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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조선의 명의들≫-ScienceㆍMediencal ScienceㆍTechnology- 김호2022-08-2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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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의들≫ 

 

조선 의학의 르네상스

조선 의학은 크게 보아 중국 의학 영향 아래 있었지만, 조선 특유의 풍속과 고대부터 전해오는 의술의 전통 속에서 나름대로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15세기의 식치(食治) 의학의 경우, ‘조선 사람은 조선의 식물(食物, 먹을거리)로 치료하자는 향약(鄕藥)의 정신과 어우러져 더욱 독특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는 후일 조선 왕실 특유의 음식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기도 했다.

임언국의 종기 치료는 침구술과 밀접하게 결합하면서 발달해 온 조선 외과 의학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데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17세기 동아시아에 자랑할 만한 허임과 같은 침구 의학의 대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조선의 이데올로기인 유학의 인간관을 으로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한 중요한 의철학 서적이었다.
자연을 닮은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도덕의 준수야말로 건강함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양생의 철학과 실천윤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동의보감은 임언국과 허임으로 이어지는 침구 의학의 전통과는 다른 약물 의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이후 조선 후기 의학 발달의 거대한 근원이 되었다.
이를 토대로 18세기 후반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제중신편의 간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임언국의 종기 치료는 침구술과 밀접하게 결합하면서 발달해 온 조선 외과 의학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데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17세기 동아시아에 자랑할 만한 허임과 같은 침구 의학의 대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책이 나옴으로써 이후 수많은 향의(鄕醫)들이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는 유이태라는 산청 지역의 의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의 활동은 후일 허준의 스승으로 오해될 만한 일화를 남겨줄 정도였다.

다산 정약용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진정한 의학자였다.
그는 조선 시대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가던 천연두와 홍역 치료를 위해 선진 의학을 수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과감하게 종두법을 시행함으로써 기왕의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실학을 몸소 실천한 정약용이야말로 진정한 조선 명의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전순의, 음식으로 치료하는 의사

식치를 중요하게 여겨 음식을 준비하고 관리하던 관청에 식치를 담당하는 전문관리를 두었는데 이를 식의(食醫)라고 한다.
고려 시대부터 왕실의 음식 관리 관청인 상식국(尙食局)에 식의를 두었으며, 고려 목종(穆宗) 때 처음 식의 제도를 시행했다.
식의는 고대 중국 관료 체제의 이상인 주례(周禮)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의 식의 제도는 이어졌다.

세조는 식의에 큰 관심을 둔 임금이다.
당시 세조의 뜻을 받들어 식의의 중요성을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사람이 있는데 식료찬요를 쓴 명의 전순의(全循義, ?~?)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460(세조 4)에 편찬한 식료찬요는 조선 전기 식치 의학을 종합하였다.
그 처방들이 대개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와 같은데, 이는 매우 분량이 많은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에서 식치 의학의 정수만을 따로 모았기 때문이다.

전순의는 세종대에서 세조대에 걸쳐 활약한 조선 전기의 어의로 세종대인 1445년에 365권이나 되는 동양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인 의방유취편찬에 참여했다.
1447년에는 침구택일편집(鍼灸擇日編集)을 김의손(金義孫)과 함께 썼고, 그 뒤 산가요록(山家要錄)으로 조선의 고유한 음식과 술 제조법을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세조는 그를 총애해, 그가 1460년경 식치에 관한 총론을 쓰자 직접 식료찬요라는 제목을 지어 줄 정도였다.

전순의는 나이가 들어서도 매우 기운차게 활동했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의술로 정평이 나 있었다.
조선 초 학자인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전순의의 뜸 치료를 받은 뒤 이렇게 칭송했다.

白髮鴻樞愈健康 백발의 홍추(鴻樞) 여전히 건강하네
人言醫術最精詳 사람들은 말하지 의술이 가장 정밀하다고 

임언국, 조선 외과 수술의 선구자

조선 초기에는 침구술에 능한 의사들이 종기를 침으로 찔러 치료하는 일이 가끔 있었지만 종기 치료만을 전문으로 담당한 의사들은 없었다.
그러나 악창(惡瘡)이나 종기로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종기를 비롯한 다양한 외상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사들이 필요했다.
이에 점차 종기 치료, 즉 치종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치종의(治腫醫)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의 경국대전예전(禮典)을 보면 의서에 능하지 않더라도 종기를 잘 고치거나 여러 가지 악병을 고치는 기술을 지닌 자들을 특별히 채용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치종의 제도를 마련한 최초의 법전 규정이다.

임언국이야말로 조선 치종학의 수준을 현재 외과학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표 의사라 할 수 있다.

임언국의 고향은 전라도 정읍으로 누대에 걸쳐 그곳에서 살아온 집안의 유학자다.
그의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여러 약을 써도 듣지를 않자 영은사라는 절의 한 노스님에게 침술을 전수받아 어머니의 질병을 고친 뒤, 스스로 묘법을 터득해 종기 말고도 다른 질병들을 치료하는 데 힘썼다.

허준, 자연을 닮은 인간

허준(1539~1615)의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龜巖)이다.
아버지 허론(許碖)은 무과 출신으로 외직을 두루 거쳤으며 어머니는 영광김씨 가문의 서녀(첩의 딸)였다.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난 허준은 어린 시절을 호남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랐고, 이를 기반으로 156930세에 내의원 의원으로 천거되었다.

