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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바느질과 길쌈도 잘하였으나”≪朝鮮女俗考조선여속고≫ 李能和 2022-11-30 07:54
Writer

朝鮮女俗考조선여속고≫ 

 

해제김상억

2 원전과 편제

내용조직

이능화 저 朝鮮女俗考1927년 한남서원과 동양서원에 의해 공동 발행된 책이다.
저자는 상대(上代)부터 조선조 말까지의 방대한 여속(女俗) 일반과 그에 따른 부속 사항을 다음과 같은 대항목으로 파악하였다.

혼인(婚姻) 1~14
복식(服飾) 18, 19
산육잡속(産育雜俗) 16
노력동작(努力動作) 22
연중행사(年中行事) 및 유오(遊娛) 21
지식녀(知識女)ㆍ지식사(智識事) 23
효녀(孝女)ㆍ효부(孝婦)ㆍ열녀(烈女) 24, 25
칭호(稱號)와 계급 17
금기(禁忌)ㆍ교훈(敎訓) 20
투부기담(妬婦奇談) 25
여자교육(女子敎育) 26

위의 내용 항목과 안설(按設)에서 저자는 혼인민속의 다기다양한 내용을 자상하게 보이면서 혼인관으로부터 그것에 따른 신앙과 미신, 그리고 혼인제도와 그 변천 과정을 예시하고자 배려했다.
복식에 대하여서는 그 유래와 자료ㆍ의장(意匠)과 제식 그리고 유포(流布)의 여러 사정까지를 보이었다.
장식민속(裝飾民俗)으로서는 관구(冠屨, 의관과 신)ㆍ차환(釵環)ㆍ지분(脂粉) 이외에 변환(辨鬟)과 지분 등을, 복장민속(服裝民俗)으로서는 고대 평복에 기본을 두고 예복과 외출복 제도를 고찰하였다.
혼복(婚服)은 혼인민속에서, 상복은 별장(別章)으로 잡아 각각 특수의상으로서의 요()를 설명하면서 부대민속으로 금욕(衾褥, 이부자리)ㆍ대우(敦盂, 쟁반과 바리)ㆍ병이(餠餌, )ㆍ병장(屛帳, 병풍과 장막)ㆍ교석(絞席)ㆍ화촉(畵爥) 등에도 언급하였다.

다음으로는 일부 지식녀들의 수학 과정과 총기(聰氣), 그리고 상당한 문학적 노작에 관한 일을 특수여속(特殊女俗)으로서 들었는데, 분명히 우리나라 고()여성의 문자교육은 매우 차별적인 것이어서 민속 내용으로 다루기에 충분하며, 그렇게 하여 습득한 지()의 용()이나 그런 지를 지닌 지식녀에 대한 처우 등에도 꽤 특수성이 있어 민속 내용이 될 수 있다.
저자가 옛 지식녀들의 지적(知的)ㆍ정적(情的)인 생활과 행적을 민속적 의미(意味) 일면(一面)으로 파악한 것은 확실히 탁견이다.
그리고 효녀ㆍ효부ㆍ열녀 관계 여속에 있는 상당한 비의적(秘義的) 성격을 풀어 보이었다. 

() 이능화

우리에게 조선 여속에 관한 역사서가 없다는 것은 조선 사람의 잘못이니, 어찌 외국 사람을 해괴하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
적이 격분되는 바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조선여속고를 엮은 동기다.
그리하여 각 방면으로 사료(史料)를 수집하였으나 쉽지 않아, 1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비로소 책을 이룩하게 되었다.

4장 민서혼제(民庶婚制)

1. 남귀여가지속(男歸女家之俗)을 바꾸어 친영지례(親迎之禮)를 행하다

우리나라 속언에 처를 취하는 일을 장가든다[入丈家]라고 하니, 곧 장가(丈家)는 처가이다. 그러니 장가든다는 것은 처가에 든다는 뜻이다.
유형원(柳馨遠)반계수록(磻溪隨錄)에 이르기를 사대부가 고루구간(固陋苟簡, 옛 습속에 젖어 예법 등이 야함)하여 서(婿, 사위)가 부()의 집에 가는 고로, 취처(娶妻, 아내 얻다)라 하지 않고, 입장가(入丈家, 장가들다)라 하였으니, 이는 양이 음을 따랐으므로, 남녀의 의를 크게 잃음이로다 운운하였다.
이렇게 조선의 남귀여가(男歸女家, 신랑이 신부의 집에 머물러 있음)의 풍속이 예로부터 내려왔으니, 고구려 때에 이미 그러하였고, 고려 때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고려 충혜왕(忠惠王) 4년 때(1343) 원나라의 어사대(御史臺)에 보낸 청파구동녀(請罷求童女)의 소()……아마도 그 풍속은 신랑으로 하여금 신부를 데려가게 하여야 할 터인데도, 신부를 내어 놓지 않으니 마치 진()의 데릴사위 풍습과 같아…… 운운하였다.
이 한마디로 그 어떠함이 증명된다.

