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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문화운동가 임진택의 애국가 바로잡기2021-09-06 19:47
Writer

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문화운동가 임진택의 애국가 바로잡기

이 책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애국가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서 임진택은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듯이 풀어나간다. 그의 주장은 민족적이고 애국적이다. 친일파와 그의 후예들은 낡은 시대적 사고라고 주장하겠지만,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자 과거 청산과 반성 없는 현실이 만들어낸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머리글-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문화운동가이자 명창인 임진택은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는 화두를 던지며 우리 대한민국 <애국가>에 감춰진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이 있음을 분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혹은 뿌듯한 마음으로 밝히고 있다.
은폐된 진실은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ㆍ친나치 행각과 불가리아 민요 표절 혐의이고,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가 만고의 애국자 안창호임에도 민족반역자 윤치호로 뒤바뀌어 있는 현상이다.

그는 주장한다.
애국가는 단지 애국가일 뿐 국가(國歌)로 제정된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애국가 바로잡기국민운동을 시작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애국가 바로잡기의 내용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우리 애국가에서 친일 부역 반애국자 안익태의 곡조는 이제 그만 버리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만고의 애국자 안창호로부터 친일민족반역자 윤치호로 뒤집혀 있는 것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애국가를 바로 잡는 일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기저질환인 친일잔재(親日殘在) 청산을 위한 상징적인 과제임을 나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안익태의 두 얼굴

안익태와 에키타이 안

1938220일 안익태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게이어트 극장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이 연주회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그의 첫 관현악곡이자 대표적인 <한국환상곡>을 초연하여 음악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여기서 <한국환상곡> 외에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 등을 지휘했다.
청중들은 동양에서 온 젊은 지휘자의 정열적인 지휘에 환호를 보냈으며, 특히 <한국환상곡>이 지닌 동양적 분위기로 아일랜드인들의 찬탄을 받았다고 한다.
1938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오케스트라를 지휘해서 다시 한번 <한국환상곡>을 연주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안익태는 국권을 상실한 대한의 애국적 청년음악가였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1938년 더블린과 부다페스트 연주 이후 1947년 스페인 마요르카에 정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긴 기간 동안 안익태의 행적은 베일에 감춰진다.
이 베일을 벗겨내는 일은 중요하다.
자신의 연주 활동을 국내 언론과 교포사회에 알리는 데 그처럼 치밀하고 부지런했던 안익태에게 대체 어떤 비밀이 생긴 것일까?
최근에 와서야 밝혀진 것이지만, 1940(국내에 빅뉴스로 대서특필된) 로마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사람은 안익태가 아니라 에키타이 안이었다. 대한 사람 익태 안이 아니라 일본인 에키타이 안이었다.
이후 베를린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람도, 빈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람도, 베오그라드, 부다페스트, 소피아, 부쿠레슈티, 하노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파리 등지에서 열렬히 지휘봉을 휘둘렀던 사람도 모두 대한 청년 안익태가 아니라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이었다.

안익태의 두 얼굴! 다른 한쪽 얼굴은 에키타이 안이었다.
애국가의 작곡자가 반애국자라고 하는 이 모순을 이제 어찌할 것인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안익태의 친일ㆍ친나치 행각을 비판하려는 데 있는 것보다, 애국가의 작곡자가 민족을 배신한 반애국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이(어린이들이)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계속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안익태의 비밀과 거짓말

