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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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적≫ 또다른 정지아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리라- [보도자료]
- 2024-07-21
≪자본주의의 적≫ 또다른 정지아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리라
“정지아 소설은 삶의 현존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한국소설계의 대표적인 ‘리얼리스트’ 정지아가 8년 만에 새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을 선보인다. 작년에 심훈문학대상과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하며 저력을 과시한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사실과 허구를 교묘히 섞어가며 세태의 흐름을 정밀하게 포착해낸다. 특히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인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에서 보여주는 언어적 세공이 탁월한데 아버지 세대의 이념 갈등과 역사적 상흔을 아들이 이어받는 모습을 뻔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게 그려냈다.
남로당이었던 부모의 삶을 소설로 써낸 ≪빨치산의 딸≫(실천문학 1990) 이후 인간의 삶에 스며든 현대사의 질곡을 천착해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새로운 화법도 다양하게 시도한다. 갑작스럽게 기억상실에 빠진 인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극소수 마니아의 ‘취향’만을 ‘저격’할 듯한 생소한 커피 원두와 인테리어의 세계를 부려놓는 식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소설가 정지아가 ‘경험’ ‘기억’ ‘관계’ 등 고유한 실존적 요소에서 살짝 눈을 돌려 정체성의 새로운 요소를 탐사하기 시작했음은 시사적인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취향이 자기 서사의 확고한 페르소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기존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세상 변화에 적극 감응하는 가운데 그 진폭을 넓혀가는 정지아의 이번 소설집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내며 독자를 몰입시킨다.
목차
- 자본주의의 적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검은 방
아하 달
애틀랜타 힙스터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
계급의 완성
존재의 증명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해설 정홍수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
-<자본주의의 적>
∙ 여기 자본주의의 진정한 적이 있다. 사회주의자였던 내 부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내 부모는 팔십년대의 일부 운동권 같은 이론적 혹은 추상적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카빈소총을 들고 지리산을 날아다녔던, 자본주의와 실전을 치른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태어난 이래로 그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무엇을 한 적은 없다. 길고 긴 겨울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본주의의 생생한 적이었던 자신들의 젊은 날을그립게 회상하는 정도? 그러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왕년의 사회주의자쯤 되겠다.
∙ 나는 삼십 년 전부터 진정한 자본주의의 적인 내 친구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 내가 ‘자폐가족’이라 명명한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인간들이다.
∙ 이제 와서 이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것은, 유일한 적이었던 사회주의도 몰락한 마당에 자본주의의 새롭고도 진정한 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는 고상하고 비장한 포부 때문은 아니다. 그저 빨치산의 딸을 벗고, 가벼이 한없이 가벼이, 먼지처럼 바람처럼, 온데간데없이, 놀아보고 싶어서다.
∙ 자폐가족의 신발장은 가관이다. 오래전에 신었던 낡은 신발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오래 신어 제 몸처럼 된 것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의 부재는 익숙한 것에 대한 애착과 닿아 있다. 나는 매우 합리적으로 낡은 것은 필요치 않은 순간 폐기 처분한다. 나에게 새것은 새로운 동시에 모르는 것이며 알아야 할 것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는 욕망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적 인간이었다. 빨치산의 딸인 내가 말이다.
∙ 자본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동력으로 삼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확대재생산 속에 괴물처럼 팽창하고 있다. 조금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단적으로 더 큰 냉장고와 더 빠른 자동차와 기능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새 휴대전화를 갖기 위해, 사람들은 무한경쟁 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자본주의 오래된 적이었던 사회주의는 새것을 갖기보다 낡은 것이라도 다 같이 나눠 갖자는 주의였다. 그런데 자폐가족은 심상하게 묻는다.
왜 가져야 돼?
더 큰 냉장고 없이도 더 빠른 자동차 없이도 새 휴대전화 없이도 인간은 살 수 있다. 자폐가족은 자본주의의 동력 그 자체인 욕망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휘발유 없이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보일러도 돌아가지 않는다. 욕망을 이성으로 통제하여 평등하게 함께 누리자는 게 사회주의다. 자폐가족은 보다 근원적으로 욕망 그 자체가 부재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전원을 오프시킨다. 자본주의에 이보다 강력한 적은 없다. 부디 이 욕망 없는 자들에게 번식의 능력을!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 그날 밤 백 피디는 제 한계를 넘었고, 모두 기분 좋게 흥건히 취했다. 거기까지였으면 나름 아름다운 밤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손님 대접할 찬거리를 사러 읍내에 다녀오던 그녀는 동네 입구에서 기함을 했다. 비뚤비뚤한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든 조잡한 입간판에 떡하니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누가 볼세라 차를 세우고 입간판을 뽑기 시작하는데, 젠장, 타다다다, 옆집 아주머니가 타는 낡은 오토바이 엔진이 뚝 멈추는 것이었다. 입간판은 어찌나 깊이 박아놨는지 용을 써도 잘 빠지지 않았다.
