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자유> 외 ≪잠 안 오는 밤에 쓴 시≫ 알렉산드르 뿌쉬낀 시선집- [보도자료]
- 2024-03-16
≪잠 안 오는 밤에 쓴 시≫
머리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지는
뿌쉬낀의 시.
세상이 처음 열릴 때의
그 신선함이여…….
―D. 그라닌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로 세르게예비치 뿌쉬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국민, 시인, 천재 작가, 민족의 혼……. 지난 2세기 동안 그의 이름을 장식해 온 이 화려한 수식어들도 그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열광을 다 표현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뿌쉬낀 광장과 뿌쉬낀 거리를 거닐며 뿌쉬낀을 암송하고 뿌쉬낀 연구소에서 공부를 하고 뿌쉬낀 극장에서 여가 시간을 보내고 뿌쉬낀 표 보드까가 출고되기를 기다리는 러시아인들에게 뿌쉬낀은 진실로 “러시아의 모든 것”처럼 보인다.
광활한 대지와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 숲, 천지를 집어삼키는 눈보라, 터키석처럼 견고하고 푸른 하늘, 웅장한 옛 궁궐과 정교한 운하, 그리고 무한히 깊고 무한히 넓은 러시아 정신― 이 모든 것 속에 뿌쉬낀의 이름은 찬란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강철과 대리석으로 주조된 문화책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오늘도 사람들은 뿌쉬낀의 시집을 넘긴다.
○ 언젠가 니꼴라이 고골은 뿌쉬낀을 가리켜 “우리보다 2백 년을 앞서간 작가”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고골의 지적이 유난히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은 다만 올해(1999)가 뿌쉬낀 탄생 2백 주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8세기 말에 태어나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뿌쉬낀은 당대에도 그렇고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날에도 그렇고 가장 현대적인 작가보다 더 현대적이다. 시, 소설, 희곡 등 모든 장르에서 숭고한 전범인 동시에 전범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 간주되는 그의 작품은 시공을 초월하여 독자에게 언제나 새로운 흥미와 새로운 감동을 선사한다.
뿌쉬낀은 단순한 고전이 아니다. 뿌쉬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다만 고전의 향기만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혹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문학에 대한 우리의 변덕스런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뿌쉬낀의 생명력, 그 마르지 않는 신선함의 원천은 바로 이러한 현대성에 있을 것이다.
자유
송시
물러가거라 내 눈앞에서
키테라의 유약한 여제여!*
제왕들도 두려워하는 도도한
자유의 가수, 너는 어디 있는가?
어서 와 내게서 왕관을 벗기고
응석받이 리라를 부수어 버리라……
나 온 누리에 자유를 노래하고
옥좌 위의 죄악을 쳐부수려 하노라.
* 비너스를 가리킨다. 신화에 의하면 비너스는 키테라 섬 근해의 거품 속에서 어른의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저 고상한 갈리아인의
숭고한 자취를 나에게 보여 달라
너는 영광스런 고난 속에서
그에게 용감한 찬가를 부르게 했으니.
바람 같은 운명의 후예들아,
세상의 폭군들아! 두려워 떨라!
너희, 쓰러진 노예들아, 용기를 내어
귀 기울이라, 봉기하라!
애재라! 어디를 둘러보나
채찍과 쇠사슬
법률은 치욕으로 멸망하고
노예들은 힘없이 눈물만 흘린다.
가는 곳마다 불의의 권력이
편견의 짙은 안개 속에서
권좌에 올랐다, 노예에 대한 교묘한 억압과
명예에 대한 숙명적인 열정이.
황제의 머리 위에
민중의 고통이 서리지 않는 곳은 오직
강력한 법률과
신성한 자유가 견고하게 맺어진 곳
튼튼한 법의 방패가 모든 이를 지키는 곳
정직한 손들에 꼭 쥐어진 법의 칼이
공민들의 평등한 머리 위로
고루고루 미끄러지는 곳
정의의 손 한번 흔들면
죄악이 맥없이 쓰러지는 곳
인색한 탐욕도 공갈 협박도
법의 손을 매수할 수 없는 곳뿐이리.
군주여, 너의 왕관과 옥좌는
조물주가 아니라 법이 준 것
너는 만민 위에 높이 앉아 있지만
법은 영원히 너보다 높은 것.
