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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벚꽃의 비밀≫ -일본의 나라꽃, 선물인가 침략인가?- 류순열2020-01-21 20: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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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29일 일본 요코하마 항, 벚나무 6천여 그루를 실은 배가 미국을 향해 출발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한 달여 뒤, 3천여 그루는 포토백 강변에 심어지고, 나머지는 뉴욕에 사는 일본인들의 희망에 따라 뉴욕으로 향했다. 워싱턴의 명물 벗꽂100년 전 이렇게 심어졌다.

그런데 미국으로 처음 벚꽃이 넘어간 것은 1912년이 아니라 1909년이다. 미국 27대 대통령 하워드 태프트의 부인1907년 일본을 방문, 벚꽃에 매료돼 벚나무를 요청했고, 당시 토쿄 시장 오자키 유키오가 묘목 2천 그루를 국가 선물로 벚나무를 보낸 것이 첫 사례이다. 그런데 이 묘목은 병충해 때문에 모두 소각되었고, 오자키 시장은 명예회복을 위해 묘목 육성을 다시 의뢰, 새로 육성된 묘목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태프트 대통령은 우리에게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 준 카쓰라 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이다. 이 밀약 100여 일 뒤 고종이 불참한 가운데 일본 군인이 포위한 상태에서 19051117일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졌다. 태프트 부인이 일본으로 간 것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카쓰라 태프트 밀약이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으로 건너간 벚꽃은 이 밀약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조선 땅에도 같은 시기에 벚나무가 심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우정 어린 선물이라면 조선으로 향한 것은 침략의 징표였다.

일제는 창경궁을 오락장으로 만들었다.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백성에게 개방하였다. 그곳에 벚꽃을 심고 벚꽃놀이를 전파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우연처럼 전개되었다.
사쿠라 밑에서 실컷 떠들고 놀게 하라. 그들의 심장이 사쿠라 화판의 향기로 물들게 하라!” (유주현, 조선총독부)

미당 서정주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천황을 위해 사쿠라처럼 지라고 호소하였다.

벚꽃의 상징성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카미카제 특공 작전이었다. (카미카제는 1274년과 1281년 일본 정복에 나선 몽골군의 배를 전복시켜 기적적으로 일본을 구한 태풍을 말한다.) 19441025일 시키시마 부대가 필리핀 레이테만의 미군 부대에 자살 공격을 감행했다. 카미카제 특공대는 곧 벚꽃이었다.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벚꽂에 일치시키고 죽어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유력 정치인, 군인, 경제인의 아들이나 황족은 배제되었다.

한국과 일본에는 오랜 꽃놀이 역사가 있다. 상춘(上春)의 풍속이 그것인데, 일본은 벚꽃, 한국은 진달래였다.

벚꽂 도시 진해는 일제가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건설한 군항 도시였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섬이 많은 진해 앞바다에 함대를 숨겨 놓았다. 진해를 기지 삼아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로 승리한 일본은 진해 제황산 꼭대기에 러일전쟁 기념탑인 일본해 해전 기념탑을 설치하였다.

이 전승 기념탑은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해 보기 싫다고 하자 즉각 철거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 일제는 전승지인 이곳에 해군기지를 만들고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벚꽃을 심었다.

진해는 일제의 철저한 계획도시로 건설되었다. 도로들은 원형 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뻗어나가는데 바로 일본제국주의 시절의 욱일기(旭日旗)’가 연상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도시심장부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를 기리는 축제가 벚꽃이 활짝 피었을 때 벚꽃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린다는 것이다.

전주 군산을 잇는 40여 킬로미터의 전군가도(全郡街道)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작로이다.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설득해 만든 이 도로는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에도 어김없이 일제는 벚나무를 잔뜩 심었다.
그 나무는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도 참나무도 아니었다. 일본말로 사쿠라라 했고 그 꽃은 일본사람들이 받드는 나라꽃이라는 것이었다.”(조정래, 아리랑)

일본의 정신이 무엇이라 묻는다면 아침 해에 향기롭게 피어나는 산벚꽃이라 하리. (모토노리 노리나가)

이승만은 벚나무를 싫어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을 싫어했다.

해방은 벚꽃 수난의 시작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베어지고 뽑혀나갔다. 무관심에 병들어갔다. 찬미의 대상이던 벚꽃이 하루아침에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진해시의 벚나무, 전군가도의 벚나무도 온전할 수 없었다. 창경원의 벚꽃놀이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 채칙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일본군으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강창성)

박정희는 진해를 방문하여 당시 시장에게 가로수뿐만 아니라 산이나 들이나 심을 수 있는 곳에 모두 벚꽃을 심으라.”고 지시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국내 곳곳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벚나무 심기에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조직적으로 열정적으로 개입했다. 묘목을 비행기로 실어 나르고 수차례 방한해 비료를 주고 성장 상태를 살피고 아끼고 가꿨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진해 벚꽃의 부활, 국회를 감싸는 여의도 벚길, 전군가도의 벚꽃길 등 상당수의 국내 대단위 벚꽃단지는 재일동포, 일본인이 일부, 또는 전부 기증하여 조직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의도 국회 뒷길의 벚꽃은 워싱톤 포토백 강변의 벚꽃을 흉내 낸 것이다. 국회의사당은 1975815일 준공되었는데 이는 집권자 박정희의 취향이 직, 간접적으로 반영된 몰역사적인 조경인 것이다.

카쓰라 태프트 밀약(1905)을사보호조약(1905)태프트 부인 방일(1907)감사의 표시벗나무 묘목 선물워싱톤 포토백 강변 벚꽃길 조성박정희 쿠데타(1961)일제 시절에 대한 향수국회의사당 벚꽃길 조성(포토백 강변 모방)벚나무 일본에서 기증

제주도 원산지설(1913)에는 무언가 국가주의의 투영이 느껴진다. “과학에는 국가가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가가 있다.”

해방 이후 조선 대중이 화풀이로 벚나무를 해칠 때 원래 우리 꽃이라며 만류하는 신문기사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진해 가로수 논쟁에서는 벚꽃 원산지설 때문에 일본 나라꽃이라는 거부감이 상당히 반감되었고, 어느덧 벚꽃 제주도 원산지설을 방패삼아 벚나무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으로 심어지기 시작했다.

원산지설로만 벚꽃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몰역사적이다. 그런 인식체계는 일제 강점기의 유산인 벚꽃의 역사성, 정치성은 희미해진다. 더욱이 제주도 원산지설은 엄밀히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라고 처음 주장한 이는 일본 식물학자이다. 벚나무는 전 세계적으로 200가지가 넘는다.

일본에서는 제주도 원산지설을 완전히 버리고 왕벚나무는 오오시마 벚나무와 에도히간 벚나무의 중간이다잡종 기원설로 돌아섰다.

한국전쟁 후 일본에서는 빨갱이 사냥이 벌어졌다. 일본 패망 후 미국의 일본 내 정책이 우파 추방에서 좌파 척결로 바뀐 것이다. 추방당한 이들은 다시 기용되었다.

벚꽃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여전히 군국주의 그늘에 갇혀 있다.

류순열, 벚꽃의 비밀, ()에세이퍼블리싱,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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