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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 ≪소치 허련≫ 조선 남종화의 마지막 불꽃 2022-09-06 21:20
Writer

소치 허련≫ 


책을 펴내며

소치 허련은 19세기 조선 사회를 그의 자서전 제목인 몽연록(夢緣錄)처럼 꿈같은 인연[夢緣]속에 한량으로 떠돌다 간 화가이다.
허련은 일생에 걸쳐 위로는 서울의 상층문화계부터, 아래로는 시골의 이름 없는 문사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교유하면서 19세기 조선 사회와 문화, 예술의 현장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다.
이처럼 삶에 있어서는 한량과 같은 면모를 보인 것과 달리, 그림에 있어서는 일생의 스승 김정희에게서 지도받은 사의적 남종화의 길을 구도자처럼 정진하였고 자신의 고향인 호남 지방에 이를 싹틔웠다.

자신의 믿음에 한결같음이 그의 인생을 살피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허련의 일생을 떠올리면 한량이자 구도자라는 상반된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허련은 단순한 화가로서보다는 시대의 치밀한 기록자 또는 증언자로 평가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이다.

허련은 그만큼 다양한 각도에서의 평가가 요구되는 인물인 것이다.

 

머리말 조선 말기 화단의 방랑자

가장 19세기적인 화가

19세기 조선 말기의 화단을 부초(浮草)처럼 주유(舟遊)하며 신분을 초월한 교유를 즐겼던 직업적 화가 허련(許鍊, 1808~1893)에 대한 평가야말로 복합적이고 다양하다.
허련은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는 후대에도 회자될 만큼 지극한 사제의 정을 보였고, 고관대작에게는 시문을 겸비한 화가로서 충실한 문객(門客)의 소임을 다했으며, 그중 몇몇 사람을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숱한 작품을 남기며 화가로서 명망을 누렸던 허련은, 가족에게는 불성실하고 권위적인 가장이었다.
수년간 집에 소식을 전하지도 않고 심지어 중혼(重婚)을 하기도 하였으며, 자식을 재주에 따라 편애하는 등 편벽된 성품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또한 생활인이나 작가로서 건실한 삶을 일궈 나가기보다, 잦은 여행과 교유로 점철된 음풍농월의 삶을 살았다.
이른바 현실적인 삶과 동떨어진 풍류객 또는 한량(閑良,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으로 일생을 보낸 것이다.

허련이 살다간 19세기는 전통시대의 마지막 세기로서, 그 시작은 정조의 죽음과 순조의 즉위(1800)에 의해 시작된다.
이는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이다.
조선 후기 문예의 부흥기로 불리는 영ㆍ정조 시대가 18세기로 마감되면서, 말기적 상황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19세기 초ㆍ중반은 조선 왕조가 쇠락의 기미를 보이고 세도정치의 폐해가 점차 드러났던 시기이다.
안으로는 홍경래의 난(1811), 진주민란(1862) 등 전국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이어졌으며, 잇단 가뭄과 홍수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국정 전반이 혼란한 시기였다.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진출이 가시화되어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성리학의 세계관 속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던 조선 왕조의 양반정치 체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위협에 직면한 위기의 시대였다.

명성과 신화

허련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궁벽한 섬에서 태어나 스승도 없이 그림을 독학하다가, 당대 최고의 학승(學僧)인 초의(草衣)의 추천을 받은 후, 역시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김정희에게 지도받게 된 과정 자체가 극적이다.

김정희의 지도를 받은 허련은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는 극찬을 들었고, 헌종을 배알하여 헌종이 직접 내린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국왕이 중앙의 이름난 화가도 아니고 도화서(圖畫署) 소속의 화원(畫員)도 아닌 지방 출신의 화가를 여러 차례 독대하고 직접 붓을 건네어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김정희의 극찬과 헌종의 애호를 통해 이룩된 명성은 그가 활동했던 19세기에 이미 신화가 되었다. 

