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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젊음을 바친 ≪그 시절, 광주 사람들≫ 혁명가 박석률과 그의 벗들2022-06-1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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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젊음을 바친 그 시절, 광주 사람들혁명가 박석률과 그의 벗들


오던 날은 몰랐지요
내 나라 내 땅을 오고 가는 줄
에돌아 가고 험한, 굽이굽이 길
한밤중 철창문 두들기는 소리, 뜬눈으로 밝히는구나  

박석률은 민청학련과 남민전 사건, 범민련 사건으로 11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 어떤 압제도 민주주의와 통일을 향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김남주는 <함성>을 발간하여 독재자와 한판 싸움을 시작하였다.
1979년 정작 독재자가 무덤에 묻였을 때, 그는 감옥에 갇혔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은 시가 되어 시대를 고발하였다.

이학영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남민전에 가입하였고, 조직의 명령에 따라 재벌 집을 털었다.
사람들은 청년 이학영에게서 붉은 냄새를 맡으려 하겠지만, 알고 보면 이학영은 여리디여린 문학청년이었다.

이강은 <함성>지를 발간하였고, 함평고구마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광주지역의 운동사는 그를 빼고는 작성할 수 없으니, 사람들은 그를 불도저라 불렀다.

임동규는 엄혹한 시대에 두 차례나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옥살이 중에서 전통무예를 복원하였으니, 사람들은 그를 빗자루도사라고 불렀다.

박석삼은 함평고구마 투쟁을 지휘하던 이강과 윤한봉을 도왔다.
박기순과 함께 교육지표 시위에 깊숙이 개입하였고, 이후 남민전에 가입하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싸움의 선봉이 되었다.

1장 혁명가 박석률

석률 형!
어느 날 형의 부재를 알았습니다. 소문도 없이 타계하여 조문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떠나고야 찾는 걸까요?
이승에서 형은 여러 번 저를 찾아주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독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후회할 때에는 이미 늦었더군요.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고 나서야 왜 하룻밤 함께 대화하지 않았을까 후회를 합니다.
작년에 형의 동생 석준 씨가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시집(박석준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 시집을 읽고 나서 형의 가계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혁명운동에 뛰어든 젊은이가 고초를 겪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으나, 형네 가족이 겪었던 비운은 눈물 없인 볼 수 없더군요.
뒤늦게 형과 석삼 씨가 쓴 옥중 편지를 구해보았습니다. 석률, 석삼 두 형제가 9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주고받은 편지는, 우리 시대가 남긴 소중한 옥중문학입니다. 200년 전 정약용, 정약전 두 형제가 겪은 유배문학과 흡사합니다. 후대들에게 꼭 전해 주어야 한다고 저는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부터 저승에 계신 형을 호출하겠습니다. 저는 형의 삶에 대해서 물을 것이고 형은 편하게 답변하면 됩니다.
우리의 대화는 100년 후의 연구자에게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길 안내를 해줄 것입니다. 신문에 보도된 기사에만 의존할 경우 자칫 역사의 진실을 놓칠 수 있잖아요. 역사 연구자는 기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있기까지 박석률의 벗들이 광주 운동권에서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가에 대해서 저는 우리의 속살을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2장 전사가 된 시인 김남주

독재자의 무덤을 파러 갑니다.”

그 시절 유인물을 배포한다는 것은 곧바로 체포되는 것을 의미했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행위가 체제를 전복하는 행위로 둔갑되던 시절이었다. 고문을 받고 나오면, 북괴의 대남공작에 동조하는 빨갱이로, 적색 오징어포로 둔갑되어 나오던 시절, 지하신문 작업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먼저 동료를 규합해야 한다. 평소 비판적인 발언을 많이 하던 친구에게 함께 작업을 하자고 제안한다. 말이 많은 동료일수록 몸을 뺀다. 검거와 취조, 고문과 투옥이 빤한 이 위험한 일에 선뜻 나서는 이는 없다.
다음으로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이강은 전세 입주금을 뺐다. 돈이 부족하여 남주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자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촌놈 남주의 말이 걸작이었다. “나는 독재자의 무덤을 파러 갑니다.” 일견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청년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청년의 뜻을 곧 알아들었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벗어주었다.
지하신문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는 것도 힘든 작업이었다. 철판과 철필, 묵지와 종이를 구입하는 과정에서도 문방구 주인의 신고에 대비하여 신중을 기해야 한다.
원고 작성은 당연히 시인의 운명을 타고난 남주의 몫이다. 그런데 필경은 누가 맡나? 글씨가 서툰 이강과 남주는 후배의 손을 빌리기로 한다. 등사는 누가 맡나? 이강의 동생 이황의 손을 빌리기로 한다.
배포는 누가 맡나? 배포의 핵심은 민첩이다. 유인물을 배포하다 경찰에게 발각되면 끝장이다. 뿌리되 들키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심야에 유인물을 집안에 넣으면 개가 컹컹 짖어댄다. 주인이 나와 뜰을 살핀다. 유인물을 발견하는 즉시 주인은 신고에 들어간다. 새벽 지하신문을 배포하는 자의 몸은 긴장으로 온통 땀범벅이 된다.
마침내 이루었다. 전국 최초로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지하신문이 나왔다. <함성>이라는 제목을 단 유인물이 나왔다. 129일이었다. 전남대 강의실 이곳저곳에 뿌려졌다. 4·19혁명의 발상지 광주고에도 배포되었고,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진원지 광주일고에도 배포되었다. 이강은 말한다.

