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세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김병기 교수의 한문 속 지혜 찾기2021-11-11 21:12
Writer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김병기 교수의 한문 속 지혜 찾기

1. 책을 펴고 발()을 내리면

開券神遊千載上하고 垂簾身在萬山中이라
개권신유천재상       수렴신재만산중
책을 펴니 내 정신은 천년의 세월 속에서 노닐고 발을 내리고 보니 내 몸은 만 겹의 산속에 있네.

중국 청나라 때의 서예가 등석여(鄧石如)의 서예 작품에서 본 글이다. 책은 참 신비롭다. 책을 펴면 그 안에서 천년 전의 인물이 남긴 말도 들을 수도 있고 행적도 볼 수 있다. 다가오는 시대를 짐작하고서 새로운 세계에 대처할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책을 펴든 사람은 행복하다. 과거와 미래 사이 천년의 세월을 오가며 그 안에서 얼마든지 노닐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내 방의 발만 내리면 시끄러운 세상과 인연이 끊긴 듯이 나만의 세계에 침잠할 수 있다면 그런 내 방이 바로 만 겹의 산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깊은 산속이 따로 없다.
대은(大隱)은 곧 시은(市隱)이다라는 말이 있다. 진정으로 큰 은거는 시장 속에 은거한 것이라는 뜻이다. 시장 속에 은거한다는 것은 시장 속에 살아도 마치 만 겹의 산속에 사는 것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시은(市隱)보다 큰 은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누가 능히 그런 시은을 할 수 있을까?
마음이 고요한 사람, 물욕에 빠지지 않은 사람, 세상에 통달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책을 폄으로써 언제라도 천년의 세월을 오가며 노닐 수 있고, 발만 내리면 만 겹의 산속에 든 듯이 조용히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부러운 사람이다.
그러나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으니 결국 인간은 마음 다스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61.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頂天脚地眼橫鼻直이여!
정천각지안횡비직
飯來開口睡來合眼할지어다.
반래개구수래합안
머리는 하늘로 향하고 발은 땅을 딛고서 눈은 가로로 찢어지고 코는 세로로 선 존재(사람)!
밥이 오면 입을 벌려 먹고 졸음이 오면 눈을 붙여 잠을 잘지어다.

전북 남원의 실상사라는 절 안의 어느 건물인가에 붙어있는 주련 글귀로 기억하고 있다. 수년 전 필자(김병기)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을 때 우연히 실상사에 들렀다가 이 글을 보고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당시 필자에게는 바쁜 체 말라, 잘난 체 말라는 말로 들려왔다.
인생이 별겐가? 배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는 게 바로 인생인데 그처럼 편한 인생을 제쳐두고 스스로 얽은 그물에 걸려 날이면 날마다 뛰어다녀도 마음은 답답함만 가득하다.
진정으로 바빠해야 할 일에 바쁘면 그건 바쁜 게 아니다. 쓸데없는 일에 바쁜 것이 바쁜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정말 바쁘지 않다.
분수에 맞게 살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잘 일이다.

6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生於憂患하고 而死於安樂이라.
생어우환       이사어안락
우환 속에서는 살지만 안락 속에서는 죽는다.

맹자<고자> ()에 나오는 말이다. 누구라도 안락함을 바라지 우환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맹자는 우환 속에서는 살고 안락 속에서는 죽는다고 했을까?
안락 속에 빠져 있으면 사람의 정신은 해이해지고 몸은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우환 속에 있는 사람은 정신은 늘 긴장되어 있고 몸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정신이 해이해지고 몸이 게을러진 사람은 방어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방어능력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병마의 공격대상이 된다. 반면에 우환 속에 있는 사람은 늘 방어체제를 확립하고 사는 사람이다. 병마가 쉽게 공격할 수 없다. 그래서 산다.
그런데 사람의 삶이란 육신의 삶과 더불어 정신의 삶도 있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넘긴 대가로 살아있는 동안 호의호식하며 안락 속에 살았지만 우리 역사 속에 영원히 죽어 마땅한 매국노로 남아 있고, 안중근 의사는 갖은 고초와 우환 속에서 죽었지만 우리 민족의 가슴 곳에 영원히 살아있는 등불이 되었다.
안락은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옛 선비들이 편안함을 가장 경계하여 일부러 몸을 편하게 놓아두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06. 부귀와 명예

