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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누가 알아주랴≫-큰 이상을 품은 실학자-유득공 산문집2022-07-24 18:16
Writer

누가 알아주랴

만주벌판을 꿈꾼 역사의 시인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다른 무엇보다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십대 초반에 이미 이른바 통일신라 시기 이전 우리나라 초기의 한시 작품을 모두 모은 선집인 삼한시기(三韓詩紀)(일명 동시맹(東詩萌))를 완성하였다.
유득공은 놀랍게도 한시뿐 아니라 가사 없이 제목만 남은 악곡이나 향가까지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18세기 북학파 학자ㆍ문인 가운데 우리나라 문학의 전체 상을 조감하려고 한 걸출한 안목의 소유자였다.
거칠게 말하자면, 유득공은 이십대 초반에 이미 평생 시작의 기초를 마련하고 방향을 결정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무 같은 사람이 유득공을 두고, 당시 세상에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 정도로 시를 전문적으로 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 공연한 말일 리가 없고, 그의 시 비평 전문서인 청비록에 유득공이 서문을 쓴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일이다.
12년 후배이자 오랜 동료인 성해응(成海應, 1760~1839)에 따르면 유득공의 시는 당시(唐詩)의 의경(意境)에 극히 뛰어났고, 특히 오언고시에 더욱 빼어났다고 하며, 다시 이덕무의 말을 빌면 처절하고 비명하며 애절함이 깃들었다고 한다.
영재는 사가시인(四家詩人) 가운데 한시의 본령에 가장 충실한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제가는 1776년에 쓴 유득공 시집의 서문에서, 유득공은 한시 창작에서 개개 한자가 갖고 있는 의미뿐 아니라 그 소리의 문제에도 각별히 유의하였다고 하였다.
성해웅은 유득공이 실학에 힘썼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실학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리(地理)와 명물(名物)에 대한 저술이 많다고 한다.

유득공은 지역적으로는 만주벌판으로, 시대적으로는 그 광활한 만주벌판을 달리던 민족사 전개의 초기 단계로 향한 꿈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우리 민족사의 잃어버린 무대를 회복하고자 한 그의 일념은 진지하였다.
• ≪발해고는 그 점에서 새삼 주목되어야 한다.
• ≪발해고에서 나라를 경영하는 정책에서 도움될 것이 무엇일까?
그는 시대를 넘어서 우리에게도 민족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큰 이상을 품은 유득공이야말로,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는 사람이었다.

1부 독서와 사색의 편린

우리나라의 벼루

김도산(金道山)이라는 자는 홍주(洪州) 아전이다. 벼루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는데, 떠돌다가 서울에 붙여 살게 되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불러갔다. 평생 만든 벼루가 아마도 천 개는 넘을 것이다. 나도 그에게 검은색과 청색 벼루 두 개를 만들게 하였다.
김도산은 벼루 석재(石材)를 이렇게 품평하였다.

남포석(藍浦石)이 가장 유명하지만, 검고 어두운 것이 애석하고 화초 무늬도 그다니 빼어나지 못하다. 위원석(渭源石)은 그 청색은 흡주석(歙州石) 같고 자주색은 단계석(端溪石) 같으니, 좋은 품질이다. 하지만 종성(鍾城)의 치란석(雉卵石)이 은은한 청색에 흰색을 띠며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고 마치 옥처럼 따스하면서도 윤기가 있어서 발묵(發墨)이 잘 되는 것만은 못하다. 평창(平昌)의 자석(紫石)과 고령(高靈)의 현석(玄石)도 좋은 품질이고, 단천(端川)의 황석(黃石)은 너무 굳세고 풍천(豐川)의 청석(靑石)은 몹시 거칠고, 안동의 마간석(馬肝石)은 가장 열약하여 벼루로 사용할 수가 없다.

이 말을 기록하여 동연보(東硏譜)를 보충한다.