조선에 와서 비로소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 있는 풍속을 바꾸어, 친영(親迎, 육례의 하나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함)의 예를 행한 다음 바로 신부를 신랑 집으로 보내게 하는 법을 지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삼봉집(三峯集)을 보면, 태조 때의 정도전(鄭道傳)이 이르기를 친영의 예를 행하지 않고, 남귀여가(男歸女家)하니, 아내된 이가 제 부모를 의지하여 지아비를 가볍게 여기지 아니한 자가 없고, 교투(驕妬)의 마음이 날로 자라서 졸지에 반복하게 되어 가도(家道)에 능체(陵替, 아랫사람이 윗사람보다 승하여, 윗사람의 권위가 떨어짐)가 생겼다고 하였다.

13장 수과(守寡)ㆍ수절(守節)

4. 미성혼녀(未成婚女)의 종신수과(終身守寡)

남에게 출가하여 아내가 된 다음 지아비가 죽으면 수절하니 절의이고도 절의이다., 그러나 천리의 당연한 도로 말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하물며 다만 혼약만 하고 불행히 성례도 못 한 채 신랑감이 죽어도 종신토록 수절하니 세상에 어찌 이런 우스운 절의가 있겠는가.
분 파는 늙은이는 숙종 임금 때 경성사람 모씨(某氏)의 사비(私婢)이니, 젊었을 때 용모가 고왔다. 이웃 사나이가 보고 반기며 붙잡으니 사절하며 이르기를 담장을 넘고, 담에 구멍을 뚫고 하는 그런 일은 아니되오. 우리 부모님께서 계시닌, 만일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우리 부모님에게 와 구하시오. 부모님께서 허락하시면 일은 다 되리라하였다. 이웃 사나이가 물러가 납폐를 갖추어 가지고 부모님을 뵈었으나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모하는 마음이 사무쳐 병이 되어 죽으니, 딸이 이 말을 듣고 울며 이르기를 이는 내가 그를 죽임이로다. 내 본디 그에게 몸을 적신 바 아니로되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매 그가 곧 죽은 바로다. 내 어찌 그 마음을 바꾸리오. 나를 그리워하다가 죽은 그를 등지고, 내가 남과 더불어 놀아나면 이는 곧 개돼지니라하며 스스로 시집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분 파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죽을 때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동계집(東溪集)
성가(聖歌)는 명종 때 촌가의 딸이니 정혼한 다음, 혼례를 올릴 기일 전에 지아비가 죽거늘 달리 출가하지 않고, 종신토록 소주 장사를 하며 살되, 소병(素屛, 글씨나 그림이 없이 흰 종이만 발라서 꾸민 병풍屛風. 흔히 궤연几筵에나 제사祭祀를 지낼 때 침.)으로 그 지아비의 신령 모양을 지어 작은 발을 걸어 놓고 조석으로 제사지냈으니, 교관(敎官) 권극기(權克己)가 열녀전에 수록하였다.

15장 조선여계(朝鮮女界)의 투부기담(妬婦奇談)

일설에 소동파(蘇東坡)가 황강(黃岡)에 살 때 진계상(陳季常)과 더불어 노닐었고, 뒤에 계상은 스스로 싫증이 나서 불문(佛門)에 들어가 참선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계상의 처 유씨(柳氏)는 표한(驃悍)하여, 손님이 가면 꾸짖는 소리를 내었다. 소동파가 글을 지어 이를 풍자하였다.

뉘라서 용구거사(龍丘居士)를 어질다 할꼬.
한가한 이야기로 잠 못 이루는 밤에
문득 하동사자(河東獅子)의 으르렁 소리 들리니
지팡이를 세우고 손을 떼나 마음 쓸쓸하구나

