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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본의 남부조선 지배론 비판 ≪북한학자 조희성의 임나일본부 해부≫ 이덕일 주해2022-09-11 09:52
Writer

북한학자 조희성의 임나일본부 해부

 

머리말 _편집부

우리 민족은 인류려명기에 벌써 조선땅에서 대동강문화를 창조하고 단일민족의 혈통을 면면히 이어온 재능 있고 지혜로우며 긍지 높은 민족이다.
외세에 침략과 유린에 맞서 자기의 주권과 존엄을 지키고 인류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는데 기여한 조선민족의 높은 애국정신과 뛰어난 재능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이러한 자부심에 찬물을 끼얹으며 사이비학설을 근거로 조선민족을 예로부터 남의 식민지지배를 받아온 민족으로 깎아내리지 못해 모지름(모질음)을 쓰는 나라가 있다.
바로 일본이다.

조선민족이 자기의 민족문화를 창조하며 동방의 강성국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을 때 야만적인 원시단계에 머물러 있다가 조선문화의 도움으로 뒤늦게야 문명의 길로 들어선 일본은 배은스럽게도 식민지지배하였다는 얼토당토않은 설을 조작하고 그것을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고 야마토민족의 우월성을 론증하는 리론적 근거로 악용하는 류례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세상에는 200여 개의 나라들이 있지만 일본처럼 력사적 사실을 외곡하여 저들의 침략적 본성을 가리우고 타민족 말살을 위해 광분한 나라는 일찍이 없었다.
일본이 왜곡 조작하였고 오늘도 국민적 상식이니 뭐니 하며 고집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이비학설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명 임나설이라고도 한다.

군부의 적극적 뒷받침을 받은 일본 어용사가들은 가야가 멸망하면서 그 력사기록들이 많이 인멸된 것을 기화로 옛 문헌인 일본서기와 기록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면서 일본의 고대야마토국가가 조선의 가야지방, 나아가서 한강 이남 지역을 타고 앉아 식민지지배를 하였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일본에서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 한다)을 조작하였다.

그러나 력사는 누가 외곡한다고 하여 달라질 수 없으며 흑백은 갈라지기 마련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계에서는 해방 후부터 일본에 의해 외곡된 조선력사를 바로잡기 위한 사업을 꾸준히 벌려왔으며 이 과정에 <임나일본부>란 당초에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원래 일본렬도의 서부 기비 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규명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북한) 력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깊이 있고 과학적인 연구사업을 진행하여 <임나일본부>가 조선이 아니라, 일본렬도에 있었을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지도 어언 반세기, <임나일본부>의 위치를 확정하여 글을 발표한 지도 수십 년이 지났으나 일본학계는 그 정당성을 외면하고 있다.
한편 남조선과 해외의 일부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대로 구체적으로 까밝힌 우리 력사학자들의 글들이 나갔으나 반신반의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사편집부는 오랜 기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깊이 있고 과학적인 연구사업을 진행하여 <임나일본부>설의 허황성과 비과학성, 기비 임나설에 대하여 론증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인 교수, 박사 조희승 선생의 글을 도서로 편찬하여 내놓게 된다.
이 글은 어떠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되었고 그것이 가지는 해독적 후과와 문제의 심각성 등을 론하였으며 1980년대 중엽 <임나일본부>의 위치를 밝힌 론문이 발표되게 된 배경과 첫 론문 발표 무대가 된 고구려문화전국제토론회의 내용을 당시의 기록자료에 근거하여 서술하였다. 그리고 과학적인 내용과 함께 여러 일화들도 삽입하였다.

 

1장 가야력사 개관

가야국이란 1세기 중엽으로부터 6세기 중엽경까지 낙동강 하류류역 일대에 존재하였던 봉건국가를 말한다. 가야국을 가라국, 가락국(아야, 아라)이라고도 하였다.

이덕일 주해 삼국사기<가락국기>는 금관가야가 서기 42년 건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강당사학계는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 연맹체를 형성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를 입증하는 사료적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발명한 삼국사기삼국유사불신론에 따라서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21(서기77) 조는 신라의 아찬(阿飡)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입구에서 가야 군사와 싸워 1천여 급을 베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서기 1세기경 낙동강 유역에는 신라토기와는 다른 가야토기가 출토되고 있다.(안춘배, 가야토기와 그 영역 연구) 이런 문헌 및 고고학적 자료에도 남한 강단사학계는 가야는 3세기 중반에 건국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불신론은 남한 강단사학계에 일종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조선반도 중남부에서는 B.C. 12세기 이전부터 노예소유자국가인 진국이 존재하였다. 진국의 한 구성부분이였던 변한의 소국 구아-가야국과 아야(안아)국을 모체로 B.C. 1세기경에 봉건소국들이 형성되었다.

