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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망국의 근원, 고종의 실체를 고발한다” ≪매국노 고종 賣國奴 高宗≫-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도자-박종인2022-09-01 09:23
Writer

망국의 근원, 고종의 실체를 고발한다매국노 고종 賣國奴 高宗

 

|서문| 누가 고종을 변호하는가

국가 지도자의 존재 이유-부국강병

국가의 목표는 국민의 행복이다.
국민 행복을 위한 두 가지 수단은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이다.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인다. 국가가 독점한 폭력을 사용해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
다른 수단은 부차적이다.

조선은 국가였나.
고종은 그 국가의 지도자였나.
실질적으로 조선왕국 최후 지도자로서 그는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는가.
앞으로 부국과 강병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고종의 행적을 알아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 고종은 매국노다.
부국을 하는 대신 자기 금고를 채웠고, 강병을 하는 대신 강병에 투입할 국가 자원을 개인 호기심과 탐욕을 채우는 데 소모했다.

누가 매국노를 변호하는가

누가 고종을 변호하는가.
아니 변호도 모자라 누가 고종을 자주독립을 염원한 개혁군주라고 찬양하는가.
고종 정권은 냉정하게 직시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느냐의 싸움을 할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구한말에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고, 그 근대화에 뒤처진 것도 고종 때문이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혀를 찰 정도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것도 고종 때문이다.

고종은 만악의 근원이다.
그때까지 조선왕조 400년이 병약하게 흘러왔지만, 그 병색을 걷고 그나마 회복될 수 있었던 기회를 고종은 다 발로 차 버렸다. 오로지 자기 목숨과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버렸다.
그러니 고종은 매국노다.
고종이 매국노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조작된 신화가 신앙으로 변하고 종교로 변해 사실로 굳어지기 전에 조작은 폭로돼야 한다.

 

1부 장성(長城) 1864~1873

1장 아버지, 장성(長城)을 쌓다.

대원군의 갑자유신(1864~1873)

흥선대원군의 개혁, 갑자유신
세금제도, 탐관오리 처단, 군사력 강화와 세도정치 혁파.
고종 등극 이듬해인 1864년부터 1873년까지 흥선대원군이 벌인 정치를 보면 왜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게 됐는지 이유가 명확하게 보인다.
정조 사후 64년 동안 이어진 노론 독재와 세도정치 모순을 대원군이 전방위적으로 제거해 버린 것이다.
10년 동안 대원군이 폭풍이 몰아치듯 벌인 개혁정책을 갑자유신이라고 한다.

2장 아들, 장성을 부수다.

고종의 친정 선언(1873)

노론의 깊은 뜻
고종을 위한 주장은 절대 아니었다.
최익현은 노론 해체를 일관되게 주장하는 대원군에 맞설 동맹군으로서 고종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심저에는 조선 국왕은 사대부들이 명나라 천자를 섬기는 통로인 제후에 불과하다는 교조적인 사대주의가 깔려 있었다.

결별
하룻밤 만에 지축(地軸)이 각도를 바꿨다.
대신들이 윽박지르거나 고집을 피우면 뜻을 굽히는 만만한 왕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1221일 고종이 명을 내렸다.

오늘은 대원군 생신이니 도승지로 하여금 문안을 올리고 오게 하라.”

끝이었다.
왕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단 대원군은 몰락해버렸다.

 

2부 출항하는 유령선 1873~1882

3장 병정놀이

고종 친위부대 무위소와 사라진 진무영

고종을 위한, 고종의 군사
고종은 그 무위소에 필요한 경비는 아낌없이 지원했다.
1874년 신설된 무위소 병력에 필요한 군모와 군복, 주거지 지원은 호조의 1순위 업무였다.
18766월 군기시(무기고) 병력에게 지급할 갑옷 8부 가운데 2벌은 무위소에 지급했다.
군기시는 선혜청으로부터 갑옷과 투구 구입비용을 빌려 이를 메꿨다.
부국을 2차 순위로 돌리더라도, 강병은 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고종이 만든 무위소는 A부터 Z까지 고종을 위한, 고종의 병력이었다.
그 병력을 메꾸기 위해 중앙과 지방군은 군복을 살 돈이 없어서 헤매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강병이 될 리가 만무했다.
대원군이 구축해놓은 지방과 중앙 군사는 급속도로 위축해갔다.

