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세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 ≪야만의 시대, 지식인의 길≫ ≪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난세에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2023-01-23 20:34
Writer

야만의 시대, 지식인의 길≫ ≪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난세에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야만의 시대 지식인의 길류창 지음, 이영구 외 옮김

머리말 죽림칠현, 그들의 백 년

이 책의 주인공은 위진(魏晉)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문인 그룹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위진이란 두 글자는 역사 개념일 뿐만 아니라 문화 개념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위진 시대는 난세였다.
왕권이 실추되고, 윤리와 도덕이 붕괴되고, 군웅이 분분히 일어나면서 정국이 요동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천하가 더 어지러울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웠다.

문화적으로 위진 시대는 꽃이 만발한 정원이었다.
사상이 자유롭고, 가치가 다원적이고, 개성이 발양되고, 문예가 대단히 발전했다.
위로는 진() 이전 시대와 아름다움을 겨룰 만했고, 아래로는 성당(盛唐, 대체로 당나라 헌종부터 대종 때까지)의 원류가 되었다.
자연히 뛰어난 인재들이 출현하여 뭇별처럼 찬란히 빛났고, 말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문화가 피어났다.

서기 220, 조비(曹丕)가 한() 왕조를 대신해 황제로 칭하고 위() 왕조를 세웠다.
45년간 5명의 황제가 있었다.

265년 사마염(司馬炎)이 위 왕조를 멸하고 서진(西晉) 왕조를 세웠다.
52년간 모두 4명의 황제가 천하를 다스렸다.
316, 팔왕(八王)의 난과 오호(五胡)의 침략을 거친 서진 왕조가 흉노에게 멸망했다.
이듬해, 사마예(司馬睿)가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南京)에서 황제를 칭했고, 이것이 동진(東晉)이다.
장강 남쪽에 자리한 동진은 104년간 무려 열한 번이나 황제가 바뀌었으며 그들의 재위 기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420, 유유(劉裕)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 사마덕문(司馬德文)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송()을 세웠다.
170여 년에 걸친 남조(南朝)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조비가 위나라를 세우고 유유가 동진의 황위를 찬탈할 때까지의 위진의 역사는 정확히 200년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200년은 사상, 문화, 예술의 황금시대였다.
유가(儒家)의 경학(經學)이 쇠퇴하고 도가(道家) 사상이 힘을 얻어 민간의 도교(道敎)가 발전했으며, 동쪽에서 불교가 넘어와 뿌리를 내렸다.
또한 현학(玄學, 위진 시대에 노장老壯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문인들의 형이상학적 담론)이 세상을 풍미해 인간의 각성을 이끌어냄으로써 ()의 자각도 뒤따랐다.
문학, 음악, 서예, 회화, 조각, 건축 등 각종 예술 양식이 전례 없는 번영과 성숙을 이루면서 대가와 명작이 연이어 탄생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라의 불행은 시인에게는 행운이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죽림칠현은 이 파란만장한 시기에 탄생했다.
그들은 이 시대에 태어나 활동하면서, 이 시대에 영향을 주고 심지어 이 시대를 바꿔놓았다.
그래서 후대에 위진 풍도(魏晉風度, 정치적으로 위진 시대에 신흥 사대부 계층이 구가했던 자유롭고 도교적인 학술과 문화의 분위기), ‘명사의 풍류가 거론될 때면 죽림칠현은 항상 어떤 기치나 정신, 혹은 신화로 떠받들어졌다.
이 일곱 인물은 중국 고대의 사상, 문화, 예술, 나아가 중국인의 정신에 깊고 큰 영향을 끼쳤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신분이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문인의 글부터 시민의 설화까지 이 영향은 어디서든 발견한다.

그들의 삶에는 중국 고대 지식인의 입신과 처세의 모든 선택이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관직에 있기도 하고, 은거를 하기도 하고, 관직 생활과 은거 생활을 다 하기도 했다.
또한 지혜롭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지혜와 어리석음을 조화롭게 갖추기도 했다. 말하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하고, 말과 침묵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판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비판도 분노도 하지 않기도 했다.
그들은 반목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결탁하고, 몸부림치고, 반항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갖가지 시험을 치러냈고 그 난세에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내길 바랐다.