이덕일 주해 남한 강단사학계는 일본인 식민지사학자들의 삼국사기삼국유사불신론을 추종해서 3세기 때 가야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학자 중의 한 명인 김태식(홍익대 역사교육학과)신라와 가야의 개국 연대를 3세기 후반 정도로 늦추어 보아야 한다.”(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의 새경향>)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초기 기록들에 보이는 기사들은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뿐이다. 신라와 가야가 모두 3세기 후반에 건국되었으니 서기 77년에 가야와 신라가 싸웠다는 삼국사기기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주장이다.

가야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금관가야-경상남도 김해군 일대
아라가야-경상남도 함안군 일대
고령가야-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읍 일대
대가야-경상북도 고령군 일대
성산가야-경상북도 상주군 일대
소가야-경상남도 고성군 일대

가야는 보통 가라, 가락, 임나가라, 구야, 아야, 아라, 아나 등으로 부른다.
실학자 정다산은 자기의 저서 아방강역고변진고에서 가야의 국호가 에서 유래한다는 괄목할 견해를 제시하였다.

“‘()’은 가락이다. 가락은 가야이다. 조선풍속에 관책의 꼭대기에 삐죽이 나온 것을 변이라고 하며 또 가나라고 한다. 지금(조선봉건왕조 후반기) 금부의 노비들과 군현의 사노들은 아직도 꼭대기가 삐죽한 책(-모자)을 쓰며 이를 가나라고 부른다. 혹은 금가나(金駕那)라고도 한다.”

○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다음과 같이 가야의 령역을 밝히었다.

나라 경계는 동쪽이 황산강(락동강)이요, 서남쪽이 바다요, 서북쪽이 지리산이요, 동북쪽이 가야산이요, 남쪽은 나라 끝으로 되었다.”

<가락국기>의 이 기사는 6세기 가야의 마지막 시기의 축소된 판도를 반영한 것이다. 가야령역은 가야의 성장발전에서 얼마간의 류동이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우리나라 력사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가야국은 신라군의 대부대 공격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하였다.
관산성격전(554, 충북 옥천)으로 급속히 약화돤 대가야는 5629월 힘을 모아 신라에 반기를 들고 싸움을 걸었으나 이사부를 사령관으로 삼고 사다함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대군을 동원시켜 들이닥친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대가야의 멸망으로 우리나라 삼국 시기의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존재하였던 6가야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 존속기간은 소국 시기부터 계산하면 약 600년간이며 련합체 형성 이후부터는 약 500년 동안이었다.

그런데 <임나일본부>설의 제창자들은 자기의 자주적인 국권을 가지고 오래도록 존재한 가야국에 기내 야마또정권이 4세기 중말엽경으로부터 6세기 중엽 사이의 200년간이나 <미야케>(관가官家, 둔창屯倉, 향택鄕宅, 삼택三宅 등으로 쓴다)를 설치하고 식민지 지배하였던 것으로, <미야케>는 후세의 조선총독부와 근사한 정치적 성격과 권능을 가졌던 것으로 외곡 날조였던 것이다.

 

2<임나일본부>설의 조작과 실재여부

일본에서 말하는 <임나일본부>란 한마디로 말하여 고대 시기 기내 야마또(日本, 大和, 大倭)정권이 조선의 가야 지방에 설치하였다고 하는 식민지 통치기관을 말한다.
<임나일본부>를 일명 <야마또노미꼬또모찌> 혹은 <미마나미야께>라고 하는 것은 고대 시기 가야를 임나라고 부른 적이 있었으며 일본말로 <미마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미나나미야케>설이라는 것은 야마또정권이 조선의 가야 지방에 식민지 통치기관을 설치했으며 그것은 비단 가야에 머무르지 않고 백제, 신라까지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을 일본의 야마또 정권이 직접 지배하였다는 사이비학설이다.

황당무계한 <남부조선지배>론은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야마또정권의 임나출병이라는 일본서기의 기사에 토대하여 작성, 확정되었다.
<임나일본부>에 관한 문헌적 근거는 바로 이 일본서기가 유일무이한 것이다.
조선의 세 나라에 대하여 쓴 력사책들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또 당시 금석문들에게도 미야께에 대한 기록은 없다.
• ≪일본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없는 사실을 조작한 여기에 근대 일본의 죄행이 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불리는 불철저한 부르죠아 혁명과 더불어 조선 침략의 길에 나선 일본은 조선과 대륙침략의 구실로서 일본서기의 기사를 과대확장하여 그럴듯한 학설을 만들 것을 착안하였다.
이렇게 창출된 것이 <임나일본부>설이었다.