18758월 일본 군함의 포격
821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포격했다.
일본이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에 당했던 그대로 포를 쏘며 조선의 개국을 강요한 것이다.
세계 제일 프랑스 함대와 혈전을 벌이고(1866년 병인양요) 신흥 무적함대인 미군 해병대와 사생결단을 벌였던(1871년 신미양요) 강화도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짜리 군함에 궤멸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일본측 보고를 받는 어전회의에서, 고종 면전에서, 관중추부사 박규수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안으로 나라를 굳건히 다스리고 밖으로 힘을 키울 정책을 다했다면 부국강병을 이루었을 터이다. 어찌 감히 서울을 넘보며 방자하게 굴게 되기에 이르렀는가? 분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 없다.”

불행하게도 친정 직후 병권 장악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던 고종의 야심은 망국 직전까지 일관되게 발산됐다.
대원군의 그림자를 다 지워버리려는 첫 발자국은 군사 개편이었고, 그 작업은 끝까지 유지됐다.
매천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때 대원군이 설치한 것은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모두 개혁하였다.”

 

3부 조선을 고물로 만들다 1882~1894

6이미 주상께 5만 냥을 상납하였느니라

부패(腐敗)

미친 호랑이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이 쌓은 장성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장성은 크게 세 가지였다. 군사력과 경제와 인적 자원.
친위부대 무위소를 만들기 위해 고종은 강화도를 비롯한 지방 부대와 중앙에 있던 기존 부대를 대폭 축소시켰다.
그 결과 1875년에 강화도를 공격한 일본 군함 운요호에 조선군은 무참하게 침몰했다.

대원군이 도입했던 청전을 아무런 대책 없이 폐지하자, 대원군 시대와 비교할 수 없는 절망적인 가난이 찾아왔다.
대원군이 구축 중이던 반 세도정치적 인력구조 또한 고종에 의해 파괴됐다.
노론이 정계에 복귀했고 척족인 민씨가 그 가운데에 포진했다.
황현이 말한 것처럼, 민씨들은 미친 호랑이처럼 포악하고 탐욕스럽게 나라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황현이 기록한 민씨들의 행각
민씨들이 벌인 부패 행각은 끝이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하나를 고르라면, 민영휘다.

민영휘 본명은 민영준이다. 민영휘는 세금을 강제로 거두거나 뇌물을 긁어모으며 임금과 불가결한 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을 전횡한 지 오래되었다. 전국의 모리배가 그에게 몰려들었으므로 인심이 들끓었다. 크고 화려한 집,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첩들, 호기를 부리는 하인들은 세도가 생겨난 이래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논밭에서 거둬들이는 소작료가 100만 석이나 되는데 조선,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갑부로 중국 신문에 실려 세상에 알려줬다. 이 또한 추하기 짝이 없다.

민영휘는 1889년과 1890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며, 가혹한 세금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때 거둔 세금으로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바쳤다.
고종은 그를 철저히 신임하고 국정을 일임했다.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 관련된 모든 일은 민영휘가 주관했다.

* ‘여흥민씨세보에 따르면 여흥 민씨는 고려 중엽 송나라에서 귀화한 사신 민칭도(閔秤道)가 시조다. 여흥 민씨는 이후 고려 국혼(國婚) 4대 명문가로 융성했다. 1392년 고려가 멸망했어도 가문은 멸망하지 않았다. 새로운 왕국 조선 첫 국왕 태조 이성계가 다섯째 아들 방원을 장가보낸 가문이 여흥 민씨 가문이었다. 실질적인 조선 마지막 왕 고종이 장가든 집안 역시 민씨였다. 심지어 고종 아버지 (대원군) 이하응이 장가든 집 또한 여흥 민씨였으니, 시대와 권력 구도를 초월한 막강한 집안이었다.

부패(腐敗)

직접 뇌물을 거둔 최악의 부패 군주
고종은 돈놀이를 사돈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지방관에게 고정된 월급이 없는 조선왕조는 가렴주구가 일상화된 착취 방식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앞장서서 매관매직을 통치자금 조달 방법으로 삼은 왕은 오직 한 명, 고종뿐이다.