태만하게 법을 잠재우는 종족
민중이건 황제건
법을 좌우할 수 있는 종족
너희에겐 슬픔 또 슬픔뿐이어라!
아, 그릇된 명예의 순교자여
나 너를 증인으로 부르노라
근자의 폭풍 같은 소요 속에서
선조를 대신하여 제왕의 목 잘린 너를.*
* 1793년 1월에 처형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를 가리킨다.
말 없는 후손의 면전에서
루이는 죽음을 향해 올라가
왕관 벗겨진 머리를
반역의 피 어린 단두대에 얹는데
법은 침묵하고 민중도 말이 없어
죄악의 도끼날이 떨어진다……
보라, 악당*의 자홍 도포가
구속당한 갈리아인들 휘감는 것을.
* 나폴레옹을 가리킨다.
악을 일삼는 독재자여!
너와 너의 옥좌를 나 증오하여
너의 멸망과 자손들의 죽음을
잔혹한 희열로 지켜보리라.
민중은 읽는다 네 이마에
찍힌 저주의 낙인을
너는 세상의 공포 자연의 치욕
지상의 신에 대한 질책.
음울한 네바강 위에
한밤의 별이 명멸하고
시름없는 사람들
편안한 꿈속을 헤맬 때
생각에 잠긴 가수는 응시한다
안개 속에서 위협하듯 잠자는
폭군의 황량한 기념비를
망각으로 던져진 궁전*을.
* 예까체리나 2세의 아들 빠벨 1세가 살해당한 미하일로프스키 궁을 가리킨다. 그는 어리석고도 잔악한 군주로서 그의 무분별한 행동에 반기를 든 근위대 장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저 무서운 장벽 너머
클리오*의 무서운 목소리를 듣고
칼리굴라**의 마지막 순간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릴 때
찬란한 장신구에 수장 두르고
포도주와 악의에 취한 채
얼굴에는 용기를 가슴에는 공포를 숨긴
자객들이 보인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뮤즈들 중 하나로 역사를 주관한다.
** 기원 1세기경의 포악하기로 이름난 로마 황제 가이우스의 별명. 측근들에게 살해당했다.
믿지 못할 파수병은 말이 없고
사다리는 소리 없이 내려와
매수당한 반역자의 손이
한밤의 어둠 속에서 대문을 활짝 연다……
아, 치욕! 수난의 시대!
근위대가 금수처럼 쳐들어왔다……!
오욕의 일격이 가해지고……
왕관을 쓴 악당은 비명에 갔다.*
* 빠벨 1세의 죽음을 가리킨다.
오, 제왕들이여, 이제 교훈을 삼으라
징벌도 보상도
감옥의 지붕도 제단도
너희들의 믿을 만한 울타리가 아니어라.
법의 희망찬 그늘 아래
먼저 머리를 숙이라
그러면 민중의 자유와 안녕이
옥좌의 영원한 수비대가 되리라.
―1817년
작은 새
예부터 내려오는 조국의 풍습
낯선 땅에서 성스럽게 지키느라
찬란한 봄의 축일에
새 한 마리 자유롭게 풀어 준다.
내 마음 위안을 찾았다.
단 하나의 생명에게일 망정
자유를 선사할 수 있었으니
어찌 신께 불평을 말할쏘냐!
―1823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마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1825년
들판에 처음 피는 화려한 꽃보다
들판에 처음 피는 화려한 꽃보다
마지막 꽃은 더욱 사랑스러워
우리 가슴에 우울한 상념
더욱 오롯이 불러일으키듯
때로는 이별의 시간이
달콤한 만남보다 더욱 살가운 것을.
-1825년
끝없이 황량한 세상의 들판에
끝없이 황량한 세상의 들판에
비밀스레 솟아나는 세 개의 샘물 있어
청춘의 샘 거칠고 성말라
반짝반짝 재잘대며 끓어오르고,
카스탈리아의 샘,* 영감의 물결로
세상의 들판에서 추방객의 목을 적시고,
마지막 샘, 차가운 망각의 샘은
가장 달콤하게 심장의 불을 사그라뜨리네.
-1827년
* 파르나소스산 위에서 솟는 신비한 영감의 샘.