드러난 친일ㆍ친나치 부역 -‘만주환상곡필름
진화영이 취재한 결과 그 영상은 만주국 건립 10주년 기념음악회를 필름에 담아낸 7~8분가량의 문화영화가 맞다.
문제는 지금까지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 연도로 알려진 통설(1940년 또는1943)과 달리 이 음악회는 19429월 베를린필하모니에서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의 지휘로 연주된 것으로, 연주단체는 베를린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아닌 베를린대()방송교향악단이며 합창은 라미합창단이다.
필름에 담긴 부분은 일본인 에키타이 안이 만주국 건립 10주년 기념을 위해 직접 작곡한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축전음악-만주국(약칭 만주환상곡)의 합창 대목이었다.
이 영상은 20063월 베를린 홈볼트 대학에 유학 중이던 송병욱이 어렵게 입수해 해독한 내용을 객석에 기고함으로써 처음 공개되었다.
송병욱에 의하면 만주환상곡1942년 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행사 일환으로 베를린필하모니에서 초연된 작품이며, 필름 자막에는 작곡과 지휘에 에키타이 안, 연주단체는 베를린 대방송교향악단, 합창은 라미합창단, 그리고 텍스트(합창 가사)는 에하라 고이치로 소개되어 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만주환상곡의 제4장 피날레에 나오는 합창 선율이 한국환상곡4악장의 합창 선율과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자기 표절인 셈이다.
이는 마치 일제 때 천황 만세를 열렬히 외치던 매국노가 광복 후 이를 숨기고 대한 만세를 뻔뻔히 외치며 애국자 행세를 하는 것과 같다.

이해영이 쓴 안익태 케이스를 읽고 애국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주환상곡> 합창 가사를 쓴 에하라 고이치는 표면상으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정보기관의 독일 총책이었다.
안익태와 에하라 고이치와의 관계는 안익태 케이스부록에 실린 글 <안익태 片貌(편모)>라는 수필에서 볼 수 있다.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으로 활약하던 시기, 그는 독일 내 일본 총책 에하라 고이치 사저에 2년 넘게 기거하며 그 집을 주소지와 연락처로 삼았다. 안익태가 저지른 반민족행위의 핵심은 친일ㆍ친나치 프로파간다 행동의 최선봉에 섰다는 사실이다.

반애국자의 애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안익태가 일본인 에키타이 안 이름으로 친일ㆍ친나치 행각을 벌이던 1940~1944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해서 일제와 전면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치열하게 싸우던 시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 미주 대한인국민회는 중정 임시정부에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곡조를 소개하고 미주에서의 사용허가를 요청한바, 임시정부는 이를 승인하고 광복군에게도 보급하기로 했다.
안익태는 한반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독일을 비롯해서 유럽 지역에서 친일ㆍ친나치 행각을 벌인지라, 조선사람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만약 안익태의 반민족적 행각을 미주 동포들이나 임시정부 김구가 알았다면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곡조를 승인 요청하거나 허용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악한 것은, 안익태는 그렇게 몰래 벌인 친일ㆍ친나치 행각을 우리 국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고백하거나 반성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반민족행위를 철저히 숨겼으며, 국민들은 그가 애국가 작곡자라는 이유로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칭송했다.

안익태는 애국가뿐 아니라 그가 대표작으로 내세우고 있는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에 대해서도 온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한국환상곡>4악장 합창 부분 한반도 찬가(讚歌)’1942년 연주된 만주환상곡합창 부분 만주ㆍ일본 찬가를 자기 표절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코리아 판타지의 작곡자라는 이유로 안익태에 대한 애국자적 환상이 만들어진 후, 그를 숭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근거 없는 영웅화 작업이 시도됨으로써 그의 애국자적 허상은 더욱 고착되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안익태는 평생을 일관한 애국자의 표상으로 위인화되었다. 이는 반애국자가 애국자로 둔갑한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남의 나라 곡()표절한 국가(國歌)란 있을 수 없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가진 변절과는 다른 또 하나의 논란은 바로 <애국가> 곡조의 표절설이다.
이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불가리아 민요 <, 도브루잔스크 크라이>의 악보 및 음곡(音曲)이다. 이는 인터넷을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안익태의 애국가 표절 시비는 1964년 제3회 국가 음악제에서 미국인 지휘자 니콜로프(Peter Nicoloff)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애국가> 중 몇 소절이 나의 모국 불가리아의 민요와 유사하다라는 주장을 하며 처음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1976년 이유선이 한국양악백년사에 국가(國歌) 제정 문제로 확대되었으나 친일인사 모윤숙이 대표로 있는 안익태기념사업회의 발 빠르고 적극적인 대처로 애국가 표절 시비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애국가> 표절 논란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음악인들 사이에서나 언론 보도에서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은 당시 우리 국민들이 안익태를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대단한 애국자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우리 <애국가>와 작곡자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안익태가 1급 친일 반민족행위자요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지금, 예전에 무마했던 불가리아 민요 표절 혐의도 다시 재소환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애국가>의 작곡자가 더 이상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애국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두둔해야 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세계 어느 나라가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를 반애국자의 작곡으로 부르며, 세계 어느 나라의 국가에 남의 나라 곡조를 표절한 곡을 사용한단 말인가?
민족의 수치요 국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애국자> 작사자는 누구인가