저녁에 모자 쓰고, 남주랑 가서 전대에 뿌렸다. 상대와 문리대, 법대에 뿌렸다. 책상 서랍에 넣었다. 광고는 학교 운동장에 뿌렸다. 전여고와 광여고, 공고와 일고는 학교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학교 밖에 뿌려놓았다. 조대에 뿌리려고 했던 100장은 뿌리지 못하고 남겨놓았다.

발칵 뒤집혔다. 지하신문을 읽고 감동한 이들은 학생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고 정보부 요원과 경찰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지하신문은 지하에 그대로 묻혔을 것이다. 지하신문이 역사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1등 공신은 역시 독재의 하수인들이었다.
수사가 시작되었고, 남주는 서울로 몸을 숨겼다. 두 청년은 쫓기는 상황에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무덤 파기 작업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해가 바뀌고, 19732월 남주와 이강은 제호를 <고발>로 바꾸었다.
새로 제작한 <고발> 500매를 이강은 서울의 남주에게 보냈다. 이불 속에 넣어 탁송하였다. 이강은 남주에게 각 학교에 배포하기 바란다.’는 별도의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아뿔사! 이강의 편지가 정보부의 검열에 발각되어 버렸다. 귀신같은 정보부 요원들이었다. 본격적인 수사가 개시되었다.

물봉 남주

윤한봉은 남주를 기인이라 했는데, 박석무는 그를 물봉이라 했다. 물봉이란 타고나길 순진하여 악동들의 놀림에 당하기만 하는 친구인데, 박석무는 후배 남주를 이렇게 평했다.

남주는 느슨하다. 늘 허리띠를 풀어 놓고 매인 데 없이 사는 사람이었다. 결단력이 없어 늘 흔들리고, 모질지 못하여 언제나 만인의 호구로 통하였다. 맺힌 데가 없고, 타이트한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아하!’하고 크게 웃어버리면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었다. 혹자는 천성의 시인이라고도 평했다. 그의 아호는 내가 지어준 물봉이어서 사람들은 남주를 물봉 선생’, 혹은 물봉 형으로 호칭하였다.

남주는 자기가 물봉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물봉의 뜻을 전면적으로 뒤집어 버렸다. ‘새벽 물(), 벌 봉()’이라. ‘새벽같이 혁명을 일으키는 사나이라는 뜻으로 재해석했다. 대단한 풀이다.

3장 문학청년 이학영

학영 그때 교도관이 그러더라고. 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얼마나 밖에서 언론이 대서특필했겠어. 지하조직에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들이 총까지 가지고 있다고. 그때 나는 이미 우리는 죽었구나 싶었어. 그 빈 사동에 나 하나 넣었으니까. 근데 10·26이 딱 났다고 앞방에서 연락을 해주는 거야. 긴급조치 9호 위반자들은 싹 나가는 거야. 그 순간 그때 조직이 쫌만 더 버텼으면 민중의 힘으로 몰아낼 수 있었는데 생각했어. 안도와 함께 억울했어. 다 나가고 유일하게 나 혼자 있는데 혼자 남으니까 벅적벅적 살다가 외로웠지. 그 속에서 5·18사건 터지고 어머니가 면회를 한번 오셔서 니가 여기 있으니까 너무 고맙다. 니가 광주에서 그대로 살았으면 죽었을 건데.” 어머니가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구.

