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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평전≫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김형수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4-07-13 21:55
  • 조회343
  • [보도자료]
  • 2024-07-13

 

김남주 평전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김형수

 

빈 들에 어둠이 가득하다

물 흐르는 소리 내 귀에서 맑고

개똥벌레 하나 풀섶에서

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

깜박깜박 빛을 내고 있다

 

김남주 <게똥벌레 하나> 중에서

 

 

아득해지는 우리들의 삶 끝에서
김남주를 만나 붙잡고 흔들며 울고 싶다 -김용택 시인

스스로를 전사라고 칭했던 시인 김남주.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으로 기록된 남민전 사건으로 10년에 가까운 옥고를 치르면서도 평생에 남긴 시 510편 중 360편을 옥중에서 탄생시킨 그는 대한민국 문학사와 민주화 역사에 뜨거운 상징으로 서 있다. 그런 그의 생의 궤적을 김남주 평전-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가 생생하게 되살려 내어 의미를 되짚어 본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 김형수는 김남주 시인의 고향 해남 땅끝에서부터 학생운동의 도시였던 광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기까지 시간적 지리적 변화를 따라가며 김남주를 지탱했던 정신적 원형이 무엇이었는지 밝힌다. 또한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발간하는 내밀한 과정과 옥중에서 우유갑과 은박지에 꾹꾹 눌러 쓴 시를 비밀리에 내어 옥중시집으로 출간한 일 등 자신의 안위 대신 오직 국가와 민중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순수한 영혼 김남주의 족적을 선명하게 펼쳐낸다.

 

 

책을 내면서

 

김남주 문학은 내게 가장 열정적일 때 앞길을 인도한 스승이었다. 나는 그의 시에 빚을 진 한 사람으로서, 한반도에서 형성된 생태공동체, 문학공동체, 언어공동체가 빚어낸 모국어 정신의 한 절정이 출현한 경로를 밝히는 게 후학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나날이 공동선이 지워져 가는 이 미천해 보이는 지상에 김남주라는 영혼이 다녀간 사실을 증언하는 것, 그의 발자국이 찍힌 자리를 확인하자는 것, 이것이 내가 그의 생애를 추적한 이유다.

 

 

앞 이야기

 

1

 

내게 김남주를 기록할 용기를 준 것은 <종과 주인>이라고 하는 짤막한 시였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드라

바로 그 낫으로

 

나는 처음에 이 시가 너무나 이상했다. 제목에 사용된 주인이니 이니 하는 낱말도 고색창연하지만, ‘으로 모가지를 벤다는 비유도 한없이 식상한 표현이다.시라고 하기에는 구성도 너무나 흔해 터진 조선말의 연결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읽다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섬뜩한 꼬리가 딸려 나온다.

 

내가 마침내 시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전혀 뜻밖의 자리에서였다. 총 서른일곱 자에 불과한 시 <종과 주인>은 일가족 삼대의 서사를 담은 활화산 같은 다큐멘터리의 완성본이었다.

 

6

 

깔담살이는 낫을 가는 사람이다. 당시 농가에서 사실상 소나 개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깔담살이 김봉수는 자신의 신분이 너무나 뼈아팠다. 그래서 평생 낫을 갈면서도 자식에 대한 기대가 끔찍하게 컸다고 한다.

하나만 잘 가르쳐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집념은 끝이 없었다.

 

 

1장 나는 해방둥이입니다

 

1

 

사실은 김남주라고 해서 자신의 나이를 똑떨어지게 밝힌 적이 왜 없겠는가.

 

나의 이름은

2104 붉은 딱지입니다

나이는

일제가 뒷문으로 나갈 때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고

미제가 앞문으로 들어올 때 세상에 나왔습니다

소위 해방둥이입니다

 

어디 사냐구요?

광주시 문흥동 88-1이 나의 주소이고

2사 하 41이 나의 집이고 나의 방이고 나의 변소입니다

-<나의 이름은> 부분

 

‘2164’는 죄수 번호이니 이육사에서 작대기 하나 더 붙은 셈이고, ‘붉은 딱지는 무서운 사상범이라는 표식이며, 광주 문흥동은 광주교도소가 위치하는 곳. ‘2사 하 41’은 최악의 정치범이 수용된 방이다.

 

내 나이와 함께 대한민국이란 공화국도 불혹의 나이입니다.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3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깨를 터시다 말고 막대기를 훼훼 저어

메밀밭을 헤치는 산짐승을 쫓는 시늉을 하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김을 매시다 말고 사금파리를 주워

고춧잎에 붉은 진딧물을 긁어내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쟁기질을 잠시 멈추시고 꼬챙이를 깎아

황소 뒷다리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내는 것을

-<시에 대하여> 부분

 

4

 

김남주가 말하는 어린 날의 추억이 온통 민중 현실을 드러내는 쪽에 집중된다는 점은 인식과 표현의 방법론적 특성으로 충분히 관찰될 필요가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가난한 이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으며, 아무리 제 이야기일지라도 사회적으로 곡해될 여지가 있는 표현을 극구 자제했다.

