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세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최연소 국내ㆍ세계 챔피언”≪이창호의 不得貪勝≫“바둑이란 ‘신의 한 수’를 향한 끝없는 완성에의 추구다”2021-11-1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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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不得貪勝(부득탐승)

프롤로그. , 이창호

나는 19757,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도 이무기도 아닌 그저 평범한 구렁이, 그것이 내 태몽이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아이에 불과했던 내 인생도, 1981, 바둑이라는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면서 변화의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19848, 나는 한국이 낳은 당대 최고의 승부사(조훈현)와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867월 프로의 관문을 돌파했다. 1989년 최연소로 국내 타이틀을 획득했고, 1990년에는 가장 존경하는 최정상의 스승을 상대로 타이틀을 쟁취했다.
이어서 1992년 최연소 세계타이틀 획득, 1995(국회의원 105명의 연대 서명으로 추진된) 전례 없는 병역대체 공익근무 등으로 과분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2011년 내 나이 올해로 서른여섯. 30년 가까이 숨 돌릴 겨를 없이 바둑 한 길 만을 걸어왔다.
글 읽는 데만 온통 정신을 쏟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을 서치(書癡)라고 한다는데, 나 역시 바둑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는 점에서 기치(棋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최근 몇 년 이어진 나의 부진을 두고 이창호의 전성기는 끝났다고 말한다.
조로(早老)는 필연이라는 승부의 세계에 몸담으면서 정신과 육체가 절정에 달하는 이십대를 훌쩍 지났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둑판 앞에 오랜 시간 수읽기(바둑에서 앞으로 전개될 변화와 추이를 가늠해보는 일)를 거듭해온 입장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인생의 대국은 이제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바둑은 승부가 전부가 아니며 그 이상의 지고한 가치가 있다. 그런 생각으로 바둑의 대중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바둑을 멀리하는 추세지만, 유럽을 비롯해 다른 문화권에서는 바둑 열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며 작은 우주다. 또한 어린아이도 어른과 동일하게 겨룰 수 있는 정신의 스포츠다.
성인이 되기 전에 생각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바둑만한 게임이 없다.
두뇌를 발달시켜주고 인내심을 길러주며 예절을 중시할 수 있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경쟁자를 존중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인성 함양에 탁월한 처방이다. 

1. 바둑을 만나다

할아버지는 바둑뿐 아니라 내 인생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마음의 스승이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보보등고(步步登高)’라는 사자성어로 이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더 높이. 아마도 생전에 내게 보여준 것과 꼭 같이, 할아버지의 일생은 그랬을 것이다.-인생 최초의 멘토

나는 누구와 대국하든 한번 자리에 앉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둑판에 파묻히듯 미동도 없이 생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즐거움이 재능이다.

이틑날 다시 2연패. 공부시간을 늘리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이틀 동안 5연패라니.
참담해진 나는 또 다시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 눈물을 흘려야 했다.
입단에 가까운 기량은 갖추고 있었다. 그것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 것은 중요한 시기마다 지속적으로 드러냈던 마음의 부담 때문이다.-강박과 몰입

2. 거인의 어깨 위에서

싸움을 피했던 것은 싸움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싸움의 수많은 변화에서 돌발적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는 실수가 두려웠던 것이다.
무릇 승부에 임할 때는 자신을 다스려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법이다. 나아가야 할 때는 주도면밀하게,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신중하게 기다려야 한다.
일단 전진하면 실패의 여지를 없애야 하고, 부동(不動)할 때는 불필요한 기미를 보이지 말아야 상대를 서서히 제압할 수 있다. -두터운 실리를 추구하다.

