L씨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을 담은 에필로그를 통해 공직에서 물러나서도 수상에게 할 말은 했던 허정숙의 말년을 엿볼 수 있다.
1990년 한소수교 후 소련 정부 자료들이 공개되고 비비안나 박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주세죽의 유형사실과 김단야의 비극적 최후도 밝혀졌다. 주세죽과 김단야는 고르바초프 정권 아래서 복권됐으며, 김단야는 2005년 소련에 이어 국내에서도 복권됐다
1권
프롤로그・1991년 서울
그녀는 어머니 유품에 들어 있었다며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을 내놓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진들이었는데 대개 소련으로 탈출한 이후 찍은 것들이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이 이채를 띠었다. 칙칙한 흑백사진들 가운데 유난히 밝고 화사한 것.
봄인가, 아니면 여름인가. 세 여자가 개울에 발 담그고 노닥거리고 있다. 하얀 통치마 저고리 위로 한낮의 햇볕이 부서진다. 팽팽한 종아리와 퉁퉁한 뺨, 가뿐한 단발은 세 여자의 인생도 막 한낮의 태양 아래를 지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세 여자가 물놀이하는 개울은 청계천인가.
가운데 앉은 양장의 여자, 이마가 넓고 콧날이 반듯한 이 여자는 주세죽이 틀림없다. 오른쪽 여자는 주세죽과 단짝이었던 허정숙 아닐까. 그러면 한 여자는 누구일까.
허정숙 주세죽과 함께 단발을 했던 또 한 여자는 고명자가 아닐까. 세 여자를 당시 잡지들은 ‘트로이카’라 불렀다. 하루에도 수십 개 사상단체가 생겨나고 없어지던 정치 에너지 대폭발의 시대에 세 여자는 그 최전선에 있었다.
주세죽의 남편 박헌영,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 고명자의 애인 김단야, 이 세 남자 역시 ‘트로이카’로 불렸다. 1900년생 동갑내기 세 남자는 실제로 그 무렵 청년공산주의 운동을 이끌고 가던 세 마리 말이었다.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연대는 우정과 애정과 이념으로 반죽되어 시멘트처럼 공고했다.
1920년대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름이 마르크스와 톨스토이, 간디였다면 그중 현실정치에서 가장 파괴력을 지닌 인물은 단연 마르크스였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심장 모스크바로부터 뜨끈뜨끈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때 나이 주세죽은 스물다섯, 허정숙은 스물넷, 고명자는 스물둘이었다.
1. 부부가 되어 무산자계급 해방에 일생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까? -1920년 상해
세죽이 “바다구나” 하고 외쳤다. 정숙이 웃었다.
“바다가 아니고 장강 하구야. 이제 양자강으로 나온 거야. 저 앞에 보이는 게 숭명(崇明)이라는 섬인가 보다.”
“어떻게 알아? 황포강 유람선 타봤니?”
“선착장에 안내 지도 있었잖아.”
세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았지만 섬은 보이지 않았다.
“섬이 어디 있다는 거야?”
정숙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넘실대는 물결 위로 아른아른한 저편에 뭔가 거무스름한 게 보였다. 세죽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대륙이 넓긴 넓구나.”
헌영이 혁명가를 선창했다. 네 남녀가 맑은 하늘 아래 출렁이는 배 위에서 동지나해쪽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동지나해 너머 조선이 있고 경성이 있을 것이다.
조국은 적의 발아래 신음하고
시대는 캄캄한 어둠에 잠겼는데
이 한 몸 일신영달이 무엇이더냐
역사여 내 갈 길을 알려다오
2. 수예시간에 톨스토이를 읽었답니다 -1924년 경성
식민지 조선 사회는 여러 시대가 뒤섞여 있었다. 여성동우회는 빙산의 꼭대기였고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대다수 여자는 정조를 목숨처럼 여기고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 혼인했으며 남편이 죽어도 재혼하거나 친정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시댁에서 조용히 늙어 죽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른 조선 땅에서 봉건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또 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봉건제도가 무너질 때 남자보다 여자들이 치르는 전쟁이 더 격렬했다.