해외침략을 위한 직접적 담당자인 일본 륙군본부는 어떻게 하나 일본서기에 실린 기사 즉 조선을 고대일본이 식민지화하였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꾀하였다.
• ≪일본서기하나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났던 것이다.
이렇게 립증을 애쓰던 참에 마침 청일전쟁을 예견하여 조선과 중국 및 조만국경 일대에 파견하였던 10여 명의 현역군인 군사탐정(간첩) 가운데서 한 명이 광개토왕비의 비문탁본(쌍구본)을 가져왔다.
때는 1884년경이었다.

<동조동근>론은 장차 내선일체론으로 번져지게 될 사상적, 라론적 기초가 된 사이비학설이었다.
<동조동근>론에 임나일본부설이 깔려 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일제의 <동조동근>론과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임나설은 단순한 학계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였으며 제국주의 일본에 있어서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국시(國是, 國策)이였다.
20세기 초 일제에 의한 조선 강점이 현실화된 시점을 전후하여 <동조동근>론이 미친 듯이 선전되었다.
광기 어린 <동조동근>론의 앞장에 선 것이 바로 일본의 어용사가였다.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설의 기본중심은 기내 야마또정권의 출장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부의 존재이다.
따라서 경상남도 김해지방에서 일본부의 존재가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증명되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일본학자들의 말대로 한다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부가 설치된 곳은 가야 일대이기 때문이다.
바로 가야의 중심지가 김해이다. 이 김해 일대에 일본적(야마또적)인 유적 유물이 나타나면 쾌재를 올리고 만세를 부를 판이었다.
그러나 일은 일본인 학자들의 희망대로 쉽게 되지 않았다.

간악한 일본 어용사가들에 의하여 무참히 파괴되고 도적 맞힌 조선의 무수한 고분들과 역사유물들은 오늘도 후안무치한 력사 파괴자, 날강도로서의 일본의 죄행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있다.
야속하고 통탄한 일은 그때까지만 해도 온전하게 남았던 창녕 교동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의 방대한 고분들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란도질을 당하고도 글쪼각 하나 남기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발굴의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였던건가? <임나일본부>의 칡뿌리만 한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었는가?
대답은 간단하였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 땅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와서 조사에 떨쳐나섰던 고고학자, 력사가들은 당황하였다. 조사를 하느라 막대한 국록을 탕진해놓고도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
당시 도쿄제국대학을 대표한다는 력사학자인 구로이따는 김해 일대를 자세히 조사한 다음 임나일본부가 처음에 대가라 즉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지방에 있었던 것은 명백한데 그 자취는 이미 망하고 또 이것을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내가 실지 탐사한 결과로써는 혹은 김해 읍내로부터 마산 및 응천으로 나오는 도중 대체로 10(4km정도-인용자)쯤 떨어진 곳으로 짐작된다.”(갱정 국사의 연구각설 상)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3<임나일본부>설의 파탄

<임나일본부>설이 성립되자면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기내 야마또정권의 군사력이라는 것이 밝혀져야 한다.
왜냐하면 임나설의 기본 바탕, 기본 론거에는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기내 야마또정권의 군사력이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 론거가 허물어지는 경우 임나설도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거꾸로 말해서 이와 같은 대전제가 성립되자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들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첫째로 4세기 말에는 기내 야마또정권이 서부일본을 통일해있어야 한다.
둘째로, 백제칠지도가 백제의 공납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여야 한다.
셋째로, 에다 후나야마고분 출토 칼을 야마또정권이 하사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넷째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야마또정권의 왜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이덕일 주해 남한 강단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임나=가야설을 전파하면서 고고학 자료 및 문헌자료들을 들고 나온다. 남한 강단사학계는 칠지도 같이 민족적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자료는 제시하지 않는다. 남한 강단사학자들이 임나=가야설을 옹호하기 위해 찾아낸 자료는 대략 다섯 가지 정도다.
<광개토대왕릉비>임나가라종발성기사다. 이는 2면 하단에 있는데, 앞뒤로 다른 글자들은 대부분 지워졌는데, 이 글자와 ()’ ‘안라(安羅)’처럼 일본에 유리한 글자들만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일본군 참모본부가 지웠다는 의혹이 있다.
중국의 <한원> 신라조에, “<제서>에서 말하기를, ‘가라와 임나는 옛날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말했다는 부분이다. 이는 가라와 임나를 각각 다른 나라로 보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임나=가야설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③ ≪통전(通典)<동이 신라국> 조에 (신라의) 선조는 백제에 부속되어 있었다. 후에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사람들이 군역을 감당하지 못해서 서로 이끌고 귀순해서 비로소 강성해졌다. 그래서 가라ㆍ임나의 여러 나라들을 습격해서 멸망시켰다.”는 구절이다. 신라의 선조가 백제에 부속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나 백제인들이 고구려 정벌을 피해서 신라에 귀순해서 강성해졌다는 이야기들은 삼국사기의 삼국과는 다른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임나=가야의 논리가 될 수 없다.
<진경대사 탑비>대사의 휘는 심희이고 속성은 신김씨인데,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다. 초발의 성지가 항상 인병에게 괴로움을 당하여 우리나라(신라)에 투항했다. 원조는 홍무대왕이다.”라는 구절이다. 이웃나라의 괴롭힘을 당해서 신라에 귀순했다는 이야기는 신라와 가야 사이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야는 신라의 공격을 당하다가 신라에 항복하거나 망했지 이웃나라의 공격을 받다가 신라에 귀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는 일본 열도 내에 있었던 분국들 사이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⑤ ≪삼국사기<강수열전>(강수)은 본래 임나 가량 사람입니다.”라는 기사이다. 이것이 삼국사기전체에서 임나라는 용어가 나오는 딱 한 번의 사례다. 일본과 남한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대로 야마토왜가 가야를 정벌해서 임나를 설치해 200여 년간 지배했으면 삼국사기<백제본기><신라본기>임나라는 용어가 무수히 나와야 하지만 일체 나오지 않는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강수가 중원경(충주) 사람이란 이유로 임나를 충주로 비정했다. 안정복 때는 임나를 충주로 봐도 큰 문제가 없었다. 일제의 침략논리로 악용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강수가 조상이 임나 가량이라고 말한 것이 어느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남한 강단사학자들이 온갖 사료를 뒤져서 임나=가야라는 논리의 근거로 삼은 것이 모두 이 정도다. 단 하나도 임나=가야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남한 강단사학계는 요컨대 대가야를 중심으로 파악되는 5~6세기의 후기 가야연맹을, 왜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라고 견강부회하고 있다. 