∙ 박사님, 이것 짬 보씨요. 박사님 나왔소.
거기, 고구마를 건네는 송씨 아주머니 앞에서 어리둥절한 그녀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진보다 기사 타이틀에 몸이 굳었다.
진정한 작가, 진정한 소확행.
아름다운 은둔자 문학박사 정지아.
-<검은 방>
∙ 창문을 블라인드로 가려도 빛은 어디론가 새어든다. 강 건너 도로를 질주하는 차 소리가 잦아들고 사위가 적막에 감싸이기 시작하면 빛의 자리를 어둠이 슬금슬금 잠식한다. 그제야 아흔아홉 해 혹사당한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돈다. 어둠의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그녀의 몸도 비로소 이완된다. 수십 년 버텨오는 동안 생겨난 장롱의 흠집이나 가구 사이사이 뭉친 먼지 같은 것들도 이제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고, 제 흔적마저 까맣게 지워, 검은 방에는 오직 그녀와 어둠뿐이다.
∙ 산에서 붙잡힌 그녀는 칠 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다시 마주한 세상은 너도 나도 친일 청산을 외치고 조국통일을 외치던 해방 직후와 전혀 달랐다. 그녀가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그것들을 이제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빨갱이인 그녀는 더더욱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침묵의 세월을 견디는 동안 기억만이 그녀의 편이었다.
∙ 그녀도 그쯤은 안다. 동지들과 젊은 그녀가 목숨 바친 사상은 막을 내렸다. 총 들고 싸웠던 자본주의가 세계 도처에 창궐하는데도 여자도 공부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도 공부할 수 있는, 그녀가 꿈꾸는 세상이 되었다. 여자들이 뉴스에 나와 똑 부러지게 제 말 하는 것도 봤다. 그녀는 남편이 살아 있다면 묻고 싶다.
우리가 뭣 땀시 그 고상을 했으까라?
남편은 죽는 날까지 희망을 잃은 적이 없는 사람이니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가 그 고상을 했응께 시방 이만큼이라도 된 것이제 몰라 물어?
-<아하 달>
∙ 재빨리 바위를 타고 오른다. 부끄러움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는 내게 부끄러움을 일깨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놈처럼 살았을지 모른다. 고마운 일이지만 부끄러움은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는 나의 스승이자 원수다. 나는 바위에 버티고 서서 그를 외면한다.
-<애틀랜타 힙스터>
∙ 카페 ㅍ에는 ㅍ 같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세상을 향해 피~하고 겨우 새어 나왔다가 이내 맥없이 닫히고 마는 ㅍ. 맨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존도 그런 사람이다. 존은 밴쿠버에서 멀지 않은, 아마 그 동네 사람을 제외하고는 알지도 못할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다. 그래서 존은 웨어 아 유 프롬이라는 흔한 질문에 밴쿠버라고 답한다. 하지만 존이 밴쿠버에 가 본 건 서너 번도 되지 않는다. 존은 밴쿠버의 관광객이었을 뿐이다.
∙ 존과 나란히 앉아 있는 여자는 여수에 사는 스물네 살 케이트다. 원래 이름은 모른다. 존의 여자들은 모두 영어 이름을 갖고 있다. 존의 여자들만이 아니다. 원어민교사들과 가깝게 지내는 젊은 여자들은 다 그렇다. 밝은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검은 눈동자의 한국 여자를 서양 이름으로 부르는 게 스텔라는 어쩐지 어색하다.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
∙ 허공에서 노란 불빛 두 개가 나를 노려본다. 녀석이다! 검정과 베이지가 뒤섞인 녀석의 털 때문에 가까이 갔는데도 외양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이 하악질을 한다. 어떻게든 녀석을 잡아야 한다. 녀석에게는 엄마로서 마땅히 보호해야 할 새끼들이 있다. 아무리 자유가 좋아도 녀석은 엄마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휴대폰을 천천히 녀석 가까이 들이민다. 녀석의 귀가 쫑긋거린다.