고종은 관직을 팔아 돈을 챙겼다.
관직을 자주 팔면 더 돈이 생기기 때문에 1년도 안 돼 지방 수령이 교체되고는 했다.
고종은 부임한 수령이 부자가 되면 다른 군으로 발령을 내고 그 대가를 또 징수했다.
한 사람이 1년에 5개 군을 바꾸는 사람이 있었고, 1개 군이 1년에 수령 5명을 맞이한 곳도 있었다.
영호남 각 군은 특히나 기름진 자리였다.
밀양사람 박병익은 35만 냥을 바쳐 경주 군수가 되었다.

7장 이 나라는 내 것이니라

갑신정변과 독재자 고종 1884

지켜지지 않은 반성
1885년 이후 1894년 갑오 정권까지 고종 직속으로 개혁 작업을 이끌었던 기관인 내무부는 모두 민씨들이 맡았다.
이것이 민씨 척족 정권의 핵심이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조직을 가장 부패한 세력이 맡았다. 권력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누리던 민씨들이.
그래서 뒤집힐 수 있었던 세상이 그대로 존속했다.
가장 개혁적일 수 있었던 10(1884~1894)은 단군 이래 최악의 부패로 낭비됐다.

8장 개틀링으로 학살한 백성

1894년 동학혁명

일본의 참전과 대학살
1894년 양력 81일 일본이 청에 선전포고를 했다.
청은 일본에 참패했다.
청나라 병사를 대신해서 일본군이 동학군 토벌을 책임졌다.
최후의 전투는 공주 우금치전투였다.

농민군이 우금치를 향해 접근하는 사이, 이미 일본군과 관군은 고개를 둘러싼 능선 30리에 포진하고 대기 중이었다.
119일 공주 관문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고개 양쪽에서 대포를 쏘는데, 한 방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그때 수백 명 동시 살상능력이 있는 무기는 자동화포, 회선포(回旋砲)밖에 없었다.
회선포는 미국산 개틀링 기관총이다. 분당 400발 발포능력이 있는 기관총이다.
순식간에 고개는 시체의 산이요 피의 바다(屍山血海)’로 변했다.

 

4부 잃어버린 태평성대 1895~1904

10장 집을 세우다

대한제국과 광무개혁

망국의 징조와 예언
고종이 외국 빚을 들여와 생일잔치를 벌이던 1902년 굶주린 경기도민들이 인조릉 장릉 송림을 침범하여 나무껍질을 모두 벗겼다.
능병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송림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11장 집을 버리다

고종의 칠관파천(七館播遷)

무더기 파천 미수의 결과
프랑스공사관 파천 첩보까지 포함하면, 고종은 자그마치 일곱 번에 걸쳐 타국 공관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더더욱 지도자가 필요한 때였고 그때마다 나라는 어지러웠다.

1894년 자기가 부른 외국 군사가 백성을 유린할 때 왕은 미국과 영국 공관 파천을 계획했다. 아관파천 1년 동안 숱한 국가 재산이 러시아와 미국으로 넘어갔다.
1897년 황제 등극 이벤트를 펼치며 황제는 뒤에서 미관파천을 계획했다.
1904년 나랏돈을 들여서 왕위 등극 40주년 행사를 준비할 때 황제는 뒤에서 미국공관으로 숨어들기를 원했다.
1905년 나라가 만신창이로 쓰러질 때 황제는 또다시 미국과 프랑스에 몸을 기대려 했다.
열강은 그때마다 자기네 국익을 앞세워 파천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망명에 대한 고종의 집착은 끝이 없었다.
19053월 미국공사 알렌이 본국으로 귀임했다. 그때 알렌이 한 말은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녀 보고 4000년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고종의 파천 목적은 일본이 본인과 측근을 압박하는 현 상황 타개였다.
사실상 고종의 파천 목적은 본인과 현 집권층, 민씨 조치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동학과 개혁세력으로부터 실정의 책임자로 지목되었던 민씨 척족 세력을 보호함으로써 본인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강했던 것이다.

19051117일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휘하 대신들을 상대로 조약을 맺고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곳이 황제가 만든 왕립도서관이나 그가 살던 집, 중명전이다.
황제는 그 집을 버렸다.

