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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한국 사회 마지막 비전향 장기수를 기록하다” 민병래2022-11-18 09:15
Writer

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서문이제는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

2020년 봄, 나에게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 불쑥 다가왔다.
가까운 후배가 폐암을 앓고 계신 강담 선생님의 사연을 들려준 게 계기였다.

그때 나는 알았다.
2000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한다라는 합의를 맺었음에도 강제전향당했다는 이유로 제외된 분이 많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20년 넘게 ‘2차 송환을 요구했으나 노무현부터 문재인까지 모든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외면했으며 이제는 한 분씩 숨을 거둬 고작 10여 명 안팍이라는 사실을.

그때부터 나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송환을 바라는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
이들의 삶에 담긴 분단의 아픔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20205월에 시작해 20228월까지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 열한 분의 삶을 기록했다.

집필 과정은 어려움이 컸다.

대부분 아흔 안팎의 연세여서 당신의 기억이 분명치 않고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다.
또 이들의 삶에는 한국전쟁과 빨치산 투쟁, 남북 사이의 대치가 담겨 있기에 나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역사의 작은 증언집을 남긴다는 마음으로 부족함을 무릅썼다.

열한 분의 삶에서 공통되는 것은 감옥에서 혹독한 강제전향 고문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1차 송환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 기록된 비전향 장기수는 모두 국방경비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에서 30년 안팎을 감옥에서 지냈다.
0.75평이라는 발조차 편히 뻗을 수 없는 방, 천정은 높고 온기는 전혀 없어 겨울에는 영하 10, 아니 20도까지 곤두박질치는 차디찬 마루였다.
세끼 밥은 전구알 크기 정도의 밥덩이에 반찬이라곤 시들어 빠진 장아찌, 멀건 된장국이 전부였다.
오죽하면 생쥐를 잡아먹으며 버텼을 것인가.

이들은 감옥생활도 버거운데 사상전향을 강요받으며 고문까지 당했다.
교도소별로 전향공작반이 만들어져 극악한 고문이 행해졌다. 주먹질과 매타작은 기본이었다. 등을 바늘로 찌르거나, 겨울에 옷을 벗기고 찬물을 끼얹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래도 신념을 지키면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까지 버젓이 행해졌다.

출소한 이후에도 고통이 따랐다.
사상전향을 하지 않으면 사회안전법에 의해 법관의 판결 없이 징역과 다를 바 없는 보호처분을 받아야 했다.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된 이후에는 대체입법인 보안관찰법에 의해 사는 곳을 신고해야 하고 3개월마다 경찰서에 동향보고를 해야 했다.
인간의 기본권, 인간의 자유가 완전히 빼앗긴 삶이었다.

이들이 겪은 오랜 수형생활, 전향 공작을 당하며 겪은 고통, 사회안전법과 보안관찰법에 의한 감시는 너무나 혹독했다.
그들이 공작원이고 빨치산이고 적대 행위를 해서 단죄받아야 한다고 치더라도 이처럼 과중하게 삼중 사중으로 고통받게 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국제법은 전쟁포로라도 인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테러리스트라도 지은 죄만큼만 처벌받는 게 상례다.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지난 시절의 처우는 반인권, 반문명의 범죄행위였다.

게다가 전향 공작에 의해 강제전향을 당했다고 해서 20009월의 1차 송환에서 배제되었다.
2002년과 2004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강제전향은 고문에 의한 것이고 헌법에 반하는 것이기에 무효라고 선언했다.
또 강제전향에 맞서다 숨진 장기수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20년이 넘게 이들의 송환이 거부되고 있다.

강담, 박종린, 김교영, 오기태 네 분이 송환을 기다리다 눈을 감았고 지난 725일에는 이두화 선생도 눈을 감았다.
양원진 선생은 구순이 넘은 나이에 여러 번 응급실을 드나들며 죽음의 문턱을 오가고 있다.
나머지 분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 늦기 전에 고향에서, 가족의 품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2차 송환을 즉시 실행하는 게 인도적인 조치이고 정의로운 행동이다.

올해가 가기 전 판문점을 통한 ‘2차 송환이 이뤄지길 역사는 기다린다. 

김영식 내일 죽는다 해도 통일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전향 취소 선언을 하고 나서야 저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공작선의 무전수로 몇 차례 분계선을 넘나들다 1962329일 울산 해안가에 있는 야산에서 체포되었다.
196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영식의 징역 생활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방에서 정좌 자세를 조금이라도 풀면 교도관이 구둣발로 무릎을 짓이겼다.