재능을 가진 상대를 넘어서는 방법은 노력뿐이다.
더 많이 집중하고 더 많이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내게는 천재적인 재능은 없지만, 그 대신 끈기가 있다.
패한 대국을 다시 놓아보며(복기) 실패의 원인을 찾는 복습의 노력만큼은 누구보다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노력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다면 더 이상 타고난 재능을 가진 상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복기의 힘

1991년 벽두에 선생님(조훈현)과 사제도전기 10번기를 벌였다.
26, 대왕 타이틀이 나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31패의 스코어.
선생님의 생애 첫 타이틀이었던 최고위, 1인자의 상징 국수, 이어서 대왕까지. 사람들은 이제는 이창호가 조훈현의 품을 떠날 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둥지를 떠나다

3. 승부는 세계로

이즈음 나의 바둑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두텁다는 점에선 달라지진 않았으나 단점으로 지적되던 포석 단계의 미숙함이 줄어들고 실리를 잃지 않으면서 전국의 군형을 잡는 감각이 다듬어졌다.
바둑은 균형을 다투는 게임이다. ‘살아 있는 기성(棋聖)’으로 추앙받는 오청원 선생이 갈파한 바둑은 조화라는 말과 같다. -균형을 발판삼아

19932월 한국바둑의 비약적인 발전에 고무돼 새롭게 막을 올린 진로배에서 한국은 중국,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를 거머쥐었다.
7월에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6회 후지쯔배’ 4강전에서 선생님과 유창혁 9단이 나란히 결승에 진출, 유 사범님이 우승함으로써 세계대회 단체전과 개인전을 모두 휩쓰는 위업을 이룩했다.
19942, 나는 선생님과 함께 제2회 진로배에 출전해 한국의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은 한국바둑이 세계최강으로 첫발을 내딛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최강 한국의 깃발을 딛다.

물만 만나면 힘을 못 쓴다는 조롱을 받던 물 징크스의 세계 최강자였던 나는 1996, 드디어 물을 건너 제대로 된 한풀이를 할 수 있었다.
199683, 결승에서 중국의 1인자 마효춘(馬曉春) 9단을 꺽고 나와는 인연이 전혀 없었을 것 같넌 후지쯔배를 기어이 품에 안았다.
남은 목표는 바둑올림픽 응씨배였다. 당시 16강전은 악몽이었다. 상대는 세계최강의 여기사 루이나이웨이 9이었다.
지금은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었지만, 그 당시에는 바둑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만큼 큰 충격을 안겨준 패배였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또 한 번 깨닫는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결과는 없다는 것.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중에 상대를 낮게 보았던 것이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자만이 곧 패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스스로 교만한 줄 모르는 것이 자만의 포석이고, 아예 겸손한 척하는 것이 자만의 중반전이며, 심지어 자신이 겸손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자만의 끝내기. -징크스의 극복

4. 위기 속의 선택

모든 승부는 순간순간이 외줄을 타는 듯한 긴장의 연속이다. 돌부처로 불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생애 최고의 순간은 거액의 상금이 걸린 세계 타이틀전 우승이 아니다. 그 가슴 벅찬 순간은 내가 국내외 타이틀 140회의 우승, 그 안에 없다.
그것은 바로 몇 번의 우승을 차지해도 개인의 기록으로 남겨질 수 없는 단체 국가대항전의 우승이기 때문이다.
그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준 것이 바로 (2005) ‘농심신라면배였다.
승리도 다 똑같은 승리가 아니며, 패배도 다 똑같은 패배가 아니다. 커다란 승리와 커다란 패배가 있고, 작은 승리와 작은 패배가 있다. 작은 승리와 커다란 패배를 허용한다면 대국(大局)은 결코 이길 수 없다.
나의 승리는 작은 승리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승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승리다. -‘보다 앞서는 우리에 눈뜨다

순류(順流)에 역류(逆流)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거기에 휘말리면 나를 잃고 상대의 흐름에 이끌려 순식간에 국면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바둑만큼 상대적이라는 의미가 잘 드러나는 게임도 없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2005년 상하이의 기적

5. 다시, 원점에 서다

2011년 초, 10차례 우승의 영광을 안았던 국수위를 마지막으로 내놓고 프로기사가 된 이래 22년 만에 무관(無冠)이 됐다.
입단 3년 만인 1989KBS 바둑왕전에서 우승해 세계 최연소(14)로 타이틀 보유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타이틀이 없다.
이제는 모든 것이 ()’이 됐다. 바둑을 시작했을 때처럼 빈손이다.
저는 강해졌습니다. 문제는 주변의 상대가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백의 종군의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무관의 제왕과 백의종군