옛날 어떤 곳에 가난한 기사 살았네
옛날 어떤 곳에 가난한 기사 살았네
순박하고 과묵한 그 기사
외모는 창백하고 침울했지만
정신은 용감하고 강직했네.
사람의 지혜로는 미칠 수 없는
하나의 영상 간직했는데
그 모습 기사의 마음속에
깊숙이 아로새겨 있었네.
그 기사 제네바로 여행하던 중
길가 십자가 앞에서
성처녀 마리아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보았네.
그때부터 그의 영혼 불타올라
여인에겐 눈길 한번 안 주고
죽는 날까지 그 어떤 여자와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네.
그때부터 강철 투구
머리에서 벗을 날 없었고
목에는 목도리 대신
묵주를 감고 다녔네.
성부께도 성자께도
성신께도 결코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기사
진정 괴상한 인간이었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 성상 앞에
밤새도록 꿇어앉아
슬픈 시선 마리아께 고정시킨 채
말없이 눈물만 홍수처럼 흘렸네.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 차
경건한 꿈 그대로 믿으면서
그는 자기의 피로 방패에 써넣었네
<성모여, 기뻐하소서 Ave, Mater Dei>라고.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벌벌 떠는 적을 향해
기사들이 질주하며
성모님을 부를 때
<천상의 빛, 거룩한 장미여Lumen coelum, sancta Rosa>라고
그는 누구보다 큰소리 외쳤고
그의 용맹은 사방에서
회교도들을 물리쳤네.
머나먼 조국의 자기 성으로 돌아온 기사
철저하게 은둔하여 살다가
사랑과 슬픔을 고이 간직한 채
종부성사도 안 받고 죽어 버렸네.
그가 숨을 거둘 때
사악한 정령 때마침 다가와
자기의 왕국으로
기사의 영혼 끌어가려 했네.
하느님께 기도도 하지 않았고
단식과 금육(禁肉)도 지키지 않았고
정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어머니만 따랐기에.
그러나 더없이 순결하신 성모께서
가슴에서 우러나 그를 옹호하셔
당신의 기사
영원히 천국에 들여놓으셨네.
-1829년
기상의 나팔이 울린다……
기상의 나팔이 울린다……
손끝에서 해묵은 단테가 떨어지고
읽기 시작했던 시구는 끝나기도 전에
입가에서 잠잠해진다.
영혼은 더욱 멀리 날아가
익숙한 소리, 살아 있는 소리
너는 얼마나 자주 울려 퍼졌나
그 옛날 나
조용히 자라나던 곳에서.
-1829년
잠 안 오는 밤에 쓴 시
불을 꺼도 잠은 오지 않고
사방엔 어둠과 지겨운 몽상뿐
단조롭기만 한 시계 소리
내 곁에서 울려 퍼진다.
아낙처럼 웅얼거리는 파르카이*
잠자는 밤의 전율
생쥐처럼 바스락거리는 삶……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는가?
지겨운 속삭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탕진해 버린 날을
질책함인가, 불평함인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네 소리 부름인가 예언인가?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다.
네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
-1830년
* Parcae. 파르카Parca의 복수.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들로, 그리스 신화의 모이라에 해당한다.
◎ 알렉산드르 뿌쉬낀, 석영준 옮김, ≪잠 안 오는 밤에 쓴 시≫, 열린책들, 1999
☞ 알렉산드르 뿌쉬낀 1799-1837. 1799년 모스크바의 명문가에서 출생. 알렉산드로 세르게예비치 뿌쉬낀은 러시아의 민족시인이며 작가이자 극작가.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창도한 거작 ≪대위의 딸≫과 러시아 최초의 리얼리즘적 운문체 소설인 ≪에브게니 오네긴≫의 저자. 참다운 국민 문학의 창시에 노력하고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하여 러시아 문학을 세계적인 의의를 가진 가치 있는 것으로 인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의 권리를 주장한 휴머니즘은 후세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 석영준 1959년 서울 출생으로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슬라브어문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뿌쉬낀 작품 번역에 대한 공로로 1999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뿌쉬낀 메달을, 2000년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러시아 시의 기듬≫ ≪러시아 현대 시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나는 사랑한다≫ ≪좋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우리들≫ ≪분신≫ ≪백야≫ 등이 있고, 논문으로「만젤쉬땀의 시인과 독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