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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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白基琓 隨想錄 • 딸에게 주는 편지- [보도자료]
- 2024-08-25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白基琓 隨想錄 • 딸에게 주는 편지
책머리에 부치는 편지
나는 내가 직접 전령사가 되고 싶었다. 한 손에는 만고강산을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그리고 거리의 아우성을 함께 몰아서 치는 징을 들고 또 한 손엔 바람 찬 산마루턱에 봉화를 당길 횃불을 들고 어기차게 내 달리는 옛이야기의 주인공 말이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조선의 처녀들
여하튼 오밀조밀한 묏동산이 줄지어 있는 이 한반도는 분명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초원, 그 초원에 금세 한줄기 빗발이 퍼부어졌는지 파릇파릇한 풀잎과 노랑꽃, 하얀 꽃들이 물기를 한껏 머금고 있었고, 때마침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긑 없는 들판이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서 있는 고목들이 마치 자연의 이정표처럼 새까맣게 끄슬려 있는 것으로 보아 금세 벼락이라도 한 대씩 야무지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해가 솟아오르는 동녘의 고목에선 아직도 타다 남은 자욱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가 밑으로 깔려 퍼지니 그 모습이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돌연히 그 연기를 가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한 필의 검은 말이 있었다. 짐승을 쫓는 사냥꾼일까? 아니다. 그러면 전승의 쾌보를 쥐고 달리는 옛 고구려 병사일까? 그것도 아니다.
점점 시야에 들어오면서 형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몹시 짐승스러운 시커먼 숫말 한 필이었다. 그리고 그 말 위에 올라탄 사람은 이제 겨우 십 칠팔 세의 꽃다운 계집애가 아닌가.
새까만 머리카락이 유난히 길었고 하얀 물항라 저고리에 기다란 자주고름, 그리고 모시임이 분명한 옥색치마를 입은 계집애.
그 처녀는 자주고름을 입에 물고 옥색치마를 천사의 옷자락처럼 휘날리며 무엇인가 전신으로 숨 가쁘게 추적하고 있다.
무엇을 저렇게 쫓아가고 있을까?
그 처녀가 쫓고 있는 것은 아득한 시야에 개미떼처럼 몰려가는 야생마의 집단이었다. 이에 덩달아 넓은 초원이 그대로 일어나는 듯, 토끼떼도 달아나고 승냥이떼도 달아나고, 특히 뿔사슴 꽃사슴의 떼거리는 그 폭이 백여 자나 되고 그 길이는 수십 리나 이어졌다. 광야가 온통 달리고 있었다.
시를 쓰고자 하는 딸에게
시 한 편은 하나의 혁명
□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
담아, 이때 역사적 현실이란 무엇일까.
민중적 삶의 총체상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표피로서의 총체상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체제와 피지배계층인 민중과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민중이 이끄는 역사의 맥락에 상관된 제 관계의 총화를 이르는 것이다. 시인이란 사물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 앞서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 대한 논리적 인식능력을 터득해야 할 줄 안다. 그리하여 그 인식능력을 예술 작업에 생명수처럼 부어 넣어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고상한 것, 가장 값진 것의 배어난 모습을 설정하는 자세와 방법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절실한 보편적 염원과 꿈이 아로새겨진 참다운 또 하나의 현실(꿈)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시인이란 직관적 인간형이 아니라 가장 탁월한 논리적 인식능력을 가진 역사적 존재요 싸움꾼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란 이러한 싸움꾼의 논리적 또는 실천적 의지와 결단, 그리고 꿈과 현실의 실천적 통일의 최고 형태라고 할 것이다. 시의 절묘함이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에 너는 먼저 인식논리의 기초인 변증법을 터득하고, 둘째 역사적 상황과 구조에 대한 구체적 파악의 힘인 사회과학적 분석 비판 능력을 기르고, 그다음 우리의 민족의식, 민족사의 주체적 맥락, 민족 분단의 현단계, 그리고 그것의 통일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인식한 기초 위에 인류 역사의 합리적 진행에 대한 신뢰로서의 역사의식(세계관)의 눈을 띄울 공부를 해야 한다.
