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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김병기2021-12-2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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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1장 광개토태왕비 세 번 죽다

상처투성이 비문과의 첫 만남

광개토태왕비! 서기 414년에 세운 이 비석은 높이가 6.39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자연석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각 면에는 탁본에서 본 것처럼 행의 줄을 맞추기 위한 사잇줄(계선界線)이 쳐져 있다.
이 사잇줄에 맞춰서 1행에 41자씩, 네 면을 돌아가며 모두 44행에 글씨가 새겨졌다. 음각한 비문의 글자가 1,775자에 이른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광개토태왕의 행적을 간단히 적었다.
2부에는 광개토태왕비 비려(碑麗)와 백제를 토벌하고 신라를 구했으며 왜구를 패주하게 하고 동부여 등을 토벌한 사실과 함께 획득한 성 및 촌락과 인마(人馬)의 규모와 수를 적었다.
3부에는 광개토태왕이 생전에 내린 교언(敎言)에 근거하여 광개토태왕릉을 지키는 책임을 다할 백성들(수묘연호守墓烟戶)의 출신과 가구 수 등을 적었다.

광개토태왕비 세 번 죽다

광개토태왕비는 세 번 죽었다.
첫 번째 죽음은 부끄럽게도 우리가 저지른 것이다. 1000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의 기억에서 광개토태왕비가 사라지도록 방치한 탓이다.
반쪽통일을 이룩한 통일신라시대에 고구려의 역사서가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화는 역사서에 남지 못하고 구전되다가 서서히 잊혀졌다. 광개토태왕비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압록강 중류 북쪽에 거대한 석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왔지만, 그것이 광개토태왕비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북방 어느 종족의 왕의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이렇게 민주를 호령했던 조상들이 남긴 자랑스러운 역사를 수습하지 못한 채 1000년이 넘도록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비가 맞은 두 번째 죽음은 일제의 소행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의 국토만이 아니라 역사마저 빼앗아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급기야 4~5세기경 한반도에 일본 정부가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라는 황당한 얘기를 사실로 강변하면서 먼 역사 속의 백제와 신라마저 빼앗아갔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일제는 광개토태왕비문을 내놓고 목소리를 더 높였다.
일본이 제시한 탁본은 광개토태왕비의 탁본이 확실했고 그 탁본에는 분명히 ‘391(신묘년)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부수고 그들(백제와 신라)을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쓰여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광개토태왕비는 중국의 책략으로 세 번째 죽음을 맞고 있다.
20047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8차 회의에서는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과 함께 중국에서 신청한 고구려 수도, 귀족과 왕족의 무덤을 동시에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인민일보><신화통신> 등 중국의 관영 언론들은 고구려 유적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소식을 전하면서 고구려는 중국 고대 동방의 소수민족 정권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대부분 중국 언론들은 북한의 신청으로 북한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정말 어이없는 보도가 아닐 수 없다. 엄연한 독립국으로서 만주 벌판은 물론 중원까지 세력을 확장해갔던 고구려를 중국에 예속된 동북 지방의 소수민족 국가로 규정하다니 말이다.

우리는 그간 일본의 역사 왜곡에 항의만 했을 뿐 결과적으로 하나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광개토태왕비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역사적 상징물이다.
나는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 아니라 아는 자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지킬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 세 번의 죽음에서 광개토태왕비를, 그리고 고구려를 살려내는 길이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는 길이다.

 

2장 비문 변조의 증거

변조의 조짐을 느끼던 날

대만의 한 서점에서 호태왕각석(好太王刻石)을 처음 펼쳐본 순간, 나는 가슴이 뛰었다.
광개토태왕비에 새겨진 글씨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서예미의 종합적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곧바로 임서(베껴 쓰기)를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장 한 장, 몇 장을 임서해 가는 사이에 어느덧 내가 느낀 아름다움이 하나둘씩 붓끝을 타고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한번 리듬을 타면 임서는 여느 창작 못지않게 즐거운 일이 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임서에 한참 몰입해 있는데 비문의 어느 부분에 이르자 갑자기 붓이 멈칫하더니 콱 막히는 것이었다.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써오던 리듬과는 다른 리듬의 글자를 만나서 잠시 붓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 것이다.(어쩌면 이것은 흰 쌀밥을 먹다 갑자기 돌을 씹는 기분일지 모른다. 그것도 큰 돌을 diamatry)
! 이게 아닌데.’ ‘혹시 내가 순간적으로 방심했나?’