죽림칠현은 중국 고대 문인의 거울이다.

대부분 주목하지 못한 우연이 있다.
205, 죽림칠현의 맏형 산도(山濤)가 태어났다.
305, 죽림칠현의 막내 왕융(王戎)이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일곱 인물의 등장과 퇴장까지 정확히 백 년이다.
이 일곱 인물의 백 년 사이, 역사와 문화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했고 문인과 예술의 기풍도 크게 변했다.

 

1 죽림칠현의 미스터리
2 조씨와 사마씨의 권력투쟁
3 급류에서 탈출하다
4 절대쌍교
5 죽림의 성대한 연회
6 고평릉의 번
7 그물에 걸리다
8 먹구름에 뒤덮힌 낙양성
9 취객의 뜻은 술에 있지 않았다
10 얼음과 불의 성격
11 사마소의 마음
12 절교의 진위
13 광릉산의 절창
14 곡은 끝났는데 사람은 흩어지지 않았네
맺는말 만고에 향기를 전하다

 

5 죽림의 성대한 연회

완함은 긴 자루가 달리고 몸통이 둥글며 줄이 네 가닥인 비파 연주에 능했다.
이 비파는 완함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마치 둥근 달을 품에 안은 듯 우아했고, 소리는 진주가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 오묘했다고 한다.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713~741)에 진나라 고분에서 구리로 만든 비파가 출토되었는데, 그 비파는 완함(阮咸)’ 혹은 간단히 ()’이라고 불렀다. 이런 종류의 오래된 비파는 모두 그 이름으로 불렀다.
이처럼 인명을 악기 이름으로 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었던 일이다.

 

9 취객의 뜻은 술에 있지 않았다

청안과 백안

완적에게는 또 하나의 재주가 있었으니 청안(淸眼)’백안(白眼)’의 자유로운 구사였다.
청안은 검은자위를 말하고 백안은 흰자위를 말한다.
보통 호감 서린 눈초리를 청안이라 하며, 무시해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는 눈초리를 백안이라 한다.
완적은 속된 인물을 만나면 백안시하곤 했다.

완적의 어머니의 장례식 때로 돌아가보자.
완적은 명성이 높았던 까닭에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혜강의 형 혜희가 조문을 왔다. 원칙대로라면 친구의 형이 왔으니 극진히 대접해야 옳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완적은 혜희를 백안시했다. 혜희를 향해 흰자위를 드러낸 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혜희는 화가 나서 돌아갔다.
이때 막 하동에서 돌아온 혜강이 이 일을 전해 듣고는 두말하지 않고 고(칠현금)와 술을 들고서 완적의 집으로 달려왔다.
완적은 그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청안을 드러냈다.

완적은 남에게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했으며 백안시하고 청안시하기도 했는데, 그 차이가 대단히 컸다.

 

14 곡은 끝났는데 사람은 흩어지지 않았네

변신의 귀재 왕융

죽림칠현 중에서 인생 전반기와 후반기가 아주 판이한 인물이 있다. 나이가 가장 어린 왕융이다.
어릴 적에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왕융은 관리가 되어서는 청렴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뇌물을 당연히 받지 않았고 심지어 부친이 죽은 뒤 친구들이 보내온 예물과 부의금까지 거절했다.

그런데 이 청렴한 관리가 고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수전노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왕융은 만년에 아주 탐욕스러워졌고 인색해졌다.
예를 들어 조카가 혼례를 올릴 때 겨우 홑옷 한 벌을 예물로 보냈다. 그래도 이것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나마 성의는 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융은 이 작은 것도 아까워서 얼마 후 조카를 찾아가 돌려달라고 했다.

왕융은 친딸에게까지 지독한 노랑이였다.
딸이 시집을 가면서 그에게 돈을 빌렸는데, 얼마 후 딸이 돈을 갚지 않은 채 친정에 왔다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딸은 얼른 돈을 갚았고 그제서야 왕융은 얼굴을 펴고서 웃음을 지었다.