민족의 참뜻
□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담아!
우리는 바로 이 자그마한 현상에서 지금 이 땅에 들어온 우리가 아닌 세계의 실상을 검출해야 할 듯하다.
즉, 우리가 아닌 세계는 곧 미국이라는 세계주의다.
지난날의 역사를 보면 우리에게 있어 세계란 중국의 중화주의였다.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았으며 특히 한문 문화권을 성립시킬 정도로 힘이 강대하였으므로 그들은 자칭 세계의 중심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그다음은 일제하에서 왜놈들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를 자기 지배하에 두고자 했다. 이 대동아공영권이란 다름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세력권이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대동아공영권이 깨지면서 우리 앞에 나타난 세계주의는 무엇이었느냐?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세계라는 것이었다. 2차대전 이후 이른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열강의 판도가 바뀌고 이에 따라서 당시의 전승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재분할하면서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된 지역을 자유세계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세계라는 실체가 있어서 그러한 세계의 개념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미국의 세계적 군사전략 개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군사전략 개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바로 미국의 자본주의를 수호하자는, 다시 말하면, 미국 독점자본의 자기 증식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일찍이 미국의 보수정치가이며 또한 군인 출신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의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미국의 가장 골칫거리는 군산복합체제에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미국 독점자본의 내재적 요구에 따라서 한없이 변할 수 있는 것이 세계전략이다.
□ 민족의 자치권
지난날 일본제국주의 세력은 우리 민족을 자기들 손아귀에 집어넣고서는 우리더러 자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농사를 짓고 지하자원을 개발하고 또 공장에서 일을 한 결과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면서 아니 이것으로 제 놈들만 살찌게 처먹으면서 조선 놈은 더럽게 게으르고, 그리하여 도대체가 어찌할 수가 없는 민족이니, 그저 때리고 밟아서 강제로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때나 이제나 우리의 농민들은 새벽하늘의 별을 이고서 밭에 나갔다가는 저녁달을 등에 지고야 겨우 집에 돌아올 정도로 부지런하고 지혜롭기가 세계 제일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렇거늘 우리 민족을 게으르고 더럽다니! 남이 일한 대가를 총칼로 빼앗아 먹는 제 놈들이 더럽고 나쁜 놈들이지, 어째서 우리가 ‘할 수 없는 민족’이란 말인가?
이것은 천 번은 뒤집어 생각해도 침략자의 파렴치한 강변이지 사실은 전연 달랐던 것이다.
민족통일이란 무엇인가-제1부
통일은 모든 외세에 대한 자주 선언
□ 주체적 탈냉전
담아!
그렇다면 통일이란 무엇일까?
첫째로 그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38선 전역에 매몰된 지뢰와 또 그 위에 쳐진 으스스한 가시철망, 그리고 이를 지키는 젊은 병사들을 모두 거두어 버리고, 분단된 조국 둘로 갈라진 하나의 민족을 다시 하나로 재결합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가시철망은 누가 먼저 쳐 놓았나?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 즉 미국과 소련이 8‧15해방 이후 남과 북에 각기 분할 진주하면서 쳐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무시무시한 38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감격의 민족통일을 쟁취하려고 하면 이 38선을 애당초부터 그어 놓은 외세를 이 땅에서 송두리째 없애지 않고서는 ‘통일’이라는 ‘통’ 자도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은 어린 코흘리개쯤이라도 익히 알만한 사실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너희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통일이란 무조건 이 땅에서 모든 외세를 쫓아내는 데 있다’고. 그렇다. 외세를 쫓아내지 않고서는 조국분단이 극복될 리 없고 통일이 이룩될 수 없다.
그러나 이때 외세라 함은 단순히 상대적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겠다. 적어도 민족이라는 일정한 주체가 있고 이러한 민족적 주체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을 해치는 가해 세력으로서의 객체가 아니면 안 된다.
