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세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洪起文 朝鮮文化論選集≫-‘조선학(朝鮮學)’을 크게 성취한 대학자- 洪起文2021-12-23 19:14
Writer

洪起文 朝鮮文化論選集≫ 

편자의 한마디

대산(袋山) 홍기문(洪起文) 선생의 그 유명한 저술 정음발달사(正音發達史)란 책을 표제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국어학자인 외숙부님(난대蘭臺 이응백李應白 박사)의 서재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때는 그 책을 읽어볼 염이나 가져보지 못했었다. 펼쳐본다 한들 읽어낼 수조차 없으리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나는 요 4, 5년래 벽초 홍명희 선생의 걸작 임꺽정을 그 초고본과 대조 교열하여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작가가 쓴 만큼의 올바른 판본을 만들어 독자들이 이 작품의 진경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사계절, 1996)를 교열하여 우리 독서계와 학계에 보탬을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료에서 벽초의 논설 <정포은과 역사성>(1937)이 이 책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대산의 조선문화총화(朝鮮文化叢話)를 열어보았다.
이에 조선문화총화정음발달사(正音發達史)를 바탕으로 공편자 김형(金榮福)이 입수해 넘겨준 자료도 덧보태서 4부의 편차를 세웠다.

1조선문화론은 정음사 간행의 조선문화총화만을 가지고 구성했다.
그런데 이 글을 발표한 조선일보의 발표 지면 모습을 조금이나마 살려내려고 2개 장으로 나누어 1장을 잡기장(雜記帳)’으로, 2장을 소문고(小文庫)’로 구분했다.
그리고 소문고안에 있는 <추정록>은 글의 앞뒤에 주를 달아 표시해 놓았다.

2조선역사론은 역사학 연구 방법론을 앞세우고 주제의 시대와 집필된 시대를 감안해서 배열 순서를 잡았다.
역사학자로서 대산의 초기 학문이 드러나 있다.

3국어학과 국문학은 국어학 분야에서 정음발달사2편 제1장을 떼어내 앞세우고, 국문학 분야에선 <박연암의 예술과 사상>을 앞세웠는데, 정음발달사는 엄격히 말해 국어학사라 할 수 있고 <한자의 연구>도 딱히 국어학 분야라고 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뭉뚱그린 셈이며, <문단인에 향한 제의><문학상의 자유주의>도 문학평론적인 속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따로 부를 구성할 수 없어서 편의상 이렇게 했다.

4서문ㆍ서평ㆍ기행 기타는 대산의 인간적이거나 사회적인 글을 모아 한 개의 부를 만든 셈인데, 그의 성장 과정이나 학문의 연원과 교우 관계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부록으로 대산의 저서에 쓴 벽초의 서문과 화가 김용준(金瑢俊)의 서문을 곁들였다.
<대산 홍기문 선생 연보>에서는 1947년 월북하기 전까지의 학문적 성과를 조사해서 작성했고, 1947년 이후에는 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ㆍ성대경 편, 창작과비평사, 1996)의 기록만을 덧보태 놓았다. _1996년 정해렴

1朝鮮文化論

朝鮮文化叢話

1장 잡기장(雜記帳)

6. 兄弟(형제)의 칭호

• ≪이아(爾雅)<석친>남자로서 먼저 낳은 자가 형이 되고 뒤에 낳은 자가 아우가 된다.(男子先生爲兄 後生爲弟)”라고 했으니 형제라는 말은 남자에 제한된 칭호이다.
지금의 한어(漢語)로 형이라는 아가(阿哥) 내지 가가(哥哥)나 아우라는 형제도 남자에게 한한 칭호지 여자에게까지 통용되는 칭호는 아니다.
그런데 왜 조선서는 여자들끼리 형이니 형제들이니 하는 말을 쓰는가?
본래 조선어에는 남자가 여자 동기에 대하여 누이, 여자가 남자 동기에 대하여 오라비라고 하고, 남자 동기간이나 여자 동기간에는 꼭같이 언니ㆍ아우로써 일컫는다.
그러니까 형이란 한자를 언니란 뜻으로 번역하여 가지고 언니란 말의 용례에 따라서 형이란 말도 여자 동기간에까지 전용된 모양이다.(하략)

