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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말똥구슬-유금 시집≫ “봄 산 고요한데 꾀꼬리 울고”2020-05-01 20: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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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웃노라

그렇고 그런 인생
부귀와는 담을 쌓았네.
밤비에 수심이 쌓이고
추풍(秋風)에 감개가 많아라.
사람들 이리 악착스러우니
세상 보고 한번 웃노라.
농사지을 땅이나 조금 있으면
밭 갈며 자유롭게 살아갈 텐데.

비가 그치다

차츰 서쪽 하늘 환해지더니
뭇 새들 하늘에 날아오르네.
젖은 구름 아직도 가랑비 내리고
나뭇잎은 우수수 소리를 내네.
가을 국화 이제야 바로 서려 하고
비 맞은 석류 윤기가 반()은 덜하네.
어느새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먼 길에선 장사꾼 외치는 소리.

농부의 집

      1

세 모퉁이 못자리 나래질 중인데
정오 되자 연기 오르더니 좁쌀밥 익었네.
병아리 삐약삐약 울고 금송아지 졸고
울타리 밑에는참외 떡잎이 돋았네.

      2

세 살배기 어린 소 한번 밭 갈러 보거늘
흙집의 아이 울어 대네 어미 물 긷는데.
아무쪼록 올 봄엔 비 많이 왔으면
담장에 복사꽃 피어도 예쁜 줄 모르니.

6언 다섯 수

      1

향긋한 나무의 초록빛 옅거나 혹 진하고
가지엔 꽃이 피기도 하고 안 피기도 하고.
꾀꼬리 두 마리 아리땁게 울고
나비는 짝 지어 날아들고 있고.

      2

봄 산 고요한데 꾀꼬리 울고
동산의 나무에 탁탁탁 딱따구리 소리.
개구리 울어 곳곳에 피리 소리인가 싶고
꿩이 울어 때때로 뿔피리 소리인 듯.

      3

외나무다리 가는 승려 아스라하고
물고기는 보리 싹처럼 가느다랗군.
한 톨 향이 맑아 책을 펼치고
담장에 꽃피어 주렴을 내리네.

      4

소 등에 탄 아이는 풀피리 불고
우물가엔 처녀가 빨래를 하네.
친구 보내고 산에 올라 먼 곳을 보다.
꽃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찻잎을 따네.

      5

금릉
(金陵)의 옛 능(, 임금의 무덤)에 풀이 푸르고
백악(白岳)의 새 능엔 꽃이 붉어라
시골집은 마냥 봄이 깊은데
윤공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병으로 누워 지내며

하늘이 내게 칠십까지 허락한다면
내 앞에 남은 해 스물세 해군.
수십 년 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쩐지 꼭 수년 전 같네.
여기저기 나그네로 떠돌았었고
집에 오면 늘 굶주리었지.
옛사람의 글을 좀 보긴 했어도
천하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네.
이전부터 담박함을 좋아하여서
몸이 더럽혀질까 늘 걱정했었지.
사람을 만나는 건 꺼리지 않아
기탄없이 말하되 재주는 감췄네.
지금 병들어 누워 있으니
창가의 나무 퍽 청초하여라.
맑은 바람 뜨락의 나무에 불고
장미는 꽃망울이 맺혀 있고나.
몸 굽혀 새로 지은 시를 적다가
고개 들어 피어오르는 흰 구름 보네.
술을 본래 좋아하는 건 아니나
흥치가 이르면 술잔을 드네.
사내자식 어리석어 책 안 읽어도
딸아이는 내 흰머리 참 잘도 뽑지.
벗은 뭐 하러 찾아오는지
주인이 이리 오래 누워 있는데.

박희병 편역, 말똥구슬-유금 시집, 돌베개, 2006

이 책은 유금(柳琴, 1741~1788)의 시집 양환집≫​(蜋丸集)을 번역한 것이다. ‘양환집말똥구슬이라는 뜻이다. 유금은 저명한 실학자 유득공의 작은 아버지이다. 문학과 예술에 뛰어나고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18세기 조선을 빛낸 영롱한 별의 하나지만, 일반인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가 서른한 살에 쓴 시집 말똥구슬은 시인의 고뇌와 진실된 목소리를 담고 있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책머리에

유금의 시는 전반적으로 그 톤이 나지막하고, 그 정조(情調)가 담박하다. 그리고 꾸밈이나 야단스러움이 없는 대신 자연스럽다. 고사나 전거(典據)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과 눈앞의 풍경을 진솔하게 노래하고자 하였다.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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