1. 야마토 정권의 서부일본 통합시기

야마또정권의 서부통합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일본력사 발전의 기점을 밝히는 중요한 고리인 동시에 임나설의 성립여부를 규정하는 관건적 문제의 하나로 제기된다.
• ≪일본서기(계체기 21년조)에 의하더라도 쯔꾸시의 구니노미야쯔꼬(國造), 이와이(磐井)가 북부규슈의 전 령역에 걸쳐 야마또정권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구니노미야쯔꼬는 지방호족, 지방세력가이다. 이와이는 근 2년간에 걸쳐 야마또의 수만 대군과 결사전을 벌렸다.
때는 바로 527년 다시 말하여 6세기 전반기에도 규슈에는 기내 야마또정권의 통제하에 들어가지 않은 세력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와이의 반란을 계기로 쯔꾸시 동쪽지역은 야마또정권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래도 진왕국처럼 반독립적 상태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야마또정권에 의한 서부일본 통합은 빨리 보아도 이와이의 반란이 있었던 6세기 중엽 이후였으며 그 이전 시기는 4~10개국 정도의 소국 할거 상태에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광개토왕비는 고구려 24대왕인 광개토왕(374~412, 재위기간 391~427)의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공적비다.
릉비는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 우리나라 압록강 만포대안에 1,600여 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서 있다.
릉비는 응회암으로 만들어졌고 4각형 기둥모양을 이루었다. 6.34m 높이의 비석 4면에 총계 1,800자에 가까운 문자가 새겨져 있다.

릉비문 2단에는 광개토왕이 고구려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치고 영락 6(396)에는 또 수군을 령솔하여 출진해 백제의 58개 성을 함락시킨 기사가 나온다. 또한 영락 10(400)에는 신라를 구원하고 임나가라를 공격하여 남해안 일대까지 진출하였고, 영락 14(404)에는 왜가 대방지방(오늘의 황해도 일대)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를 무찔렀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일본학자들은 릉비에 나오는 왜를 기내 야마또정권으로 묘사하면서 “4세기 말 대방계선까지 진출하여 남하하는 강대한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릴 정도로 (왜가) 셌기 때문에 그때 당시 야마또정권이 임나(가야)를 지배해 있었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고 단정해왔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왜 기사가 나온다고 하여 그것이 곧 기내 야마또정권의 왜이라거나 왜가 김해지방을 지배했다는 근거로는 될 수 없다.
또한 일본학자들은 릉비에 나오는 왜 관계기사의 주어를 아전인수격으로 몽땅 왜로 보면서 고찰 서술해왔다.
일본학자들의 해석대로 한다면 력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얼핏 보기에 광개토왕릉비를 왜인이 세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지경이다.