 

5부 고물을 팔아치우다 1904~1910

12장 러일전쟁과 주합루

황천항해(荒天航海) 1904~1905

북새통이 된 조선과 지도부의 무지
조선 옆에 일본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세계 제국주의에 포위돼 있었다.
조선은, 조선의 바다는 말 그대로 전 세계 제국주의로 북새통이었다.
오로지 조선만 이 북새통이 된 정황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니,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1887년부터 1905년까지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조선공사는 8명이었다.
그런데 184개월 동안 실제로 공사가 현지에 재임했던 기간은 69개월이었다.
공사가 정보수집과 외교활동은 하지 않고 국내정치에 정신이 팔려있었으니, 조선 지도부는 대량살상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사회체계를 갈아엎는 일본을 목격할 수 없었다.
서유럽을 흉내 내 스스로 제국주의화한 일본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시아가 여순을 차지한 사실을 조선 정부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고종은 그 모든 나태한 행위를 묵인하고 방조한 사람이었다.
사료를 들춰보고 동시대 지식인들 증언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고종이 국가와 백성과 국익을 위해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권력 유지와 확장은 고종이 친정을 한 이래 초지일관 추구했던 유일한 정책이었다.

13장 황제가 기댄 그녀, 앨리스

19059, 을사조약 두달 전

앨리스(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외동딸) 일행이 한국에서 한 일은 축제를 벌이고 만찬을 하고 환영연을 벌이고 야외파티를 하고 이 고대 도시 밖으로 말를 타고 놀러 다닌 것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이번 방문이 정치적으로 무슨 뜻이 있어서 미국 정부가 한국을 도와 위태로운 상황에서 꺼내 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사실과 거리가 아주 멀다.

철석같이 미국을 믿은 고종
1905년 앨리스 일행은 미 아시아함대 전함 오하이오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다.
미국을 큰형(Elder Brother)’이라고 불렀던 고종에게, 앨리스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첫 만찬에서 황제가 앨리스를 팔짱을 끼고 테이블로 직접 인도할 정도였다.

홍콩에 나타난 버펄로 빌
앨리스는 이듬해 약혼자 롱위스와 백악관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즐긴 신혼여행에 모든 비용과 이벤트를 가난한 대한제국이 마련하고, 뒷바라지를 하고, 모욕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귀국하는 공주에게 자기 사진을 선물로 안겨주며 따뜻하게 배웅했다.

고종만 몰랐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던 조선은 루스벨트 일행을 구명 장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운명은 결정된 상태였다.
루스벨트는 일찌감치 1900년 부통령 시절 조선인은 자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 대통령이었다.
95일 러일전쟁 종전협정인 포츠머스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지위가 인정된 상황이었다.

세계 각국이 합심해서 반() 러시아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영국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함께 팽창하는 러시아를 경계하던 때였다.
고종과 그 측근들은 러시아를 신흥강국이라고 판단했지만, 전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은 반 러시아였다.

그 냉혹한 시대에 고종은 완전한 판단 착오에 빠져 있었다.
고종은 미국에게 러시아를 경계하는일본을 막아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었다.
또 러시아에는 끝없이 일본군의 폭압과 내정 간섭을 저지해달라는 친서를 보내고 있었다.
하루빨리 러시아군이 대한제국에 진주해 일본을 제거해달라는 친서들이다.
직간접적 경로로 러시아와 연줄을 대고 있는 근왕파 측근들과 고종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게다가 두 달 전 7월에는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사이에 필리핀 조선은 각각 미국과 일본이 먹는다는 땅따먹기 밀약이 맺어진 상태였다.
미국 사교계의 스타였던 앨리스 루스벨트는 미일 수교 50주년 축하라는 명분으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일행에 끼어있었다.
725일 도쿄에 도착한 이들은 이틀 뒤 밀약을 맺고 두 달 동안 필리핀, 싱가포르, 홍콩, 상해, 북경을 여행했다.
그리고 다시 도쿄를 들렀다가 조선을 찾은 것이다.

14장 늙은 조병세의 죽음과 난파선의 쥐떼들

을사조약 전야

나라를 고물로 만든 고종
고종이 재위한 지 어느덧 41년째였다. 친정 선언으로부터 31년째였다.
친정 초기부터 이날까지 아래에서 올라온 상소는 주제가 동일했다.
안일함’ ‘탐욕’ ‘사치와 부패’ ‘측근정치’ ‘벼슬팔이’ ‘무명잡세.
임오군란 때 왕십리 군인들이 총을 든 것도 고종과 민씨들의 탐욕 때문이었고 갑신정변 때 급진개혁파가 적어내린 정강에도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동학 농민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도 탐관오리의 탐학과 가렴주구였다.
청나라와 일본 군사를 불러들여 그 백성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주역도 고종이었다.

