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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태리의 님” ≪마찌니 評傳≫- 民族統一의 思想과 行動, 볼튼 킹2021-10-20 21:08
Writer

 마찌니 評傳

조셉 마찌니(1805~1872) 그는 누구인가?
이태리 통일의 위대한 혁명아로서 민족 분단 14백 년을 종식시키는 삶을 산 마찌니.
민족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불사른 마찌니 그는 순수한 열정, 시대와 역사를 꿰뚫는 통찰력과 이상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준다.
기나긴 외세 지배에 의해 흐려진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일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생애를 통해 그는 부단히 전개했다.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망명 생활로 전전해야 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곤 했다.
실의와 좌절, 생명의 위협 속에서 일구고 가꾼 그의 말과 글과 행동은 조국 이태리를 구시대 식민통치의 늪에서 뛰어나오게 했고 새시대를 창조하는 역사의 계기를 만들었다.
일찍이 신채호가 그의 이태리 삼걸전에서 조국통일에 대한 그 뜻과 의지를 높이 기렸으며 한용운이 그의 <님의 침묵>에서 이태리의 님이라고 칭송한 마찌니.
민족통일은 궁극적으로 민중의 성장과 성장한 민중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하였으며 그 민중과 더불어 행동한 마찌니.
진정한 애국자와 혁명가가 늘 그랬듯이 쓸쓸한 만년을 보내면서도 그의 삶에 대해 결코 비탄해하지 않았던 마찌니.
그러나 그가 남긴 신념의 뜻, 민족과 사회와 문학과 종교를 논한 빛나는 언어들, 그 순수한 아름다움은 지중해의 그 물빛보다 더 푸르게 반짝이면서 현대 민족운동사를 찬연히 밝힌다.

마찌니의 말

- 민족은 나에게 신성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속에서 모든 인간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도구를 보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류의 워크숍이다. 민족이란 살아있는 과업이다. 민족의 생명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고 보편섭리적 계획 내에서의 힘이며 기능이다.”

- 모든 위대한 민족운동은 오로지 시대나 난관에 구애되지 않는 신념과 의지의 영향력 아래, 무명의 민중들 가운데서 시작된다.”

- 사상이 진리 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사상가의 생활은 그의 행동 속에서 진리를 눈에 띄게 표현해야 한다.”

- 폭정을 정의로, 거짓을 진실로, 이기적 이익을 의무로, 왕국을 공화국으로 대치했을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이전에 평화는 불가능하다.”

- 청춘은 운동으로 살고 열정과 신념으로 큰다. 젊은이들을 드높은 사명으로 떠받들어 보라. 그들을 선의의 경쟁과 칭찬으로 불붙여 보라. 젊은이들의 대열 속으로, 불의 언어, 영감의 언어를 터뜨려 보라. 그들에게 조국, 영광, , 위대한 과거를 말해 보라!”

1장 제노아의 집 1805~1831, 25세까지

소년시절과 청년시절-대학생활-문학수업-고전주의와 낭만주의-카르보나리에의 가담-체포와 망명

조셉 마찌니는 1805622일 제노아의 비아 로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얼마간의 명성을 얻은 의사였으며 또는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자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료봉사에 바쳤다. 가정에서는 때로는 딱딱하고 전제적이었지만 다정다감하고 애정이 넘쳤다.

마찌니가 꽤 닮은 그의 어머니는 약점을 별로 지니지 않은 이태리 어머니 특유의 유능하고 헌신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또한 당시 유럽을 개조하고 있던 여러 가지 강력한 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고 집안에서도 여러 통치자들과 정부들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집안은 화목했으며 핍포는 그의 부모와 새 누이들의 귀염둥이로 자랐다. 감정이 섬세하고 민첩하고 부드러운 이 소년은 아버지가 건강을 염려했지만 끈질기고 재기있게 공부를 했으며 일찍부터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대학 생활은 이태리에서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마찌니는 열네 살에 제노아의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 생활이 정결하고 애정이 넘치는 강렬한 성격의 대학생들 가운데서 지도자가 되었다.

마찌니는 문학에 가장 관심을 보였다.

마찌니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독일인은 이제는 잊혀진 헤르더(Herder, J. G. 1744~1703) 철학자, 신학자, 시인)였다.

헤르더로부터 마찌니는 인생에 관한 정신적 개념, 영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 인류 진보에 관한 이론, 그리고 신의 역사(役事)에 대한 인간의 동참 등을 배웠거나 확인했다.

그는 사소한 글 말고도 파우스트에 관한 글도 썼다.