1출생 유배지에서 태어난 화가

진도에서 태어나다

허련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인 진도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의 살기 좋은 섬으로, 완만한 산세에 땅이 기름져 옥주(沃州)라는 옛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진도의 여자들은 강인한 생활력으로, 남자들은 그림 잘 그리고 소리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섬에서는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남자들이 뱃일을 할 수밖에 없지만, 진도는 농사만으로도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했기에 예술적 취향을 발달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생을 두고 풍류 어린 삶을 지향한 허련의 한량기질이 진도라는 지역 특유의 풍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큰 무리는 아닐 듯싶다.

허련이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가운데 하나였던 진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궁벽한 섬에서 태어났기에 겪은 문화적 소외감은 허련이 중앙의 인정을 갈구하며 일생 동안 방랑에 가까운 주유를 지속한 원인이 되었다.
허련이 중앙으로부터 인정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는, 그의 방랑에 가까운 주유 경로가 서울과 호남 지방의 왕복에 국한되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일생은 궁벽한 유배지 출신으로 가졌던 사대문화 지향적 가치관문화적 소외 의식과 그 극복이라는 두 가지 전제를 염두에 둬야 할 필요가 있다.

2 입신 화가의 길에 들어서다.

대선사 초의

허련의 일생에서 28세 이전의 상황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자서전 격인 소치실록에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회화에 대한 주변의 인식 수준이 빈약한 가운데 허련에게 그림에 대한 인식과 기초적인 화법을 가르친 인물이 대선사(大禪師) 초의(草衣, 1786~1866)이다.

초의는 다도(茶道)로 유명하지만 불교는 물론 유학, 도교 등 여러 교학(敎學)에도 능한 조선 말기의 대선사이다.
허련은 초의 문하에서 3년여간 꾸준히 시학(詩學), 불경, 그림과 글씨 등을 연마했다.
그리하여 훗날 명사와 고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그들과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교양과 학식의 기본을 갖추게 되었다.

윤종민과 공재화첩

대흥사에 머물며 초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허련은 183528세에 해남 연동의 녹우당(錄雨堂)으로 가서 윤두서의 후손 윤종민(尹種敏)에게서 공재화첩을 빌렸다.
녹우당은 가사문학의 대가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고택이고 공재화첩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화첩이다.
• ≪공재화첩을 본 허련은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고, “나는 비로소 그림 그리는 데에 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토로하였다.
견문이 좁을 수밖에 없었던 허련이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로 꼽히는 윤두서의 그림을 본 후 일종의 개안(開眼)을 한 것이다.

꿈같은 인연의 시작

허련은 속된 말로 인복(人福)이 좋은 정도를 넘어 과분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김정희와 최고의 학승인 대선사 초의를 스승으로 모셨고, 조정의 고위 관료를 지냈던 권돈인(權敦仁), 무인이지만 학식이 깊어 유장(儒將)으로 불렸던 신헌(申櫶, 申觀浩로 개명) 등과 교유를 하고 윤두서의 후손 윤종민,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 정학유 등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위로는 헌종을 모시고 어연(御硯)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렸고 말년에는 흥선대원군을 만나 극찬을 들었으며 당대 최고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문중의 좌장 김흥근(金興根), 난초를 잘 그려 화가로도 유명한 민영익(閔泳翊)의 집에서 오래 유숙하기도 했다.
허련은 명사들과의 교유에 있어 집착에 가까운 정성을 보였다.

 

허련의 산수화

동아시아에서 산수화는 단지 산수를 그린 그림을 넘어, 인간이 자연에 대해 생각한 자연관과 우주관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따라서 산수화는 인물화나 풍속화, 새와 짐승을 그리는 영모화(翎毛畵) 등에 비해 그 중요성 면에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다.
허련의 작품 세계에 있어서도 산수화는 모란 그림과 함께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모란 그림은 당시 사회에서 요구했던 부귀라는 세속적 덕목에 부응하여 제작한 것이었으나, 산수화는 스승 김정희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 평생 몰두한 남종화법의 실체라는 점을 전제하고 보아야 한다.

