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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2022-05-12 09:39
Writer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이 빛나는 계절에 위대한 시민들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황석영)

32년 전의 지하 베스트셀러
이제 우리는 5·18을 떳떳하게 기억한다.

 

간행의 말
진실 왜곡,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

1997‘12·12, 5·18 재판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은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
5·18은 특별법 제정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됐다.
20115·18 기록물은 영국의 <대헌장>(Magma Carta, 1215), <미국의 독립선언문>(1776),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1789) 등과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에서 길이 빛날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머리말
이제 또다시 어둠을 넘어서-황석영

나는 광주 후배들의 요청에 의하여 항쟁 기록의 출판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것을 기꺼이 수락했다.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구속과 핍박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으나 이는 작가로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문병란 시인의 절규와 같은 시 구절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가 광주항쟁 기록의 제목이 되었는데, 이는 식민지시대 이래 우리 민중의 근현대사를 집약해주는 말이기도 하였다.
전남도청의 마지막 새벽, 처절하게 상징화되었던 삶과 죽음은 190년대 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의 깃발이 되었다.

추천사
광주의 비극은 서울과 워싱턴의 합작품-브루스 커밍스Bruse Cumings(시카고대학 석좌교수)

이 책은 한국인들은 물론 한국문제에 관심 있는 미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한국현대사에서 광주문제가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만이 아니라, 광주의 비극이 서울과 워싱턴 두 나라 정치권력의 합동작품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미국 사람인 나로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광주항쟁은 미국이 한국의 군사독재자들을 수십년간 지원한 결과였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밑바닥으로부터 성장했고, 수백만 명의 희생을 치르면서 더욱 강해졌다.
아직 완벽한 민주체제를 구축했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아시아인들의 문화와 가치에 대한 서구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놀랄 만한 시민사회를 건설한 것이다.

5·18광주 민중항쟁

1. 5·17 비상계엄

신군부의 음모

5·17군부반란은 유신잔당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두 번째 군부반란이다. 12·12로 권력 장악의 가장 주요한 발판인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차근차근 정권장악에 매진하였다. 그들은 섣불리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최규하 정부를 축출하고 일거에 정치권력을 잡을 경우 18년 박정희 독재에 강한 혐오감을 가진 민중의 저항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박정희가 남긴 군부독재 혐오감을 딛고 권력을 장악하자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좀 더디지만 확실한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권력을 손안에 넣기까지 8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세 가지 음모를 추진했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돌베개, 1989, 2022.)
첫째, 민중들의 한결같은 열망인 민주개혁을 최대한 저지시켜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우선하여 민주적 개헌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둘째, 여론 조작을 통해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정국 안정을 책임질 수 있는 강력한 정부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학생, 재야, 야당 등 조직적인 저항 세력의 고립을 유도했다. 이를 위해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198021일 보안사령부 내에 언론조종반을 두어 언론계를 회유 협박하고 언론을 검열 민주 개헌이나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야당, 재야, 학생운동에 대한 보도를 삭제토록 하였다. 이들의 행동을 안정을 깨뜨리는 폭력ㆍ파괴 행위로 보도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거듭 강조하면서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셋째, 예상되는 저항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군대를 준비하고 훈련시켰다. 이른바 충정훈련이었다. 충정훈련은 폭동진압훈련이라고도 불렀는데. 국민들의 혈세로 유지되는 군대를 동원하여 자기의 부모형제 가슴에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도록 하는 야만적인 훈련이었다. 충정훈련의 명령은 1980218일 내려졌다.
이 같은 작업은 은밀하게 추진되었고 그 결과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음모는 효과적으로 은폐되었다.

민주화의 봄
재야, 학생 노동 운동권에서는 10·26 사건 이후 12·12 군부반란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791124YWCA 위장 결혼식을 계기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열었다. 이는 유신체제를 부활하려는 배후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10·26으로 계엄령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모임이나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잠시 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대회장에 난입하여 난투극을 벌이고 여기에 참석한 재야인사 96명을 체포하고 다시 44명이 추가로 연행되었다.
19803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소위 민주화의 봄이 시작됨과 동시에 각 대학에서 학원 민주화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학원 민주화 투쟁에서 제기된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다.

- 학도호국단의 폐지와 직선제 총학생회의 부활
- 학칙 가운데 비민주적인 조항의 제거
- 학생활동과 학내 언론의 자율성 보장
- 정보원의 학원 사찰과 학내출입 금지
- 학원의 족벌운영 반대 및 재단 부조리의 척결
- 어용교수 퇴진 및 지도교수제 폐지
- 학교시설의 개선
- 학원을 병영화하는 병영집체훈련 등 군사훈련의 철폐

