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세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빛나는 비린내 속에 몸을 섞으며”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장석 시집2023-02-05 08:25
Writer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장석

1957년 부산 출생. 평북 영변 출신으로 함흥과 부산에서 성장하고 수학한 아버지와 전남 순천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의 21녀 중 둘째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나, 이 시집을 첫 번째로 펴내는 중고품 신인이다. 오래 묵힌 세월로 인해 두 번째 시집 우리 별의 봄도 함께 펴내게 되었다.

1980년 서울대 국문과 재학 중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의 꿈>이 당선되며 등단한 장석은, 그러나 많은 화제와 비평적 상찬을 불러일으킨 데뷔작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어디에도 그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침묵이고 사라짐이었다.

 

 

<서시>

온몸으로 앉아 있는 바위

전신만신의 둥근 달

혼신을 다해 붉은 꽃

멍청한 돌부처

그리고 사랑은
세상에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서랍 1>

네 이름이 채송화라지

맨드라미처럼 웃고 서 있는 아이들 옆
담벼락 아래 앉아 있는
소녀에게 물었다
양지바른 작은 소녀에게

팔월이었고
대낮이었고
국민학교 이학년 때의
무척 수줍고 무섭기도 한 날이었다.

 

<순천 외가 4>

순천 아랫장의 낮전에는
장꾼은 하나 햇볕은 셋
곡물상 짚광주리에는 오곡이 가득

강바닥에 떨어져 노랗게 웃고 있는
옥수수 한 알

전 존재를 빼버리고
남은 이빨 하나
잃어버린 나

장거리를 키 작게 걸어오는
국밥 냄새

 

<언덕에서>

산수유꽃 언덕에 나도 피어
노랗게 바라보리라

아스라이 보이는 바다의 봄내
막 태어난 잔물결의 헤엄

가을이 오면 해풍을 보내다오
내 마음속의
붉고 붉은 열매들에게

그러면 나 후두둑 땅에 떨어져
비탈을 굴러 해변으로
하나는 가장 멀리 온 파도의 손아귀에

가을 바다도
조금 붉어지도록


<여름이 온다>

정어리 떼와 더불어
여름 한철 살았으면

훌훌 벗어버리고 바다에 들어
윤무로 만드는 둥근 집 안으로 가
나도 손잡고 춤추며 푸르러지리라

천 마리가 모여서 된 색시와 짝을 이루어
빛나는 비린내 속에 몸을 섞으며
바다숲으로 찾아온 햇살 아래서
희고 푸른 그녀 몸의 비늘로 다듬어주리라

한여름을
필사의 속도로 도망치리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엄습하는 공포를 피해
함께하는 두려움이 만드는
사랑의 힘으로

귤 껍데기처럼
단호한 심장으로
굳은 연대의 악수처럼 단단한 몸으로
저 산호초를 돌아서
한 입 차이로 뒤쫓는 공포를 향해
불꽃을 일으키며 일제히 돌진하리라

여름 바다에 가면
비등하는 표층 아래
우리들이 함께 그어갔던
끊이지 않는 긴 선을 찾아라
은빛으로 적었던
두려움과 사랑의 기록을

가을이 오면
파도 마루에 인광 빛나면
순은과 청금으로 치장한 여인들이
이윽고 내어놓은 알들의 밭에서
늙어버린 다리 사이로
나도 거품을 내어야 하는가

지켜주지도 못할
이어가지도 못할 인연은
시간의 물결에 흩어지리라

가을이 오면
가을 바다에 노을 가득하면

 

<청혼>

아름다웠고
사랑했으므로
푸른 밤바다에 목걸이를 늘여놓고는
그녀의 손을 이끌려고 왔으리라

바닷가 마을에서 온 불빛
먼저 온 별빛을 밀치며
작은 새인 양
진주알 위로 앉아본다.