나는 어린 나이에 프로기사의 길을 걸으면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동년배들과 사고와 대화의 주제가 너무 동떨어진다는 것을 느끼고 기보만을 들여다보는 생활에서 벗어나 매일 책과 신문을 가까이 두게 되었다.
나는 역사와 철학에 관련된 책을 좋아하지만, 중국 고전부터 연애소설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나의 독서습관은 효율성이 좀 떨어진다. 연초에는 항상 한 해 100권 독파를 목표로 삼지만, 한 권 한 권을 굉장히 더디게 읽는 편이다.
단어나 문장이 이해되지 않으면 다음 줄로 넘어가지 못한다. 두세 줄 읽는 데 5, 10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
같은 문장 같은 페이지를 읽고 또 읽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한없이 느린 달팽이 독서법이다.
책을 잘못 골라 재미가 없다고 느낄 때에도 끝까지 읽는다. 고역이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을 맺어야 마음이 편하다. 주변 사람들은 무슨 책을 씹어 먹듯이 읽느냐고 웃기도 한다. -씹어 먹듯 책을 읽다

병은 겸손을 가르친다.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긍정의 눈, 그 마음이야말로 잠재된 인간의 가치를 최상으로 이끌어주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겸손과 자존심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꺽이지 않는 단단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다. -직업병의 명암

지난날 나는 한 전화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바둑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끝없이 먼 길을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의 바둑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
바둑이란 ()의 한 수를 향한, 끝없는 완성에의 추구다.
나는 스스로 원하고 선택한 길을 끝없이 걸어왔고, 스스로 마감할 때까지 이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글씨는 쓰는 사람을 닮는다.

에필로그. 아직 끝나지 않은 승부 이창호

어제의 승리는 잊고 오늘의 승부에 집중하는 것이 프로기사의 숙명이다.
지금 싸우고 있는 자는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싸우지 않는 자는 이미 졌다는 말도 있다.
나는 아직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코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반상의 승부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창호, 이창호의 不得貪勝(부득탐승), 라이프맵, 2011

위기십결(圍棋十訣) : 바둑을 둘 때 명심해야 할 열 가지 계명

1. 부득탐승(不得貪勝) : 승리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
2. 입계의완(入界誼緩) : 경계를 넘어설 때는 느긋하게 하라.
3. 공피고아(功被顧我) : 공격에 나서기 전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라.
4. 기자쟁선(棋者爭先) : 돌을 버리더라도 선수(先手)를 잡아라.
5. 사소취대(捨小取大) :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6. 봉위수기(逢危須棄) : 위기가 닥치면 돌을 버려라.
7. 신물경속(愼勿輕速) : 경솔하게 서두르지 마라.
8. 동수상응(動須相應) : 행마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9. 피강자보(彼强自保) : 상대가 강하면 나의 안전을 도모하라.
10. 세고취화(勢孤取和) : 형세가 외로울 때는 화평을 취하라

위기구품(圍棋九品) : 중국 송()나라 장의(張擬)기경(棋經)에 의한 바둑 기량의 아홉 가지 품격(이창호는 자신의 실력을 후하게 쳐야 5품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1. 수졸(守卒)_9: 어리석게나마 지킬 줄 아는 실력을 갖춘 단계
2. 약우(若愚)_8: 어리석기는하나 바둑을 둘 줄 아는 단계
3. 투력(鬪力)_7: 싸우는 힘이 생겨 바둑을 힘 있게 둘 수 있는 단계
4. 소교(小巧)_6: 작은 기교를 부릴 줄 아는 단계
5. 용지(用智)_5: 지혜로움이 엿보이는 바둑을 두는 단계
6. 통유(通幽)_4: 심오한 바둑의 세계로 들어가 바둑을 두는 단계
7. 구체(具體)_3: 바둑의 근간을 구체적으로 익힌 단계
8. 좌조(坐照)_2: 앉아서 바둑의 세계를 관조하는 단계
9. 입신(入神)_1: 신의 경지에 들어가서 바둑을 두는 단계

일인자의 자리는 잠시 머무를 수 있어도 영원히 지킬 수 없다.”
상황이 극에 달하면 결국 변화하니, 그 변화에 맞서지 말어야 한다.”
더 커다란 승리를 향해 작은 나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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