학원 민주화 투쟁은 광범위한 학생들의 참여가 있었으며 일부 어용교수 퇴진과 학칙 개정 등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대학가의 투쟁은 4월의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을 계기로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병영집체훈련은 학원의 병영화를 목적으로 한 유신체제의 대표적인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은 군부독재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측과 첨예한 대립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은 학생운동이 본격적인 대정부 정치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군부와 최규하 정부는 국민들의 반공의식을 부추기는 가운데 학생운동과 군부의 정면대결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현장은 사정이 달랐다. YH사태에서 보듯이 노동자들은 유신체제하에서 완전한 무권리 상태에서 짓눌리고 빼앗기면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왔다. 노동자들의 처절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권력의 잔혹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권력은 공포스러운 존재였고 함부로 덤비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로 느꼈다. 그런 만큼 당장 노동자들이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음모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절대 권력자가 사라지고 다소나마 숨통이 트이자 노동자들은 우선 최소한의 권리찾기에 나섰다.
1980년 봄이 되자 노동자들은 우선 노조결성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5·17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8만여 명이 새로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이와 함께 노동자들은 임투시기를 맞이하여 보다 과감하게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했다. 3월에 접어들어 해태, 롯데 등 제과업계 11개 노조가 8시간 노동제 실시를 목표로 투쟁에 돌입했다. 12시간에 받았던 임금을 8시간 기본급으로 전환시킴으로써 4050%에 달하는 임금인상 효과를 가져왔다. 제과업계 8시간 노동제 실시는 즉각 다른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연쇄적인 투쟁을 가져왔다.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19805·17쿠데타 이전에 발생한 노동쟁의는 2,168건에 이르렀다.
19804월이 되자 권력이 노동현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하는 등 투쟁의 물결을 잡으려는 조치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420, 강원도 사북 동원탄좌에서 1980년 당시 가장 치열했던 노동자 투쟁이 일어났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2230.) 시작은 조그만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노조지부장이 회사와 짜고 임금인상률을 20%로 몰래 낙착시켜 버린 사실에 분노한 30여 명의 노조원이 노조지부장의 사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이에 회사측은 경찰에 연락하여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옛날 같으면 조용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경찰 난동은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원한을 폭발시켰다. 418, 노동자들이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질세라 경찰이 다시 출동하여 이들을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지프가 광부 4명을 다치게 하고 그대로 뺑소니쳤다. 동료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한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경찰과 충돌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3,500여 명의 노동자 거의 전원이 들고 일어나 노조 사무실과 광업소 사무소, 정선경찰서 사북지서를 점거했다. 무기고와 예비군 무기고까지 점거했지만 무장하지는 않았다.
인근에 있는 5백여 명의 기동경찰이 급파되었지만 치열한 투석전으로 맞선 노동자들의 기세 높은 공격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이로부터 3일 동안 사북읍을 노동자들이 장악하여 노동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관제 언론들은 노동자들이 사북읍을 장악한 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 보도하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일부 불순세력의 선동에 의한 파괴운운하는 악의적인 보도가 대부분이었다.
강원도경 경찰의 진압작전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으며, 사북읍은 424일까지 치안 공백상태에 빠졌다. 사태가 진정된 후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사북 노동자 투쟁은 전국의 노동자 투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대규모 사업장의 투쟁에 불길이 번지게 되었다.
19805월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보다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414일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전두환이 차지함으로써 행정부를 장악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권력 장악을 위한 최후의 순간만을 노리는 상태가 되었다. 정국은 이른바 안개정국이 형성되었다.