얼마 뒤 나는 두 번째 임서를 시작했다. 한 번의 임서로 제법 익숙해진 터라 처음보다 더 신명나게 글씨가 써졌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어느 부분에 이르자 저번처럼 다른 흐름이 느껴지면서 붓놀림이 하니 막혔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정말 이상한 생각에 그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첫 번째 임서할 때 왠지 모를 막힘을 느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고구려 글씨의 매력

광개토태왕비의 서체는 백번 강조해도 부족할 만큼 아름답다.
광개토태왕비는 소중한 사적 자료이기 이전에 뛰어난 예술 작품이다.
광개토태왕비의 글씨는 순전한 고구려의 글씨다. 중국의 글씨와는 판이한 글씨이다.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수백 번을 보고, 수십 번을 임서한 후에 깨달은 사실은 비문 변조를 둘러싸고 벌어진 100년간의 논쟁을 풀 열쇠가 바로 광개토태왕비 글씨의 자체(字體)와 서체(書體)에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방법인 서예학이라는 학문을 이용하면 변조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자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글자의 모양으로 구분한 것이 자체이다.
한자는 발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글자의 모양이 변해왔다.
그 과정에서 필획의 가감이나 곡직(曲直) 등의 변화로 인하여 글자의 기본 구조에 차이가 생기게 됐다. 이런 차이를 기준으로 분류한 모양새를 자체라고 한다.
전서체, 예서체,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 등 흔히 5체라고 분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서체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체에서 나타나는 스타일의 차이에 따라 분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자체로 쓴 같은 글자라도 어느 시대에 누가 썼느냐에 따라 당시의 시대성과 개인의 예술성의 차이 때문에 글자 스타일이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같은 예서체나 해서체로 글씨를 썼더라도 석봉 한호의 스타일과 추사 김정희의 스타일은 분명히 다르다.
이런 차이에 따라 석봉체’, ‘추사체라고 부르는 것이 서체이다.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는 어떻게 명명해야 할까?
광개토왕비의 글씨는 자체로는 예서체, 그중에서도 서한시대의 예서인 고예(古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서체로는 중국과는 판이한 고구려체 혹은 광개토태왕비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비문 변조의 새로운 증거

나는 수십 종에 이르는 광개토태왕비 탁본 중에서 대표적인 열 가지를 펼쳐놓고 면밀하게 서체를 비교하여 분석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 사코 가게노부 대위가 가져왔다는 쌍구가묵본은 물론, 내가 임서의 범본으로 삼은 예원진상사본도 꺼내놓았다.
그리고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출간한 광개토왕릉비탁본 도록에 실린 여덟 가지 국내 소장 탁본들도 펼쳤다.
확실한 것은 이들 탁본이 모두 원석 정탁본이 아니라 석회로 비면을 정리한 뒤에 뜬 석회탁본이라는 점이다.

나는 확대경을 대고 이들 탁본을 비교하면서 글씨체를 꼼꼼하게 대조해 보았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일제에 의한 변조의혹이 제기된 신묘년 기사 중 세 글자인 (건널 도)’, ‘(바다 해)’, ‘(깨부술 파)이다.
내가 처음 비문을 베껴 쓰다가 붓놀림이 막힌 바로 그 글자들이다.

먼저(건널 도)자를 보자
자가 신묘년 기사 외에 두 군데 더 등장한다.(1면의 3, 2면의 32)
서예학적 관점에서 보면 신묘년 기사에 있는 문제의 자는 다른 곳의 자와는 많이 다르다.
광개토태왕비 전체의 서체와 비교해보아도 신묘년 기사에 나오는 자는 유별나다.
서예학적 측면에서 가장 큰 차이는 丿 (별획)’(날획)’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의 가장 큰 특징은 점을 제외한 모든 필획이 거의 직선을 띠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별획과 날획을 쓸 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신묘년 기사 부분의자를 자세히 보면 의 마지막 부문 의 별획은 다른 광개토태왕체의 별획과 달리 직사선이 아니라 오늘날 흔히 쓰이는 해서체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로 중간 부분이 아래쪽으로 상당히 굽어 있다. 날획도 오늘날의 상용 해서체에서나 볼 수 있는 모양으로, 시작 부분이 위쪽으로 약간 꺽인 기세를 띠는 파책 모양이어서 파도가 출렁이는 모양이다.
신묘년 기사 부분의 자의 이런 특징은 광개토태왕비의 다른 자에 나오는 별획과 날획과 완전히 판이한 모습이다.
정리하면 다른 곳에 나오는 자의 별획이나 날획은 모두 고구려의 예서체, 즉 광개토태왕비체로 쓰여 있어서 결구나 장법으로 보아 기맥이 상통하는데, 유독 신묘년 기사의 자는 광개토태왕비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왜 이런 티가 나는 것일까?
이 글자는 1600년 전 고구려의 누군가가 쓴 원래 비문의 글자가 아니라 변조해 넣은 글자이기 때문이다.
변조해 넣은 사람은 일상으로 쓰던 해서체의 습관이 붙어 있었다.
이 습관은 1880년대를 전후한 시기 일본의 인쇄 문화와도 적잖은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은 근대식 인쇄 활자를 제작하면서 중국 명나라 때 활자의 글자체를 많이 수용하여 이른바 명조체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명조체를 널리 보급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의 명조체는 파책 획이 처음 시작되는 상단 부분은 각을 세워 꺽은 모양이 뚜렷하고 끝부분은 도획의 자취가 역력하다.
당시 명조체에 있던 꺽임 현상과 도획의 모습은 오늘날 컴퓨터 폰트 중의 하나로 개발된 명조체 한자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한자를 익숙하게 쓰는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파책의 상단부를 꺽어서 쓰곤 한다.
광개토태왕비의 변조자에게도 그런 일반화된 쓰기 습관 때문에 자를 만들어 넣을 때 광개토태왕체와는 판이한 별획과 날획을 보여준 것이다.