38. 바둑의 유래

바둑은 언제부터 생겼는가. 혹은 요()가 만들었더니 그 아들 단주(丹朱)가 잘 두었다고도 전하고, 혹은 순()이 만들어서 그 아들 상균(商均)을 가르쳤다고 전하고, 또 혹은 걸()의 신하되는 오증(烏曾)이가 창시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 ≪논어에는 박혁(博弈)도 않느니보다는 낫다는 구가 있는바 설문에는 혁() 자가 곧 위기(圍碁)의 뜻이다.
그 이외에 맹자에도 혁의 명인(名人)인 혁추(弈秋)의 이야기가 나오고 좌전에도 혁에 대한 말이 씌여 있다.
이걸로 본다면 춘추시대 내지 전국시대로부터 한토(漢土)에는 이미 바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단순예경(邯鄲淳藝經)에는 기국(棋局)이 종으로 또 횡으로 17()여서 합 289도라고 적혔다.
이미 당 이전의 바둑판은 지금보다 사방 두 줄씩이 적었던 모양이요, 장의(張擬)기경(碁經)은 벌써 17도가 아니라니, 오늘날의 바둑판도 송 이전부터 내려옴에 틀림없다.
본래 장의는 송인(宋人)이요, 기보로는 수대(隋代)에도 기세(碁勢)니 기법(碁法)이니 기도(碁道)니 그 종류가 많았건만 모두 실전(失傳)함에 따라 지금에는 기경이상 오랜 것이 없는 것이다.(하략)

2장 소문고(小文庫)

6. 남자의 귀고리

한토(漢土)의 여인들은 지금까지도 귀를 뚫어 귀고리를 달지만 조선서도 옛날의 여인들은 역시 귀고리로 귀중한 장식품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 이전은 물론이요 한양조에 들어와서도 3백여 년 전까지도 있었다고 추찰된다.
명인(明人) 전예형(田藝蘅)유청일찰(留靑日札)에는 여자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매다는 일은 예로부터 있었는데 이는 미천한 자들이 하였다. 장자천자(天子)의 시종들은 귀를 뚫지 않았다고 하였다.”라고 하여 천자의 시어는 천이(穿耳)치 않는다는 장자의 말로써 귀고리가 천자의 일이라고 단정하였지만 그 단정의 근거가 그다지 튼튼하지는 못하다.
• ≪사기부인의 비녀는 떨어져 나가도 귀고리가 머리를 두드린다라는 구로 보아 한대(漢代)에도 반드시 천자의 일은 아닌 듯하거니와 두자미(杜子美) 시의 옥귀거리 매단 이는 뉘네 집 아가씨인가?”로 보아 전씨 자신도 말한 바와 같이 당대에는 여자의 보통 이식(耳飾)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조선서는 3백여 년 전까지 여자뿐이 아니요, 남자들까지도 귀고리를 달고 다녔던 증거가 있으니, 김주신(金柱臣)수곡집(壽谷集)을 보면 선조 5년 임신(1592)에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신체의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시키지 않은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우리나라 대소 남녀들은 반드시 그 귀를 꿰뚫어 귀고리를 만들어 거는데 중국인들에게 기롱을 받으니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부터 이를 고치기를 효유하노라.”라는 이야기가 있다.
남자들끼리 귀고리를 단 것은 그 당시 한인들의 기소(譏笑, 비방하여 웃음)를 받았음직도 한 일이나 부모에게 받은 신체발부를 감히 훼상(毁傷)치 못한다는 유자의 도덕 아래 드디어 여인들의 귀고리조차 없애버리게 된 모양이다.
본래 한인들도 그 사내아이를 천예(賤穢)하게 여기는 뜻으로 장래를 축복키 위해서는 한 귀만을 뚫어놓는 예가 없지 않으니 그 역시 옛날에는 남자들까지 귀고리를 달던 잔습(殘習)이라고 보인다.(하략)

2朝鮮歷史論

申丹齋學說批判

한편으로 신단재(申丹齋: 신채호申采浩)는 가친(벽초 홍명희)의 가장 가까운 친우요, 또 나의 가장 경모(敬慕)하는 선배다.
그렇다고 구구한 사정으로써 이 붓을 굽혀 그에게 맞지 않는 예찬과 쓸데없는 존숭을 올리지는 않으리라.
그렇다고 나 또한 편파(偏頗)한 감정으로써 억설(抑說)과 궤변을 가져 그의 업적을 훼방치는 않으리라.