서울역 회군

5월 들어 다수의 학생들이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한 쿠데타 음모를 감지하여 투쟁의 목표를 계엄령 해제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대규모 가두시위의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510일 신민당과 공화당은 총무회담을 통해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를 건의하기로 하였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즉각 개헌공청회를 취소하고(510), 북한 게릴라 침투의 위협이 높다는 근거 없는 이유를 들어 전군과 경찰에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할 것을 명령하였다.
512, 일부 총학생회 간부의 나약함이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 이동을 쿠데타의 징조로 보고 총학생회 간부들이 나서서 학생들을 귀가시킨 후 자신들마저 도망가 버린 것이다.
13, 더 이상 총학생회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직접 독자적인 가두시위에 나섰다. 6개 대학 2,500여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이에 총학생회 간부들은 떠밀리다시피 14일 오전부터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4일 정오를 전후하여 7만여 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개개인의 자신감으로 충만한 수만의 학생 시위대는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난사하는 경찰에 맨손으로 돌진하면서 곳곳에서 경찰 저지선을 돌파, 순식간에 영등포, 청량리, 신촌 등 도심으로 밀려들었다. 학생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가자! 광화문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을 향해 돌진했다.
다음날 515, 투쟁의 규모는 한층 확대되고, 범위 또한 확산되었다. 서울에서만 10만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지방 26개 대학에서 일제히 투쟁의 함성이 울렸다. 서울역 광장에서는 어제와 달리 연좌농성을 벌이면서 전두환 신군부 세력과 최규하 정부를 규탄했다. 그 주위를 에워싼 시민은 3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농성 중이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농성 지도부는 이를 거절할 뿐 아니라 위험에 처할 것을 염려해 자진 해산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근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빵과 휴지와 수건이 학생들에게 날아들었고 지갑을 털어 학생들에게 밥을 사주었다.
각계 저명인사들은 학생들 시위를 지지하는 시국선언을 하였다. 김영삼, 김대중 두 김씨는 16일 회담을 약속하며 각자 학생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공화당 역시 당무회의를 열어 계엄령 해제 시기를 정부에 요구하기로 하였다. 기자협회는 517일 회의를 열어 불법부당한 보도검열을 거부함으로써 자율언론을 실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계속된다면 학생 시위만으로 쉽게 움직이지 않던 민중들까지도 투쟁에 합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결사항쟁의 각오로 학생들이 투쟁을 계속한다면 말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0만여 학생들이 서울역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던 시각, 군 병력의 이동을 알리는 시민들의 제보가 계속 날아왔다.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 부근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가 집결했다는 제보였다. 이 제보는 즉각 서울역으로 전달되었다. 서울역을 사수하자는 연설에 우레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학생들의 불안감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 순간 치명적인 일이 벌어졌다.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시위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시민들이 호응이 적다(?)는 석연찮은 이유에서였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 결정된 것이다. 학생들은 지도부의 뜻에 따라 학교로 복귀하고 일부는 대성통곡 땅을 치며 분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서울역 집회에서 보수 야권의 국민연합은 소요사태로 계엄당국의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전민노련과 전민학련이 내세우는 광화문으로 진출하여 미 대사관을 둘러싸서 미국에 군부출동 저지선거 보장을 받아내자는 주장을 북한 간첩이나 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서울역 집회가 시민 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민주정부 수립요구와 함께 대규모 군중 집회로 이어지자 다급해진 국민연합은 심재철 유시민 등 학생 지도부를 불러 서울역 회군을 종용하게 되고, 이 서울역 회군 결정은 전두환 일당에게 탄압 명분을 주게 되었으며,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른 시위 주동자 체포령으로 서울의 봄은 끝나게 된다. 이로써 광주학살은 예견된 것이었다.
서울역 회군으로 서울에서의 투쟁 열기는 급속히 식어버렸다. 16일에는 광주에서 횃불대행진과 5·16화형식이 있었지만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권력에 대항하기에는 너무 세력이 미약했다.
학생들이 퇴각을 결정하자 군부는 학생들이 겁을 먹고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권력 장악을 위한 행동에 돌입하였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국회에서의 계엄령 해제 결의와 같은 정치권의 압박은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학생 시위가 퇴조하고 투쟁의 열기가 식어버린 1980517일 일요일은 그들이 권력을 장악할 최적의 순간이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즉각 행동에 돌입하였다. 517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탱크로 무장한 군병력을 주요 도시에 투입했으며, 전국의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림과 동시에 군부대를 대학 내에 투입 완전 장악해 버렸다. 이와 함께 이화여대 회의장을 급습, 각 대학 학생 대표를 연행했고, 아울러 주요 대학 학생회 간부에 대해 검거령을 내림으로써 학생회의 공식 조직을 사실상 와해시켰다. 10시를 전후하여 미리 작성하여 명단에 올라 있는 재야인사의 집을 급습, 김대중,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리영희 씨 등을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했다. 계속해서 쿠데타군은 김종필, 이후락 등 여권 주요 인물들을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하였다.
518일 계엄사령부는 포고령 10를 발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520일 오전 10시 소집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의원들의 등원을 총칼로 저지했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13137)

2. 5·18민중항쟁 10

폭압적인 5·17쿠데타가 단행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휘몰아치자 대부분의 민주세력은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저항을 지도할 인물은 검거되거나 검거를 피해 몸을 숨겼다. 모두들 숨죽이고 공포 속에서 이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나 단 한 곳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그것은 518일 아침 광주 전남대 정문에서 시작되었다.
광주에서는 민족민주화성회 마지막 날인 516, 횃불대행진과 516 화형식을 평화적으로 마치고 서울의 학생 대표자 회의의 결정에 따라 17일 시위를 쉬기로 하였다. 다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휴교령이 내려지면 오전 10시 학교 정문 앞, 정오 도청 앞으로 집결한다는 행동방침이 정해졌다. 그런데 쿠데타가 발생 휴교령이 내려졌다. 광주 일원의 대학들은 7공수여단에 의해 완전 장악되었다.
갑작스런 계엄군의 등장으로 학생운동 지도부가 마비된 것은 광주도 다른 지역과 비슷했다. 항쟁의 첫 도화선이 된 18일 아침 오전 10시 약속했던 바와 같이 아침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200여 명의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10일간의 항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민중항쟁=광주민주화운동은 삼 단계로 진행되었다. 자연발생적 민중항쟁의 시기(1821), 해방 광주의 시기(2225), 최후 항쟁의 시기(2627)가 그것이다.