 

 

 

2장 보리밭을 흔드는 북소리

 

2

 

김남주가 해남중학교에 들어간 시기는 도회지에서 연일 데모가 일어나고 라디오에서 시국 뉴스가 끊이지 않던 4월이었다. 정원 60명인 학급에서 그것도 보결생으로 들어간 까닭에 그는 시험에 낙방하고 마치 기부금 등록을 한 아이처럼 학기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나서야 강의실에 배정되었다. 때는 4월 중순에 이르렀고, 그의 등록번호는 합격자 수를 훨씬 초과한 71번이었다. 하필 그의 처지가 비슷한 학생이 뒤를 따라 72번으로 입학하여 같은 책상을 쓰게 되었다. 이름은 이강. 알고 보니 인근 학교 교사의 아들인데 입학금 처리가 잘못 되어서 합격이 취소되었다가 부랴부랴 추가등록을 마친 경우였다. () 서로는 서로를 금방 알아보았다.

 

4

 

어쩌면 이를 시국의 운세라고 말해도 될는지 모른다. 2 때 중간고사도 끝나기 전에 하필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해 학교에 휴교 조치가 취해졌다. 김남주는 이 가파른 정국을 통과하면서 비평적 독서 습관이 몸에 배었다.

 

5

 

그가 전라도의 민중 현실이 만들어낸 욕설들이 섞인 사투리를 특별히 애용한 것은 문화적 습관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태도였다. 그가 어떤 자리에서 화를 내는지를 보라

 

하얗게 이마에 천년의 눈을 이고

파랗게 가슴에 억년의 물을 안고

웅장하게 광활하게 펼쳐지는 화면을 보고

문자 그대로 장관으로 전개되는

백두산을 보고 백두산 천지를 보고

원더풀! 원더풀! 뒤에서 누가 감탄을 연발한다

어떤 놈이 우리말 좋은 말 놔두고

남의 말 코쟁이 말 쏟아놓는고뒤를 돌아보니

빈대코에 마늘 냄새 풍기는 한국 놈이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주먹으로 아갈통을 쥐박아줄까 하다가

! ! 우리말 조선말 까먹고

원더풀! 원더풀! 혀 꼬부라진 소리치는 것도

꼭 제 탓만은 아니렸다! 싶어

그만 놔둬버렸다

 

미제 사십 년 나라 꼴 더럽게 됐다 퉤!

-시 <싸가지 없는 새끼> 전문

 

세상이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있을 때 김남주는 광주일고에 합격했다.

 

6

 

김남주는 광주일고 시절에 더욱 이강과 어울려 정부에 비판적인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찾아다녔다.

 

김남주는 얼마 안 되어서 학교를 등지게 되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둔 것은 그해 10월이었는데(데모 때문에 방학이 10월까지 연장되었음)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학교 공부가 나랑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뭣이 되는 것을 싫어했어요. 뭣이냐 하면 관리 같은 것이, 무슨 회사 직원 같은 것이 맘에 들지 않았어요.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3장 광주의 빈털터리들

 

3

 

근대 광주 정신의 뿌리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거슬러 간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숫제 사내의 씨가 말랐다고 얘기되던 광주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광주학생운동을 주동한 강석봉, 국기열, 이기홍, 김세원 등은 한때 419 후에 결성된 사회당의 전남 책임자를 맡고 있었다. 이를 흔히 혁신계 운동이라고 지칭하는데, 박정희 군사정권의 폭압 아래서 이들의 맥을 이은 정신적 후계자가 김시현이었다.

김시현은 승주군 낙안면에서 일어난 31만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종주의 손자로서 419혁명 때 전남대 민통련 의장, 통민청 전남위원회 위원장 서리, 민자통 전남협의회 학생부장을 지냈다. 그가 열정적으로 활동하다가 1961년 통민청 사건으로 실형을 받자 그 후배들이 전남대 63세대의 주역이 된다.