대한민국 <애국가>의 작사자는 공식적으로는 미상이다.
학계에서는 한창호 작사설윤치호 작사설이 오랫동안 대립해왔으며, 세간에서는 두 대립되는 설이 공공연하게 각축을 벌여왔다.
두 설 외에도 오래전에는 소위 합작설이란 것이 등장하기도 했고, 한때는 음악학자 노동은이 추정한 공동창작설이 공감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세()를 얻고 있지 못하다.

애국가 작사자 논쟁의 시발

해방 이후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처음으로 글로 기록한 이는 작가 이광수이다. 그는 1947도산 안창호라는 책에서 애국가의 현 가사는 안창호의 작이라고 주장했으며, 안창호는 이를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194810박은용은 <애국가 >에서에서 이광수의 주장을 배격하고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을 제기하였다.
박은용은 피아니스트 윤기선(윤치호 아들) 집에 전해오는 윤치호의 필적 중에 ‘1907윤치호 이라는 서명(書名)이 붙은 친필 붓글씨애국가사(愛國歌詞)의 글발을 증거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1907년은 애국가 작사 연도가 아니라 필사(筆寫) 연대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그런데 윤치호 친필이라며 제출된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가 신뢰받을 수 없는 일방적인 정보였음은, 후에(1955) 윤치호의 사위 정광현에 의해 가사지의 필사 연대가 1907년이 아닌 1945년으로 번복됨으로써 밝혀졌다.

애국자 작사자 조사위원회 활동의 전말

<애국가>가 작사자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논쟁으로 번진 것은 1955년의 일이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애국가작사자와 작곡가를 물어왔을 때(세계대백과사전에 넣기 위해) 문교부는 작사자 안창호, 작곡자 안익태라고 통보하고 이 자랑스러운 경사를 언론사에 통보하였다.
이 기사가 보도되자 애국자 작사자가 안창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문제 제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서울신문> 414일자. 애국가 작사자 확인에 부심<연합신문> 414일자. 안창호가 아닌 것은 명백<한국일보> 415일자. 윤치호 최병헌 양 씨의 합작?<한국일보> 416일자. 윤영선 씨 애국가는 선친이 작사한 것. 윤치호 씨 영식(令息)이 합작설에 이의(異意) 제기

작사자 논란이 일자 문교부는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인문학 및 국학의 선구자 최남선, 서지학의 권위자 황의돈 등으로 4자위원회를 구성하여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다.
최남선과 황의돈은 일관되게 안창호 작사설을 지지했고, 국사편찬위원회와 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는 처음에는 윤치호 최병헌 합작설을 내세우다가 나중에는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물증을 앞세워 윤치호 작사설을 지지하며 안창호 작사설에 대립했다.
* 이병도 :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실증사관을 내세웠으며, 광복 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시 일본에서 황국사관을 신봉하고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천리(天理)대학교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제기되어 비판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5555일 주요한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안창호 윤치호 합작설을 제기하고 칼럼 말미에 문제의 윤치호 씨 서명이 있는 사본만을 가지고는 윤씨 작사의 확증으로 보기 어렵다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러저러한 정황에서 윤치호 동생 윤치왕은 <경향신문> 지면을 빌려 애국가가사는 윤치호가 작사한 것으로 1907년 한영서원 학생용 팸플릿에 실렸으며, ‘붓글씨 가사본은 같은 해 윤치호가 친히 국문 간소화 방침에 따라 신()철자법으로 써놓은 유품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윤치왕의 이러한 해명은 불과 며칠 후 윤치호의 사위인 정광현에 의해 전면 부정된다. 정광현이 담화 형식을 통해 애국가 가사지의 필서 연대는 1907년이 아니라 1945이라고 공개적으로 번복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의 개입* 등 우여곡절 끝에 조사위원회의 공식 결론은 작사자 미상으로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 배제이다.
* 이승만의 개립: 이승만은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라 잘못 믿고 친일의 흠이 있는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로 할 수 없으므로 조사위원회는 그 뜻에 따라 결론지었다고 서정주는 회고했다.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물적 증거 검토