자연발생적 민중봉기의 시기(1821)

운명의 날, 18일 계엄확대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민주화 시위를 한 곳은 전국에서 광주뿐이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번뜩이는 총칼 앞에서의 이 당돌한 외침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남한 유일의 힘 있는 포효였다.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빛이었다.
자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치민 공수부대원들이 갑자기 공격 앞으로!” 외치며 학생들에게 달려들어 진압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10여 명이 학생들이 붙잡혀 무참히 짓이겨져 버렸다. 말리는 시민들도 폭력에 난타당했다.
격분한 학생들은 광주의 중심지 금남로를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1130분경 시내 중심가의 금남로 가톨릭센타 앞에는 500여 명으로 불어난 학생 시위대열에 수녀 50여 명도 합세했다. 금남로 한쪽 차선을 점거한 채 항의 농성이 시작됐다. “계엄군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었다. 경찰기동대가 들이닥쳐 최루탄을 뿌려 이들을 해산했다.
광주에서 오전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군본부 지휘부는 공수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광주에서의 시위를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자신감을 회복하여 군부 쿠데타의 저항에 나설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31사단장은 2명의 7공수 대대장과 광주경찰서 경비과장과 회의를 열였다. 오후 4시까지 7공수가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이로부터 공수부대의 무자비하고 피비린내 나는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총칼의 무서움을 모르는 광주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기를 꺽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야.”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와 시민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제주 4·3항쟁이나 여순항쟁에서 그랬듯이 그들은 죄 없는 시민들이라고 해서 가만두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농아자, 여학생, 신혼부부 등 남녀를 가리지 않고 군홧발로 짓밟고, 진압봉으로 패고, 총 개머리판 등으로 두들겨 팼다. 심지어는 대검으로 찔렀다. 최초의 사망자는 말 못 하는 장애자였다.

519, 공수부대를 통해 광주를 마음껏 난도질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이 정도의 공포감을 조성하면 광주는 조용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광주가 어떤 도시인가? 19일 아침 시내 중심가는 철시를 하고 삼엄한 경비 속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전날의 만행에 분노한 시위대는 점점 늘어만 갔다. 중고생들까지 나서서 시위대에 참여하여 전두환 퇴진을 외치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의 시위대의 규모는 어제보다 더욱 늘어나 3,000여 명에 달했다. 시위대 옆에 나와 있는 많은 시민들이 학생들을 격려했다.
11시가 넘어서자 밤중에 증파된 11공수여단이 도청 앞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해 시위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악랄하기는 7공수부대와 마찬가지였다. 3, 4명씩 짝을 지어 다니면서 건물 안 상점 안까지 샅샅이 뒤져 학생 시민들을 연행하다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바로 대검으로 찔러 버렸다. 항의하던 할아버지,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 기사, 학원생들도 모두 진압대상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시민들이 시위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위의 주도권이 점차 대학생에게서 시민 중고등학생들에게로 넘어갔다. 녹두서점을 비롯한 곳곳에서 화염병이 만들어졌다.
11공수여단이 점심식사를 위해 주둔지인 조선대운동장으로 들어간 사이 그 공백을 틈타 시민들이 다시 금남로로 밀려들었다. 시민들의 분노는 딴전만 부리고 있는 언론에게 향하였다. 광주 상황에 단 한마디 보도도 없었던 전일방송이 공격의 대상이었다.
오후 540분 광주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계엄군이 최초로 발포하였다. 고등학생 한 명이 쓰러졌다. 그는 즉각 시민들에 옮겨져 생명을 구했지만 복부 관통상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볍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지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트럭에 실려 가지 않고 중상을 입고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손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부상자들과 죽어가는 사람들로 광주 시내의 병원 시설로는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520, 밤새 내리던 비가 오전 9시경 그치고 오전 중 시위는 소강상태였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윤상원의 주도로 전남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명의의 <선언문>이 뿌려지고 시위가 시작되었다. 만여 명이 넘는 인파가 금남로를 가득 메웠다.
시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외신기자들이 철수하자마자 공수대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평화적인 시위대의 정수리를 갈기기 시작했다. 정수리에서 피가 솟구치고 사람들이 짚단 넘어지듯 쓰러졌다. 잡힌 시위대의 옷을 벗겨 팬티만 입힌 채 무릎을 꿇리고 이마를 땅바닥에 대도록 해서는 계속 곤봉으로 두들겨 팼다.
이제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시민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칼이나 송곳을 찾아 무장하기 시작했다. 윤상원도 송곳을 바지 주머니에 숨기고 다녔다. 물러났던 시위대가 몰려와 계엄군과 혈전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각목, 쇠파이프, , 연탄집게, 식칼, 화염병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들고 나왔다. 시위는 민중봉기로 질적인 변화를 하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고속버스와 시내버스를 앞세우고 200여 대의 택시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금남로에 들이닥쳤다. 군중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환영했다. 공수대원들은 차량 행렬을 향해 최루탄을 쏟아부었다. 개머리판으로 차량을 부수고, 운전사를 끌어내 두들겨 팼다.
오후 8시경에는 MBC 광주방송국도 불에 탔다. 뜨거운 열기가 광주를 달궜다. 밤새도록 시위가 계속되었다. 전옥주, 차명숙(본명 전춘심) 두 여성이 방송 차량에서 마이크를 잡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수천 명의 시위대를 새벽까지 이끌었다. 수만 명의 시민에 포위된 계엄군은 공포심에 휩싸였다.
1030, 신역을 지키던 3공수부대에서 발포를 시작했다. 이날 밤 광주역에서 최소 5명 이상의 시민이 죽고 수십 명의 시민이 다쳤다. 도청을 지키던 11공수여단에게도 실탄이 분배되었다. 이는 다음날 오후 1시 집단 발포로 이어졌다.
자정 무렵 전교사령관은 전화를 걸어 공수부대를 외곽으로 철수시키고 보병부대 투입을 건의했다.