민족통일이란 무엇인가-제2부
□ 자유를 얻어내야 한다
백범은 일찍이 8.15해방 직후 우리 조국이 강제적으로 양분되려고 할 때,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받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은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라고 외침으로써 조국은 하나라는 민족적 대원칙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점에서 7‧4성명은 최초 한 문맥만으로는 백범을 비롯한 통일세력의 노선을 확인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백범의 민족통일 사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본제국주의를 비롯한 모든 침략적 외세로부터 조국의 완전한 통일독립을 쟁취해내는 독립운동의 연장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왕조의 법통을 이어가자는 것이 아니었다. 억눌린 백성들을 일으켜 백성의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외세를 업고라도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민중을 묶어가는, 이를테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혁명이 아니라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와의 철저한 싸움 속에서 민중을 묶어가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지향했다.
이런 점에서 백범의 통일노선은 그 뿌리부터가 민중운동, 즉 이 나라 이 백성의 실체인 농민운동에 근거한 자생적 진보 지향이었으며 세계사의 진보와도 일치하는 위대한 혁명정신이었다.
이 때문에 백범의 의식은 역사의 전진과 함께 한없이 발전해갔다. 최소한도 한반도의 모든 그늘지고 딱하고 활달하고 정기 높은 것들을 모두 집어삼킬 수 있는, 그야말로 만고에 푸르른 대하 같은 포용력이 있었다. 이 점에서 그분은 민족 화해의 신이었다. 또 그분은 발끈발끈 화내는 법이 없었다. 이를테면 내가 제일이니 딴 놈은 까불지 마라, 하는 식의 어지러운 좁은 골목길의 골목대장 같은 조잡함을 민족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못된 놈은 질책하되 애정으로 하고 잘한 자에 대해서는 상을 주되 채찍으로 주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장수 같은 대륙적 풍모가 있었다. 이 점에선 백범은 위대한 관용의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백범에게는 자기 자신 일개 쌍놈이니, 쌍놈, 즉 짓눌린 사람들을 위해야 한다는 그분의 전 생애에 터득한 사상적 원칙이 있었다. 이 원칙에 입각해보면 최소한도 몇몇 친일반역자만 빼고는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누구도 욕하지도 손대지도 꺾지도 말자는 것이다. 최소한도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 가난으로부터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주자는 것이었다.
가장 멋진 사내놈
□ 이름 없는 병사, 고독한 일꾼
그러나 사내중의 사내놈, 진짜 멋쟁이 사내를 아버지는 전진적 인간형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버지도 물론 사내이지만 나는 어림도 없다. 전진적 인간형은 우선 역사의 합법칙적인 발전과정에 대해 정확한 논리적인 인식을 갖는다. 따라서 논리적인 인식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인식세계 뒤안(뒤꼍)에 있는 자기를 끊임없이 실천적으로 확인한다. 이 점에서 전진적 인간형은 본질적으로 민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민중이 민중으로서 바로 서려고 하면 역사의 발전과 자기 개인의 발전 사이에 균형을 이루었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소시민적 자리 닦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균형은 이를 끊임없이 깨버려야만 한다. 이와 같은 균형과 반균형의 관계에서 자기를 얻으려는 싸움을 한 인간의 발전이라고 하며, 동물과 똑같은 육체적 상태를 가진 인간이 획득한 최초의 혁명적 권위의 세계이며, 그래서 전진적 인간형의 세계에는 세속의 욕망이 범하지 못할 창조의 세계가 있다.
인자하신 엄마이
* ‘엄마이’는 ‘어머니’의 황해도 사투리임
그런데 어머니, 어머니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곧잘 하셨지요. 제가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하면 어머님은 죽어도 돈이 없다는 말씀은 아니 하고, 얘야 참아라, 하고 타일렀지요. 그때 저는 한 번도 참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버티고 졸라대던 생각이 채찍처럼 저를 괴롭힙니다.