신묘년 기사에 있는 자의 특이성은 이것만이 아니다.
광개토태왕비가 가지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글꼴이 정사각형 모양이거나 세로가 약간 긴 직사각형을 이루는 점이다.
거의 모든 글자들이 이런 사각형을 이루기 때문에 한 글자에서 가로획이 두 획 이상 중첩될 경우에는 각 획이 다 수평을 이루면서 평행상태이다. 동시에 각 획의 길이도 기본적으로 가지런하거나 아래쪽으로 갈수록 약간씩 길다.
하지만 신묘년 기사의 자는 그렇지 않다. ‘(법도)자의 윗부분에 나란한 세 개의 가로획이 밑으로 갈수록 오른쪽 끝부분이 짧다. 세 개의 가로획은 한결같이 약간씩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이런 신묘년 기사에 있는 자의 특이함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역시 흔히 쓰는 해서체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신묘년 기사의 자는 고구려식 예서체로 쓴 광개토태왕비의 다른 글자와 달리 다분히 해서체의 자형을 띤다.
자는 광개토태왕비의 서체적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누군가가 탁본을 변조할 때 당시 일본에서 일상으로 쓰던 명조체에 익숙한 해서체의 조형 감각으로 다른 비문 글자와 겉모습만 비슷하게 맞춰 새겨 넣은 것이다.
물론 변조한 사람은 광개토태왕비 서체를 치밀하게 모방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비 서체의 독특한 특징을 간파하지 못하고 어설픈 변조를 하고 만 것이다.

자 다음에 오는 (바다 해)자도 서예학적인 눈으로 보면 변조 사실이 분명해진다.
전체적인 글자꼴이 사각형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보일 뿐만 아니라 해서체의 필법으로 썼기 때문에 신묘년 부분의 자의 자는 명조체의 자와 같이 완전히 기운 모습으로 고구려식 예서체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자형뿐만 아니라 자에 있는 부분 가운데에 끼어 있는 세로획을 보면 신묘년 기사의 자의 경우 왕왕 직선으로 표시된 경우가 있다.(탁본 가운데)
자 부분의 가운데를 두 개의 점이 아니라 세로획으로 처리한 것은 광개토태왕비문 서체의 전체적 맥락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광개토태왕 비문 전체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글자에서 점과 직선이 주된 필획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점을 써야 할 곳은 거의 빠짐없이 점을 썼다. 신묘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는 점으로 썼다.
이처럼 자의 두 점을 점으로 처리하지 않고 세로획으로 처리하는 것 역시 상용 해서의 필법이다.

마지막으로 (깨뜨릴 파)자를 살펴볼 차례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신묘년 기사 부분 외에 세 개의 자가 등장한다.
얼핏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눈 밝은 독자라면 한 가지 차이점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다른 곳의 자와 달리 신묘년 기사의 자는 중간 부분 오른쪽이 약간 불룩하게 활처럼 굽어 있다.
바로 의 왼쪽에 붙어 있는 의 두 번째 필획 丿 (별획)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필법에 따라 썼다면 이것 역시 직선으로 처리되었어야 한다.
•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처리한 것은 해서 필법이다.