하루하루가 힘든 징역 생활인데 1973년에 차원이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강제전향 공작이었다.
김영석이 끝내 거부하자 전향공작반과 교도소 내 폭력 전과자 이른바 떡봉이는 김영식에게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나중에는 집요하게 물고문을 자행했고 결국 김영식은 전향선언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도장을 찍은 이후 전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수치심에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죄책감에 넋이 빠져 살았고 출소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젠가 북으로 돌아갈 그날에 가족을 당당하게 보지 못할 생각을 하니 죽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김영식은 1차 송환에 끼지 못했다.
김영식은 200092, 공작선을 같이 탔던 조창손과 장병락이 북쪽으로 떠나는 것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스러웠다.
자신도 오겠거니 기다릴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듯했다.
내가 원해서 도장을 찍은 게 아닌데. 내가 원해서 전향을 한 게 아닌데.”

김영식이 20001118일에 양심선언을 한 것은 200092일의 1차 송환에서 탈락한 게 중요한 계기였다.
김영식은 1973년에 이루어진 전향은 고문에 의한 것이기에 부정한다며 이제 나도 인간이 되었습니다. 마음속 돌덩이를 이제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 전향무효 선언으로 박해를 받더라도 각오하고 맞서겠습니다라고 맺음말을 했다.
김영식 이전에도 용기를 내어 정순택과 유연철이 전향무효 선언을 했었다.
1999423일자 <한겨레>의 광고면을 통해서였는데 기자회견 같은 공개행사를 열어 밝힌 경우는 김영식이 처음이었다.

고문에 의해 이루어진 강제전향은 김영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다행히 국가기관인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강제전향은 위헌적인 사상전향제도에서 비롯된 국가의 위법행위이기에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는 결정을 내려, 이들의 응어리진 마음에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다.

198812월에 출소한 이후 김영식의 생활은 고달팠다.
머리빗을 만드는 공장에서, 돌가루를 만드는 공장에서, 지역 건설업체에서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일을 했다.
김영식은 출소 후 몸 고생 못지않게 돈 고생도 했다. 주위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기 이자도 받지 못하고 원금까지도 떼이기도 하였다.

고단한 삶에 안정과 평화가 온 것은, 서울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거주하던 장기수들이 1차 송환 때 북으로 가고 나서였다.
낙성대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 이는 정순덕, 정순택, 박희성 등이었다. 정순덕은 마지막 빨치산으로 유명한 여전사였고, 1921년생 정순택은 팔순이 넘은 큰형님 같은 분이었고, 박희성은 공작선을 타고 내려왔던 장기수였다.
김성식은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마당에 나무를 심고 화초를 심었다.
그가 나서부터 배운 것이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이었다.

김영식은 유실수도 심었다.
2006, 한겨레신문사에서 북에 사과나무 묘목 보내기 운동을 할 때 그는 전북 장수의 한 사과나무 농장에서 5만 원짜리 묘목을 사 김영식이란 이름표를 달아 동참했다.
그때 쓴 시가 한 편 있다.

서울에서 장수로 왔다. 사과나무 만나러
사과나무야 네가 평양으로 간다지
가면 무럭무럭 자라 북 어린이들 건강 보장하려무나
남에서 북으로 간 사과나무가
북 어린이 도와 평화의 마음이 솟아나게끔 하려나
남북 어린이 화합에 외세가 분단시킨 조국을 하나 되게 하려무나
통일 사과여 조국 통일이 빨리 오게끔 더 많이 열리기를 바란다

이제 열여섯 살 먹은 통일나무에는 가을에 제법 많은 열매가 열린다.

1933년생 김영식, 이제 그의 나이도 아흔을 바라본다.
다행히 남쪽에서 결연을 맺은 양아들과 손주 격인 아이 둘이 있다.
그들의 따뜻한 보살핌, 낙성대 만남의 집이 지닌 온기 덕분에 건강을 유지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바람은 오직 하나, 남북관계가 빨리 호전되어 고향에 가는 것뿐이다.
살아서 북에 올라가게 되면 김영식은 조그만 밤 농장을 일구려 한다.
밤 농사를 잘해 북녘 가족에겐 물론이고 남쪽 동포, 낙성대 식구들, 통일운동을 하는 젊은 청년들, 그리고 양아들과 손주에게 가을마다 밤을 보내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 과연 오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양희철 삼백 마리의 생쥐를 잡아먹고 지켜낸 사상의 자유

남도 북도 나의 조국입니다.”

늦가을로 접어들던 어느 날, 양희철은 밥풀 몇 알로 쥐 한 마리를 방으로 유인했다.
광주교도소 2029번 양희철은 그날부터 쥐 사냥선수가 되었다. 그는 동료 장기수에게 삼백 마리 넘게 잡아먹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장기수에게 징역의 고통은 배고픔만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좌익사범을 수십 년 혹은 무기징역으로 가두어 놓으면서 내면의 양심까지 탄압했다.
1968년 전주교도소에서의 끔찍한 헬리콥터 고문을 양희철은 버텼다. 그는 전향 공작이 마지막으로 극성을 부리던 19748월 광주교도소에서 여덟 번이나 생똥을 싸면서 사상의 자유를 지켜냈다고 기억한다.

