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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독립운동열전 1, 2≫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러나 잊힌 사건,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 임경석2022-10-17 20:05
Writer

독립운동열전 1, 2≫

 

독립운동열전을 펴내면서∥ 

이 책은 한국의 독립을 위래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긴 시대에 살았던 한국 사람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이야기이지요. 그것은 제국주의 지배에 맞선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사입니다.
제국주의 열강의 폭압에 저항하여 비서구 약소민족들이 전개한 세계적 규모의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입니다.
투쟁에 나선 이들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영토와 인민을 분리시켜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운동사이기도 합니다.
1910년에 빼앗겼던 국가 주권을 되찾으려 했다는 뜻으로 보자면 광복운동입니다.
수백만의 민중이 참여하고 폭력을 온갖 방법으로 식민지 통치권력을 전복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혁명운동사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주의를 배제하거나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사회주의를 중시했습니다.
왜냐하면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 다수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191931운동 이후에는 특히 더 그랬습니다.
이런 이유로 독자 여러분은 이 책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주된 지위를 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특징이 있습니다.

무명의 헌신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독립운동사는 정의에 헌신했으되 잊혀져 버린 이름 없는 투사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31운동과 세계 대공황기 혁명운동과 같은 독립투쟁의 일대 고조기를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수십만, 수백만의 민중이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고 공동체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중의 헌신이 독립운동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지요.
이 책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형상화하고자 했습니다.
대의에 헌신했던 이름 없는 민중을 독립운동사의 주역 자리에 올려놓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주목했습니다.
지도적 지위에 있던 사람이나 영웅적 업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발굴하고자 했습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가 고초를 겪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눈길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던 어린 자식들, 남편 없이 홀로 어린 자식들을 키워야 했던 아내들, 자식을 잃은 노부모의 애타는 고통을, 해방된 조국에서 살고 있는 후대 사람들은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지도자나 저명인사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서는 그늘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를 발굴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공적인 업적을 보여주는 정보에 머물지 않고, 개인 신상이나 가족에 관한 정보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독립운동 열전 1-잊힌 사건을 찾아서

목차

독립운동 열전을 펴내면서
1장 망명
01_소년잡지 권두시의 비밀
02_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의 망명길
03_상하이 망명객들의 삶-심훈의 소설 동방의 애인

2장 김립 암살 사건
04_누가 독립운동가를 쏘았는가-김립 암살 사건 1
05_동지가 동지를 쐈다-김립 암살 사건 2
06_모스크바 지원금의 진실-김립 암살 사건 3
07_독립군 부대를 107개나 더 만들 수 있었다-김립 암살 사건 4

315만 원 사건
08_일제의 돈을 갖고 튀어라!-‘15만 원 사건’ 1
09_밀고로 스러진 무기 마련 꿈-‘15만 원 사건’ 2
10_의병투쟁의 거목 엄인섭의 두 얼굴-‘15만 원 사건’ 3

4장 의열투쟁
11_경성 천지를 뒤흔든 김상옥의 총격전
12_의열단 사건이 경이로운 이유
13_불발에 그친 의열단의 황포탄 의거
14_다나카 저격범 오성륜의 탈옥
15_혁명가로 키우려던 김익상의 딸은 어디로 갔는가

5장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16_독립지사 정순만과 개척리 살인 사건
17_개척리 살인 사건의 여파, 이상설ㆍ안창호 등돌리다
18_독립운동가 찍어낸 일본 비밀경찰, 기토 가쓰미
19_첫 번째 독립 정부 계획-대한광복군 정부와 권업회

6장 배신
20_역사에 정의는 있는가, 밀고자 오현주
21_임시정부 파괴공작에 나선 김달하
22_31운동 학생대표 김대우의 변절
23_젊은 여성 동지를 팔아넘긴 독고전
24_밀정이 된 독립운동가 김성근

7장 비밀결사
25_조직 살리려 안간힘 쓴 책임비서 김재봉
26_조선공산당 제2대 책임비서 강달영의 하루
27_비밀결사를 다시 일으킨 수배자, 권오설
28_‘혁명의 별을 새긴 강철 관에 잠든 채그리고리
29_공과 엇갈리는 제4대 책임비서 안광천

8장 옥중투쟁
30_법정에서도 당당히 항변했던 박헌영
31_고문에 희생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박길양
32_예방구금에 맞서 105일 단식투쟁으로 옥사한 이한빈

9장 국제주의
33_코민테른 특사 존 페퍼의 조선 여행
34_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발견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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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망명
01_소년잡지 권두시의 비밀

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마라


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마라.
나는 간다.
가기는 간다마는,
나의 가슴에 품긴 이상의 광명은 영겁무궁까지도 네가 그의 표상이로다.
 