人生富貴駒過隙이니 唯有榮名壽金石이라.
인생부귀구과극       유유영명수금석
인생의 부귀는 마치 틈새를 통해 본 망아지 걸음 마냥 빠르게 지나간다. 오직 역사에 남은 영예로운 이름만이 금석(金石)처럼 영원하리라.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산 학자 고염무(高炎武)가 쓴 <추풍행(秋風行)>이라는 시에 나오는 말이다. 고염무는 만주족에게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독서와 학문 연구로 보낸 지조 있는 선비였다.
그는 임종에 이르러 특별한 유언을 하였다.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 죽지 못해 살기는 했지만 내가 죽은 후 후세의 사가들이 나를 명나라의 고염무라 하지 않고 청나라의 고염무라고 칭한다면 나는 지하에서라도 통곡을 할 것이다.”
그렇게 지조가 굳은 그였기 때문에 그는 부귀를 틈새를 통해 본 망아지의 달음질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가는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고서 역사에 떳떳한 이름이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자 문화권 국가 사람들은 예로부터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일을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다. 후대의 역사보다는 우선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다. 역사는 시험 보기 위해서 외우는 과목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바로잡는 과목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잠깐의 부귀와 향락에 취해 역사를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196. 섣달 그믐

年光除日又元日한데 心事今吾非故吾.
연광제일우원일       심사금오비고오
세월은 흘러 그믐날(除日)이 지나면 정월 초하루(元日)가 될 테고, 마음은 새로워져 오늘의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어야 하네.

송나라 때의 시인 왕염(王炎)이 쓴 <제일(除日)>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제일(除日)’이란 일 년을 다 제()해버린 날, 즉 일 년을 다 써버리고 마지막 남은 하루라는 뜻으로 섣달 그믐날을 일컫는 말이다. ‘원일(元日)’은 다시 시작하는 새해의 첫날, 즉 정월 초하루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제일과 원일 사이, 즉 일 년의 끝점에서 다시 새로운 일 년의 시작점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바로 섣달 그믐날 12시이다. 이 의미 깊은 시간을 몸으로 느끼기 위하여 사람들은 사방에 불을 밝힌 채 잠을 자지 않고 지켜 앉아 있었으니 이를 수세(守歲, 해 지킴)’라고 한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며 수세를 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세월의 건널목에서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맞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사람들은 새로이 시작하는 한 해에 그처럼 큰 기대를 걸고서 묵은 나, 옛날 나의 잘못된 점을 가는 세월 속에 깨끗이 묻어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어른들 말씀에 행여 눈썹이 셀까 졸린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다가 결국은 스르르 잠이 들고, 초하룻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정말 눈썹이 셌을까 봐 거울로 달려가던 일이 새삼 기억에 새롭다.
섣달 그믐엔 모두 낡고 묵은 나를 깨끗이 버리고 새해의 새날을 맞도록 하자.

김병기 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어문학사, 2009

저자의 머리말에서

중국 문학을 공부하는 나는 평소에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고전 문학 작품을 많이 접하곤 한다. 그 과정에서 정말 외워두고 싶은 한 구절을 만날 때가 더러 있다. 나는 그때마다 그런 구절들을 보석을 줍듯이 따로 모았다.
그런 구절들을 칼럼을 곁들여 전북일보에 연재하였는데 그중 일부를 습주(拾珠)라는 이름으로 2002년 출간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전체를 수정ㆍ보완하고 재편집하여 4권의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1권에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라는 이름을 붙였고, 2권에는 찾는 이 없다고 피어나는 향기를 거두랴라는 이름을, 3권에는 나 말고 누가 나를 괴롭히겠는가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4권에는 눈물 어린 눈으로 꽃에게 물어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행복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잘 수 있는 빈 마음의 그 곳으로 찾아들어 온다. 비워두어야 채울 것이 찾아드는 것이다. 욕심으로 꽉 차서 빈 틈이 없는 안으로 다시 무엇이 들어 올 수 있겠는가?
• 옛사람들이 남긴 한문 속에 들어 있는 지혜를 모아놓은 이 책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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