2부 풍속과 민속

양호(兩湖)의 풍속

북사(北史)≫ 「백제전, 백제 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고 아울러 책도 좋아해서 뛰어난 사람은 제법 글을 지을 줄 알고 행정 실무에도 능하다. 또 의약과 점치기, 관상술과 음양오행법도 알고 장기ㆍ바둑을 매우 즐겨한다하였다.
살펴보건대 지금 호서ㆍ호남 지방은 다 옛 백제 땅이다. 지금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지는 않지만 그 나머지는 과연 모두 능한데, 호남 사람들은 점과 관상 및 오행술을 아주 좋아하고 바둑에는 국수가 많다. 풍속이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대단히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 짚이다. 군자창(軍資倉)과 광흥창(廣興倉)의 양창(兩倉)이 심지어 짚을 담당하는 공인(貢人)을 두고 있고, 조회(朝會)와 사향(祀享)에서 모두 진배(進排)(갖추어 대령한다는 말)하여 뜰에 펴면 백관(百官)들이 그 위에서 절하고 꿇어앉으니, 중요하다 이를 만하다.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이고 자리를 엮고 삼태기를 짜고 신을 삼고 말과 소를 먹이며, 짚으로 새끼를 꼬면 크게는 그네 타기, 무거운 물건 끌어당기기, 닻줄 내리기와 작게는 여러 가지 묶고 메는 일들에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고, 짚으로 가마니를 짜면 서울로 조운(漕運)을 실어보내거나 주현(州縣)에 쌓아두는 군향(軍餉)과 조적(糶糴) 및 공사(公私) 간의 곡식 여러 억만 석이 모두 거기에 담기게 된다. (하략)

3부 독서와 사색의 편린

시로 남은 열하 기행

우리나라 사람은 열하에까지 간 적이 없었는데 경자년(저조 4, 1780)의 사신이 처음으로 갔다. 그 경로는 연경에서 고북구(古北口)로 나갔다가 다시 고북구를 거쳐 연경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옛 역사서를 살펴보면 고구려 장군 갈로맹광(葛盧孟光)이 연()나라 왕 풍홍(馮弘)을 맞아 싸울 때 용성(龍城)에 이르러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해진 옷을 벗어버리고 연나라 무기고를 빼앗아 예리한 병기를 주어 성을 크게 약탈하고 돌아왔다 한다. 용성은 지금의 조양현(朝陽縣)이니, 조양현 서쪽의 건창(建昌)ㆍ평천(平泉) 등지는 맹광이 가보지 않았던 곳이다.
나는 이번 걸음에 요동 벌판의 백대(白臺)로부터 해() 땅을 지나 피서산장(避暑山莊)을 구경하고 고북구로 들어왔다가 산해관(山海關)으로 나와 돌아왔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을 한 바퀴 빙 돌았고 만리장성을 반이나 돌아보았으니 일찍이 없었던 여정이라 할 것이다. 을묘년(정조 19, 1795) 동짓날 유득공은 고운재(古芸齋)에서 쓰다.

4부 우리 역사와 우리 땅

가락국(駕洛國)

임자년(정조16, 1792) 225일에 상()이 영릉(永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데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라는 김아무개가 제위답을 고을 사람에게 뺏겼노라고 호소하였다. 상은 곧바로 경상감사에게 살펴 시정하도록 분부하고 또 각신(閣臣)을 보내 수로왕릉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으니, 거룩한 은전이었다.
살펴보건대 북사(北史)신라는 가라국(迦羅國)에 부용(附庸)국이다하였고, 남제서(南齊書)에는 건원(健元) 원년(479)에 가라국(加羅國)의 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옴에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위를 주었다하였다. 상고해보건대 가라(迦羅)와 가라(加羅)는 모두 가락(駕洛)을 이르는 말이다. ()나라 고제(高帝) 건원(健元) 원년은 신라의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신라 21대 왕, 재위는 479~500)원년이고 가락국 질지왕(銍知王, 재위 451~492) 29년인데, 하지(荷知)질지의 자()인지 아니면 서로 달랐던 옛날의 방언인지 알 수 없다.
가락은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통하였고, 신라는 그 부용(附庸)이었으니, 삼한(三韓)의 큰 나라였다. (하략)

5부 동아시아에서 서양으로

만주어(滿洲語)

여진(女眞)은 말[]모린(毛鄰)’이라 하는데, 이것은 모린위(毛鄰衛)가 취해서 이름 붙인 바이다. 우리말로는 말을 ()’이라 하니, 발음이 모린과 가깝다. 한청문감(漢淸文鑑), 붉은 색깔의 말을 절다(截多)라 하고 밤색 말을 구랑(勾郞)이라 하고 홍사마(紅紗馬)를 부루(夫婁)라 하고 검은색 말을 가라(加羅)라 하고 황색 말을 공골(公鶻)이라 하고 검은 갈기에 황색 말을 고라(高羅)라 하고 해류(海騮)를 가리온(加里溫)이라 하고 선검(線臉)을 간()이라고 한 것은, 이 모두 우리말이고 만주어와도 거의 같다. 땅이 서로 인접해 있어서 서로 배웠기 때문이다.