대략 짐작하는 바와 같이 단재는 창달건쾌(暢達健快)한 동시에 다분감정(多分感情)에 달리는 문장의 소유자로서 자기의 견해를 간명직절하게 표시해 주기에는 그 문장이 도리어 다소의 장애를 이루는 점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저작으로부터 자자구구를 훝어가지고 선은 이런데 후는 이러냐는 식으로 따져서는 취모멱자(吹毛覓疵: 남의 결점을 억지로 찾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튼 단재는 사상 추향의 여하가 민족 성쇠를 결정한다고 하고 모종 사건이 다시 그 사상 추향을 결정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모종 사건의 한 예로는 묘청 반란. 단재의 설명에 의하여 유교 사상에 대한 화랑 사상의 쟁패그것의 실패를 들지 않았는가?
또 단재는 역사를 아와 비아에 대한 투쟁에 의한 심적 상태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호의로 보더라도 그가 역사의 원동력을 정신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만은 부인치 못한다.
그 점에 있어 그는 종래의 관념론적 역사가로부터 일보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그는 역사의 원동력이 물질적 생산력에 놓여 있다는 것도 이해치 못하였고, 또한 후의 역사가 계급 대립의 역사라는 것도 이해치 못하였다.
그래서 그의 역사학은 항상 그 당시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생산관계에 대하여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고 오직 국가의 분합(分合)이라든지 국위의 소장(消長)이라든지 종교 사상의 변역(變易)이라든지 내지 영주(英主)의 위적(偉績)이라든지 명장(名將)의 전공이라든지 등등 피상적 현상을 어루더듬기에 종사하였다.
• ≪조선사연구초를 보라. 관구검(毌丘儉)의 내침, 수ㆍ당의 패전을 말하기에 급급할 뿐 삼국시대의 경제생활 내지 계급 관계 같은 데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차라리 연개소문 개인의 인물됨을 논평키 위해서는 몇백언을 허비할망정 그런 데는 일언도 비치지 않은 것이다.

단재와 같은 역사관 아래서는 진정한 역사가 찾아질 리 결코 없는 일이다.

3國語學國文學

正音發達史()

導說

3. 訓民正音의 평가

필자의 견해로는 세종을 위시하여 언문 제유로부터 훈민정음의 제작으로써 한문의 상용(常用)을 폐하자는 생각은 절대로 아니다. 오직 한문을 이해치 못하는 우민(愚民)들을 위하여 또 한문 학습의 한 보조적 수단을 삼아서 겨우 그 가치를 인정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관공서(官公署)에서 이두(吏讀)를 쓰는 대신으로 훈민정음을 쓰려고 한 것만은 사실이었것만도 드디어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세종ㆍ세조도 적극적으로 강행치 못한 것이라 성종 때 와서는 더 말할 것이 없는 일이다.
만일 발표 후 한자음의 정리보다도 차라리 그 방면에 힘을 기울이었더라면 훈민정음의 발달은 좀더 활발하였을지 모른다. 오히려 그들이 예기한 바를 일보 넘어서서 어느 정도까지 한문의 상용을 저해치 않았으리라고도 보장키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하여튼 훈민정음은 제작자 자신으로부터도 실가(實價) 이하에 평가된 것이 사실인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그보다도 다시 이하로 실용되어옴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한 점으로 보아서는 세종 이후 발달이라느니보다는 그 반대의 말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洪起文 , 金榮福丁海廉 편역, 洪起文 朝鮮文化論選集, 現代實學社, 1997

대산(袋山)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1903년 서울에서 벽초 홍명희의 큰아들로 태어나서 199290세로 생애를 마쳤다. 정음발달사를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 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산(袋山) 선생은 민족 존망지추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하에 성장하면서 민족 언어인 조선어의 문법을 연구하는 데서 뜻을 일으켜, 국어학ㆍ언어학ㆍ음운학ㆍ한문학ㆍ국문학ㆍ역사학으로 그 폭을 넓히고 심화시켜 갔으며, 815해방을 맞고부터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인 고전(古典) 번역에 몰두하여 올곧고 큰 생애를 마감했다. 일제 강점기를 살면서도 그 부자(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와 대산 홍기문)가 지조를 온전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실학정신(實學精神)’을 잘 체득 계승하고 과학정신으로 무장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으로는 국권침탈에 자결로 저항한 조부 홍범식(洪範植)의 유훈(遺訓)을 져버릴 수 없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일찍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우리에게 뛰어난 두 선비가 있으니 첫째는 기문(起文)이요, 둘째는 춘동(김춘동金春東)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위당 말씀대로 그 생을 온전히 하고 조선학(朝鮮學)’을 크게 성취한 대학자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Comment
Captcha Code
(Enter the auto register prevention c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