마찌니의 관심은 점점 정치에 쏠렸다. 제노아의 그의 가정이 그의 정치적 관심을 조장한 것은 틀림없었다.

마찌니가 <인디카토레 제노베스>에 집필을 시작할 무렵, 그는 <카르보나리(탄소당) 결사>에 가입했다. 카르모나리 회원들은 당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런 사태는 조만간 모든 비밀결사를 마비시켰다.

정부는 카르보나리 조직 안에 비밀첩자들을 투입하고 있었다. 마찌니는 첩자들 가운데 한 명을 입회시켰기 때문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마찌니는 혐의를 받을 만한 서류를 모두 없애버려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다.

세월이 지난 뒤 미찌니는 그 서류를 없앤 자신의 행위를 자랑삼아 회상하곤 했다.

하지만 당국은 마찌니를 무사히 풀어주기에는 증거를 너무나 많이 잡고 있었다. 당국은 작은 마을에 주거제한 당하거나 아니면 망명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마찌니에게 강요했다.

당시의 사태가 그의 의사를 결정했다.
바로 얼마 전에 중부 이태리에서 혁명이 터졌다. 프랑스 정부가 카르보나리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원조를 바라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마찌니는 파리에서 큰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며, 파리로부터 해방된 이태리로 멀지 않아 돌아오리라고 확신했다.

18312월 마찌니는 사보나로 급히 달려온 가족과 작별하고 아페닌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나중에 꽤나 익숙해지고 정이 든 알프스산맥을 처음으로 넘어갔다.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리용에 있는 이태리 망명객들과 합류하라는 조언을 듣고 파리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리용으로 향했다.

2장 청년이태리당 1831~1833, 25~27

이태리의 상황-1831년의 혁명-청년이태리당-그 강령-이태리에의 신뢰, 열렬한 의무감, 사회개혁-그 정치적 체제: 공화주의-이태리의 통일-오스트리아와의 전쟁-비밀결사

마찌니는 말했다.
지금까지 어느 한 계층이 개혁의 열매를 물려받고 독차지하며 어느 한 귀족정치가 다른 귀족정치로 바뀌는 것에 그치는 한 우리는 결코 혁명을 찾지 못할 것이다.”

선과 악, 진실과 허위, 진보와 반동 사이에 중용이란 있을 수 없다.”

누더기를 걸치고 허기져서 부자들이 멸시하며 던져주는 빵부스러기에 고통스럽게 달려들거나 야수같이 날뛰는 즐거움에 취하여 소요 속에 휩쓸려 헤매는 민중이 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본다. 나는 저들 고통에 찌든 얼굴들이 신의 손길을, 우리와 똑같은 사명의 표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 미래의 터전을 떠올려 보곤 한다. 그것은 장엄하게 일어선 민중, 한 가지 신조로 모인 형제들, 평등과 사랑의 유대, 아름다움과 힘 속에 끊임없이 자라나는 이상적인 시민적 덕성의 환상이다. 미래의 민중은 사치에 물들지 않고 비참에 억눌리지 않으며 자신의 권리와 임무에 대한 인식만으로 고양된 것이다. 그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나의 심장은 현실을 보는 고통으로,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영광으로 고동친다.”

마찌니의 작전계획은 게릴라전이었다. 게릴라전이야말로 자유를 전취해야 하는 봉기한 민중의 당연한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마찌니는 이렇게 외쳤다.

이태리인들이여! 그대들의 산들을 바라보시오. 거기에 힘과 틀림없는 승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마찌니는 봉기의 시기가 임박했다고 자신했다. 유럽혁명이 곧 있을 듯했으며 이때라도 형제나라들 뒤에 처져서는 안 되었다.
카르보나리당의 지도 아래서마저 10년 안에 세 차례나 혁명을 일으켰던 이태리 민중은 좀더 높은 신념의 영향을 받으며 더욱 흔쾌히, 더욱 늠름하게 다시 봉기할 것으로 그는 믿었다.

3장 마르세이유 1831~1834, 25~28

마르세이유-청년이태리당의 확산-알베르트에게 보낸 편지-피에드몽트 왕국의 군내 음모-제네바에서-사보이 침공

18337월 초 마찌니는 제네바로 옮겨갔다.
마찌니는 새로운 봉기계획을 세우기 위해 현장으로 옮겨온 셈이다.
군대 봉기의 실패로 인해서 그는 오히려 피에드몽트에서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더욱 몰두했다.
마찌니는 틀림없이 찰스 알베르트를 응징하기를 바랐으며 유럽 전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잔혹성에 미쳐버릴 만도 했었다.