일제가 조국을 침탈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던 무렵이든가요. 좌우가 잔뜩 찌프린 날씨에 시퍼렇게 얼어붙은 눈가루가 시름시름 휘날리던 섣달그믐날이었습니다. 그래도 옆집에서는 조차떡을 치고 수수부치기를 부치는 내음이 어린 저의 식욕을 다그쳤드랩습니다. 저는 대문을 박차고 달겨들면서 어머니! 우리도 떡을 하라고 요구하였지요. 그때 어머니는 옆집 어느 여인의 삯바느질을 하다 말고, 금을 캐러 간 아버지가 금을 많이 캐 가지고 곧 오신단다, 아버지가 오면 그까지껏 조차떡뿐이겠느냐, 너의 아버지는 은근 소를 잡는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기다릴 수 없어 그냥 졸라대니까 할머니가 떡 대신 번데기를 한 소쿠리 갔다 주었지요. 철없는 저는 그 번데기를 집어던지며 자꾸만 졸라대니 어머니도 눈물을 흘려 명주 저고리에 얼룩을 지게 하여 삯바느질을 그르치던 생각이 짜릿합니다.
또 그뿐입니까. 어느 해 대보름날 외갓집에서 떡을 좀 해왔드랬지요. 이놈을 우리 집안에서 구어 먹으려고 하니까,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떡을 구면 냄새가 난단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도 없으면서 냄새만 풍기면 어쩌느냐” 하셨지요.
어머니, 어머니는 제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참으로 인자하시던 분이었습니다.
◎ 백기완,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시인사, 1979
☞ 백기완 : 1932년 1월 24일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白弘烈)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 백태주(白台周)는 장련면의 유지였고 1919년 3.1 운동 당시 수천 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22년 장연농민공제회의 초대 회장으로 재임했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장련지부 설립에도 참여했다. 부친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장련청년회 집행위원, 장련청년동맹 검사위원을 역임한 인텔리였다. 두 부자는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 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 지방 수재 당시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도 하였지만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지원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고문으로 옥사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로 인해 1942년 국민학교를 중퇴한 그의 학력은 국민학교 4학년에서 끝났다. 6.25 전쟁에 소년병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1954년부터 농민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재야운동가로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함석헌ㆍ계훈제ㆍ변영태 등 재야운동가들과 함께 참가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재야 정치인인 장준하와는 ‘백범사상연구소’ 설립과 ‘민족학교 운동’도 전개했다. 이후 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 등 민주화 운동에 많이 참여했으며 1974년 유신헌법철폐 100만인 선언 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재야운동권에 독자 후보로 추대돼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와 군부독재 종식을 촉구하면서 중도 사퇴했다. 당시 양 김을 넘어 3김 단일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5년 뒤인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야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추대돼 출마했지만 5위로 낙선하였다.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입장에서는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이후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후보다. 이때 얻은 1%의 득표율과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의 조직은 현 제도권 진보정당의 선조인 건설국민승리21의 모체로서 의의가 있다.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으며 2000년대 들어서도 비정규직ㆍ해고 노동자들의 전국 투쟁현장을 비롯해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투쟁,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 이명박 정권퇴진운동, 민중총궐기 등에 참여했고 다치기도 했다.
통합진보당 해산 반대 및 이석기 전 의원의 구속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평생에 걸쳐 남북통일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인물이기도 했으나 위와 같은 활동은 그가 NL 계열에 속한다거나 성향이 같다기보다는 그의 민주화 운동 경력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사실 1992년 대선 때는 NL 계열의 지지를 못 받아서 별로 높은 득표를 올리지 못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당시 NL계에서 김대중 후보가 성향은 같지는 않지만 일단 당선 가능성은 그나마 높기는 했으니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 지지했기 때문이었고 그러다 보니 득표를 많이 하지는 못했다. 기본적으로 NL-PD식의 1980년대 운동권 분류에는 들어맞지 않는 인물이다.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1980년에 그가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의 일부분을 차용하여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항일민족론≫(197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등 평론ㆍ수필집을 비롯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열렬한 국어순화론자로,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되도록 순우리말을 썼다고 한다. 덕분에 분명 한국어로 말하는데 주위에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꾸준히 밀던 단어 중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과 같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안착시킨 것들도 있기는 하다.
2018년 4월경 심장병 수술 때문에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폐질환 투병 중 결국 2021년 2월 15일 새벽 4시 향년 8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중에는 2년 만에 조문했다.
-백기완-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