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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덕일의 한국통사≫-다시 찾는 7,000년 우리 역사, 선사시대-대한제국 편2020-03-25 20: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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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국사 인식의 문제점

이 나라 학생들은 국사를 암기과목으로 여긴다. 한마디로 비극이다. 국사가 암기과목이 된 이유는 서론과 본론, 결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론은 마치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서술인 것처럼 표방했지만 본론에 가면 아직도 중화 사대주의와 친일 식민사학 관점이 수두룩하다. 앞뒤가 다르니 따지지 말고 외워야 점수를 딸 수 있다. -서설 국사를 보는 눈

이기백, 이병도가 말하는 객관

두 학자 모두 낙랑군은 지금의 대동강(평양)에 있었고, 그 식민지는 대단히 번성했다고 썼다. 이 두 가지 사실이 객관적일 수 있을까? 지극히 주관적인 뿐만 아니라 한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이 마치 지상낙원인 것처럼 써놓은 것은 사실을 심각히 왜곡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인은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조선총독부의 관점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낙랑군은 요동에 있었다고 달리 말했고, 역사학자를 겸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지금의 하북성 일대라고 말했다.

이기백이 한국의 역사학을 민족주의 사학 유물사관 실증사학의 세 학파로 나눈 것부터가 어느 한 편에 치우친 분류이다. 이를 명실이 상부하게 나누려면 민족주의사학 유물사관 식민사학으로 분류해야 했다. 이병도이기백은 식민사학을 실증이란 용어로 대체하고는 마치 그런 역사관이 객관’ ‘공정한 것처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

광복 후 북한 역사학이 걸어온 길

이기백이 유물사관으로 분류한 학파는 사회경제사학이라고 불렀다

1949년 북한 역사학계는 이미 낙랑군=평양설임나=가야설이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그 극복에 나섰다.

북한학계는 1961년경 한사군=한반도설(낙랑군=평양설)을 폐기시킨 후 한사군=요동설(낙랑군=요동설)을 정립하고, 1963년경 임나=가야설을 폐기시킨 후 임나는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이라는 분국설을 정립했다.

광복 후 남한 역사학이 걸어온 길

광복 직후 남한 역사학계를 재건할 때 진단학회에서 이병도에 대한 제명운동이 벌어졌을 정도로 일제 식민사학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맑스의 사적 유물론을 지지하던 사회경제사학자들이 대거 월북하고, 분단과 625를 거치면서 정인보안재홍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납북되면서, 그 빈 공간을 조선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신석호가 장악해 식민사관을 제외한 모든 역사관을 강단과 제도권에서 말살하고 식민사관이라는 이름표를 실증사관으로 바꾸어 달고는 남한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남한 역사학계는 강단사학동일체의 원칙으로 보수도 진보도, 노장도 소장도 없이 한몸으로 식민사학 옹호에 매진해왔다. 그 결과 시간이 흘러 광복 후 3,4대 역사학자가 등장했지만 식민지 카르텔은 더욱 심화되었다.

2016년 젊은 학자들이 대거 등장해 (조선총독부 학설=식민사관을 옹호하는) 발언에 나섰고 조선일보는 이들에게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다. 이들이 조선총독부 학설 옹호에 나서자 조선일보, 한국일보는 물론 한겨레신문과경향신문까지 대거 나서서 대서특필하며 옹호했다.

◯ 민족주의 역사학

■ 남한 강단사학계에서 신채호의 역사학은 사라지고 이병도‧신석호의 역사학만 득세하며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비난 현상이 나타났다. (‧) 일제 황국사관의 관점으로 한국 민족주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반역사적 상황은 종식될 때가 되었다. 한국 민족주의는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단재 신채호 등의 경우처럼 자신의 정체성의 토대 위에 다른 민족과 상호존중하면서 공존하자는 평화의 이념이었다. 

국사의 범주

한국은 나라와 민족이 같다고 말하지만 사실 한민족은 동이족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전체 동이족 역사 중에서 어디까지를 민족사로 서술할 것인가. 동이족은 우리 한족韓族뿐만 아니라 선비(몽골), 만주(말갈여진), 거란족 등을 모두 포괄하는 넓은 개념의 용어이다.

백암 박은식(1859~1925)은 만주(말갈여진)족 역사까지 우리 역사 범주에 넣는 역사관의 혁명을 보여주었다.