 

3 추사 당대 최고의 인물을 스승으로 모시다

서화 수업

어느 날 김정희는 허련에게 자신의 회화관과 허련의 지향점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길[화도(畵道)]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 자네는 그림에 있어서 이미 화격을 체득했다고 생각하는가? 자네가 처음 배운 것은 공재 윤두서의 화첩인 줄 아네. 우리나라에서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곧 공재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네. 그러나 신운(神韻)의 경지는 결핍되었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이 모두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화첩에 전하는 것은 한갓 안목만 혼란하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지 않도록 하게. 자네는 화가의 삼매(三昧)에 있어서 천리 길에 겨우 세 걸음을 옮겨놓은 것과 같네.

 

김정희의 제주 유배

허련은 김정희의 유배지 대정에서 그림과 글씨를 연마했다.
스승의 고난이 제자의 예술적 성장에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허련은 참으로 귀한 이 수련 기간을 헌종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술회하였다.

저는 추사 선생의 적소(謫所, 귀양지)에 계속 함께 있으면서 그림 그리기, 시 읊기, 글씨 연습 등의 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

허련의 특장이 산수와 모란에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허련은 많지 않은 수효이지만 인물화도 남겼다.
전신상과 반신상으로 된 김정희 초상 두 점은 김정희의 높은 인품과 학식을 그대로 담은 걸작으로 유명하다.
두 점의 초상화는 조선 말기 인물화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군의 기량과 작품성을 보여준다.

허련이 그린 김정희의 초상은 모두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전신상인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동파입극상(東坡笠屐像)>을 방()한 것이므로 김정희가 제주도 대정에 유배되었을 때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동파입극상>은 송나라 원우연간(元祐年間, 1086~1094)에 중국 최남단의 섬 해남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소식(蘇軾), 어느 날 갑자기 내린 폭우를 피하기 위하여 삿갓[()]과 나막신[())]을 빌려 신은 채 도포를 걷어 올리고 진흙탕을 피해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허련의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은 제주에 유배되어 고초를 겪는 김정희와 해남도 바닷가로 귀양 가서 고생하는 소식을 겨누어 그린 것이다. 

4 몽연 꿈같은 인연의 연속

용상 앞에서 그림을 그리다

허련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고 영광스러운 시기는 1849(헌종 15),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해에 허련은 다섯 달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헌종을 배알(拜謁)하고 헌종이 손수 준 붓을 받아 어연(御硯)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는 등 일개 화가로서 상상할 수 없는 영예를 누렸다.
김정희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온 지 꼭 10년 만에 인생 최고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허련은 당시를 회상하고 이렇게 회상했다.

상감께서는 기쁜 빛을 띠며 가까이 와 앉으라 하시고는, 좌우에 있는 사람을 시켜 벼룻집[연갑(硯匣)]을 열어 먹을 갈라고 분부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손수 양털로 된 붓 두 자루를 쥐고 붓 뚜껑을 빼어 보이며, ‘이것이 좋은가, 아니면 저것이 좋은가 마음대로 취하라고 하시었습니다. () 또 평상(平床)을 가져다 놓으시라 하시오나, 운필하기에 불편하다고 아뢰니 곧 서상을 거두라고 하시고는 당선(唐扇) 한 자루를 내어놓고 손가락 끝[지두(指頭)]으로 그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는 바로 매화를 손가락 끝으로 그리고 화제(畵題)를 썼습니다. 

5 화업 예술의 정점에 오르다

낙향과 운림산방

허련이 정착한 이래 진도의 운림산방은 허련 개인의 거처라는 의미를 넘어 호남 회화의 상징적 장소 또는 호남 남종화의 성지로 불리게 되었다.
운림산방이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에 지방 출신으로 유일하게 중앙의 서화계에서 인정받고,다시 지방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유일한 화가인 허련 회화의 존재감을 알리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후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호남의 그림과 미술 문화를 논할 적에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곳이 운림산방이 되었다.
운림산방 내 연못의 작은 섬에는 허련이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 배롱나무[木百日紅]가 여름이면 붉은 꽃을 피운다.