○ ≪동의보감은 불교와 도교의 인간학을 모두 아우르면서 새로운 인간과학의 정당성을 주술이나 구복의 세계가 아닌 하늘의 법칙에서 가져왔다.
자연을 닮은 인간은 당연히 자연의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춘하추동의 순리, 밤과 낮의 질서, 음과 양의 조화, 인륜의 구현이 모두 당연한 인간의 삶이 바탕으로 삼아야 하는 자연의 원리였다.
• ≪동의보감의 양생학은 바로 이를 나타낸 인륜의 의학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삶이 곧 인간의 마땅한 도리요, 인륜의 마땅함을 지키는 일이 건강의 지름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동의보감의 인간과학이야말로 도교와 불교를 넘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유교의 윤리에 따른 삶을 철학으로 뒷받침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 ≪동의보감을 통해 의술은 유교의 통치술이 되었고 유교는 과학의 근거를 얻게 되었다.
몸을 아우르는 새로운 인체과학은 인륜의 정당성을 자연의 법칙에서 구함으로써 그것을 비판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 ≪동의보감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과 인간을 완전하게 이어준 신형장부론의 과학, 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유학의 이념을 몸에 적용한 인간학이었다.

허임, 침구의 대가

조선을 대표하는 침구의는 허임이다.
그는 천민 출신이지만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드날리던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되었다.
허임의 아버지는 악공(樂工)이었으며 어머니는 사비였다.
허억봉은 당대 최고의 피리꾼으로 만년에는 현금(玄琴)에도 능했던, 음악으로 일세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강원도 양양의 관노(官奴)로 있던 허억봉은 피리를 잘 부는 덕에 왕실 행사에 악공으로 참여했고, 이를 계기로 장악원(掌樂院) 소속의 악공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정승 김귀영(金貴榮) 집안의 사비(곧 허임의 어머니)와 혼인해 허임을 낳았다.

1725년 일본에서 침구경험방을 간행한 산센쥰안(山川淳菴)은 일본판 서문에서 조선의 침구술이 매우 뛰어나며 그 방법들이 모두 허임의 기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허임의 침구술은 여러 제자들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에 이어졌다.
공주의 유명한 침의 최우량은 허임에게 의술을 전수받았다.
최유태와 오정화는 허임의 의술을 전수받아 명성을 떨친 후배 의사들이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 새로 쓰는 유이태

행장과 사적에 따르면 유이태는 1651년에 태어나 1715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양반의 후손으로 경상도 거창에서 태어나 문장과 의학을 겸비한 유의(儒醫)로 활동했다.
그의 먼 선조는 의병장을 지낸 경력이 있으며 외가로도 병조판서와 경상좌수사를 지낸 인물들이 있다.
유이태는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부모를 대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며 저녁엔 잠자리를 정해드리고 새벽에는 문안을 드리는 등 극전히 봉양했다.

유이태는 허준의 스승이기보다 마진편이라는 홍역 전문 치료책의 저자로, 인서문견방(혹은 실편)이라는 경험방 의서를 간행한 조선 숙종대의 명의로 기억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정약용, 홍역의 정체를 밝히다

조선 시대 대표 역병(疫病)인 두창(이에 포함되었던 마진([홍역])과 벌인 전쟁은 조선 정부가 수행해야 할 급박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단지 환자를 격리하는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두진(痘疹, 천연두의 증상)과 같은 역병을 완전히 치료하기 위해서는 종두와 같은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

정약용은 종두를 조선 땅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떤 계기로 그가 종두술을 도입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당시의 상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체계(종두)를 모색했다.
전통체계와 이에 근거한 치료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끌어들인 것이다.
정약용의 두진에 대한 지식은 조선과 명 청의 의학서를 구본(舊本)으로 하면서 새로운 종두법을 신참(新參)하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어떤 이유로 두진 전문 의서를 쓰게 되었을까?
• ≪마과회통서문에서 그는 어렸을 때 죽을 뻔한 것을 이몽수라는 의사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므로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고 책을 쓴 동기를 밝히고 있다.
두진을 연구하게 된 사정은 더 있다. 바로 자식들의 죽음이다.
1798년의 마과회통이 구본의 총 집합체라면 1800년의 <종두요지>는 바로 신참으로 전진하는 모습이었다.

강명길, 동의보감을 새롭게 다시 만들다

1799년 강명길의 나이 63세가 되던 해 드디어 동의보감의 업그레이드판인 제중신편이 완성되었다.
밤낮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모든 의사들을 모아서 전하의 명령에 따라 어수선한 것을 버리고 요점만 골라 여덟 권을 묶었다.
• ≪제중신편동의보감의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충하려고 만든 의서였다.
• ≪제중신편의 간행으로 동의보감의 실용화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이후 더욱 간편하고 실용적인 의서들의 경향이 농후해지면서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모두 제중신편의 영향이었다.

강명길은 1737년에 태어나 1801년에 죽었다.
그의 집안은 중인 집안의 전형으로 조선 시대 전체에 걸쳐 수많은 의관, 주학(籌學), 역관, 율관을 배출했다.
특히 주학과 의학(醫學)에 종사한 자들이 대다수인데 강명길의 처가는 대대로 주학을 전공한 집안이었다.
주학과 의학은 음양과 오행 등 상수학에 일정한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다른 중인 분과보다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강병길의 아버지도 원래는 주학으로 입격했다가 다시 의학으로 출신한 적이 있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온 정조대 명의 강명길의 스승은 영조대 명의 주명신이다.
주명신이 1724(경종 4)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의문보감은 일제 강점기까지도 계속 출판할 정도로 널리 애용한 의서였다.
이는 동의보감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주명신만의 경험이 수록되어 새롭게 밝힌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호, 조선의 명의들, 살림, 2007

저자 김호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동의보감 편찬의 역사적 배경과 의학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 원고를 바탕으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일지사, 2000)를 출간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책임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조선 과학인들 열전등 여러 권의 책을 썼으며, <조선 후기 왕실의 출산 풍경>, <18세기 후반의 서울의 의료 생활> 등 조선 시대 생활사 및 과학기술 분야의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지금은 경인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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