그 남자

자신의 청사진에
달빛으로 야경을 그리고는
밤바다에 발 담그어
내 생애로 들어와달라고

밀물로 다가가는
나를 안아달라고

 

<노래>

아름다운 노래는
어느 여인들의 말로 불리는가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가
슬픔에 잠긴 마음인가
기쁨도 슬픔도 모두 아름다운 일
하나는 피어오르고
하나는 잦아들면서
삶의 모닥불을 이루는 불꽃들

저토록 아름다운 노래가
어떤 여인의 모어에서 태어났을까

어느 새의 집에서 가져온 것일까
불을 훔쳤듯
새의 집을 털어 노래를 훔쳐
이 세상을 흐리게 하였구나

그대
나의 기쁨을 위한
재주 많은 손을 가졌으나
늘 가슴이 미어지는
벌을 받는 사람아

작은 새의 노랫말을 알려면
숲의 어떤 나뭇잎을 읽어야 하나
어디로 불어가는 바람의
소리를 들어야 하나

너는 기쁨이고
때로는 슬픔이니
한 개의 씨앗에서 비롯되었고
이 노래의 일부이고
누구에게로 가는 여행의 한 걸음이니
아름답게 불타다가
놀랍게 꺼지거라

새는 노래한다

나도 함께 노래하리니
라디오 앞
소쿠리에 담긴 채
귀를 크게 열고 있는 마른 버섯들처럼

 

<그믐달>

네가 이지러져 있는 것이다
마음의 그믐은 그치고
분홍빛 아기 손톱처럼
다시 자라나거라

암록의 밤하늘에 퍼지는
보름달의 그 흐뭇한 빛

 

<앎의 즐거움 2>

늦은 오후의 햇살이
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머리카락이 성겨진 앞산의 정수리를
빗질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안다

차에 치인 삵이 몸을 버리고 숲으로 갈 때
누구의 손이 종소리를 보내는지

삶에 일몰이 밀물로 와
시야가 노을처럼 붉어지면
나는 안다

숲이나 숲 밖이나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에 기대어 있고

햇빛의 빗질을 받으며
그가 보내는 종소리를 함께 들으며

 

<스페인의 시골 마을>

아디오스

굽은 길의 모퉁이
나무 아래의 작은 그늘
칠월의 금빛에서 빠져나온 냄새들

그리고 작은 새
작은 새의 아기 새

새에서 막 진화한 소녀들
숲으로 날아오르듯 이곳으로 올라와
차 안을 푸른 숲으로 만들고

나는 숲에서 나와 다시 길에 서서
시골 마을의 정류장에서

몸 일으켜 빛을 털어내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가는
버스를 닮은 큰 짐승을 바라본다


장석,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 2020

그토록 오랜 시간의 회랑을 돌아 아마도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려왔던 시인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1980년 한 일간지 신춘문예에 잠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져버린 시인. 데뷔작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 남긴 채 망각의 심연 저편으로 완벽하게 숨어버린 시인. 새로운 밀레니엄의 개막이란 구호도 적잖이 퇴색해버린 지금, 그 시인이 다시 돌아와 그동안 남몰래 쓰고 다듬어왔던 언어를 건넨다. 세계를 향해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그의 사랑의 전언에는 여전히 순결한 자아에 대한 갈망과 현상적 질서 너머의 본질을 투시하고자 하는 은밀한 열망이 가득 차 있다. 그동안 그는 이 언어를 버려두고 아니 쌓아두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한 시절 한 세상을 탕진해왔던 것일까.” (남진우, 시인)

그 시의 삶에서 건진, 솟아오른 시들을 안고 시인 장석이 돌아왔다. 이 첫 시집에 실린 76. 이번에 함께 나오는 제2시집 우리 별의 봄에 담긴 74. 합하여 모두 150편이다. 자연, , 인간 앞에 겸허한, 성실ㆍ이타ㆍ헌신의 정신이 연 스스로 켠 불로” “아름답고 ”(<가을빛>)한 세계이다. (<발문>에서, 정호웅, 문학평론가)

 

Comment
Captcha Code
(Enter the auto register prevention c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