이번에는 왼쪽의 과 오른쪽의 가 결합된 모양을 유심히 살펴보자
다른 곳에 있는 자는 왼쪽 의 가로획과 의 두 번째 획인 가로획의 높이가 같다.
그런데 신묘년 기사의 자는 그렇지 않보다 아래쪽에 있다. 마치 오늘날의 명조체 자와 같은 모양이다. 이점 역시 변조의 증거이다.
이 점은 정말 유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다.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자의 변조 흔적은 자나 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
광개토태왕비의 다른 글자들과 그런대로 잘 어울리고 있어서 변조를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로 변조되기 전의 본래 글자가 획수가 매우 적은 글자였기 때문이다. 원래 획수가 적은 글자일 경우에는 획수가 많은 글자에 비해 다른 글자로 바꾸기가 훨씬 쉽다.

 

3장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신묘년 기사의 본래 글자와 본래 의미

일본이 통설이라고 주장하는 변조된 신묘년 기사를 비문처럼 구두점이 없이 이어놓고 살펴보자.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而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변조설을 부정하는 대개의 일본인 학자들은 이 기사에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고 해석한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而辛卯年,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

역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고구려식 용어인 속민(屬民)’비록 현재는 분리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의 민족 관계에 있는 나라를 가리키며, 부차적으로는 직접 조공을 바치는 나라를 뜻하는 말이다.
신민(臣民)’은 고구려에 대해 복종의 의사를 표시한 어떤 나라 혹은 집단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즉 왕 아래에 있는 모든 신하와 백성을 통칭하는 일반 명사이다.
속민과 신민의 차이를 알면 비문 변조 이전의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 그 실상도 밝힐 수 있다.

이제 첫 구절인 百殘新羅舊是屬民(백잔신라구시속민), 由來朝貢(유래조공)’부터 분석해보자.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동일 민족이면서 예로부터 조공을 해온(由來朝貢)’ 나라이기 때문에 속민이라는 전용(專用) 명사로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혈족 관계로 보나 조공 관계로 보나 복속의 정도가 강한 속민인 백제나 신라를 복속의 정도가 낮은 신민이라는 일반 명사로 달리 나타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비유컨대 혈연관계에 있는 내 동생을 다시 친구라고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비 전체를 통틀어 이 신묘년 기사 한 곳에서만 등장하는 신민이라는 단어는 과연 어느 집단을 나타내는 말일까?
백제와 신라는 속민이라 불렀으니 다시 신민이라 칭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신민은 신묘년 기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집단인 를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다.
광개토태왕비는 광개토태왕의 훈적비이기 때문에 비문의 주어는 항상 광개토태왕이거나 고구려라는 점을 상기하자

신민이 왜를 지칭한 것이라면 신묘년 기사의 마지막 구절인 以爲臣民(이위신민)’의 주어는 당연히 고구려이므로 이에 대한 해석은 당연히 ‘(고구려가) 왜를 신민으로 삼았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 일본은 일찍부터 고구려의 신민이었던 것이다.
100년 동안 그렇게 논쟁해온 신묘년 기사의 원문, 즉 변조되기 전의 원본이 서서히 복원되는 순간이다.

일제의 치밀한 변조 작업으로 오히려 왜가 일찍부터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는 주장에 빌미를 제공했던 광개토태왕비문이 이제 비문에 속하는 속민신민의 차이가 파악됨으로써 그 의미가 정반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문장이라야만 제대로 된 비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渡海破라고 변조되기 전에 새겨져 있던 세 글자는 왜가 백제나 신라에 대해 모종의 예를 갖춘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속민과 신민을 분간하여 사용한 까닭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가 백제나 신라에게 갖춘 모종의 예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게 행한 예와 같은 것, 다름 아닌 조공이다.
이런 정황을 가지고 渡海破자리에 있던 원래의 글자가 무엇이었는지 추론해볼 차례다.

나는 변조되기 전 원래의 세 글자가 바로 入貢于(입공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들 입, : 조공 바칠 공, ; ‘~에게라는 뜻의 어조사 우)

*** 왜 그런지는 뒤에 서예학적 분석을 통해 상세히 살필 것이다.

渡海破入貢于로 바꾸면 원문이 어떻게 변하고 해석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자.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而辛卯年, 入貢于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왜를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

이 해석을 부연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백제와 신라는 진작부터 고구려의 속민, 즉 고구려와 동일 민족으로서 조공을 하는 나라였으므로 그동안 내내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신묘년(391)부터 왜가 고구려의 속민인 백제와 신라와 당시 한반도의 남부에 있던 또 하나의 나라인 □□에게 조공을 시작했다. 왜가 고구려의 속민인 백제와 신라에게 조공을 해왔고, 또 비록 속민은 아니지만 고구려에게 이미 복종의 예를 갖춘 □□에에도 조공을 시작했으므로 왜도 신민으로 삼아 신민의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원문을 복원해야만 문리상 하자가 없고 문법적으로도 어색한 곳이 없는 완벽한 문장이 된다.
아울러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지금까지 결자(缺字)로 남겨둔 두 글자도 문맥상 加羅(가라, 가야의 옛 이름)일 수밖에 없음이 자명해진다.