윤치호 작사설에서 주요한 증거로 제출된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에 대한 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가 과연 윤치호 친필이 맞는가이다. 1945년에 필서된 것이라면 자필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거짓이 게재되어 있었고, ‘서화로서 기본조건도 갖추지 못한 작품이기에 더욱 그렇다. 제목도 없는 작품이 애국가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신뢰하기 어렵다.
194510월 자식들 요청으로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썼다면 그 목적은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1945년 바로 그 당시에 자신의 구명운동을 위해서 적극 활용됐어야 할 증거물이었다.
윤치호는 194512월에 작고한바, 민족반역자로서의 불명예를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물을 왜 정작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1945년에는 공개하지 않다가 3년이 지난 194810월에야 유가족들이 뒤늦게 신문의 칼럼을 통해 공개했는지 의문이 생겨난다.
• ① 각설하고 향후 누구라도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을 주장하려면 그동안 가장 중요한 물적 증거로서 윤치호 친필을 기정사실화해온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식적이며 엄정한 필적 감정부터 선행돼야 한다.
• ②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의 또 다른 주요 물적 증거로 내세웠던 윤치호 역술 찬미가재판본은 그 자체로 증거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장남이 보관했다는 찬미가원판의 완전한 공개가 먼저 선행돼야 한다.
1955년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한창일 때 국사편찬위원회가 전력을 다해서 애타게 찾았는데도 나오지 않았던 책(애국가 가사본이 실린 책)들이 1975윤치호 장남 윤영선이 소지하고 있던 윤치호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1955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에서 증거물로 제시된 친필은 논란 끝에 채택되지 못한 자료인데, 20년이 지난 뒤에 다시 그 원본이 발굴되었다고. 그 집에서? 이상하지 않은가?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은 찬미가 원본과 재판본을 왜 그동안 감춰놓았다가 이 시점에 다시 내놓았을까? 그리고 처음 발견되었다고 대서특필한 원본은 왜 아직도 그 형태와 그 내용이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을까?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전문 증거에 담긴 함의

앞의 19554주요한의 경향신문 칼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설에는 당초 성자성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라는 가사가 윤치호 씨 원작인데, 나중에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주요한이 전한 이 내용은 이른바 애국가 작사자 논쟁에 있어서 단독 작사설과 다른 안창호ㆍ윤치호 합의설이다.
나중에 주요한은 그의 안도산 전서를 발행하면서 그의 사위인 홍재형으로부터 다시 전해 들은 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수록해놓았다.
• ① 안창호가 윤치호가 만나 이 같은 대화를 나눈 곳은 평양 대성학교에서이다. 황실가의 가사를 고쳐 부름이 좋겠다고 윤치호와 상의하던 안창호가 미리 써놓았던 동해물과 백두산이가사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찬성했고, 안창호는 그러면 이 가사를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 하고 제안하여 서로 묵계(默契)했다. 그 뒤부터 애국가는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안창호는 자기 공을 세우지 않고 윤 교장에게 공을 돌린 것이다.
* 황실가와 애국가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이어지는 동일한 후렴구를 가진 무궁화 가()()이다.