4장 불도저 이강

이강 박석무를 잡아들였어. 이 글을 쓸 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다. 전대 담당 형사가 석무를 지목했어. 석무 형더러 네가 썼거나. 네가 알 만한 사람을 대라고 하는 거야. 두어 시간을 실갱이하다가 송경민, 고재근은 재학생이 아니어서 안전했고. 김남주. 이렇게 지목된 거야. 안기부가 영문과 학생들한테 물어보니까 다들 남주는 그럴 인물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대. 그래서 수사를 중단했어. 나는 수사대상에 올라가지 않았고. 그런데 내가 지하신문 제2탄을 계획했어. 산수동에서 월산동으로 옮기고 1만 원 정도가 여유가 생겨서, <고발>이라는 이름으로 500매 정도 프린트했지. 나 혼자 뿌릴 수가 없으니까. 이전에 남은 <함성> 100장에다가 <고발> 500장에 인쇄기까지 이불로 싸서 화물소에 맡겼던 거야. 물품보관증을 남주에게 보내면서 내가 편지를 짤막하게 썼어. 그런데 이것이 걸린 것 같아. 그때 살던 집도 아무도 없었지만, 주거 확인 차 왔다던가 해서, 누구누구 살고 있느냐면서, 내 여동생이 나가서 이강이 산다고 신원확인을 하고 나간 거다. 방안에서 들어와서 뭔가 의심이 들기는 하는데, 뭔가 그날 느낌이 이상했어. 도로변에서 담뱃불 좀 빌립시다하더니 느닷없이 , 이강이지하면서, 납치하는 거야. 화물소로 데려갔고, 버틸 수가 없었고, 다 불었지. 그 길로 연행되어 도청 공작 분실 지하로 들어가서 엄청 두들겨 맞았지. 3일 정도 물고문을 하려고 거꾸로 세워놓고 두들겨 맞았는데, 그런데 물고문을 하다가 기절하다가, 정신 차리다가 3번째 정도에서 , 녹두지 어디서 났냐?”고 묻자 혼절 상태에서 석무 형에게서 받았다고 실토했지. 바로 석무 형이 연행되어 엄청 맞았지. 시인을 안 했으니까. 왜냐하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니까.

5장 쌍무기 임동규

후진국 경제론의 저자는 누구인가?

70년대 후반 학생운동권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권을 이끈 한 이론적 저서인 후진국 경제론을 잊을 수 없다. 이승만 정권에 연이은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의 상황은 한마디로 이야기하여 사회과학 부재의 암흑세계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교토대학 박사학위 취득을 원하는 조용범 교수로부터 후진국 경제론이라는 주제의 집필을 요구받았다. 당시 석박사학위 논문을 타인이 대신 써주는 대필 작성은 상식적인 일이었음을 후배들은 이해해주길 바란다.
진실을 밝히자면 후진국 경제론은 박현채 선생이 집필하고 조용범 교수의 이름으로 공간한 책이다. 이러한 사실이 조용범 교수의 이름을 조금이라도 낮출 것이라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의 상황에서 이런 불온서적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할 것을 감히 결의해 준 조용범 교수의 용기가 더 빛나는 것이었다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던 1981년 당시 그곳에는 재일교포 몇 분이 계셨다. 법정대학 박사과정을 이수한 분을 비롯하여 동경대학 경제학부 대학원을 마친 분, 서울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온 분 등이 함께 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분들의 입국 목적은 사회과학의 불모지인 남한 땅에 사회과학의 나무를 심겠다는 것이었다.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비장한 각오를 하고 오신 이분들이 후진국 경제론을 보고서는, 이렇게 높은 이론적 역량을 갖춘 훌륭한 학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오직 국내 활동가를 돕는 일에 매진하겠다는 소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어찌 됐든 후진국 경제론70년대 후반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함께 진보진영의 필독서가 된 것은 알만한 분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박현채 선생과 나는 이러한 현실비판을 넘어 민족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들도 시도하였다. 1978년 공간된 민족경제론은 이와 같은 노력들을 취합하여 엮어진 결과인 것이다.