잡지 소년19104월호에 실린 권두시이다.
19099월호부터 소년잡지는 바뀌었다. 청년학우회 결성에 참가한 최남선은 잡지 지면을 통해 청년학우회의 동향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청년학우회는 비밀결사 신민회의 표면 단체였다.
1910년에 접어들었다. 망국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양상이 뚜렸했다. 이를 저지하려던 비장한 시도들은 유혈의 탄압 속에서 시들어갔다.
그해 3월경이었다. 신민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망명이었다. 집단적으로 해외에 나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합의했다.
망명자들은 중국 산동반도에 위치한 칭다오(靑島)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독일의 조차지였기 때문이다.
신민회 인사들의 집단 망명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나라가 망한 뒤인 191012, 신민회 인사들의 국외 망명이 또 한 차례 집단적으로 조직됐다. 이번에는 압록강 건너 서간도로 정해졌다.
○ ≪소년잡지 권두시는 바로 신민회 망명자들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었다.
기약없이 망명길에 오르는 동지들을 바라보는 젊은 최남선의 가슴 속에서는 죄책과 비애감이 끓어올랐다.
그는 망명자들을 축복하는 두 편의 시를 썼다. <나라를 떠나는 슬픔><태백의 님을 이별함>이 그것이다.
태백은 조국을 가리키는 은유였다. 지금은 비록 이지러진 달처럼 조락하고 있지만, 시운이 닿으면 다시 둥근 보름달로 떠오르게 될 조국이었다.
피억압 민족에게 그것은 평화와 정의의 표상이었다.
권두시는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끝맺고 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봄은 오느니라.
제왕의 권력과 재화의 세력 밖에 있는 동군(東君, 태양신)은 때만 되면 오느니라.
무궁화 다시 피건 또다시 나 만나자.

 

2장 김립 암살 사건
07_독립군 부대를 107개나 더 만들 수 있었다-김립 암살 사건 4

김립 암살 사건은 일종의 국가폭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의 결정에 의거하여 경무국이 집행한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위해를 가져온 불행이었다.
임시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 명백한 과오를 범했다.
첫째,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입각해 있었다. 모스크바 자금 40만 금화 루블의 집행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속해 있었다.
둘째, 설혹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형벌의 집행 과정이 적법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계의 폭넓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졌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과오를 바로잡아야 한다.
진상이 규명되어야 하고, 망자에게 국가적 차원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
또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을 자임하는 한국 정부의 마땅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4장 의열투쟁
13_불발에 그친 의열단의 황포탄 의거

다나까 육군대장 저격 사건에 가담한 의열 투사들은 세 사람이었다.
아침 6, 춘분이 지난 지 며칠 안 된 때라 어둑어둑한 일출 무렵이었다.
세 사람은 혹여 언론 보도와 달리 기선 도착시간이 예정보다 몇 시간 앞당겨질 수 있었기에 아침 일찍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때부터 오후 3시 남짓까지, 일행은 무려 9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배가 언제 도착할까.
세 사람의 신경은 온통 거기에만 쏠렸다.

다갈색 중국옷을 착용한 오성륜이 첫 번째를 담당했다.
표적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권총을 사격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는 최적의 장소를 물색했다.
한구로(漢口路) 입구에서 강변 쪽을 향해 9~10미터쯤 떨어진 길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세관 마두의 검사소 출입구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2선은 김익상이 맡았다.
불행히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가 나설 터였다.
두 번째로 거사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는 한 손에는 폭탄을,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들었다.
갈색 코트가 무기를 은폐하는 데 제격이었다.
그는 부두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전화 박스 뒤에 자리를 잡았다.
3선 행위자로 약속한 이가 있었다.
바로 이종암이었다.
이도 저도 실패한다면 그가 나설 참이었다.
세 사람은 비밀결사 의열단의 동지였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이 실행하고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약속한 사람들이었다.

거사 이틀 전이었다.
1922326일 밤 10, 상하이 프랑스 조계 백이로(白爾路) 정운리(停雲里) 18호에 8명의 젊은이들이 둘러앉았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까닭은 죽기를 각오한 동지들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김익상은 남은 동지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합하라고 주문했다.
우리 정신을 관철하기 위해생사를 넘어서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욕된 운명에 속박되어 구차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끝으로 단장 김원봉에게 당부했다.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아내와 세 살짜리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15_혁명가로 키우려던 김익상의 딸은 어디로 갔는가