필자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왜가 삼국사기박제상 렬전에 나오는 왜로 보면서 첫째로, 가야, 신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왜라는 것 다시 말하여 작은 배로 바다를 건너 쉽게 조선 땅에 가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는 것, 둘째로, 전일본적으로 기마전투무기가 가장 일찍이 출현하는 지역이였다는 것 즉 기마전투무기와 선진영농기술, 선진묘제(수혈계횡혈식석실무덤)의 첫 상륙지로 되는 지역이라는 것을 포착하고 그곳이 어디냐 하는 검토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기내 야마또정권은 그와 같은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과 이러한 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 바로 북규슈의 이또지마반도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또지마 가야소국의 군사력이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신라를 한편으로 하고 백제-가야, 왜를 한편으로 한 조선반도의 풍운의 력사에 말려 들어갔고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가 고국 가야 편에서 고구려, 신라와 싸운 왜였다고 보는 것은 공화국 력사학계의 새롭고 참신한 제기로서 이제는 정설로 되였다.

3. 백제 칠지도

<임나일본부>설에서 야마또정권이 남부조선을 4세기 후반경부터 식민지통치하였다는 론거의 하나가 다름 아닌 현재 나라현 이소노가미 신궁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 칠지도의 명문에 있다.
일본학자들은 백제왕이 왜왕을 위하여 제작한 것이며 복속의 증거로 공납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명문 자체는 그렇게 읽을 수 없다.

해방 후 일본학자들은 어떻게 하나 백제 칠지도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임나설에 맞게 해석하기 위해 고심참담하였다.
그래서 찾은 것이 간지를 끌어내리는 장난이였다.
• ≪일본서기신공 52(임신년)을 두 순(, 120) 끌어내리면 372년이 된다. 또한 후꾸야마는 칠지도의 년호가 태시(泰始)가 아니라 동진의 태화(太和)로 보면서 태화(泰和) 4년은 곧 369(기사년)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는 뜻이 서로 통하니 동진의 년호가 틀림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클태()를 생략해서 콩태()로 쓰일 경우는 간혹 있으나 반대로 획수가 적은 ’, ‘자를 획수가 많고 또 쓰기도 어려우며 새기기는 더더욱 어려운 자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만 보아도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또한 칠지도 상감문은 공상품이거나 헌납식 문투가 아니라 하행문(下行文) 즉 하사품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백제왕이 왜왕에 대한 신속의 표시로 바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4. 에다후나야마 고분

4세기 말 5세기 초에 야마또정권이 조선에 군대를 출병하자면 서부일본이 그의 통제하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5세기 초 규슈지방 호족들이 야마또정권에 복속해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가 구마모또현 다마나군에다 후나야마고분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은상감으로 66자의 명문이 새겨진 칼의 출토였다.(현재 도쿄국립박물관)
그런데 문제는 일본학자들이 이 칼의 명문을 자의대로 해석하면서 임나설을 립증할 자료로 써먹어 왔다는 데 있다.

력사적 사실은 야마또정권이 서부규슈에 있는 호족에게 칼을 하사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서부규슈와 가와찌 야마또의 피장자들에게 거울과 칼들을 하사해주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에다 후나야마고분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유물들에 대한 비교연구 등)5세기의 조일관계가 기내 야마또를 중심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를 축으로 움직여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야마또의 이른바 반정천황이 신하인 모대왕에게(자기에게) 복속했다는 표시로 칼을 하사하였다는 이른바 전통적 학설이 뒤집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5. 전방후원, 전방후방분

일본에는 고분이 10만 개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이 원분이나 방분이지만 류별나게 큰 것도 있으며 형태가 특이한 것도 있다. 형태가 특이한 것이 전방후원, 전방후방분이다.
전방후원분이란 앞이 모나고 뒤가 둥글게 생긴 분묘를 말한다.
바로 일본학자들은 이 전방후원, 전방후방분을 일본 고유의 것으로 단정하고 떠들어왔다.
심지어 그들은 그것을 절대화하던 나머지 조선에 있는 것까지도 무조건 일본 것이며 야마또정권의 군사적 진출의 증거라고 하였다.

전방후원, 전방후방분이란 원래가 조선의 고유한 묘제이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삼국시기 조선 무덤의 외형에서 기본이 원형과 방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네모난 제단을 단 것이 전방후원, 전방후방분인 것이다.
최근 시기 여러 기의 전방후원분이 남부조선 일대에서 확인되었다.
200010월 당시 전라남도 영산강 일대에서 여러 기의 전방후원분이 드러났다. ‘확인된 전방후원분만 해도 10여 기나 된다.
그중에는 영산강 류역의 전방후원분이 서부규슈의 전방후원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이상 임나설을 근거짓는 몇 가지 자료를 들어 그의 연구 형편 등에 대하여 보았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로써 일본학자들이 백년래 연구해왔다는 임나설이 얼마나 편향에 찬 독선적 연구였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본다.
임나설에 대한 우리 학계의 강한 비판에 의하여 일본고대사학계는 밑뿌리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이 디디고 서 있는 중요자료들은 임나설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조선 이주민들이 일본 땅으로 적극 진출한 힘 있는 발자취를 반영한 귀중한 반증자료들이였다.
그러므로 이 자료들에 기초하는 한 임나일본부설은 허공에 뜬 사이비학설이며 임나일본부는 옛 임나가라지방에 그 어떤 고고학적 유적 유물도 없는 허구이다.