1833년 가을에 이르러 몇백 명의 망명자들이 스위스에서 모집되었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폴란드인과 독일인이었으며 프랑스인도 소수까지만 끼어있었다.
마찌니는 원조를 환영했다. 그는 원조가 민주주의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굳게 다져서 <청년유럽당>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찌니의 준비는 부족하나마 그해 10월까지는 완료되었다. 800명이 무장을 끝내고 진군할 태세를 갖췄다. 제노아, 나폴리, 마르체스, 그리고 아브루찌에서 동시에 봉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휘권을 가진 라모리노가 성공할 가망성을 다 망쳐놓았다. (사보이의 운동가들은 사보이 태생의 천하주유(天下周遊)형의 모험가인 라모리노 장군이란 사람에게 지휘권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모리노는 반란 원정에 사실상 흥미가 없었다. 그는 원정을 파탄시키라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던 것 같다. 어쨌건 라모리노는 마찌니가 피땀을 들여 모은 군자금을 물 쓰듯 하면서 파리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려움이 압력을 가했다. 스위스 정부가 압력을 가했다. 마침내 1월에 라모리노가 도착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라모리노는 의용병들을 목표도 없이 끌고 다녔다.
24일에는 적과 총 한 발 서로 쏴보지 않은 채 라모리노는 부하들을 해산시켜 버렸다. 반란은 사산(死産)되고 말았다.

4장 스위스에서 1834~1836, 29-31

망명생활-정신적 위기-혁명의 원칙-청년스위스당-청년유럽당-여성 친구들

나는 정신적 경련을 겪고 있소. 나는 땅 위에 뒹굴면서 나 자신을 물어뜯는 경우가 있소, 인간의 얼굴이 보이거나 목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분노의 발작이 일어나는 거요.”

우리는 민중의 명분을 우리의 명분으로 만들었으며 모든 세대의 설움을 스스로 떠맡았소, 우리는 영원의 하느님으로부터 불꽃을 받아들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 민중 사이에 놓이게 되었소. 우리는 스스로 해방자의 임무를 떠맡았으며 하느님은 우리를 받아들이셨소.”

상황의 불가피성으로 해서 조용한 가정생활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은 가슴 속에 아무것으로도 메꿀 수 없는 구멍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5장 런던에서 1837~1843, 31~38

런던에서의 생활-정신적 상황-영국의 친구들-칼라일가와의 우정-라마네와 조르쥬 상드-문화 활동-청년이태리당의 붕괴-해튼가든의 이태리 학교-노동자에의 호소

1837년 초 마찌니와 루피니 형제는 런던에 도착했다.
런던으로 온 결정적 이유는 루피니 형제가 은둔생활의 고통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돈에 쪼들리는 일 말고는 마찌니의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점차 밝아졌다.
마찌니가 영국인과 깊이 맺은 첫 우정은 칼라일 일가와의 것이었다. 그는 1940년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나를 형제처럼 사랑하며 자기네들의 능력 이상으로 나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한다.”

두 사람은 단테를 종아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했지만 마찌니는 칼라일의 저서에 대한 비평에서 부드럽고 정중하긴 해도, 칼라일의 개인주의, 영웅숭배, 인류의 위대한 공동 진보에 대한 경시, 실제 정치적 응용에 부닥칠 경우에 보이는 그의 비효율성과 비겁성 등을 비판했다.
친구를 사귀는 일 말고는 마찌니는 서서히 일을 찾기 시작했다. 난관은 많았다.
처음에는 너무나 지치고 생활에 쪼들려서 글을 쓸 짬도 없었다.
마찌니는 점차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생활을 해봄으로써 마찌니는 당시의 사회사상과 접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정치운동들이 대중들의 처지라는 거대한 문제 곁에서 찌그러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6장 혁명 1843~1848, 38~43

이태리의 정치상황-우체국에서의 스캔들-국제인민연맹-1845~7년 동안의 생활-피오 노노에게의 편지-왕당파에 대한 태도-1848년 혁명-밀라노에서의 생활