그 한 사람인 이홍길은 광주 419의 도화선이 된 광주고등학교 시위를 주동했다. 광주 419의 발상지를 기념하는 탑이 광주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것은 이 때문이다. 바로 이 시위를 함께한 동기들이 전남대 4학년이 되었을 때 1964년 한일회담 문제가 부상되는데, 그 핵심인 이홍길과 홍갑길의 고교 1년 후배가 박석무였다. 그리고 이들이 결성한 한일문제연구회가 전남대 63운동의 주력부대로 등장하여 만들어낸 첫 작품이 한일굴욕회담에 반대한 1964326 데모였고, 또 그들이 4월 초에 강연회를 준비하여 초청 연사로 온 장준하 선생이 정부가 옳은 길로 가지 않을 때 학생들은 극한투쟁도 사양하지 말아야 한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공산주의가 옳은 거라면 그렇게 나갈 수도 있다등의 발언으로 학생들을 달구어놓자, 그곳에서 촉발된 저항 의지를 용암처럼 분출한 것이 박정희 하야를 요구한 527 데모였다. 그런데 이 데모는 놀랍게도 이홍길홍갑기 등 선배 그룹이 없는 사이에 후배 박석무가 혼자 주동한 광주 현대 학생운동의 기념비적 업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박석무는 거의 박석무 사건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독자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시위대 선언문 작성, 플래카드 제작, 군중 동원, 선언문 낭독까지 모두 혼자서 도맡고, 데모의 투석전까지 직접 지휘했다. 이 사건이 특히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도청 앞까지 진출하여 광주가 생긴 이래 민간 시위대가 도청 앞 광장을 최초로 점령했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를 기폭제로 한 후속 데모가 63 계엄령 후까지 이어지면서 전남대조선대광주교대뿐만 아니라 고등학생까지 5,000여 명이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총 궐기한 6465 데모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부상자 속출, 군용트럭 탈취, 바리케이드 돌파, 도청 포위 등 실로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는데, 김남주와 이강이 고등학생 때 열심히 쫓아다녔던 시위가 바로 이것이었다.

 

6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한 인간의 진면목이 감추지 않는데도 은폐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김남주는 성품이 하도 조용해서 그가 영어를 잘하는 것조차 동료들이 희한하게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그렇다고 하여 모두가 그러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국문과를 다니며 종종 마주치고는 했던 학우는 김남주의 비범성을 매우 주목하고 있었다. 훗날 문단에 등단하여 뱀딸기의 노래라는 시집을 낸 김희수 시인은 이 무렵에 김남주가 빚은 일화들을 세세하게 기억한다. 그에 의하면 전남대 안에서 김남주의 광범한 독서와 인문학적 소양의 깊이를 따를 사람은 없었다. 그가 엉뚱한 자리에서 가끔 비상한 일격을 쏟아놓을 때는 주변에 있는 학우들이 일제히 놀라곤 했다. 특히 수업시간에 종종 영어로 농담을 던져서 미국인 선생을 폭소에 빠뜨릴 때면 전남대학교에서 이렇게 뛰어난 학생은 없었노라고 교수들도 혀를 내둘렀다.

 

 

4장 저 푸른 소나무처럼 더 푸른 대나무처럼

 

2

 

두 사람은 민중의 가슴에 살아 숨 쉰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감동 속에서 녹두장군의 옛길을 따라 걸었다. 만석보를 둘러보고, 저녁나절이 되자 황토현에 들러 돌비로 우뚝 솟은 동학혁명기념탑에 참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각에 그곳에는 갓 쓰고 흰옷을 입은 대여섯 명의 노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시국 타령을 하러 온 것지 아니면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고 온 건지 알 수 없지만, 노인들은 비문을 손바닥으로 쓸 듯이 아루만지기도 하고, 물끄러미 하늘과 들을 쳐다보기도 하며 한숨을 짓고는 했다.

이를 보며 김남주와 이강은 동시에 강렬한 계시와 영감을 얻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을 즉시 벗어던지고 민족의 부름에 따를 것을 산천이 명한다. 그래서 녹두장군과 갑오 농민군의 영령 앞에서 결의를 다지는 간단한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읖조리며 청송녹죽’, 즉 저 푸른 소나무처럼, 더 푸른 대나무처럼 살자고 다짐하는 심사를 거침없이 뿜어놓게 되었는데, 그것이 <노래>라는 시였다. 아직 등단하지 않은, 습작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즉흥적 격문에 가까운 이 작품이 갖는 중요성은 크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시 <노래> 전문

 

 

5장 파도는 가고

 

6장 카프카서점을 떠난 뒤

 

7장 전사

 

8장 무등산은 옷자락을 말아 올려 하늘을 가려버렸다

 

9장 마지막으로 별들이 눈을 감는가

 

-뒤에 남기는 이야기

 

어떤 예술이든 작가가 이념이나 기교적 습성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현 존재를 현실 그 자체로 대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최고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시인의 언어가 당대의 심장에서 솟아야 하고, 또한 그로써 수많은 사람을 역사의 광장으로 부르는 힘을 가지려면, 시인의 자리가 정치적 내전의 시대라고 할 만큼 격렬한 폭발 현장에 육박해 있어야 한다. 20세기를 통틀어 15,000만 개의 영혼이 전쟁과 국가 지도자들의 직접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김남주의 시는 그 치열한 지대의 한복판을 포복하였고, 그래서 얻은 백열하는 정신으로 시대적 관능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당대에 증명했다.

 

 

김형수 지음, 김남주 평전, 다산책방, 2022

 

김형수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 시집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가난한 성자들 1, 2,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흩어진 중심등과 문익환 평전, 소태산 평전을 출간했으며 작가 수업 시리즈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큰 반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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