민족의 개념과 범위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혈통과 뿌리를 민족 분류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았지만 각 민족의 이동이 보다 자유로운 지금은 혈통과 뿌리 외에 여러 요소가 추가되어야 한다. 다른 민족들이 우리 사회와 역사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민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사회의 미래

지금으로부터 거의 1만 년 전의 요하문명부터 반만 년 전의 단군조선은 모두 한민족이 천손(天孫)임을 말해주고 있다. 단군조선의 이런 천손 사상은 여러 민족국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중화 사대주의 역사관이 횡횡하면서 천손의 역사관은 점점 사라지고 천자의 제국은 제후국으로 전락했다.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을 좌절시킨 위화도회군 이후 중화 사대주의 사관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크게 갉아먹었다. 여기에 일제 식민사관이 더해졌는데, 우리는 아직껏 이 두 암적 요소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제는 두 암적 요소를 극복한 새로운 역사관으로 한국 사회를 일변해야 한다.

이덕일, 이덕일의 한국통사-다시 찾는 7,000년 우리 역사, 다산북스, 2019

1장 선사시대와 우리 민족의 형성

 요하문명과 홍산문화: 요하문명은 중국의 하북성내몽골요녕성 일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동이족 문화를 뜻하는데 세계 4대문명이라는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3,000~1,000년 정도 빠르다.
홍산문화에서는 곰, , 돼지 등 다양한 동물 모양의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곰, , 돼지 토템족들의 공존을 암시한다. 특히 곰과 새는 고조선과 동이족 국가 은나라의 주요 토템이다. 옥기는 계급의 발생과 제정일치 시대를 말해주는데 이 역시 초기 고조선 사회의 모습과 같다.
앞으로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겠지만 현재의 연구나 발굴 성과만 가지고도 서기전 2,300여 년에 건국했다는 삼국유사의 단군조선 건국연대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문헌과 고고 유적,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대일항전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하고 서기전 3세기경 성립한 위만조선만 인정했던 것이 오류임을 말해준다. 남한의 강단사학계 역시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있는데 북한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자 노예 소유주 국가인 고조선이 서기전 30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2장 고조선과 열국시대

    기자동래설: 서기 전 12세기경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주장이 기자동래설로서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화 사대주의 사관으로 신봉했다. 기자는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왕의 숙부로 주왕의 폭정을 간쟁하다가 옥에 갇혔다. 은나라 신하였던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자를 석방시키자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고려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가 온 곳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14세기 가짜 기자 무덤을 만들고 기자의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냈으며, 나아가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평양에 기자의 궁전과 우물, 기자가 정전제를 실시했다는 기자전(箕子田)까지 만들었다. 조선에 명청의 사신이 오면 이렇게 만들어진 유적들을 보여주면서, “기자가 평양에 왔다는 증거로 삼았다. 이런 경로를 거쳐 기자는 중국에서 평양에서 왔던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자동래설은 고려조선의 유학자들이 사대주의 사관에서 만든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3장 열국시대에서 사국삼국시대로
4장 남북조시대
5장 고려시대
6장 조선 전기

    세종 시대의 명암: 세종은 태종이 남겨준 유산 위에 즉위했다. 세종은 나라는 군주와 사대부가 함께 다스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사대부들은 역모가 아닌 한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사대부들의 이익과 일반 백성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 부왕 태종과 달리 사대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가의 이익이 일반 백성들의 이익과 일치할 때 태종은 과감하게 백성들의 편에 섰지만 세종은 달랐다.
세종 재위 2(1420) ‘금부민고소법 金部民告訴法’, 즉 수령고소금지법을 제정한 것은 그릇된 신분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민, 즉 지방 백성들은 역모와 불법살인이 아닌 한 수령을 고소할 수 없다는 악법이었다. 백성들이 수령의 불법행위를 고소하면 역모나 불법살인이 아닌 한 백성들을 장 100, 유배 3,000리에 처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악법의 사상적 뿌리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였다.

    7장 조선 후기

    ​8장 대한제국사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과 국사교과서: 이인직은 국사교과서에서 신소설 혈의 누를 쓴 선각자라고 가르쳐왔다. 혈의 누의 내용은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에게 겁탈당할 뻔한 조선 처녀를 일본군이 구해준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이후인 1906년부터 만세보에 연재되었으니 대한제국을 빨리 점령해달라는 정치소설이었다.
일진회에서 합방청원을 제출하던 1910년 일본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3대 통감으로 부임하자 데라우치가 일진회와 손잡고 대한제국을 병합할까봐 마음이 다급해진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을 시켜 나라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하게 됐다. 이인직은 도쿄 유학 시절의 스승이었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 미도리를 만나 비밀협상을 수행했다. 고마츠가 나라 팔아먹은 한국인들에게 귀족의 작위를 주고 막대한 은사금도 줄 것이라고 말하자 이인직은 그런 관대한 조건이라면 이완용도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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