 

4<임나일본부>는 기비지방에

1. 조일학술토론회

1986419일과 20, 그해 724일 평양의 인민대학습당과 인민문화궁전에서는 조일 두 나라 력사학자들의 학술토론회가 열리었다.
우리 공화국 측의 기본발언에서 발언자는 먼저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나오는 신라를 침범한 왜는 북규슈에 있는 왜 소국이며 그것은 곧 백제계통의 소국이였다는 데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어 일본서기에서, 야마또정권이 수차에 걸쳐 정벌했다고 하는 신라를 조선반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기비지방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야마또정권이 미야께를 두었다고 하는 미마나는 역시 서부일본 기비지방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맺었다.
필자는 서부일본의 기비지방에 가야(임나), 신라소국이 있었다는 것을 두 쯔꾸리야마 고분과 조선식 산성인 기노죠 및 일본서기기록을 들어 설명하였다. 덧붙여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왜의 위치에 대하여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론증하였다.

이덕일 주해 남한 일부 강단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직접 지지하기는 어려우니 외교기관설, 교역기관설 등의 성격논쟁으로 비켜가면서, 여전히 임나=가야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임나일본부>의 위치

필자는 일본서기에 실린 임나관계 기사들이 일정한 력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의 모든 기사들이 다 같이 허황하고 허구이며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한 문학작품에 불과하다면 그 밖의 과학적 분석을 가하여 얻어진 타당성 있는 력사적 사실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삼국사기>를 비롯한 조선과 중국자료 등과 부합되는 자료들, 고고학적 유적 유물과 일치하는 기사내용의 삽입 등은 우리들에게 임나기사 역시 일정한 력사적 사실의 반영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의 옳은 해결은 이러저러한 평가와 해석이 아니라 <임나일본부>가 어디에 설치되였겠는가 하는 위치를 확정하는데 문제의 핵, 초점이 있다.
요컨대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를 아무런 타당성과 근거 없는 조선 땅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일본 땅에서 찾는 여기에 굳게 닫겨진 <임나일본부> 해결의 열쇠가 있다.

기비 가야국과 가야씨

필자는 <임나일본부> 탐구에서 그 위치의 후보를 4개소 짚었다.
첫째, 가와찌 일대, 둘째, 기비 일대, 셋째, 이즈모 일대, 넷째, 규슈 일대.
이렇게 네 개 지구를 설정한 것은 서부일본에 가야국이 있었다는 확신에서였다.

필자의 자료연구에 의하면 상기 네 지구의 가야소국 지정후보 가운데서 가장 유리한 것이 기비지방이였다.
기비지방에 있던 가야고을은 본시 가야국이던 것이 645년의 <대화개신> 이후 국군(國郡)제도가 실시되면서 국(, 나라)의 격을 떨구어 군(, 고을)으로 되었다.
기비에 가야고을이 있었다는 기록은 많다.
• ≪일본서기말고도 금석문과 똑같은 사료적 가치를 가지는 목간(木簡)들에도 加夜(가야), 賀夜(가야)의 이름이 나오며(후지하라경, 평성궁터) 속일본기, 일본후기들에도 加陽(가요)의 한자로 나타난다.
가야고을은 1901(명치 34) 기비군이 처음 생기면서 고을로서의 그 이름은 없어졌다.
말하자면 20세기 초 고을명으로서의 가야가 없어지기 전까지 실로 1,500년이 넘도록 기비지방에는 가야의 이름이 고을명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가야고을은 숱한 가야마을들이 모여서 하나의 고을을 이루었고 나아가서 나라(소국)를 구성하였다.

기노죠산성과 우라

일본렬도 서부지구에는 일본사람들이 조선식 산성으로 부르는 고대 산성유적들이 있다.
기노죠산성을 포함해서 수십 개 산성을 조선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산성의 립지선택과 성벽축성법 및 수문구조가 아시아에서 유독 조선에만 고유한 방법으로 이룩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선식 산성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일본학자들이며 그것은 조선사람 이외는 쌓지 않은 성새시설이였기 때문이다.

조선식 산성의 본질은 조선이주민 집단이 축조한 군사방어시설이라는 데 있으며 그것은 나아가서 일본렬도 내 조선소국의 정치적 상징으로까지 되었다.
조선식 산성은 말 그대로 조선과 조선사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조선식 산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조선이주민집단(고분떼)이 살던 거주지가 존재한다.