그때마다 고종은 정치를 똑바로 하겠다며 공개 반성문을 썼지만 반성문은 모면책에 불과했다.
잠깐 움츠러들었던 권력욕과 탐욕은 곧 옛 측근과 연합하면서 부활했다.
나라는 만신창이가 돼 갔다.

15장 매국노 고종

1905년 을사조약과 뇌물 2만 원

상소한 자들을 처벌하라
숨 막히는 밤이 지나고 조약은 체결됐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1127일 원로대신 조병세 무리가 궁중에 들어와 농성을 하며 상소를 하자 고종은 반복하여 타이른 것이 서너 번만이 아닌데 왜 말을 받지 않는가라며 이들을 궐 밖으로 쫓아버렸다.
28일 무관장 민영환이 뒤를 이었다. 고종은 이들을 체포해 징계를 내리라 명했다.
이틀 뒤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 다음날 조병세가 자결했다.

황제가 받은 접대비 2만 원
을사조약 체결 6일 전인 190511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외무성 기밀 제119호에 의거해 기밀비 10만 원을 집행했다.

신협약 체결 전에 있어서는 당장 이토 대사 내한에 즈음해 궁중 내탕금이 궁핍 상태라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에 대사 접대용 비용에 충당하는 명의 아래 금 2만 원을 심상훈(沈相薰)응 거쳐서 황제 수중에 납입시키고 금 3,000원은 폐하 좌우에 있는 시종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구완희(具完喜)에게, 3,000원은 법무대신 이하영(李夏榮)에게 급여한 외에 나머지 2만 원은 모두 조인 후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등으로 하여금 선후책으로 그 부하를 위무시킬 필요상 지급할 것을 조치했습니다.”

한 마디로, 조약 체결 6일 전에 황제 고종이 일본 공사에게서 2만 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5년 뒤인 1910년 서울 숙련 목수 일당이 1원이었다.
목수 연봉을 200원으로 가정했을 때 2만 원은 이 목수 100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2010년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연봉은 2,500만 원이니, 100배는 25억 원이다.
25억 원 명분은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이고, 이유는 내탕금 궁핍 상태였다.
조약 상대방의 궁박함을 이용한 증뢰(贈賂), 태조고황제가 비바람 맞으며 힘들게 마련한 나라를 판, 수뢰(受賂).

나가 죽으시라
조약 체결 닷새 뒤인 19051122이상설이 노골적으로 분노의 붓을 던졌다.

이 조약은 맺어도 망하고 거부해도 망한다. 망하는 것은 똑같으니 차라리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准亦亡國不准亦亡也 如等亡焉則 無寧決志殉社
준역망국부준역망야 여등망언칙 무녕결지순사

이틀 뒤인 1124일 앨리스 공주의 나라, 큰형님 미국이 가장 먼저 일본에게 공사관 철수 의사를 밝혔다.

16장 도꾸주노미야 이태왕

헤이그 밀사와 왕공족(王公族)

밀사들, 그 이후
714일 일요일 이위종이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사이 일요일 이준이 호텔에서 죽었다.
이틀 뒤 이준은 현지 공동묘지에서 가매장됐다.
임시 장례식에는 이상설과 호텔 사장이 참석했다.
고종은 강제 퇴위당했다.
720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거짓 밀사들을 사법처리하라고 명했다.
88일 법부대신 조중응이 평리원 선고문을 순종에게 보고했다.
정사 이상설은 교수형, 부사 이위종과 이준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형은 이들을 체포한 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상설191732일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광복을 못 이루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재도 날려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동지들은 아무르 강변에 장작을 쌓고 화장을 치른 뒤 그 유골을 북해(北海)에 산골했다.
48세였다.

이위종은 헤이그 회의 다음 해인 1908년 안중근과 함께 무장조직 등 의회를 조직했다.
1911년 아버지 이범진이 자결한 뒤 전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내놓고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 혁명군인 적군파로 활동하던 이위종은 19201228일 일본군에 체포돼 이듬해 25일 총살됐다.