521일 계엄사령부는 새벽 430분 긴급참모회의를 소집했다. ‘자위권 발동’, ‘공수부대 외곽 철수’, ‘광주 봉쇄등의 방침이 정해졌다.
21일은 부처님 오신 날(음력 사월 초팔일)이었다. 아침, 사람들은 밤에 죽은 시신 두 구를 태극기를 덮어 리어커에 싣고 도청 앞 분수대로 향했다. 시체는 맞아서 죽었는지 온몸이 멍들고 부어 있었다. 시신은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시민들은 전날의 차량 시위를 계승하여 보다 강력한 차량 시위대로 공수부대를 밀어낼 준비를 하였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차량 56대를 징발하여 10만 이상이 모여 있는 금남로로 향했다. 시위대의 식사는 동백회원들을 위시하여 동네 아주머니들이 준비했다. 시장 주변에는 쌀과 반찬, 음료수, 빵 등을 모아 지나가는 시위대 차량에 건네주었다.
유인물 <투사회보>가 뿌려졌다. <투사회보>는 들불야학팀이 만들었다. 도청 앞 시민들과 공수부대와 3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시민들의 항의 집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광주시민의 피를 보상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구속 학생ㆍ시민을 석방하라!”
우리는 죽음으로써 광주를 사수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양측 사이에 감도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정오가 지났으나 공수부대는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시민들이 힘으로 그들을 밀어내기로 결심했다. 공수대원들은 20열 횡대로 정열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중간에 있던 차량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갑자기 시위대 장갑차 한 대가 공수부대 저지선으로 돌진했다. 순식간에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졌다. 공수부대들은 도청 쪽으로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원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시민들은 분수대 앞에까지 전진했다. 버스 1대가 도청으로 접근하자 분수대 근처에 있던 일부 병력이 사격을 가했다.
바로 그 직후 오후 1시 정각, 애국가가 연주되면서 갑자기 드드득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한 것이다. 위협을 느낀 공수대원들이 비무장 시민들에게 향한 피의 학살이었다. 저격병도 동원되었다. 고층 건물에 매복해 있던 저격병들은 시민 지도자들을 겨냥해 조준 사살하였다. 10분간 이어진 사격으로 금남로는 피바다를 이루었다. 아비규환의 금남로였다.
이어 광주 만세!”를 외치며 장갑차로 돌진하던 청년 한 명이 주변 저격병의 표적이 되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56명의 청년들이 나타나 태극기를 흔들면서 구호를 외쳤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그들 역시 간악한 무리들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날 발포로 최소한 시민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도청뿐 아니라 전남대 앞에서도 오전 10시부터 시민들은 많은 희생을 내며 공수대원과 공방전을 하고 있었다. 한번 발포를 시작한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많은 운전기사들이 총에 맞아 죽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서둘렀다. 누가 지시하거나 명령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시민 각 개인 스스로 판단하여 이루어졌다. 광주 근교 화순, 나주, 장성, 영광, 담양 등지의 경찰서나 지서에 있던 예비군 무기고가 목표였다. 전남지역 각 군에는 경비경찰이 한두 명밖에 없었다. 모두 광주로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확보했다.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다. 무장 시위대는 시민들에게 총기를 나눠주고 기본적인 총기 조작 훈련을 가르쳐주었다.

광주시민은 더 이상 총에 맞아 죽을 수만은 없습니다. 광주시민을 지킬 수 있는 사람과 죽음을 다해 싸울 수 있는 사람만 총을 받으시오.”