가족과 친지에게도 이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 왕융이 집에 자두를 많이 심었는데 맛있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서 내다 팔기로 했다.
그런데 그냥 내다 팔면 그만인 것을, 왕융은 남이 자기 집의 상등 품종을 가져다 심을까 걱정이 되어 팔기 전에 송곳으로 씨앗을 모두 파냈다.

훗날 안풍후(安豐侯)에 봉해진 왕융은 허리에 돈 만 관을 찬 갑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만족하려면 멀었는지 밤마다 등불 밑에서 부인과 함께 상아 주판으로 자기 집 재산을 세곤 했다.

이렇게 왕융은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 죽림의 정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 돼버렸다. 


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짜오지엔민 지음, 곽복선 옮김

옮긴이 서문 죽림칠현, 13억 중국인의 자화상

죽림칠현(竹林七賢)은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간 선비들이다.
칠현 중 생몰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유령(劉伶)과 완함(阮咸)을 제외한 다섯 명의 생존연대를 보면 산도(山濤, 205~283), 완적(阮籍, 209~263), 혜강(嵇康, 223~262), 상수(尙秀, 227~272), 왕융(王戎, 234~305)의 순이다.
이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에서의 중원의 패권을 다루던 위(), (), () 삼국 중 주로 북부 위나라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살다간 동한(東漢) 말엽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西晉) 말엽까지, 말 그대로 동란의 시기였던 만큼 그 삶도 파란만장하다.

죽림칠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가 혜강이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대나무의 올곧음과 늘 푸름을 간직한 채 자신의 시대와 맞섰던 그에게서 선비의 깨끗함과 의연함을 느낄 수 있다.
사마의(司馬懿)와 그 아들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삼국시대에 혜강은 붓 한 자루로 결연히 그들과 맞섰다.
불사이군(不事二君)!
혜강은 위나라 조씨 황제들에게는 머리를 숙였지만 사마씨에게는 그럴 수 없었기에, 결국 40세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불의의 시대에 타협하지 않았던 참 선비, 그가 바로 혜강이다.

넘치는 해학과 속 깊은 재주를 지니고 영웅의 기상으로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싶었으나, 정권의 꽃병에 머물고 만 완적(阮籍).
그는 남들이 알 리 없는 울분을 술과 시로 달래며 인생을 소비했다.
겉으로는 원융무애(圓融無碍), 거칠 것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참다운 자기를 향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였다.
폭압적 현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완적은, 젊은 혜강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권력자 사마소(司馬昭)에게 일언반구의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속으로만 울고 있었던 그는 붓을 들어 군주도 신하도 존재하지 않는 무군무신론을 써내려가며 그 슬픔을 달랬다.
거기에 나약한 문필을 휘두르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처지가 완적의 모습과 겹쳐진다.
뜻과 어긋난 현실에서 갈 바를 몰라 머뭇거리며 그림자로 살아간 선비, 그것이 완적의 초상화다.

산도(山濤)는 죽림의 장자로 불리며 나이만큼이나 원숙함을 보여주었다.
일찍이 노장(老壯)에 침잠하여 세상사를 다투려 하지 않았고, 누가 물으면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속에는 늘 세상을 경륜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위나라에 빚진 것이 없었던 그는 혜강과 달리 적극적으로 사마소를 도왔으나, 권력의 회오리가 몰아칠 때도, 관료 세계의 무분별과 혼탁 속에서도 늘 청정을 유지하였다.
관료로서 그의 초상은 죽림의 배움을 현실에 옮겨다 놓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관료가 되어서도 죽림의 옛 친구들을 잊지 않았으며, 부귀와 공명을 얻고도 조강지처만은 끔찍이 아꼈다.
40세에 벼슬길에 나가 거듭된 사퇴에도 불구하고 삼공(三公)의 자리에 올랐던 그는, 혜강의 아들을 사마소에게 천거하여 끝까지 돌보았다.
그러면서도 재물을 탐하지 않은 깨끗한 관료였다.
청렴한 관리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선비, 그가 산도다.