소치실록

허련은 1865년 겨울에 전북 임피로 이사하였다가 햇수로 3년 만인 18675월에 배를 타고 귀향하였다.
그리고 자서전격인 소치실록정묘(丁卯, 1867) 납월(臘月, 12) 상한(上澣, 상순) 운림각(雲林閣, 운림산방)에서 저술을 마쳤다.
원 제목을 몽연록(夢緣錄)에서 소치실록(小癡實錄)으로 했다가 다시 소치실기(小癡實記)로 바꾸었기 때문에 소치실기로 표기해야 하지만, 일반에 알려진 명칭은 소치실록이다.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다사다난했던 내용을 기록한 소치실록은 전통시대 화가의 자서전으로는 유일하다.

호로첩

허련은 소치실록을 저술한 다음 해인 1868(61)호로첩(胡蘆帖)을 그렸다.
• ≪호로첩은 허련이 중국 대가들의 작품 및 조선의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여 만든 화첩으로 총 29점의 그림과 3점의 글씨로 되어 있다.
호로는 호리병박이므로 호로첩의 의미는 신선이 호리병을 달고 다니는 것을 흉내 내는 것처럼, 명작들을 모사하여 그린 것으로 풀이된다.

선면산수도

<선면산수도>에서 허련은 변형된 거친 피마준법(披麻皴法)을 특유의 마른 붓[건필(乾筆)]으로 구사하였고 전반적인 구도와 배치는 오파(吳派)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은거도(隱居圖) 계열을 따랐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면산수도>는 이와 같은 허련 특유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노년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목모란 허모란

모란은 허모란[許牧丹]이라고 불리게 할 정도로 그를 유명하게 한 화목이다.
모란은 중국인들에게 꽃 중의 왕[花王]’, 부와 명예의 꽃[富貴花]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사랑과 연모의 문장이며, 여성적 미의 상징이다.
또한 봄을 상징하며, ‘행운의 징조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며, 연꽃, 국화와 더불어 널리 애호되는 꽃 가운데 하나였다.
허련이 모란, 특히 묵모란으로 유명해진 것은 신분제 사회가 와해되어 가는 과정에서 부귀를 갈망했던 당시의 사회 풍조를 반영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묵모란은 허련이 중년 이후 이곳저곳을 주유할 때에 지방관과 지방 유지들의 계속된 주문에 따라 수월하게 그려줄 수 있었던 소재였기에 많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6전락 황혼의 비애

완당탁묵

70세에 접어든 1877(고종 13) 3, 전라북도 남원시 선원사(禪院寺)에 머물던 허련은 선원사와 교룡산성을 오가며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하여 완당탁묵(阮堂拓墨)추사탁본첩을 만들었다.
허련이 70세에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한 것은 60세에 소치실록을 지은 것과 비견할 만하다.
• ≪소치실록이 환갑을 앞두고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것이라면 추사의 글씨를 판각한 완당탁묵추사탁본첩은 고희에 접어들며 스승을 되새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완당탁묵으로 대표되는 추사탁본첩의 제작 동기는 스승을 기리기 위한 제자 허련의 정성이 일차적이지만, 만년의 경제적 어려움에서 비롯된 측면도 컸다.
허련은 속연록에서 선원사와 교룡산성에 머무는 동안 서화를 팔아 여비를 충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허련이 노년으로 갈수록 점차 직면하게 된 경제적 어려움은 여러 기록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금강산과 노치묵존

허련의 붓이 만년에 들어서도 결코 무디어지지 않았음은, 그가 71세에 그린 <금강산도>80세에 그린 노치묵존(老癡墨存)을 통해 알 수 있다.
<금강산도>71세에 금강산과 평안도 일대를 유람하려 했지만 가지 못하고, 대신 견향대사(見香大師, 견향 윤우)에게 금강산을 상상해서 그려준 그림이다.
• ≪노치묵존에 실린 네 작품은 모두 미법산수(米法山水) 또는 예찬식 산수화로서 허련이 평생 추구한 남종화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부초

허련은 그의 나이 72세 때인 1879(고종 16) 220일 민영익의 집에 머물다 귀향을 허락받고 남대문을 나섰다.
일생 동안 정착을 못 하고 떠돌던 허련도 이제 고향과 가족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한데 남대문을 나서자 그의 시중을 들던 김예담이 사라져 버린다.
왕년의 명성이 사라져 버린, 그래서 모시고 다녀 본들 별 볼 일 없는 신세로 전락한 허련의 노년은 이렇게 적막했다.