집단 발포 2시간여 만에 시민군은 신속하게 M1, 칼빈총과 같은 재래식 총기를 확보하고 도청을 향해 모여들었다. 시민군은 10여 명씩 짝을 지어 부대를 편성하고 각 조별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되었다. 시민군이 나타나자 시민들은 열광적인 환호로 이들을 맞이했다. 무기는 계속해서 반입되고 시민군의 숫자는 늘어갔다. 이미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날 가장 치열했던 도청 공격에 참가했던 중학생 시민군의 증언을 들어보자. 최종북은 당시 나이 15세 무진중학교 3학년생으로 도청 공격 특공대원으로 뽑혀 활동하다가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대검에 찔리고 전신을 구타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금남로는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계속되다 쥐 죽은 듯 조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수천, 수만의 눈들은 숨어서 도청을 지켜보고 있었다. 본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했다. 쓰러져간 시민들을 치료하기 위해 시민들로 구성된 수송대가 적십자병원 완장을 차고 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차에 실려 갔다.
금남로 3가에서 젊은 청년이 도청으로 갈 사람은 21명만 트럭에 타라고 했다. 목숨을 던져 싸울 사람만 나오라고 했다. 50여 명이 달려 나와 서로 차를 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청년이 총를 쏘면서 20명만 타라고 했다. 곧이어 20명이 탄 트럭이 도청을 향해 갔다. 또다시 총소리가 진동했다. 트럭에 탄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지프차에 탄 우리 일행 5명은 군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해 분수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진격했다. 분수대로 돌진해 가는데 갑자기 차의 기름통이 고장났다. 그곳에 머뭇거리면서 본부에 연락을 했다. 본부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다시 차를 몰고 나가고 있을 때, 운전사가 공수부대원의 총에 맞고 죽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대신 운전하고 가다 분수대에 처박히고 말았다. 지프차는 뒤집어져 분수대에 빠졌다. 차에서 빠져나오려다 3명이 죽었다. 나는 분수대에 처박힌 차에서 빠져나오느라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 어렵게 간신히 빠져나와 분수대 아래로 기어 나왔다. 도청에서는 연방 총을 쏘아댔다. 총에 맞을까 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수협 쪽으로 기어서 갔다. 총알을 피해 가며 정신없이 기었다. 내가 수협 앞에 왔을 때, 3명의 공수가 내 손을 군홧발로 밟았다. 그들은 대검으로 내 팔을 찍고 군화발로 차더니 웃통을 벗겨 YMCA로 끌고 갔다. 고개도 못 들게 하면서 개머리판으로 마구 찍었다. 놈들은 무자비하게 전신을 구타했다.
YMCA에 도착해 나를 입구에 세워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발에다 총을 쏘았다. 그 당시 나는 총을 맞은 지도 모를 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다리와 무릎에 또 총을 쏘았다. 내 옆에 있던 두 사람은 공수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때 나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공수들은 전라도 말을 했다.
죽은 척하지 마, 이 자식아!”
공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는 의식이 거의 없어 몸이 축 늘어졌다. 몸의 감각도 거의 없었다. 얼마 후 계엄군이 YMCA로 나를 끌고 가더니 화장실 좌변기에 나의 머리를 처박아 넣었다.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때 밖에서 갑자기 철수한다고 "시체를 빨리 실어!"라고 외치면서 무척 서둘러 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버려둔 채 갔다.(5·18증언자료, 5·18증언: <중학생 특공대의 도청 공격>, 증언자 : 최종북. 조사일시 : 1988. 10.)