유령(劉伶)의 생명수는 술이었다.
그의 인생은 자신이 아니라 술이 써 내려갔고, 술로 빚어진 그는 늘 술의 덕()을 찬양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흉중에는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심원한 우주가 담겨 있었다.
현실의 좀스러움을 벗어난 호연지기(浩然之氣)!
허나 현실에서는 늘 패배자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술지개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세상을 흐릿하게 바라보았다.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던 그의 넓고 깊은 사유 세계는 그를 죽림의 현자가 되게끔 하였다.
취한 채로 비틀거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싶었던 그가 술에서 깨어난 적이 있었을까?
자신이 취한 것일까, 세상이 취한 것일까?
욕망도 탐욕도 내려놓은 지 오래. 현실의 삶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어 세상을 퍼마셨던 술꾼!
술을 찬양하는 노래로 이름을 날린 유령의 모습이다.

완함(阮咸)은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의 자유를 추구했던 시대의 반항아였다.
미친 듯이 달린 물건을 흔들어 대며 속세 것들을 비웃고, 움직이면 술 한 잔 걸치고 비파로 시름을 달래곤 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퍼마시고 고꾸라지며 미친 자보다 더 미치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시대를 비껴갔던 국외자였다.
하지만 숙부 완적의 명성에 눌려 늘 아류에 머물고자 했던바, 학문으로 보나 노는 물로 보나 그는 한 수 아래였다,
그럴수록 더욱 기행을 일삼으며 내성의 허함을 감싸려 했던 미치광이!
완함은 소꼬잠방이를 높이 날리며 자존심을 하늘로 띄워버렸다.

상수(尙秀)는 최고의 학자가 되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날리는 명예를 얻고 싶었다.
한 획, 한 글자, 한 구절 그르침 없이 새기면서 자신의 세계를 열기 위해 부단히 노장을 궁구하였다.
마침내 장자주해(莊子註解)’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는, 낮이면 친구의 밭일을 도와주거나 대장간에서 공구질을 했고, 잘 못 마시는 술이지만 가끔은 죽림에서 느긋이 홀짝이며 세상을 조롱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죽림의 친구들이 다 떠나자 결국 권력의 꽃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벼슬길에 발을 들어놓은 순간 이미 자신이길 그친,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변절한 선비! 그가 상수였다.

왕융(王融)은 어린 나이에 그 배포와 학식, 담론으로 이미 명성을 드날렸다.
좋은 가문과 배경, 당대의 인재들이 인정한 재능으로 말미암아, 가장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림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자신의 소원대로 삼국 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한 오()나라와의 무창대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러나 벼슬이 수직으로 상승하면 할수록 어찌된 일인지 그는 점점 더 속물로 변해갔다.
높은 자리에 전전하는 그의 노골적인 구걸행각은 치사할 정도였다.
정말 죽림에 머무르기나 한 걸까?
후대 뜻 있는 선비들에 의해 죽림칠현에서 제명당하는 왕융.
지금도 권력과 부귀만을 애타게 쫓는 자들을 보면 그들의 교활한 웃음과 속물적 태도가 겹쳐 떠오른다.
그것은 이미 선비도 더더욱 현자도 아닌 왕융의 모습이다.

서문

죽림(竹林)은 너무나 평이한 경치다.
선비들이 이 평범한 경치의 대나무 숲을 거닐게 되면서 뜻밖에도 문화사(文化史)의 기묘한 모습, 정치사의 기적과 심령사의 기이한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기이한 모습, 기적, 기이한 이야기, 이 세 가지 기이함이 위진(魏晉) 시대에 칠현(七賢, 혜강ㆍ완적ㆍ산도ㆍ상수ㆍ완함ㆍ유령ㆍ왕융)을 배출해냈다.
죽림과 칠현은 혼연히 한몸이 되어 떼어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죽림칠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죽림칠현은 노장(老壯)을 믿었으며 특히 장자(莊子)를 숭배했다.
죽림이 하나로 물화(物化)된 모습을 장자의 나비 이야기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죽림이 칠현으로 변한 것인지, 칠현이 죽림으로 변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죽림칠현은 하나의 무리로, 마치 서로 다른 일곱 그루의 대나무들이 안개 낀 대숲에 삐쭉삐쭉 서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이들은 죽림칠현을 탈속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속된 구석이 많았으며, 또한 각기 서로 다른 속물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가장 귀중한 유산은 스스로 속됨을 멸시하고, 속됨을 깨뜨리고, 속됨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정말 슬픈 구석은 속됨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낙망해 길을 헤맸지만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로 속됨과 다시 어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강렬히 대비되는 점이 있었다.
환난을 바탕으로 얻은 부귀영화에 어떻게 대처했느냐, 번뇌를 같이하는 일가족의 생명을 어떻게 대처했느냐, 적막을 주 선율로 하는 길고 긴 생애를 어떻게 지냈느냐, 헛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생전과 사후의 명성에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다른 점이 생겨났다.