誰似龍丘居士賢 수사용구거사현
談空說有夜不眠 담공설유야불면
忽聞河東獅子吼 홀문하동사자후
柱杖落手心茫然 주장락수심망연

1. 판관사령(判官使令)
• ≪골계전(滑稽傳)한 대장이 있어 아내를 매우 두려워했다. 하루는 홍기(紅旗)ㆍ청기(靑旗)를 고을 밖에 세우고 외처자(畏妻子,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는 홍기 쪽에, 불외처자(不畏妻子,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청기 쪽에 모이라고 영을 내리었다. 다 홍기 쪽에 모였으되, 유독 한 사람이 청기 쪽에 가 있었다. 대장은 이를 장하다 하며, 묻기를 내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적과 싸워 이를 무찌르매 조금도 굴하지 않았는데, 집안에 들어가면 사은(私恩)한 마음에 기가 꺾이어 처가 두려워지거늘, 그대는 어떻게 하여 불외처(不畏妻)의 도를 닦았느뇨하였다. 그 군졸이 대답하되 저의 아내가 항상 나에게 경계하기를 세 사람만 모이면 반드시 여색 이야기를 하게 되니 가지 말라 하였습니다. 보니 홍기 쪽 아래에 사람이 심히 많이 모인지라 가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장이 기뻐하며 외처자(畏妻子)는 오직 이 늙은 것뿐만이 아니로구나하였다고 했다.
이능화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 속담에 지아비로서 아내에게 눌리어 지내는 자를 일컬어 판관사령(判官使令)이라 하니 대게 판관은 군수요, 사령은 관아의 역졸이다. 판관이 외처(畏妻)하여 어느 날 뭇 사령들을 모아놓고, 청기 홍기를 세워놓고 앞의 대장처럼 시켰다고 하여 이 이야기가 퍼져서 외처자를 판관사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 완백부인(完伯夫人)
옛날에 투기가 심한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의 지아비가 전라감사로 부임하자 따라서 임지로 갔다. 얼마 안 있어 감사가 수청기생(守廳妓生)을 둔 일을 탐지하고, 이를 막는 길을 생각하여, 감영의 수리(首吏)를 불러다가 명하여 이르기를 통인 중에서 가장 미남을 골라 오너라하였다. 수리가 물러가 감사에게 그 뜻을 아뢰었다. 감사가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미남을 데려다가 어디에다 쓰겠소하고 물었다. 부인이 공께서 곧 수청기(守廳妓)를 두어 종년행락(終年行樂)을 하면서, 어찌 저에게는 수청남(守廳男)을 허락지 아니하오라 하였다. 감사는 크게 놀라 기생을 물리고, 그의 처에게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22장 조선부녀의 노력동작(勞力動作)

1. 한예(韓濊)시대 여공일반(女紅一斑)

()는 누에치기를 알았으며, 또 무명을 짰다. 위지(魏志)
()에는 무명이 있다. 북사(北史)
옥저(沃沮)는 고구려의 속국이다. 고구려는 대가(大加)에게 조세의 일을 통책(統責)시키어 맥포어염(貊布魚鹽) 및 그 밖의 해중식물을 거두어 천릿길을 짐 지워 오게 하였다. 위지
변진(弁辰)은 폭이 넓은 무명을 짰다. 위지
진한(辰韓)은 누에치기를 잘 알고 있었다. 위지
마한 사람은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알고, 무명을 짜며, 진한은 비단을 짰다. 후한서(後漢書)
백잔왕(百殘王, 백제왕)이 남녀 1천 명과 가는 무명 1천 필을 바치고 돌아갔으며, 금후로도 내내 노객이 되겠노라 스스로 맹세했다. <고구려(高句麗)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23장 조선부녀의 지식계급

1. 사족부녀(士族婦女)의 유문식자(有文識者)

난설헌(蘭雪軒) 허씨(許氏)
허씨(許氏)는 호가 난설헌(蘭雪軒)이다. 선조 때 정자(正字김성립(金誠立)의 부인이요, 감사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딸이요, 허봉(許篈)ㆍ허성(許筬)ㆍ허균(許筠)의 매씨(妹氏)이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일곱 살에 글을 지었으니, 여신동이라 칭호되었다. 성미가 신선 같아 항상 화관을 쓰고, 향안(香案)과 마주 앉아 음풍(吟風)하며, 시사(詩詞)를 지었다.

이후재(李厚載)의 부인 조씨(趙氏)
조씨는 인조 때 이후재의 부인이니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의 딸이요, 창강(滄江) 조속(趙涑)의 자씨(姊氏)이다. 배움에 아주 잘 깨달았고, 마음씀과 행실이 단결(端潔)하였다. 다박머리 때부터 여훈(女訓)등 여러 서책에 널리 통하였고, 삼가 예를 행하여, 부모(父母) 구고(舅姑)를 효()로써 섬기었고, 여공(女工)에도 민첩하였으므로, 성미가 엄한 여러 어른들도 어진 며느리라 극찬하였다. 또 그 사려(思慮)함이 군자와 같아, 일을 당하면 반드시 꾀하여 잘 처결하였으므로, 시부모가 일찍이 가정을 맡기고 크게 기뻐하였다.