오후 4시 공수부대는 시내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공수부대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로 양측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철수했다.
시위는 전남 각지로 번졌다. 521일 버스를 타고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 2백여 명은 나주, 함평, 무안을 거쳐 목포에 나타났다. 광주 소식을 단편적으로 듣고 있던 목포시민들은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2일 새벽에는 청장년을 중심으로 파출소와 무기고를 접수해 무장한 시위대는 사실상 목포를 완전 장악했다. 목포의 소수 경찰들은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스스로 해산해 버렸다. 함평, 나주, 영산포, 영암, 해남 화순 등지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은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해 나갔다.
오후 7시 도청이 완전 시민군 손으로 넘어왔다. 도청 앞 화단에는 시신만 즐비했다. 신원확인을 위해 화단에서 시신을 파내었다.
광주는 해방구가 되었다. 이는 광주시민들이 피 흘리며 투쟁한 위대한 승리였다. 시민들의 투쟁은 어떤 조직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중ㆍ고등학생을 포함한 청년ㆍ학생들, 시민의 무장화는 윤상원에게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당시 어느 운동가들도 광주시민이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누구도 광주 민중의 위대한 저항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측할 수도 없었다. 민중의 폭발력은 이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방 광주의 시기(2225)
22일 항쟁 5일째 날이 밝았다. 믿기지 않은 승리였다.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했다. 벅찬 감동이 도청 앞 광장에 넘실되었다. 도청 앞 광장은 광주시민에게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광주시가 광역시로 분화되기 전인 1980년은 전라남도라는 광역자치단체 산하에 광주시가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전라남도청은 광주ㆍ전남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계엄군과 시민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곳이 도청을 향한 금남로였으며 최후 방어지역도 도청이었다. 시민들은 길거리에 방치된 차량을 치우고, 금남로를 적셨던 핏자국을 씻어냈다.
광주공원에서는 시민군들의 재편성 작업이 시작됐다.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 상황실로 사용했다. 기동순찰대를 편성하여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출동하도록 대기시켰다.
시장과 상점들은 정상적으로 문을 열고 부상자들로 부족했던 혈액은 시민들의 헌혈로 남아돌았다. 경찰의 치안 활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도 사건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시민군과 수습대책위에서 필요한 자금이 해결되었다. 1천여 명에 이르는 시민군들의 매끼 식사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주먹밥으로 해결되었다.
이와 같이 해방 광주의 시기는 광주시민의 민주적 역량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해방 기간 광주시민들의 의지를 모아내는 역할을 했던 것은 시민궐기대회와 <투사회보>였다. 시민궐기대회는 김태종, 박효선 등 극단 광대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23일부터 도청이 진압되기 전 26일까지 총 다섯 차례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시민들은 매일 향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행동방침을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결정했다. 해방 광주 기간 직접 민주주의 원리에 바탕을 둔 완벽에 가까운 자치공동체를 광주시민은 경험한 것이다. 해방 광주, 그것은 기존의 낡은 질서가 무너진 속에서 민중 자신의 손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민중 세계를 보여준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억압의 질서가 무너지고 해방의 질서가 대신한 광주였다.
<투사회보>는 광천동에서 운영되던 들불야학 강학들과 학생들이 발간했다. 윤상원, 전용호, 김영철, 박용준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든 <투사회보>는 광주시민의 눈과 입이 되었다.
이제 광주시민 앞에 어려운 과제가 남아 있었다. 항쟁지도부를 세우고 그를 중심으로 항쟁의 발전 과정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항쟁지도부가 어떤 세력이냐에 따라 항쟁의 방향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광주시민은 항쟁을 내부적으로 와해시키려는 음모와 대결해야 했다. 그동안 시민들의 거센 투쟁 열기에 압도되어 숨을 죽이고 있던 친정부 인사들은 재빨리 항쟁지도부를 장악함으로써 항쟁을 무력화시키려고 하였다. 522일 정시채 부지사를 중심으로 ‘5·18수습대책위원회를 광주의 유지급 인사들로 구성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수, 변호사, 신부 등 재야인사를 합류시켰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하여서 더 이상의 유혈을 방지하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반납하고 치안을 계엄군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시민들 중에서도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기층민중들은 이 같은 수습대책위원의 제안에 강한 반발을 보였다. 그들은 전두환 처벌을 요구했다. 그것만이 광주시민의 피의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길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무기 반납을 하면 누구에게 보상받으란 말이냐!며 무기 반납을 단호히 거부했다.
한편 박충훈 총리의 신임 내각이 들어섬과 함께 신군부는 22일 오전 10시 전교사령관을 소준열 소장으로 교체하고 강경진압체제를 확립했다. 미국도 이에 사실상 동의했다. 미국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철수하자마자 522일 요청한 한국군의 군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에 동의하였다. 미국 역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기다리지 않고 무력에 의한 진압을 일찌감치 결정해버린 것이다.(군사반란세력 입장에서는 미국의 협력을 끌어내 광주 무력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300.)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은 22일 신라호텔의 중앙 언론기관장과의 간담회에서, “광주 시내 철물상회가 약탈대상이 되고 있다면서 있는 놈 때려잡자는 구호까지 등장했다는 등 현지 사정과 동떨어진 유언비어를 언급했다. 계속해서 그는 군이 시가전을 각오한 일대 작전을 준비 중인데 작전할 경우 2시간 내 진압할 자신이 있다. 군은 결심한 이상 물러설 수 없다면서 ‘24을 기해 광주 시가전을 각오하고 대작전을 펴겠다며 유혈진압을 강력하게 시사했다.(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298300.)

23일 일반 수습대책위원회를 대신할 새로운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총기 회수 문제로 내부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투항파로 분류되는 김창길 등 학생수습대책위가 나서서 총기 회수에 앞장섰다. 25일까지 회수된 총기는 모두 4,500정이었다. 5,000정 가운데 90%가 회수되었다. 그에 따라 시민군의 수도 5,000명에서 500명 정도로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외곽을 방어하는 시민군은 도청 내 상황과 관계없이 무기 반납을 거부한 채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24일 항쟁파로 분류되는 김종배, 허규정 등의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이 채택되었다.

첫째, ‘광주사태에 대하여 정부는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사과하라.
둘째,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구속된 학생ㆍ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피해보상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학생수습위는 항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투항파가 한걸음 물러났다.

25일 오전 10시 광주YWCA 회의에 재야 민주 인사들이 모였다. 정상용은 일단 총기 회수를 중단할 것을 설득하였다. 설득은 쉽지 않았다. 서로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다 회의는 끝났다.
시민들은 총기 회수를 하면 피바람이 불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총기 회수 결사반대를 외치며 제3차 궐기대회에 참가했다. 계엄군은 총기가 회수되지 않으면 어떠한 협상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항쟁파는 1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총기를 지급하고 시민군을 재편하여 초소에 배치하였다. 오후 7시 온건파와 항쟁파 사이에 총기 회수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25일 밤 9, 항쟁파는 투항파 김창길의 수습위원장직 사의를 받아내고 학생수습위원회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위원장을 김종배로 하고 내무담당 부위원장 허규정, 외무 담당 부위원장 정상용, 대변인 윤상원 등 결사항쟁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항쟁지도부가 재건된 것이다.
이들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시민들의 투쟁 열기를 고조시키는 한편 시민군을 개편하여 계엄군의 재진주에 대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때 무력진압 방침에 대해 미군과 협의를 마치고 모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최후 항쟁의 시기(2627)