해방 후 귀국한 의열단장 김원봉은 김익상을 찾았다.
종적이 묘연했다.
대신 조카 김기복이 나타났다.
김원봉 선생께서 찾으시는 김익상 씨는 나의 아저씨입니다.”
그는 김익상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김익상이 일본 황태자 결혼, 천황 즉위 등을 계기로 하여 세 차례 감형을 받았고, 결국 13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1936년에 출옥했다는 이야기, 출옥 이후에도 예비검속과 요시찰 감시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 19418월에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과 조우하여 격투를 벌이다가 다시 수감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 등을 전해주었다.
김익상의 최후는 아마도 사상전향 및 예방구금제도의 시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422월에 공포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르면,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서 사상전향에 응하지 않는 자는 언제라도 다시 수감되어야만 했다.
딸은 어떻게 됐는가?
유감스럽게도 김기복은 김익상의 아내와 딸의 소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과연 김익상은 가족과 재회를 했던 것일까?
제 한 몸과 가족을 희생하여 피억압 동포의 해방을 꾀했던 한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유언은 끝내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던 것 같다.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
이 유언을 이행해야 할 사람은 이제 의열단장 김원봉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해방된 세상에 살고 있는 공동체 성원들이 마땅히 지키고 이행해야 할 도덕적 의무다.

6장 배신
21_임시정부 파괴공작에 나선 김달하

1925330일 김달하가 자택에서 피살됐다.
밀정 처형을 집행한 이는 반일 비밀결사 구성원인 이인홍과 이기환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의열단이라고도 하고 다물단이라고도 한다.
처형 장소는 베이징 북쪽 안정문 차련호동 서구내로 북문패 23호 김달하의 자택이었다.
처형 방법은 교살이었다.
김달하의 처형이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김달하가 일본 밀정이라는 증거가 김창숙의 발언 이외에는 더 없지 않은가.
최근 김달하가 독립운동가의 변절에 많은 공을 들였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발견됐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김복(金復)이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우쓰노미아 다로에게 보낸 편지가 발굴된 것이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상해임시정부는 200명이었으나 대부분 귀국하고 현재 남은 사람은 60명입니다. 이중 극렬분자는 40명에 이릅니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선 20~30만 엔이 필요합니다. …… 김달하와 함께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베이징에 모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갖고 있습니다. 활동비로 김달하에게는 3만 엔, 저에게는 2만 엔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에는 김달하가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훼절과 조선 귀환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는 점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던, 억울한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말끔히 가시는 기분이다.

7장 비밀결사
26_조선공산당 제2대 책임비서 강달영의 하루

강달영(40)은 수요일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했다.
1936317일 오전 10, 출근으로는 좀 늦은 시간이었다.
수표정 43번지, 오늘날 청계2가 교차로에서 3가 방향으로 남측 천변에 위치한 조선일보사 건물에 들어섰다.
그는 영업국의 촉탁으로 재직 중이었다.
촉탁이란 정식 사원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임시로 직무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연이틀이나 결근한 뒤였다.
그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책임비서가 몰입했던 업무 가운데 하나는 국제당과의 교신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한 바로 그날, 책임비서는 박민영을 만났다.
1주일째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한 뒤였다.
접촉이 쉽지 않은 까닭은 박민영이 국내에 잠입한 지 얼마 안 되어 비밀활동을 위한 거점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책임비서는 지난 며칠 동안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작성한 14종의 극비문서를 건넸다.
그날 오후 강달영은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화요회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 단체 명칭이고, 프락치야란 그 내부에 설치한 당원조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화요 프락치야 회의를 서둘러 소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바로 4개의 합법단체(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을 통합하여 하나의 단체로 개편하는 과제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35일 자 당중앙 집행위원회 석상에서 결정된 사안이었다.
김달영이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 직접 참석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사안을 그날 저녁에 개최한 당중앙 비서부 모임에서 비서부 차석인 이준태에게 보고받았다.
비서부는 당중앙 직속의 핵심부서로서 자신이 직접 이끌고 있었다.
이 회의가 하루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강달영의 어느 날 동선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비서부 일기> 덕분이다.
뒷날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때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암호 기록을 자신만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문경관 요시노 도조 경부보는 뼈가 돌이 되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겠다는 결심이 그의 몸에서 풍겼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살 기도를 몇 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암호 해독 기술이 알고리즘을 뚫었을 때,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그의 결심은 무너져 내렸다.
그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미쳐버렸다.
정신이상자가 되어 출옥 후에도 증상이 가시지 않은 채 쓸쓸히 지내다가 1940712, 향년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8장 옥중투쟁
31_예방구금에 맞서 105일 단식투쟁으로 옥사한 이한빈
이한빈은 사회주의자였다.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온, 장래가 촉망되는 간부급 인물이었다.
그가 서른 살 되던 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했고, 그 후 국내에 잠입하여 비밀결사운동에 종사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총독부 경성복심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출감예정일은 1942920일이었다.
당시는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이 갈수록 확대되던 극단의 시기였다.
만기를 채웠음에도 이한빈은 감옥 문을 나서지 못했다.
이른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른) 예방구금에 걸려든 탓이었다.
예방구금이란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관헌의 심증만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의 전력을 가진 사람을 수감할 수 있다는 행정처분이었다.
아무런 범죄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터무니없는 악법이었다.
이한빈은 항의에 나섰다.
194331일에 시작된 단식은 613일까지 (105일간) 계속됐다.
단식이 길어지면 체내 근육과 지방이 신진대사의 에너지원으로 대체되기 장기간 단식은 때문에 인간의 신체 조직을 파괴한다.
이한빈은 피골이 상접한 채로 숨을 거뒀다.