엄동설한을 뚫고 홀로 길을 떠난 그의 발걸음은 허랑했다.
남대문을 나와 줄곧 걸어 충청북도 문의현에 도착한 허련은 10여 일을 머문 후, 다시 공주로 가서 충청감영의 객사(客舍)에 묵으며 그림을 그려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그려 주었다고 회고했다.
대내를 출입하며 국왕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최고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날리던 화가가, 이렇듯 초라하고 옹색한 떠돌이 화가로 전락한 것이다.

노년에 접어들수록 허련은 점점 더 지방관이나 지방유지, 무명의 문사들과의 교유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의 행동반경은 갈수록 협소해졌고 경제적 곤란은 그의 여정을 더욱 정처 없게 했으며 행색 또한 초라해져만 갔다.
그의 자부심은 여전하지만 화려했던 과거와 남루한 현실은 갈수록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맺은말 예향의 원조

허련 회화의 의미

중국 남종화를 표준으로 삼았던 김정희가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을 모범으로 하여 18세기 이후 조선 화단의 주요 흐름 중 하나였던 진경산수화풍을 비판하였다면, 허련은 김정희 회화에 대한 인식과 화풍을 그대로 호남 지방으로 파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서울 화단의 중국 지향적 경향과 그 지방적 반영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허련의 활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허련의 회화 세계는 지금도 전해지는 많은 작품과 후손ㆍ후학 등에 의하여 현대 호남의 한국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김상엽, 소치 허련, 돌베개, 2008

저자 김상엽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동의보감 편찬의 역사적 배경과 의학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 원고를 바탕으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일지사, 2000)를 출간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책임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조선 과학인들 열전등 여러 권의 책을 썼으며, <조선 후기 왕실의 출산 풍경>, <18세기 후반의 서울의 의료 생활> 등 조선 시대 생활사 및 과학기술 분야의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지금은 경인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남종화 : 중국 명말(明末)의 막시룡(莫是龍), 동기창(董其昌, 1555~1636), 진계유(陳繼儒)가 제시한 남북종론에서 나온 북종화에 대립되는 개념의 산수화 양식.
문인들이나 사대부가 주류를 이루는 문인화와 혼용되어 남종문인화라고도 부르는데, 대개 남종화는 산수화를 의미하고 문인화는 산수화 외에 사군자, 화조화 등 좀더 넓은 범위를 가리킨다.
남종화의 계보는 당나라의 왕유(王維, 699~759)를 시조로 하여 오대송초(五代宋初)의 동원(董源)과 거연(巨然)을 거쳐 미불(米芾, 1051~1107), 미우인(米友仁), 실질적 개조(開祖)인 황공망(黃公望, 1269-1354), 예찬(倪瓚, 1301- 1374), 왕몽(王蒙), 오진(吳鎭) 그리고 명대(明代)의 심주(沈周, 1427~1509), 문징명(文徵明, 1470~1559)과 예림백세(藝林百世)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동기창 등으로 이어진다.
화풍상의 특징은 수묵선염을 주로 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하였다. 준법(皴法)도 비교적 부드럽고 우아한 피마준(披麻皴), 미점(米點) 등을 자주 사용하고 발묵(渤墨)과 파묵(破墨)을 애용하여 운치 있는 산수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초부터 부분적으로 유입되다가 후기부터 크게 유행하여 조선화단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러나 남북종론은 문인화와의 모호한 구분과 회화 양식에 대한 편협적인 가치평가로 인해 현재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종화(南宗畵)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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