6장 이름 없는 전사 박석삼

박석삼의 회고

나는 1955년생입니다. 위로 두 형과 누나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셋 있습니다. 1979113일 박정희가 땅에 묻힌 날 석률 형과 함께 잡혔다가 전두환이 백담사에 가던 며칠 후 19881221일 출소했습니다.
남들은 이걸 보고 오해를 합니다. 청춘을 감옥에서 썩혔다고. 그러나 나는 청춘을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1980년대 초반 학생들이 감옥에서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를 부를 때, 나는 왜 남들이 자신을 기억해야 되는지 황당했습니다. 그 뼛속 깊은 소부르주아적 관점을 경멸했습니다. 나는 남주 형의 시에 대해서도 한 번도 공감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힘이 아니라 펜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을 감옥에 있었던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았고, 자기 역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하면서 자신을 정립한 것도 좋았지만, 단 한 번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재소자 대중까지 조직해서 교도소의 폭력에 반대하여 처우개선 투쟁을 했고, 투쟁 상보를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을 겪은 사람들이 아직도 박석삼을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옥중투쟁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단식투쟁을 수없이 했습니다. 강제급식을 가장 많이 당했고, 통닭구이까지 당하면서 저항을 했습니다. 1980년대 전반, 정치범들은 법무부와 권력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내가 제일 평가받는 것 혹은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이 지점입니다. 나는 1980년대 전반 옥중투쟁의 모범이 되고자 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합니다. 100년 전 200년 전에 나온 고전들의 주장을 암송하여 주장한 적도 있었지만, 현실 속에서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자명한 주장과 명제도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남들에게 불편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조용히 나의 길을 추구합니다. 존재를 모두 불태우고 아무런 흔적도 남김없이 사라져갈 겁니다. 묘비도 남기지 않을 겁 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름 없는 전사입니다.

7장 박석률, 박석삼 형제들의 옥중 편지

관현이는 죽어가면서도 영일이를 걱정했지

어머님 !
10월의 차가운 공기가 아침, 저녁을 파고듭니다. 6년 전 이맘때였지요. 관현이가 우리들 곁을 떠난 처우 개선을 내걸고 온몸으로 싸우기 몇 날 며칠이었던가요. 모두 합하면 40여 일도 더 넘었을 것입니다.
밖에서는 관현이가 밥알에 섞인 나팔꽃 씨 때문에 단식한 것처럼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관현이는 재소자의 처우 개선을 위하여 외치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6년이 지난 오늘도 관현이가 우리 곁을 떠났던 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분노했던가를. 관현이는 죽어가면서도 동료 영일이를 빨리 입원시키라고 더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 며칠 전에는 신향식 선생님의 가신 날을 맞아 추모의 정을 바쳤습니다. 가신 님들의 명복을 빕니다.
1988. 10. 12 광주에서

1113, 전태일을 기리며

어머님!
갑자기 무서리가 내릴 듯한 차가운 날씨가 계속되는군요. 오늘 1113일은 1970년 바로 그날 전태일이 온몸을 불사르고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치다가 우리 결을 떠나간 날입니다.
어머님! 그 무렵이 기억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판자 울타리를 부수어가지고, 불을 피워 국수를 끓여 먹던 날이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던 그때를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무렵의 서울은 농촌을 떠난 이농민만 해도 330만 명이나 몰려들어 거리마다 실업자가 넘쳐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무렵 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창동 골짜기 집까지 걸어 다녀야 했던 날이 많았습니다. 아침에 갖고 나온 교통비를 털어 점심을 굶고 있는 소년 노동자들에게 풀빵을 사주어 끼니를 때우게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굶고요. 그러고서 밤늦게 일이 끝나면 청계천 5가에서부터 창동 골짜기까지 걸어갔다고 합니다.
1988. 11. 13. 광주에서

8장 박석률 유작 외

만날 수 없는 새 1

- 겨레새

오던 날은 몰랐지요
내 나라 내 땅을 오고 가는 줄
에돌아 가고 험한, 굽이굽이 길
한밤중 철창문 두들기는 소리, 뜬눈으로 밝히는구나
무덤 속이 이보다 더하랴,
가는 세월 오는 세월, 수 삼십 년
두 팔, 두 발 묶인 채
초록의 색깔조차 뺏으니
짐승도 힘들고, 식물도 힘들었어
썩어 가는 공기,
서리 찬 새벽, 조각달 걸리고
육체는 썩어 가도
생각만은 가둘 수 없다
가시는 날은 내 나라 내 땅위에 입맞춤하면서
달려가지요
에헤야 에헤야 에헤야
겨레새가 되어
지리산 천왕봉으로 묘향산 금강산을 부르며
달려가지요, 달려가지요
통일새들처럼 뛰어가지요 날아가지요

박석률 기념사업회 준비위 기획, 황광우 편,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젊음을 바친 그 시절, 광주 사람들-혁명가 박석률과 그의 벗들, 심미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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