 

독립운동 열전 2-잊힌 인물을 찾아서
목차

독립운동 열전을 펴내면서

1장 김사국과 가족
01_‘혁명에 몸 바친 김사국ㆍ사민 형제
02_혁명과 사랑의 불꽃, 박원희

2장 김한
03_체포된 혁명가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04_동지 손에 꺾인 비운의 혁명가 김한

3장 김단야
05_31운동의 숨은 공로자, 김단야
06_민완 기자 김단야가 상하이에 특파된 까닭
07_경성 하늘에 적기가 나부끼다
08_스탈린 광기에 희생된 혁명가 김단야

4장 홍범도
09_귀순 공작에 맞선 홍범도 장군의 아내, 이씨 부인
10_양반 의병장에 꺾인 평민홍범도의 큰 뜻

5장 김창숙과 두 아들
11_김창숙의 편지로 본 망명객 심정
12_김창숙의 둘째, 민족해방의 제물이 되다
13_총을 든 유학자 김창숙

6장 박진순
14_‘동양의 레닌박진순의 소년 시절
15_청년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는가-박진순의 청년시대

7장 조훈
16_러시아 벌목장, 막일하는 사관생도들
17_조훈의 두 차례 국내 잠입 이유

8장 빨치산 대장들
18_아버지가 남긴 사진 4
19_박종근의 빨치산 활동
20_피살 51년 만에 발견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의 주인공
21_박영발, 빨치산이 되기까지
22_방준표의 청년시대
23_방준표, 입산하기 전에 무엇을 했나

9장 여성
24_한국의 로자’, 박헌영의 연인 주세죽
25_31운동기 여성의 투쟁과 수난의 상징, 김마리아
26_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 여의사 이덕요
27_종로 네거리가 좁았던 근우회의 책사, 박신우
28_‘여학생 만세 사건주인공, 송계월

10장 대중 속 지도자
29_이름 없는 이들도 쇠갈고리에 찢겼다-강용흘의 초당에 묘사된 31운동 풍경
30_인정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장재성
31_광주학생운동 전국 확산의 불쏘시개, 장석천
32_형무소에서도 세 개의 이름을 가졌던 농민운동가, 허성택
33_우물 속 주검을 둘러싼 교활한 각본-송하 살인 사건의 진실

11장 사회주의 개척자
34_레닌에게 면박당했다는 이동휘의 진실
35_상해파 공산당 쇠락엔 그의 죽음이 있었다, 최팔용
36_사생을 같이할 수 있는 동지, 홍도
37_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 청년 김규열
38_소련에서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천황 모해범, 김중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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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 독립운동열전 1, 2≫, 푸른역사, 2022

저자() 임경석 : 역사학자.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한국근대사 전공.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2017년부터 한겨레21임경석의 역사극장을 연재하고 있다. 구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의 한국 관련 자료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기록을 비교ㆍ검토하는 연구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2003), 이정 박헌영 일대기(2004),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의 기록(2008), 모스크바 밀사(2012) 등이 있다.

독립운동 열전 1-잊힌 사건을 찾아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그러나 잊힌 34꼭지에 담긴 독립운동 사건들

독립운동 열전 2-잊힌 인물을 찾아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러나 잊힌 38꼭지에 담긴 독립운동가들

*** ‘독립운동 열전 1-잊힌 사건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2-잊힌 인물을 찾아서 독립과 해방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인 인물들, 개인의 일신을 위해 그들을 배신했던 이름들,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찾아 떠난 책이다.
구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의 한국 관련 자료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기록을 비교ㆍ검토하는 연구에 힘을 기울여온 저자 임경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긴 시대에 살았던 한국 사람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이야기”(5) 중 기억되어야 함에도 잊힌 사건들을 34꼭지, 잊힌 인물들을 38꼭지에 담아 펼쳐 보인다.
저자는 특히 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주목한다. “지도적 지위에 있던 사람이나 영웅적 업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발굴”(7)한다. 또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게 주된 지위를 부여한다. 독립운동에 몸 바친 사람들 중 다수가 사회주의자였음에도 오랜 시간 그들이 공식적인 독립운동 역사서에서 배제되어왔음을 지적하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제외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저자의 이 같은 노력은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여러 독립운동 사건과 무명 독립운동가의 헌신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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