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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빈센트 반 고흐2020-02-10 19: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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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테오

테오, 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니? 그러기를 빈다. ‘인생의 사소한 고통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갖지 않겠니? 사람은 때로 절망에 빠질 수도 있어. 마치 지옥처럼 생각될 때도 있어. 그래도 거기에는 무언가 다른, 더 훌륭한 게 있어. 거기에는 3단계가 있.
1.
누구를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하는 단
2.
사랑하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단계(지금의 내 경우이지)
3.
랑하고 사랑받는
2
계는 1단계보다 낫지만, 3단계란! 바로 그것이야!
그래, 꼬마야, 너도 사랑하면 좋으련만, 그리고 나에게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렴. 1881113

-사랑하는 테오

테오, 터널이 끝나는 곳에 희미한 빛이라도 보인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요즘은 그 빛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 인간을 소묘하는 것, 생명이 있는 존재를 소묘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야. 정말 어렵지만 멋진 일이지. 188233일 금요일

-사랑하는 테오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아파서는 안 돼. 내가 예술을 어떻게 보는지 완벽하게 보여주고 싶어.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려면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야 해. 나의 목표를 달성한다 해도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겠지만, 내 눈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니까.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스러운 사람, 불쾌한 사람일 거야. 사회적으로 아무런 지위도 없고, 그것을 갖지도 못할, 요컨대 최하 중의 최하급.
, 좋아,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언젠가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괴팍한 사람,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그의 가슴에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겠어.
그것이 내 야망이야. 그것은 원한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하고, 열정이 아니라 평온한 느낌에 근거하는 거야.
비록 가끔은 너무나 깊은 비참함 속에 잠겨 있지만, 나의 내면에는 여전히 평온함, 순수한 조화, 그리고 음악이 있어. 나는 가장 가난한 오두막, 가장 더러운 구석에서 유화나 소묘를 발견해. 그리고 내 마음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런 것에 이끌려. 1882721

-사랑하는 테오

그림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있는 듯한, 보이지 않는 철벽을 통과하는 일이야.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우리는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서서히 인내심을 가지고 삽질을 해서 그 벽을 파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럴 때, 원칙에 따라 인생을 생각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흔들림 없이 계속할 수 있겠니? 예술만이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야. 위대한 일은 우연이 아니라 분명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야. 18821022일 일요일 오후

-사랑하는 테오

우울한 기분이 들면, 황량한 해변으로 걸어가서 길고 하얀 파도의 줄이 이어지는 회색조를 띤 녹색 바다를 바라본다. 얼마나 멋진지 몰라. 그러나 무언가 장대한 것, 무한한 것, 신의 존재를 느끼기 바란다면 그걸 발견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도 없어. 나는 대양보다 더 깊고, 무한하며, 영원한 무엇을, 작은 아기가 아침에 눈을 떠서 찬란한 햇빛이 요람에 비치기 시작하면 종알거리고 웃는 그 눈의 표정 속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높은 곳으로부터의 빛이 있다면 아마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겠지. 1882115

-사랑하는 누이동생에게

나 자신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 무엇보다도 꽤나 많이 늙어버렸어. 그래, 주름살, 거친 턱수염, 몇 개의 썩은 이 등등.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겠니? 나는 그림을 그린다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고 있어.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림 따위 그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게 너무 좋고, 비록 내 젊음은 잃어버렸지만 젊음과 신선함이 있는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어서 행복하구나.

나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비뚤어지거나, 신랄하게 되거나, 성을 잘 내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거야.”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가능한 한 많이 평화로운 마음을 갖는 것은, 설령 확실한 것을 조금밖에, 또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해도 필경 약국에서 파는 약보다 잘 듣는 약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 대부분은 절로 생겨나지. 사람은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해. 1887년 여름 또는 가을

-사랑하는 벗 고갱

내가 아를에서 그린 실편백나무 한 그루와 별이 있는 그림이 있네. 빛나지 않는 달이 뜬 밤하늘, 지상에 던져진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간신히 드러나는 가는 초승달, 자네가 좋다면 별은 과장된 밝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감청색 하늘 속에서 분홍색과 녹색의 부드러운 밝음이지. 그 하늘에는 구름이 급히 흘러가고 있네. 그 아래는 길이고, 길섶에 키가 큰 노란 나무줄기, 그 뒤로는 낮은 알피누의 푸른 더미, 창에 노란 색 등불이 켜져 있는 낡은 여관 하나, 그리고 검은 색의 키가 매우 큰 실편백나무 한 그루. 길에는 흰말이 끄는 노란색 마차 한 대와 천천히 산보하는 두 사람이 있네. 매우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역시 프로방스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1890617일경

빈센트 반 고흐 지음, 박홍규 엮고 옮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빈센트 반 고흐 편지 선집, 아트북스, 2009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네덜란드 브라반트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81년 말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8907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800여점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스케치를 남겼다. 대표작으로 감자 먹는 사람들」「해바라기」「별이 빛나는 밤」「까마귀가 나는 밀밭등이 있다.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고흐는 영혼의 동반자이자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와 668통에 이르는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 밖에 어머니, 여동생, 친구들과 나눈 편지까지 합하면 그가 남긴 편지는 909통에 달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또는 태풍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녹초가 된 상태로 돌아온 그가 써내려간 편지에는 상세한 일상의 보고는 물론 의문과 신념, 우울과 고독, 기쁨과 슬픔이 하나로 녹아있으며 그 자체로 귀중하고 아름다운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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