3. 청요릿집의 공산당, 신혼방의 청년동맹 -1925년 경성
세죽이 심문을 받는 동안 어디선가 끊임없이 외마디 비명과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형사에게 “옆방에 혹시 남편이냐”고 물었다. 신의주재판서에 도착했을 때 형사들이 제일 먼저 끌어내 다른 장소로 데려갔다. 조선공산당 중앙위가 있지만 실제 모든 사업은 공산청년회가 했고 연락문서들은 박헌영 이름으로 나갔으니 그가 가장 심한 고문을 받을 것이다. 누군가 고문받다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도 분명 동지 중 한 사람이겠지만 세죽은 그게 남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끼니라고 제공하는 메주 몇 알조차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1927년 경성
정숙은 작별인사 왔던 날 세죽의 말이 맴돌았다.
“내가 상해에서 너를 안 만났으면 남편도 안 만났으면 지금쯤 함흥에서 음악선생 하고 있을까. 그동안 땅 밑이 꺼지는 것처럼 힘들 때도 많았고 죽고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바깥이 춥다고 껍질 속으로 도로 들어가겠나. 죽도 밥도 아닌 인생은 생각하기도 싫어.”
5. 마침내 혁명의 심장에 도착하다 -1928년 모스크바
대합실에는 고명자와 김단야가 마중 나와 있었다. 3년 만의 재회였다. 두 사람을 보자 세죽은 낯선 도시 모스크바가 갑자기 정겹게 느껴졌다. 명자는 짧은 단발머리에 갈색 수달피 모자를 쓰고 더블버튼 반코트와 바지 차림에 가죽장화를 신었다. 단야 역시 소련 신사들처럼 모직코트 차림에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전형적인 소련 인텔리 커플의 모습이었다.
헌영과 세죽 부부가 도착했다는 사발통문이 돌자 유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김명시와 김조이, 두 여자가 맨 먼저 달려왔다. 곧 권오직과 조두원, 조용암도 나타났다. 모두 조선공산당 일제 검거가 시작되기 전에 조선을 빠져나왔고 이제 이곳에서 3년 과정을 마쳐가는 중이었다. 유학생들은 부부에게 국내 사정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댔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검거 사태에 대해 근심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하나같이 혈색이 좋았고 비분강개할 때조차 의욕이 넘쳐 보였다. 혁명가에게 소련은 과연 또 하나의 조국이었다.
6. 자본주의 세계의 종말이 멀지 않았소 -1929년 경성
7. 상황이 우리를 같이 살게 만들었어요 -1932년 상해, 모스크바
8. 나 간다고 서러워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1935년 경성
말로만 듣던 만주 바람을 정숙은 실감했다. 만주로 떠나는 행렬에는 농사지을 한 뼘 땅을 찾아가는 농민도 있고 한밑천 잡아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새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장사치도 있었다. 물론 그녀처럼 항일투쟁 하러 가는 이들도 암암리에 섞여 있을 것이다. 북행열차 이등칸이 삼등칸처럼 비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거국시(去國詩)’를 읊조렸다. 한일합방 되던 해 도산 안창호가 중국으로 망명 떠나면서 남긴 시였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떠밀어서 너를 떠나게 하니
이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서러워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9. 이곳이 당신들의 종착역이다 -1936년 모스크바, 크질오르다
10. 일본 형제들이여, 그대의 상관들에게 총구멍을 돌려라 -1938년 무한, 연안
2권
11. 한바탕 기나긴 백일몽 -1939년 경성
12.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1942년 태항산
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 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간 밤에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나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얼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
두 개의 작은 봉분 주위로 의용대원들이 둘러서서 추모가를 불렀다.