부록

역사로서의 시

()란 포괄적 의미의 역사다. 옛날 주()나라가 강성하였을 때 여러 제후국들은 태사(太史)에게 시를 바쳐서 그 나라 풍속의 좋고 나쁘고를 헤아렸고, 각기 자기 나라의 시를 후세에 전하여 그 나라 정치의 잘되고 못 되고를 살피게 하였다. 역사가 역사가 됨도 이와 같을 뿐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기록하는 대상은 조정의 일에 그친다. 그러나 시가 싣는 것은 조정에서 시골까지, 천지(天地)에서 인물(人物)까지, 실제의 사실에서 허탄(虛誕)한 일까지, 자잘한 일들을 한 가지도 갖추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시에 실리는 숨은 이야기 기이한 소문에는 종종 역사가 빠뜨린 일들이 허다히 나타난다. 시가 역사로 됨이 단지 역사가 역사로 되는 경우와 꼭 같기만 할 뿐이겠는가?
하지만, 이는 고시(古詩)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라 당()나라 때는 시가 주나라 때보다 더 왕성하였지만, 시를 잘 말하는 자들은 오직 두공부(杜工部) 한 사람만을 시사(詩史)’라 일컫는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시인들은 알 만한 것이다. 가령 지금 여러 나라의 시를 태사에게 바치고 후세에 전한다면 오히려 풍속을 헤아리고 정치를 살필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역사는 따로 역사가 되고 시는 따로 시가 될 뿐이다. 아하! 이런 시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른바 산시(刪詩)한 뒤로는 시가 없다함은 한때 욱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하략) 


유득공 지음, 김윤조 옮김, 누가 알아주랴, 태학사, 2005

 

유득공: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영재(冷齋)ㆍ영암(冷菴)ㆍ가상루(歌商樓)ㆍ고운당(古芸堂)ㆍ고운거사(古芸居士)ㆍ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 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 짓기를 배웠으며, 한시(漢詩)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박제가(朴齊家)ㆍ이덕무(李德懋)ㆍ이서구(李書九)와 더불어 한시사가(漢詩四家) 또는 후사가(後四家)로 꼽힌다. 20세를 지나서는 박지원(朴趾源)ㆍ이덕무ㆍ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774(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1779(정조 3) 박제가ㆍ이덕무ㆍ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 '4검서'라 불린다. 이를 계기로 서얼출신이라는 신분제약에서 벗어나 관직을 두루 거쳐 포천현감(抱川縣監)ㆍ양근군수(楊根郡守)ㆍ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ㆍ사도시주부(司寺主簿ㆍ가평군수(加平郡守)ㆍ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00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승하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순조 7)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는 개성ㆍ평양ㆍ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니, 이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역사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첫째, 시문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冷齋集)과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1772)이 있다. 둘째, 중국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1777)이 있으니, 나중에 병세집(竝世集)(1796)으로 완성되었다. 연행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이 있고, 연행할 때의 단상(斷想)들을 모아 놓은 금대억어(金臺臆語)후운록(後雲錄)에 수록되어 있다. 셋째, 신변 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내려간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와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가 있다. 경도잡지는 뒤에 김매순(金邁淳)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넷째, 역사서로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가 있다.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역사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북학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작품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에 따라 중국 서적을 다양하게 섭렵하였고, 한국역사에도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ㆍ몽골ㆍ회회(回回)ㆍ안남(安南:베트남)ㆍ남장(南掌:라오스)ㆍ면전(緬甸:미얀마)ㆍ타이완ㆍ일본ㆍ류큐[琉球]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영국)ㆍ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중국 일변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역사관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지만, 처음에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변모해갔고, 그 결과 발해고≫ ≪사군지를 저술하여 한국사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에, 발해를 세운 대씨(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ㆍ한치윤(韓致奫)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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