<모모따로 전설>

죠도 일대에는 조선식 산성도 있다.
기노죠산성처럼 크지는 않지만 여러 기의 조선식 산성이 있다.
대다라(大多羅) 지명이 있는 언덕에 게시고산(芥子山)이 있는데 본래는 가라꼬산(韓子山)이라고 불렀다는 곳이다. 여기에 있는 기비쯔오까가라끼신사(吉備津岡幸木神社)의 가라끼는 본시 가라끼(韓城, 加羅城)에서 나왔다.

죠도(가미쯔미찌)에는 가라소국이 있었다.
이 소국이 가라라고 하는 것은 옛 기비군에 있던 가야소국과 달리 가라라는 지명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또 일본서기의 임나관계 기사와의 대비 속에서 그렇게 본 것이였다.
죠도고을 일대에 있던 옛 지명들과 산성, 고분들은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와의 대비고찰을 통하여 그 내용이 확증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정적인 것은 일본서기(10권 응신 229월조)국조본기에 실린 자료들에 기비 가야군(-임나)과 죠도군의 조상이 같다고 한 것이다. 가야노구니노미야쯔꼬(가야국)와 가미쯔미찌노미야쯔꼬(죠도국조)의 조상이 같다고 한 것이다.

기비 시라기(신라)

○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서 제일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신라이다. 동시에 중애천황의 안해 신공황후가 진행하였다는 <삼한정벌> 가운데서 중요 공격국 역시 신라였다.
력대 일본의 중진학자들이라고 하는 여러 학자들은 에누리 없이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신라를 조선의 신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과녁이 빗나갔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해당 기사들이 <삼국사기>(신라본기)를 비롯한 문헌자료와는 물론 물질적(고고학적) 자료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일 량국에 있는 자료들이 다소나마 비슷하게라도 맞아떨어지면 몰라도 완전히 차이나고 어긋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필고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신라를 조선이 아니라 일본렬도에서 찾게 한다.

그러면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신라소국은 어디에 있었던가.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기비 가야국과 린접한 지대에 있는 요시이강 동쪽에 위치한 오늘의 오꾸군 일대가 시라기-신라소국이였다.

기비의 나라를 구성하는 비젠국이 743(천평 15)에 중앙정부에 보고한 내용에 명백히 오꾸고을이 신라였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구사본기라는 옛 책에 의하면 오꾸 일대에 오오후꾸국을 두었다고 하였는데 <()>는 하꾸, 호꾸라고 음으로 읽었으나 본래는 희다는 뜻인 시라, 시로로서 고대시기에는 시라(희다)라고 읽었다.
말하자면 맏백()은 흰백()과 같거나 통하는 글자였다.
다시 말하여 백국(白國)이란 하꾸의 나라, 흰 나라, 시라(신라)의 나라라는 뜻이였다.

오꾸군 일대에는 신라계통 조선이주민집단인 하따씨 사람들이 수많이 정착하였고 하따를 비롯한 신라계통 지명들이 적지 않게 붙박혀 있다.
더욱이 조선(신라)계통 유적 유물들이 널리 분포되여 있다.
아무튼 오꾸군 일대가 고대시기에 신라라고 불리워지고 신라사람들이 수많이 정착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지명과 고고학적 유적 유물들이 증명해준다.

기비의 구다라(백제)와 고마(고구려)

기비지방에서 구다라(백제)소국과 고마(고구려)소국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고대시기에 있었던 조선소국의 발자취는 지명에, 고문헌에, 옛이야기에 반영되어 있지만 그것은 대개가 가리워지고 은폐되여 있으며 자기의 진 모습을 드러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 날 (지금도 그러하지만) 일본언론계와 사학계에서는 기비를 신비의 나라’, ‘수수께끼의 고대국가라고 불러왔다.

○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신라의 서북쪽에 구다라가 있다고 하면서 싸움이 잦은 것으로 기록되여 있다.
오늘의 아까이와군과 와께군 일대가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구다라(백제)소국이였다.
구다라소국의 존재는 여러 가지로 증명이 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구다라의 지명유래이다.
요시이강 류역인 오늘의 와깨군 기다야마가따 일대와 시오다라는 고장에 구다라라는 지명이 붙박혀 있다.

○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고마(고마-고구려)는 임나(가야)국의 위치에서 볼 때 북쪽에 있고 구다라와 시라기가 고마국의 남쪽 지척에 있었다.
공화국 학계가 가야국과 신라, 백제의 소국들을 기비지방에 정한 조건에서 고마소국 역시 가야나 구다라(백제)의 위쪽에 있어야 한다.

구메는 고마가 변화된 말이다. 어음적으로 볼 때도 구메=고마라는 것은 모음조화가 이루어져 그렇게 되었다고 일본의 어학자들은 말한다.