사나운 비바람 몰아치는 길가에
다 못 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우리들이 이룰 것을 맹세하느니
진리의 묘비 아래 길이길이 잠들라
불별의 영령
13. 너희 아버지는 조선의 혁명가란다 -1945년 서울, 평양, 크질오르다
여운형 선생이 단야에 대해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서울의 소련영사관은 철수해버렸으니 평양의 대사관을 통해 알아볼 요량인 듯했다. 어느 날 계동 집에 들렀을 때 여운형은 “내 그러잖아도 자네를 부를 참이었네.”라며 바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명자를 옆에 앉혔다.
“요새도 서울역에 나가나.”
“자주는 아니고 이따금씩요. 생각나면.”
“이제는 그만두게. 단야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명자는 아득해지는 머릿속을 추슬렀다.
“무슨 소리예요…. 언제 어떻게 됐다는 거지요.”
“소련에서.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일이야. 그렇게만 알고 있어.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말게.”
명자는 도망치듯 게동을 나와 전차를 타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 목구멍이 파열하듯 울음이 터졌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를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14. 여우 굴이냐, 호랑이 굴이냐 -1948년 평양, 서울
15. 저 해골 안에 톨스토이나 간디가 들어 있었단 말인가 -1950년 평양, 크질오르다
16 내가 죽더라도 그 죽음이 말을 할 것이오 -1952년 평양, 모스크바
17. 우리는 결국 미국을 보지 못한 콜럼버스였소 -1956년 평양
문득 정숙은 항미원조전쟁 때 북조선에 내려왔다 전사한 모 주석의 아들 생각을 했다. 아들을 사지에 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것도 같고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것도 같았다. 정숙은 아들 살리자고 타협을 하지 않았던가.
모 주석은 정숙의 소개를 받으며 북조선 대표단과 한 사람씩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같은 점 한 가지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여서 공사석에서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반드시 이름과 직책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북조선 대표단은 거의 새 얼굴이라 일일이 정숙의 소개가 필요했다.
“정숙 양, 요새 지내기 어떠시오?”
“하늘과 땅 사이가 세 치입니다.”
모택동이 대장정 때 쓴 시 <산>의 한 구절이었다.
안장에 앉아 말에 채찍질하다
돌아보고 깜짝 놀랐네
하늘과 땅 사이가 석 자 세 치
모 주석 역시 <산>의 한 구절로 화답했다.
“멧부리는 푸른 하늘을 떠받치면서도 닳거나 무뎌지지 않는다네.”
연안의 요동에서 헌옷 속에서 이와 더불어 살던 시절의 정겹고 허물없던 조선 혁명가 동지들 얼굴이 하나둘 사라져가니 그가 정숙의 손을 잡고 흔들 때 반가운 빛이 역력했다. 헤어질 때 늘 하는 인사조차 의미심장했다.
“짜이찌엔再現!”
에필로그 -1991년 평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경합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르크스의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그들을 추종한 공산주의 세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 반대편의 자본주의 세계를 인간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작가의 말
소설을 쓰는 동안 한 시대를 탐사하느라 즐거웠지만 비통한 일들에 많이 울었다. 흔히 작가들이 작품을 쓰고 나면 주인공을 이제 내보낸다고 말하지만 나도 이제 이 세 여자를 떠나보낸다. 세 여자는 내 안에서 12년을 살았다. 그분들의 삶을, 그분들 세대의 삶을, 그 시대의 역사를 위로하며 보내드린다. -2017년 6월 조선희
◎ 조선희, ≪세 여자 1, 2≫, 한겨레출판, 2022(개정판)
☞ 조선희 : 1960년 4월 25일 강원 강릉 출신으로 강릉여자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연합통신 기자, 한겨레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한겨레신문 출판본부 씨네21 편집장,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서울문화재단 대표,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2000년 기자 일을 접고 에세이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을 냈다. 한국 고전영화에 관한 책 ≪클래식 중독≫을 냈다. ≪세 여자≫는 2005년에 시작했으나 두 번의 공직 생활로 중단됐고 12년 만에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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