왕공족의 탄생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왕국은 네덜란드군과 전쟁을 벌였다.
왕족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인도 무굴제국도 영국과 세포이항쟁을 벌였다가 멸망했다.

대한제국은 달랐다.
평온하게 국가는 처분됐고, 종묘와 사직은 보전됐다.
종묘사직의 향불은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일본 황실이 해체되는 1945년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쇼토쿠노미야 이왕은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종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명칭이 바뀌고, 순종의 직계는 천황가의 일원인 왕족으로, 그 형제들은 공족으로 대우받았다.
옛 궁내부를 대신한 이왕직이 왕공족 재산과 신분을 관리했다.
왕공족의 지위는 일본 황족에 준했다.
일본 왕족보다 높았다.

재산은 막대했다. 조약에 따라 나라는 사라졌지만 구 황실은 이듬해부터 세비(歲費)도 지급받았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50만 엔이었다.
그리고 150만 엔은 1921년부터 30만 엔이 증가해 1945년까지 180만 엔으로 유지됐다.
1911~1913년 회계연도 조선총독부 세출예산은 5,0469,000엔이었다.
식민지 세출의 2%2,000만 조선인의 10만분의 1도 되지 않는 옛 지배자 가족에게 매년 지급됐다.
193092일 자 총독부 자료 이왕가추가예산설명에 따르면 그해 이왕가 재산은 유가증권으로 607,778, 부동산은 논, , 대지, 임야, 모두 합쳐서 7726,091엔어치를 가지고 있었다.
1921년 예산은 100만 엔이 늘어난 2573,425엔에 달했다.
불시적인 행사에는 추가예산이 투입됐다.

왕공족의 식민 일상
1913년 고종 회갑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원래는 1912년이었으나 그해에 일본 천황 메이지가 죽어 잔치를 연기했다.
광교와 다동기생조합 소속 예기(藝妓)들이 잔치에서 노래하고 춤을 췄다.

고종의 7남 영친왕 이은은 1907년 고종 퇴위 직후 일본으로 갔다.
왕족으로 살며, 왕족 의무 규정에 따라 군에 입대해 중장까지 진급했다.
1927년에는 일본 백작 신분으로 유럽을 순방했다.
19176월 순종은 일본 도쿄로 가서 천황을 알현하고 영친왕을 만났다.

1918113일 전 황제 이희(李熙, 고종)와 현 황제 이척(李拓, 순종), 이척의 동생 이은과 또 다른 동생인 의친왕 이강이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現伊三浪), 조선 귀족, 총독부 관리들과 덕수궁 석조전에서 오찬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치 나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왕공족들은 살았다.
순종을 위시한 조선 왕공족은 일본 황실의 책봉을 받은 후 그 일원이 되어 왕실 일가의 안위만을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사람은 달랐다. 고종의 5남이자 순종의 배다른 동생 의친왕 이강이다.
미국 유학파인 이강은 끝까지 배일(排日) 독립(獨立)을 주장했다.
191911월 상해임시정부가 이강을 망명시키려다가 발각됐을 때, 이강은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독립된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으로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강은 아들 이우를 일본 황실 반대를 무시하고 조선 여자와 결혼시켰다.
아버지를 닮았던 아들 이우는 1945년 히로시마에서 폭사했다.
이강은 1955년 서울 안국동에서 죽었다.

1919121일 고종이 덕수궁에서 죽었다.
고종 장례 이틀 전인 31일 전() 조선인이 들고 일어났다.
411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1945815일 조선이 해방됐다.
왕공족은 이후로도 신분을 유지했다.
왕공족은 해방 2년 뒤인 1947년 일본이 신헌법으로 황족 예우 규정을 폐지하면서 사라졌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賣國奴 高宗, 와이즈맵, 2020

저자 박종인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소위 386세대 신문 기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질랜드 UNITEC School of Design에서 현대사진학을 전공했다. ‘직시直視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조선일보>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연재 중이다. <TV조선>에 같은 제목의 역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잊히고 은폐된 역사를 발굴해 바로잡아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20서재필 언론문화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대한민국 징비록, 박종인의 땅의 역사12, 여행의 품격, 기자의 글쓰기, 한국의 고집쟁이들, 행복한 고집쟁이들, 내가 만난 노자, 나마스떼,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공저), 다섯 가지 지독한 여행 이야기가 있고,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 마하바라타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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