526일 새벽 4, 광주 외곽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무전기를 통해 도천 상황실이 전해지자 도청에 비상이 걸렸다. 27일 새벽 소탕작전을 앞두고 시민군의 반응을 미리 떠보고, 교란시키기 위한 교란작전이었다. 곧바로 도청 전 병력이 무장 출동할 수 있도록 무기와 탄약 보급이 이루어졌다.
2층 부지사실에서 철야를 하던 나이든 수습위원들이 계엄군 진입을 막겠다고 앞장섰다. 이성학 제헌의회 의원, 홍남순ㆍ이기홍 변호사, 김성룡ㆍ조비오 신부 등 17명이 도청을 출발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바 죽음을 각오하고 온몸으로 계엄군을 막겠다는 죽음의 행진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여명의 거리였지만 길거리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따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수백 명의 대열이 되었다.
26일 오후 2시 항쟁지도부는 도청 2층 식산국장실에서 기동타격대를 재편하여 계엄군의 진입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동타격대 규모는 모두 60여 명으로 16조는 46명씩, 예비로 꾸려진 7조는 30여 명으로 편성되었다. 기동타격대의 주 임무는 계엄군의 동태 파악과 치안 유지였다. 기동타격대가 나가면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먹을 것을 나눠주는 등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시 외과지역은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공수대원들과 야간 침투를 시도하는 공수대원들의 살육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방위대가 조직되었다. 화순 너릿재와 증심사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한 태봉ㆍ숙실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학운동 지역방위대, 무등산장 입구 산수동로터리에 있는 산수동 지역방위대, 효천ㆍ남평 길목인 백운동 지역방위대, 송정리ㆍ상무대 길목인 농성동 지역방위대, 담양 길목인 두암동 지역방위대, 용전ㆍ재전 길목인 오치동 지역방위대, 장성 길목인 운암동 지역방위대가 지역 예비군과 젊은이들로 편성되어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다.
26일 오후 계엄군 진입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항쟁지도부는 두 차례에 걸친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고 ‘80만 광주 민주시민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에서 채택한 7개 항에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고자 했던 시민들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

1. 이번 사태의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가라.
2. 무력 탄압만 계속하는 명분 없는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3.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 처단하라.
4. 구속중인 민주인사를 즉각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과도정부를 수립하라.
5.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보도하지 마라.
6.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피해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한다.
7. 이상의 요구를 관철할 때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우리 80만 시민 일동은 투쟁할 것을 온 국민 앞에 선언한다.

이로써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최후 항쟁을 할 사람을 선정했다. 150여 지원자 중 80여 명이 군 제대자 예비군이었고 10여 명이 여학생, 나머지 60여 명은 고등학생이거나 군대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투항파는 도청을 완전히 떠났다. 남아 있는 학생수습위원회는 명칭을 민주투쟁위원회로 바꾸고 대변인 윤상원이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26일 오후 5, 윤상원은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며, 우리가 패배할지라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로 회견을 마무리하였다.
26일 밤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하자 일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항쟁지도부는 이를 말리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미 고등학생이나 여성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간곡히 권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살아남아서 왜 우리가 마지막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증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사항쟁의 도청 내 시민군의 분위기는 비장하고 결연했다.

27일 새벽, 3공수여단 특공조는 4개 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04시 무렵 총성이 울렸다. 특공조는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폭도 소탕작전이었다.
윤상원이 죽고 김영철은 체포되었다.
오전 510분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 YMCA,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이 완전히 진압당했다. 박용준이 죽었다. 불과 1시간 30분 만에 항전은 끝났다. 그때 광주시민은 거의 깨어 있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애절한 여학생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세월이 흐른 뒤에도 광주시민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항쟁의 피로 붉게 물든 광주의 아침이 밝았다. 하늘에는 계엄군의 헬리콥터가 계속 낮게 날면서 광주시민을 위협하고 있었다. 총소리는 낮 12시가 되어도 간간이 들려왔다.

참고한 책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오월 민중항쟁의 기록, 창비, 2017(전면 개정판).
김상집, 윤상원 평전, 동녘, 2021.
김상윤ㆍ정현애ㆍ김상집, 녹두서점의 오월-80년 광주, 항쟁의 기억, 한겨레출판, 2019.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3, 돌베개, 1989.
박호재ㆍ임낙평, 윤상원 평전, 풀빛, 2007(개정판).
윤동수, 윤상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황광우, 임을 위한 행진-윤한봉 전기, 오월의봄, 2017.
편집위원회 엮음, 
들불의 역사≫, 들불열사기념사업회, 2002.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창비, 2017(전면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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