죽림칠현의 정신은 선비와 대나무를 하나로 묶는 인연을 만들어냈다.
동진(東晉)의 왕자였던 유()는 매번 새집으로 이사 갈 때마다 대나무를 심게 하면서 이 군자가 없다면 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으랴!”라고 읊조리곤 하었다.
북송(北宋)소동파(蘇東坡)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해서도 소탈한 심정으로 먹을 고기가 없을 수는 있지만, 머무는 곳에 대나무가 없을 수는 없다라고 했다.

 

절교의 배후 - 가는 길이 다른 혜강과 산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새총 - 혜강과 종회의 어긋난 만남
품격의 비교 - 사마씨와 내공을 겨루는 혜강
속세에 묻히는 신선의 기운 - 혜강이 그려낸 피로 물든 한 폭의 수채화
조정에 숨은 큰 은자 - 영원한 방랑자 완적
영웅 없는 세상 - 불우한 은자 완적
머나 먼 멱라수 - 굴원을 그리며 눈물짓던 선비 완적
벼슬길을 향해 - 죽림의 또 다른 장자 산도
평 선비에서 원로대신으로 - 사마씨 정권의 영원한 꽃병 산도
추악한 주신 - 우주를 마음에 품은 대인 유령
미인을 말에 태우고 가는 광인 - 시대의 반항아 완함
숲 그림자 속의 증인 - 진정한 죽림의 파수꾼 상수
빼어난 속물 - 재주와 인품이 어긋난 왕융
화롯불 위에서 구어낸 명예 - 왕융의 처세술

 

절교의 배후 - 가는 길이 다른 혜강과 산도

산도는 여러 해를 견디며 마흔이 넘은 중년에 이를 때까지 그 기개를 간직했지만, 끝내는 물질의 궁핍함과 적막하기 그지없는 환경,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을 견뎌내지 못하고 벼슬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자기가 했던 일을, 자기가 내뱉었던 말들을 깡그리 잊어버린 채!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그는 은둔자(은사)라는 밑천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죽림을 구름판 삼아 한달음에 조정관직을 손에 넣었다. 이익을 위해 죽림을 배반한 것이다. ‘적어도 나, 혜강을 배반한 것이다. 자기가 흙탕물에 빠진 것이야 내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다시 돌아와 나까지 끌어드리려고 하다니.’


노자, 장자가 내 스승이며 유하혜(柳下惠,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동방삭(東方朔, 한무제 시대 문장과 골계로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이 내 친구입니다. 그들은 낮고 비천한 직위에서도 편안히 지내면서 유유자적하는 가운데 즐거움을 얻었다, 정말 내게 가장 좋은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통달할 때는 선을 베풀되 평생 변함이 없으며, 실의에 빠졌을 때는 자족해 근심함이 없습니다.”(혜강의 <절교서>에서)

혜강은 부귀가 화를 불러온다고 두려워하는 심리 상태를 시문을 통해서 드러냈다.