7장 로마공화국 1848~1849, 43~44

종전-인민전쟁-플로렌스에서의 생활-로마 사절단-로마공화국-교회에 대한 태도-프랑스의 공격

8장 다시 런던으로 1849~1859, 44~54

스위스에서-런던에서의 생활-영국 친구들-영국의 정치와 문학-이태리의 친구들

9장 마찌니와 카부르 1850~1857, 42~52

피에드몽트파()-마찌니와 카부르-프랑스동맹-마찌니와 마닌-칼의 이론-음모-1857년의 제노아

만약 마찌니가 공화국이 통일보다 더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했더라면 그의 행동은 적어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으로 통일을 공화국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왔고 또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그 무엇보다도 위에 놓아왔었다. 그는 자기의 정치적 신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물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신조는 깊은 확신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수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카부르는 귀족 출신이었고, 대체로 이론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며, 서서히 단계적으로 자기의 길을 더듬어 가는데 만족하는 기회주의자였다.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몇 년이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타입이었다. 성공이 오직 그의 목표였으며 수단이나 개인적 명예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마찌니는 더욱 위대한 본성과 교양은 갖췄지만 아량은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주주의자 중 민주주의자로 왕과 귀족, 중류계급을 불신했다. 우정이나 증오가 불같았고 이를 겉으로 드러냈다. 융통성이 없고 불안정한 성도(聖徒)로서 추상적인 정의라는 원칙으로 백만대군을 대적하려 드는 사람이었으며, 미래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사바세계의 장애와 자기 발밑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10장 통일의 문턱에서 1858~1869, 53-55

1859년 정치-플로렌스에서-남부지방에 대한 계획들-가리발디의 원정-나폴리에서

로마의 자유는 세계의 자유다. 로마가 봉기한다면 로마는 우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 허위에 대한 영원한 진리의 승리, 인간 양심의 불가침성을 선포해야 한다.”

11장 베니스를 위하여 1861~186656-61

1860년 인후의 정책-이태리에 대한 실망-로마와 베니스-왕정(王政)에 대한 태도-영국에서의 생활-그레꼬 사건-미국과 아일랜드의 정치-마찌니와 가리발디-빅토르 엠마뉴엘로부터의 교섭-1866년의 전쟁

나는 베니스를 위래서, 로마를 위해서, 공화국을 위해서, 그 도구가 되기 위해서 죽도록 일해야만 한다.”

신의 섭리는 선도(先導)의 기능이 이태리의 생명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했다. 유럽이 살지 못하면 우리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방하고 나서 다른 민족도 해방시켜야 한다. 우리는 위대해지든지 아니면 멸망해야 한다.

12장 혁명가의 만년 1866~1872, 61~66

공화주의 연맹-루가노에서의 생활-멘타나-1868-70년의 공화주의 운동-비스마르크와의 밀약-가에타에의 연금 그리고 석방- 인터내셔날에 대한 공격-서거

마찌니는 무신론과 무정부주의, 사회주의를 모두 반대했다.
그는 이태리 보수주의자들이 야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네들이 야만인들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은 하나의 사상을 대표하고 있다. 그 사상이란 노동자들의 봉기가 운명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사상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을 맞을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가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면서 나는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태리 노동자에게 한 마지막 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이 위대하고 불행한 조국을 위해 사랑하고 일하라. 우리의 조국은 위대한 운명에의 부름을 받고 있지만 그 길을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 제자리에 못 박혀 있다. 사랑하고 일하는 것만이 당신네들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1872310일 그는 숨을 거뒀다. 그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론 나는 하느님을 믿지.”라는 말이었다.
제노아 외곽에 있는 스타글리에노 묘지 그의 어머니 곁에 카투치가 쓴 비명(碑銘)과 함께 그는 쉬고 있다.

모든 것을 희생했고
많이 바쳤으며
많이 사랑했지만
결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던
사람.

13장 인간의 의무와 도덕
14장 국가의 자유와 이상정부
15장 사회이론과 사회개혁
16장 민족과 민중
17장 삶의 현실과 문학예술
18장 종교의 본질과 사회정의
19장 인간 마찌니의 위대성과 한계
볼튼 킹 저, 황의방ㆍ송재원 역, 마찌니 評傳- 民族統一思想行動, 한길사, 1980

이 책은 1902년 영국에서 출판된 “The Life of Mazzini”를 번역한 것이다.
마찌니가 한 일은 한마디로 통일이라는 이상을 향해 이태리 국민을 분기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글을 썼고 팜플렛과 신문을 제작했으며 민중에게 연설했다. 이태리 민중을 교육시켜 사상적으로 무장시키려는 것이었다. 혁명적 봉기를 여러 번 기도한 것도 국민을 분기시키고 깨우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는지 모른다. “수십 년의 교육보다 한 번의 개혁이 국민을 더 깨우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또 민중의 힘을 신뢰했다. 그는 또 한 점 부끄럼 없는 스스로의 삶으로 이태리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마찌니는 통일 이태리, 이태리 이상의 상징이었다. _역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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