-<계급의 완성>
∙ 그는 한 손으로 발을 부여잡은 채 부지런히 콘커터를 움직였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방바닥에 허연 각질이 수북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이런 쓰레기를 주렁주렁 몸에 달고 살았으니 사람들이 쓰레기통 취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울컥 뜨거운 뭔가가 솟구쳤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제 몸의 죽은 잔해물들이 죽자고 달려온 자신의 지난 시간들 같기도 했고, 벗겨도 벗겨도 제 몸에서 나올 것이라곤 저런 쓰레기들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 뒤로 그는 다시는 콘커터를 쓰지 않았다. 쓰다 보면 제 몸을 심장까지 도려내고 싶어질 것 같았다.
∙ 그는 삼십 분 넘게 문 앞을 서성거렸다. 좀처럼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회 칠만 원이라는 입간판에 적힌 액수가 기를 죽였다. 칠만 원이면 아들놈이 좋아하는 생삼겹살이 근 일곱 근이요, 시급 사천삼백 원인 아들이 열여섯 시간 일해야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돈이었다. 온갖 것들이 발목을 붙잡았으나 그는 결국 토탈 풋케어 숍의 문을 열고 말았다. 변변한 것 하나 가져본 것 없는 인생, 무엇하나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태어날 때 그대로의 분홍빛 발만큼이라도 가져가고 싶었다.
-<존재의 증명>
∙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에티오피아 하라를 다 마시기 전까지는. 2팝 전까지 중배전했는지 깊은 다크 초콜릿 향이 인상적인 하라였다. 하라는 랭보가 가장 사랑한 커피이기도 했다. 스무살에 이미 시와 결별한 랭보는 연인 베를렌과도 결별한 후 세계를 떠돌았다. 그러다 자리를 잡은 곳이 에티오피아의 하라였다. 시를 버린 그는 하라에서 무기와 커피를 파는 무역상이 되었다. 시와 커피와 무기… 이 세 가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없어도 인간이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는. 저항과 반항의 상징이었던 랭보는 삶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마침내는 무기상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 기택이가 툇마루를 뽈뽈 기어다니던 시절, 내가 큰어머니 젖을 먹던 시절, 그 툇마루 끝에는 항상 큰아버지가 있었다. 큰아버지는 우리를 보지 않았다. 허공의 어디쯤을 멍하게 바라보면서 됫병 소주를 종일 천천히 들이켰다. 언젠가 궁금해서 물은 적이 있다.
큰아배, 머슬 보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큰아버지가 말했다.
보긴 머슬 봐. 사방이 시커먼 허방인디.
∙ 내가 노동계급의 권리에 정신 팔린 사이 어머니는 담낭암을 앓고 있었다. 기택이 말이 아니었으면 어머니 살이 내린 것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기택이 덕분에 병원에 갔고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다. 똑똑한 나는 기택이처럼은 살지 않았을까? 기택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하니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머리 나쁜 기택이는 어떻게 살았을까? 배운 것 없어 막노동자꾼이었던, 일찍 결혼해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둔, 나이 마흔에 위암을 앓았던, 늘 소주를 마셨던 기택이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해설|
-빛과 어둠의 원무 너머 정홍수
우리는 이번 소설집에서 이 두 편의 소설(<검은 방>,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과 함께 <자본주의의 적>과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무심한 듯한 (물론 의도적인 과장과 변용을 포함해서) 자전적 이야기의 개방적 형식과 만나게 되거니와, 이 어름이 또다른 정지아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작가의 말|
…옳은 건 없다. 모르겠다.
정지아
∥출판사 서평
한국소설의 또다른 시작
정지아 소설은 언제든 살아온 만큼,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이다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이 소설집을 읽고 “정지아 소설은 언제든 살아온 만큼,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이 아니었던가”(해설, 295~96면)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되돌린다. 이번 작품집에서 보여준 파격적인 시도 역시 삶의 현존을 정확하게 묘사해온 정지아 소설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소설집에는 ‘문학박사 정지아’를 비롯한 실존인물과, 누가 봐도 허구로 창조해낸 인물, 그리고 그 구분이 모호한 수많은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 안에서 살아 숨쉬지만 소설집을 덮을 때 독자들은 이들이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짝은어매헌티 쫌 전해주소. 짝은어매 땜시 이때꺼정 나가 살았네”(<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275면) 같은 남도의 입말이 긴 여운으로 남으며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존재의 이름 하나하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날렵한 최첨단의 소재로 무장한 젊은 세대 작가들의 소설이 주는 재미와는 다른, 육중한 주제의식을 무겁지만은 않은 위트와 에피소드로 버무려내는 중견작가 정지아의 소설을 읽는 경험은 재미 이상의 메시지와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 정지아, ≪자본주의의 적≫, 창비, 2021
☞ 정지아(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등이 있다.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올해의 소설상, 노근리 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