영화와 명성은 몸을 더럽히는 것이며
높은 지위는 재앙을 늘리는 것이다.
榮名穢人身 高位多災禍(, <여완덕여與阮德如>에서)

혜강이 부귀가 재앙을 불러올까 두려워한다는 것, 그가 산도와 절교하게 된 주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다

절교서가 전달된 후에 사람들은 혜강과 산도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산도는 절교서를 받아들고 오랫동안 마음 아파했다. 이 절교서가 혜강이 사마정권에게 미움을 받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기에 산도는 더욱 가슴 저렸다. 사실 혜강은 그저 말로만 절교를 했을 뿐이며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산도를 그리워했다. 이러한 논법에 무슨 증거라도 있는가? 혜강이 처형되기 전에 뱉은 한마디가 그 증거이다.
형장에서 혜강이 <광릉산>을 연주하고 난 후에 태연자약하게 아비를 잃게 되는 자기의 아들 혜소에게 말했다.
거원(산도)이 있으니 네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혜강의 예상대로 그가 죽은 후에 산도는 마음을 다해 혜소를 돌보아 주었으며 금기를 깨고 비서승으로 발탁했다.
또한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미안함을 품고 이야기했다.
자네를 도와주려 생각한 지 오래네. 천지와 사계절도 왕성함과 쇠함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실제 상황을 연구해 보면 절교서가 세상에 알려진 후에도 혜강과 산도는 여전히 우정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아주 명확한 점은 혜강의 <산도와의 절교서>는 산도를 향해서 쓴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억누르고 있은 지 오래된, 어디에도 쏟아낼 수 없었던 비분강개한 심정을 이때 이런 방식을 빌려 폭포처럼 쏟아낸 것으로 잠시 산도가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절교서는 하나의 깃발이다. 지조를 굳게 지킨 깃발이고, 품평을 널리 알리는 깃발이며, 당시 정권과 협력을 거절한 깃발이었다.
대장부의 뜻과 기개는 부탁을 할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절교서는 하나의 선언이다. 속세를 떠나 고고한 생활을 한다는 선언이며, 가난하지만 굽히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는 뜻을 가진 선언이다.
만일 속세 사람들이 모두 부귀영화를 좋아한다 할지라도 나 혼자만은 이를 멀리할 수 있다. 이 어찌 통쾌하지 않으랴! 이 절교서를 통해 혜강은 통속적인 의미의 이름에서 벗어났다. 그의 이름은 일종의 특수한 정신적 부호가 되었다. 이 부호는 나머지 죽림칠현과도 구별되는 것이며, 풍류를 다투는 명사들과도 다른 것이었다. 혜강은 문화라는 산맥 중 눈에 번쩍 띄는 석벽 위에 새겨진 부호이며, 당대와 후대 문인들의 영혼을 자극하는 부호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새총 - 혜강과 종회의 어긋난 만남


거친 천으로 된 적삼을 걸친 혜강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망치로 쇠를 힘껏 내리치고 있고, 상수(尙秀)가 조수 역할을 하며 가죽 주머니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피워내고 있었다. 좋은 옷을 입고 살찐 말에 높이 앉은 종회는 수많은 종자와 손님을 대동하고 호기롭게 와서,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만나지 못했던 혜강을 방문했다. 혜강은 그들이 온 것을 모르는 체 자기 일에만 몰두해 쇠를 계속 두드려댔다. 잠시 그 앞에 서 있던 종회는 주인의 무례함에 화가 치밀어 올라 발걸음을 되돌렸다. 종회가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혜강이 동작을 멈추고 툭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무엇을 들었기에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보았기에 돌아가는가?”
종회는 혜강의 질문을 슬쩍 비틀어 대답했다.
들은 것을 들었기에 이곳에 왔으며, 본 것을 보았기에 돌아간다.”(세설신어)

혜강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종회가 현학의 정시명사들을 배반한 것이었다. 사마씨 집단이 조상(曹爽)과 같은 일당이란 죄목으로 하안(何晏)을 주살한 후, 종회는 도의를 져버리고 부귀공명을 탐해 사마씨 집단에 들어갔다. 혜강의 입장에서 볼 때 종회는 소인에다 비열하기 짝이 없으며, 바탕에 큰 차이가 나는 인간이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현학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가 종회에게 보여준 도도함은 자신의 올곧은 기개를 드러내려는 혜강만의 특수한 형식이었던 것이다.

종회는 총명하기로 이름이 났지만 혜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혜강과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자 종회는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류창 지음, 이영구 외 옮김, 야만의 시대, 지식인의 길, 유유, 2012
짜오지엔민 지음, 곽복선 옮김, 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 푸른역사, 2007  

Comment
Captcha Code
(Enter the auto register prevention c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