윤정경이 채록ㆍ공개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증언

김정수(윤정경의 작은할머니, 1894년생)의 목격 증언
윤정경은 <‘동해물과 백두산이詩想과 도산 안창호>, 진리 찾아 50, 진솔한 삶의 향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88동문 입학 50주년 기념문집에서 현행 <애국가> 탄생의 결정적 장면이 눈으로 보듯 펼쳐져 있었다.
이 글은 안창호가 19072월 미국에서 귀국한 지 3월 초 경칩 무렵에 평안도 지방을 방문했다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의 시상(詩想)을 떠올렸던 상황에 대한 목격담을 윤정경 자신이 직접 청취하여 채록한 것이다. 당시 열세 살이던 김정수는 안창호와 집안 어른들이 만나 대화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김정수:‘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첫머리는 안창호 선생이 우리 집에 와서 지으셨다. 손님으로 온 분이 미국에서 온 지 며칠 안 됐다고 나도 끼어 앉아 있었지. 그리고는 함께 예배를 보는데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백두산과 두만강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찬미가가 있었거든. 안창호 선생님이 들으시고 그 가사에 무슨 연유가 있는지 궁금해하시더구나. 네 큰방아버지(윤형관 집사)저희 집안 조상인 윤관 장군의 칠언절구(七言絶句)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수음마무白頭山石磨刀塵 豆滿江水飮馬無라는 구절이 있어 거기서 따온 것으로, 신자들의 간도 땅 만주 전도(傳道) 열망을 담아서 예배 볼 때 찬미가처럼 부르고 있습니다.” 설명을 드렸단다. 안창호 선생은 시문(詩文)과 가사(歌詞)에 대단히 박식한 것 같더라. 자신이 직접 새 찬미가사를 지어보겠다면서 하시는 말씀이 세상에는 춘하추동 없이 너무 춥거나 덥거나 해서 살기 어려운 나라도 많다는데, 이왕이면 우리가 복 받고 있는 춘하추동을 찬미하는 것도 새바람을 추가하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만주 벌판을 달리던 우리 민족의 강성했던 기상을 새로 짓는 가사에서도 첫머리에 담되 두만강 물동해 물로 바꾸면 더 웅장해 보일 것 같습니다. 미국을 왕복할 때 보니 태평양이 참으로 광활하고 웅대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구나. 네 큰방아버지가 이왕이면 선천 바닥뿐 아니라 온 겨레가 즐겨 부를 수 있도록 선생님이 잘 지어주시면 그대로 받들겠습니다.”라고 청을 드렸단다. 안창호 선생은 평양으로 가싱 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해 춘하추동 사계절을 노래하는 가사를 새로 만들어 보내주셨는데, 그 내용이 어찌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는지 선천교회 찬미가는 대번에 안창호 선생이 지어 보낸 가사로 바뀌었고, 이 찬미가는 선천 바닥에서 애창곡 1번이 됐단다. 내가 안창호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이 백두산과 동해물이라는 노랫말과 함께이니까 아직도 기억하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잊었을 게야. 안창호 선생이 이 노랫말을 짓기 위해 이틀이나 금식기도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안창호 선생은 자신이 가르치는 평양 대성학교 학생들에게도 이 찬미가를 알려줬다는데, 대성학교뿐 아니라 이 찬미가를 부르는 교회가 점점 늘어났지.

이 생생한 대화는 1957년에 있었던 일이다. 김정수 할머니와 아들 윤성실이 나눈 대화에 종손 윤정경이 함께 들으면서 촘촘히 기록해놓은 자료를 글로 복원한 것이다.
1955년 애국자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혼돈 속에서 작사자를 규명하지 못한 채 작사자 미상으로 발표하면서,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조사를 재개하겠다라고 공헌한지 50년 만에 드디어 그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이다.