이로써 오늘날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임이 명백해졌다.

일본의 주장대로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던 게 아니라 일본()이 오히려 가야에게 조공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아울러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은 같은 민족이지만 가야는 서로 다른 민족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동족이었으므로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었다(百殘新羅舊是屬民)”라는 표현을 하면서 그 문장에서는 가야를 제외했지만 왜가 백제, 가야, 신라 등 세 나라에게 조공을 들인 사실(史實)을 기록할 때는 분명하게 가야기록하여 입공우백잔가라신라(入貢于百殘□□新羅)’라고 한 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으로서 고구려와 동족임은 이미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고, 김수로왕이 건국한 가야는 남방으로부터 해로를 따라 건너온 민족이라는 점이 학계의 고증을 통해 밝혀졌는데, 당시에 고구려는 이러한 민족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사실(史實)을 허투루 기록함이 없이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짓고 새긴 비문인 것이다.

뒤에서 상세히 밝히겠지만 만약 入貢于가 아닌 다른 글자였다면 渡海破로 변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변조했더라도 사코본과 같은 줄이 틀어지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41600년 만의 침묵을 깨다
비문 변조 현장 검증
또 다른 역사 변조의 현장
일본의 통설 래도해파구의 문법적 오류
신묘년 기사의 문단과 문장 분석
왜는 백제ㆍ신라에 대한 조공국
미심쩍은 회여록
기존 해석의 문제점
댓글에 대한 반론

5장 되돌아본 100년 전쟁
광개토태왕비 100년 전쟁
석회를 뒤집어쓴 광개토태왕비
비문 변조설에 대한 억지 반박
비문 연구 신() 삼국지
사코본 이전의 탁본이 발견되다니

초판 에필로그 - 광개토태왕비 부활을 위해
증보판 에필로그 -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

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20(초판, 2005)

나는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완전한 이해가 있을 때에만 광개토태왕비를, 아니 고구려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 아니라 아는 자의 것이다.” _<서문-열쇠는 서예학이다> 2005

우리의 근대사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국학자의 한 분인 위당 정인보 선생이 일제의 교활하고 비양심적인 우리 역사 왜곡에 대해서 한 말이다.

교활한 자들은 이에 한술 더 떠 모조리 숨겨버리고 고쳐버리고 옮겨놓고 바꾸어 버리는 일을 역사 서적에 가하지(근거하지)를 않고 우선은 아무렇게나 논하여 믿건 말건 하게 하여 놓는다. 그런 뒤에 그런 논거로 제시할 것을 사방에 내어놓느라(찾느라) 언덕이고 밭도랑을 방황하면서 속으로는 속임수로 자기네에 이로운 것을 믿고 뽐내니, 심지어는 일부러 묻어두었다가 캐어내어 털고 훔쳐서(닦아서) 변독(辨牘: 분간하여 해독함)하고서는 이에 기뻐 날뛰며 과연 이 땅에서 이 물건이 나왔도다!’ 한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바로 일제가 저지른 이러한 역사 왜곡 만행의 정황부터 파악해야 한다
. 그래야 정상적인 상황에서 객관적인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자기네들의 필요에 맞도록 혈안이 되어 왜곡했던 그 시기에 역사 왜곡의 제물이 되어버린 광개토태왕비문에 대해서 설마 일제가 비를 변조까지 했겠서?’라는 태도를 보이면서 관대하게 이를 데 없이 넘어가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오늘날 일본의 억지 주장- 임진왜란은 침략전쟁이 아니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도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한 것일 뿐 조선 침탈의 야욕은 없었고, 일제 강점 35년은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하여 조선을 돕는 역할을 했을 뿐 수탈한 적이 없었으며, 독도는 일본 땅이고, 위안부 차출도 없었으며, 강제징용이나 징병도 하지 않았다-을 일상으로 해대는 일본을 보면서 그들의 선조들 또한 광개토태왕비를 자신들에게 이롭도록 멋대로 변조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_<증보판 서문-이게 증거다. 지금도 변조를 계속 하고 있지 않은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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