또한 구매군에는 고구려 관련 지명들이 수많이 존재한다.
실례로 기비 고마국의 남쪽 끝으로 볼 수 있는 미쯔군에는 고구려에서 나온 고려라는 지명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여 있다.
고구려 지명 유제는 고구려소국의 유제이기도 하다.
소국명으로서의 고마(구메)와 함께 고구려로서의 고려(고오라이) 지명은 명실공히 구매 일대가 고마-고구려소국이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임나일본부>의 정체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선의 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은 과학적 자료로써는 도저히 증명할 수 없는 억지 공사였다.
•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기비지방 임나가라에 설치된 야나마또정권의 전권대표격인 행정적 출장기관 또는 그 기관을 책임진 관리였다.
이것이 기내 야마또정권이 파견한 <임나일본부>의 실체이고 정체였다. 


해제-이덕일

남한 강단사학계의 딜레마
월북학자들을 중심으로 북한 역사학계가 형성되고,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납북되면서 남한 역사학계는 황국사관을 추종하던 식민사학자들이 다시 장악했다.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자국사를 깎아내리던 이병도ㆍ신석호 등이 주요 대학의 역사학과와 국사관(국사편찬위원회) 등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딜레마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와 달리 드러내놓고 황국사관을 옳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였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론, 본론, 결론이 다른 따로국밥 역사학을 탄생시켰다. 포장지와 내용물이 달랐다.
총론으로는 늘 식민사학을 비판하지만 각론은 횡설수설하다가 결론에서는 정확하게 종착역, 즉 조선총독부의 품에 안긴다.

각론, 본론 결론이 정반대인 따로국밥 역사학이 살아남는 정도를 넘어 지금껏 하나뿐인 정설로 행세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숙주는 바로 분단이었다.

조희승의 이 책은 남한 강단사학자들과 달리 서론 본론 결론이 같다.
조희승은 임나=가야설이 이른바 한국인과 일본인이 뿌리가 같고 조상도 같다는 동조동근론의 토대가 되었고, 이것이 후에는 내선일체론으로 약용되었다면서 이런 논리를 제창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실명과 그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도쿄제국대학과 만주철도 조사실 등이 임나=가야설조작에 조직적으로 나서서 고대일본의 남부조선지배설을 론증한답시고 쓴 이른바 대작이라는 것들을 출간했다면서 어중이떠중이 사이비 학자들의 학설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 책의 가치는 조희승이 임나의 위치를 오카야마현 키비라고 설정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키비가 임나라면 각축을 별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분국들도 그 근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희승은 임나와 가장 많은 각축을 벌였던 신라 분국의 위치에 대해서 기비 가야국과 린접한 지대에 있는 요시이강 동쪽에 위치한 오늘의 (오카야마현) 오쿠군 일대가 시라기-신라소국이였다.”라고 보고 있다.
또한 백제 분국은 오늘의 (오카야마현) 이카이와군(赤磐郡)과 와케군(和郡) 일대가 일본서기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구다라(백제) 소국이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기비 가야 소국이 있던 위쪽, 구다라 소국으로 밝혀진 아카이와군과 린접한 고을인 구메군을 고구려 분국이라고 보고 있다.
오카야마현에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는 물론 신라 백제 고구려 분국들이 모두 있었다는 것이다.

반민족사학에 맞서는 민족사학과 분단사학에 맞서는 통일사학의 체계를 세울 때가 되었다.” 이 길만이 현 분단 체제에 대한 우리들 마음속의 장벽을 허물고 통일된 내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희승 지음 이덕일 해제 역주, 북한학자 조희성의 임나일본부 해부, 도서출판 말, 2019

 

조선침략을 위해 일본군 참모본부가 창시한
임나일본부설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일본땅에 세운 가야의 분국
임나일본부에 관한 문헌적 근거는 일본서기가 유일무이한 것이다. 조선의 세 나라에 대하여 쓴 력사책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또 당시의 금석문에도 미야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없는 사실을 조작한 여기에 근대일본의 죄행이 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불리우는 불철저한 부르죠아 혁명과 더불어 조선 침략의 길에 나선 일본은 조선과 대륙 침략의 구실로서 력사학을 택하였다. 그들은 조선침략 구실의 리론적 근거로서 일본서기의 기사를 과대확장하여 그럴듯한 학설을 만들 것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창출된 것이 <임나일본부>설이였다. -조희승

일제식민사학은 크게 세 가지 논리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단군의 역사성을 말살하는 것이고, 둘째 한사군=한반도설이고 셋째 임나=가야설’, 즉 임나일본부설이다. 그간 남북 분단상황으로 북한의 역사학계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정리했는지는 남한 사회에 소개되지 않고 있었다. 2018년에 해역 출간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에서 북한은 1961년에 한사군=한반도설을 폐기했음을 밝혔다. 이 책 북한학자 조희성의 임나일본부 해부1963년 일본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북한학자 김석형의 분국설을 심층적으로 계승한 저서로서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북한학자들의 끈질긴 학문적 역정을 보여준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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