1. 사족부녀의 능해시사자(能解詩詞者)

창암(蒼巖) 김씨(金氏) 자경(自警)

덕과 인을 지녀야 사람이거늘
꽃비녀에 보배 찬다고 몸 편안하리?
연지분과 부귀영화가 두렵거니
위로는 왕장(王章)이 있고 아래로는 백성이 있도다

據德懷仁可謂人
거덕회인가위인
華簪寶貝莫安身 화잠보패막안신
脂豪榮祿吾還畏 지호영록오환외
上有王章下有民 상유왕장하유민

25장 조선의 열녀(烈女)

3. 백제 열녀

도미의 아내
도미(都彌, ?~?)는 백제 사람으로 비록 소민(小民) 출신이나 의리에 밝았다. 그의 아내는 미려하였고, 또 절행(節行)이 있어 그때 세인이 칭송하였다.
일찍이 개루왕(蓋婁王)이 이말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무릇 부인의 덕은 정결함을 으뜸으로 치나, 만약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꾀인다면 곧 마음을 아니 움직일 자가 적으리라하매, 이에 대답하기를 비록 죽을지언정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오리다하였다. 왕은 이를 시험하고자, 일을 꾸미어 도미를 머물게 한 다음, 가까운 한 신하에게 거짓으로 왕 차림을 시켜 말을 태워 도미의 집에 보내었다. 먼저 사람을 시키어 왕이 왔음을 알리고, 도미의 처에게 이르기를 내 오래 전부터 너의 아름다음을 듣고 좋아했는데, 도미와 내기를 하기를 하여 너를 얻었으므로 내일 너를 궁인(宮人)으로 데려가겠노라. 이제부터 너의 몸은 나의 것이니라하고, 막 음란하고자 하니, 도미의 아내가 이르기를 나랏님에게는 망령된 말씀이 없사오매, 내 감히 따르지 아니하리오?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입실하소서.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겠습니다하고 물러 나와 한 계집종을 치장시켜 들이었다.
뒤에 왕이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애매한 죄를 씌워 그의 두 눈을 뺀 다음, 사람을 시켜 그를 끌어내어 작은 배에 실어 강물 위에 띄워 놓고, 도미의 아내를 끌어다가 강압으로 음란하려 하자 도미의 아내가 이르기를 이제 양인(良人)을 이미 잃고 오직 한 몸이니 혼자서는 살지 못하는 터에, 항차 임금님을 모시게 되었사오니 어찌 어기리오까? 지금 경도로 온몸이 더러우니 청하옵건대 곱게 목욕한 다음에 날을 기가려 주시옵소서하였다. 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도미의 아내는 마침내 도망하여 강가에 이르렀으나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갑자기 조각배가 나타나서 물결을 따라오므로, 이를 갈아타고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지아비를 만났으니, 아직 죽지 않은지라,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같이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蒜山)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를 불쌍히 여기어 옷과 밥을 주니 드디어 살아나 기려(羈旅)의 고장에서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열전>

5. 고려 열녀

진주목 열녀 최씨
진주목(晉州牧) 열녀 최씨(崔氏)는 영암(靈巖) 사인(士人) 최인우(崔仁祐)의 딸로서 주호장(州戶長) 정비(鄭備)에게 시집갔다. 홍무(洪武) 기미에 외적이 진주를 침범하자 합경(闔境)이 어수선하였다. 이때 정비는 서울로 도망하였고, 적군은 마을로 들어왔다. 최씨는 서른이 좀 넘은 미인으로 네 아들을 데리고 바삐 산으로 피하였다. 나올 때 적과 마주치자 적이 칼로 위협하였다. 최는 나무를 껴안고 항거하며, 떨쳐 꾸짖기를 내 맞아 죽을지언정 도적에게 더럽히고 살소냐, 죽느니만 못하도다하며 계속 매도(罵倒)하니 마침내 이를 죽이어 나무 밑에 넘어뜨리고, 두 아들을 잡아갔다. 겨우 여섯 살 난 셋째 아들이 시체 옆에서 호곡(號哭)하였고, 기저귀를 찬 어린 아기가 기어가 어머니의 젖을 빠니, 피가 입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어린 아기도 죽었다. 이어 10년 기사에 도관찰사 장하(張夏)가 왕에게 아뢰어 마을에 정문을 세우도록 명을 내리고, 이역(吏役)들에게 그녀의 열()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이능화, 조선여속고, 東文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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