통일 조국을 꿈꾸며 북으로 간 대학생
― 쥐 잡아먹으며 버틴 징역 37
생똥을 지리면서도 버텨 낸 전향 공작
감옥에서 익힌 침뜸으로 새로운 삶을 살다
먼저 간 장기수들의 묘소를 돌다

 

박종린 두 개의 나라, 두 번의 무기징역, 하나의 조국

아흔 살을 눈앞에 둔 이 몸을 제 고향 북녘땅으로 보내주세요,”

저는 1933년 중국 길림성 훈춘에서 태어나 해방되는 해에 함경도 경원으로 들어왔지요.
통신부대 소좌 시절인 1959년 남쪽에 내려왔다가 체포되어 지금까지 예서 살고 있으니 60년이 흘렀네요. 북녘땅에서 산 세월은 고작 15.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몇 배 많습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다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에 부끄럽지 않게
재소자 인권투쟁에 나서다
붉은별 사건으로 또 무기징역
좌절된 1차 송환
스친 듯 만난 딸 옥희, 눈물 속에 헤어지고
암이 갉아 먹는 몸으로 2차 송환을 기다리다
두 개의 나라 하나의 조국

2020년 구술 당시에 박종린 선생은 거의 모든 일과를 침대에서 보낼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양원진 신념을 지키고 정치적 삶을 완성하렵니다.

돌아보면 통일운동의 한길에 서 있던 삶입니다.”

내 이름은 양원진 올해 93세입니다.
한 해가 다르게 허리는 구부정하고 다리 힘은 빠져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충무로에 있는 조국통일민주연합사무실에 고문 자격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나가서 젊은 동지들을 만납니다. 또 낙성대 만남의 집에도 종종 들러 장기수 선생들과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 봄에는 제주 43 추모행사에도 다녀왔습니다. 밥도 곧잘 해 먹습니다. 돼지 등뼈에 배추김치 넣고 끓여 세끼 밥 거르지 않습니다. 죽는 날까지 내 발로 걸어 다닐 작정입니다.

 

박순자 이름이 셋인 여전사, 그녀의 마지막 소원 두 가지

지리산의 함성을 기억하고 또 기억합니다.”

박순자, 박수분, 설봉이라는 세 개의 이름을 지닌 박순자.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그에게 두 가지 소원이 있다. 첫 번째는 뇌성마비 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고 눈을 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

 

김교영 지리산의 빨치산에서 길음동의 여관 주인으로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평양행 기차를 탔던 것이 아직까지 죄스럽습니다.”

강담 고마운 아내에게 차마 얘기하지 못한 소원

고향으로 돌아가 남겨 놓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 싶습니다.”

박희성 분단으로이산가족이 된 건 매한가지인데

주민등록 뒷 번호는 10000000, 광주교도소 옛터가 본적지입니다.”

이광근 암호문과 무전기 대신 미싱을 잡다

아버지 환갑 때는 올 수 있겠지? 큰누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쟁쟁합니다.”

조상이 열아홉에 남으로 내려온 소년, 일흔 노인이 되었습니다

딱 한 번만 다시 가족이 둘러앉을 수 있다면

오기태 우리에게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아흔 살 저는 오늘도 대통령께 편지를 씁니다.”

 

민병래, 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원더박스, 2022

그들의 죽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가
평균 나이 90세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은 열 명 이하. 이들에겐 남은 시간이 없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존재다.
비전향 장기수.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이들을 잊고 있었다. 2000963명의 장기수가 송환된 이후 이 문제는 거기서 멈춰 버렸다. 돌아가지 못한 수십 명의 사람들을 남겨둔 채. 복잡한 정치적 계산 속에 22년의 간절한 기다림에도 송환의 길은 다시 열리지 않고, 세월이 흐르며 이들은 하나씩 숨을 거두고 있다. 그렇게 송환을 요구하는 이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방관은 해결이 아니다. 정의와 양심, 인권을 지키기 위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민병래 : 1960년 강원 출생. 생업에 종사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이다. 1998년부터 한글을 모르는 노인과 이주민을 상대로 문해교실과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푸른의 이사를 맡고 있다. 2016년 촛불 광장에서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다.
2020년 우연히 송환되지 못한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들을 찾아가 삶의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묶은 이 책이 더 늦기 전에 2차 송환의 물꼬를 트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저서로 호암미술관에 있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민병래의 사수만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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