윤형갑(윤정경 작은할아버지, 1904년생)의 직접청취 증언
윤정경은 김정수 할머니와 목격증언과 궤를 같이하는 또 하나의 증언을 채록해 두었으니, 바로 독립운동가였던 작은할아버지 윤형갑이 도산 안창호로부터 직접 들은 직접청취증언이다.
그는 윤형갑이 안창호와의 대화 내용을 1950년대 후반 채록해 두었다가 50여 년이 지난 2013년에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시상(詩想)과 도산 안창호, 대한광복군 총영 태동(胎動)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책 내용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무궁화노래는 내가(안창호)가 지었다.-무궁화는 꽃이 아닌 조선사람들
삼천리강산은 간도 땅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안창호 원작 가사와 윤치호 개작 가사의 치명적 차이-‘정성을 다하여님군을 섬기며의 차이
동해물과 애국가는 주권재민 애국가이다.

윤형갑: 많은 사람들이 애국가는 누가 지었을까 궁금해합니다. 큰형님(윤형관)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는 선생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말하던데요.
안창호: 선천예배당 윤 집사(윤형관)는 정성이 대단했어. 벼루와 지필묵을 싸들고 평양까지 따라왔지. 종이가 넉넉해 종이 아끼지 않고 가사를 이리저리 다듬을 수 있었다. 완성된 찬미가 형태의 주권재민 혁명 애국가는 정서(精書)해서 윤 집사 편으로 선천예배당으로 보내주고 서울로 와서는 균명학교 강연 때 내가 지은 애국가를 구절마다 따라 부르게 되풀이 가르치고 매일 아침에 이 애국가를 창()하자는 강연을 했지.
윤형갑: 그렇다면 이제 선생님께서 애국가 원작자라고 나서시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안창호: 득보다 실이 더 크다. 혁명과 전쟁은 소수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야. 온 겨레가 떨쳐나서서 해야 하는 것이야. 선천예배당의 애국찬미가는 내가 원작자이다. 그러나 애국가는 나 개인이 지은 노래로 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가사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서 온 겨레가 민요처럼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어야 해. ‘애국가의 기틀은 내가 지어놓았다.

그러면서 안창호는 애국가가 미국의 <오 마이 클레멘타인>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민요처럼 정착되기를 바랬다.

무궁화 노래와 애국가

<애국가>류의 최초 형성과정

애국가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6년 서재필을 필두로 독립협회가 결성할 즈음 창간된 독립신문이 제안한 국가(國歌) 제정을 위한 애국가 부르기 운동에서 출발한다.
독립신문에 발표된 애국가류 작품들의 제목을 보면 독립가’, ‘경축가’, ‘새 군가’, ‘교가등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제목 자체가 애국가인 작품이 3분의 1이 넘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았다.

<올드 랭 사인> 곡조 <무궁화노래> 출현
18978조선개국 505년 기원절행사에 배재학당 학원들이 참가하여 여러 노래를 불렀는데 그중 <무궁화노래>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렴이 없이 제목만 <무궁화노래>였다.
당시 독립신문에 의하면, 18978<무궁화노래> 가사(우리 나라 우리 님군 황텬이 도으사, 님군과 백셩이 한가지로 만만세를 하야 태평 독립 하야 보세)를 윤치호가 썼고, <올드 랭 사인> 곡조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결정적 근거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논리의 비약으로 언급할 수준이 아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18996월 배재학당 방학예식에서 다시 <무궁화노래>(무궁화 1)가 등장한다.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부른 <무궁화노래>는 후렴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젼하세로 현행 애국가의 후렴과 똑같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무궁화노래>라는 제목 자체가 후렴이 들어 있는 노랫말에서 연유한 것일진대, 현행 애국가 역시 무궁화의 후렴의 <무궁화노래>이기 때문이다.
후렴이 먼저 형성되어 틀이 잡히고 본가사가 나중에 추가 생성되는 민요적 성격을 <애국가>는 가지고 있다.

무궁화 2’ 동해물과 애국가의 탄생
1907성자신손 무궁화노래와 후렴이 같고 본가사가 다른,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새로운 <무궁화노래>가 출현했다.
무궁화2’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이다.
현행 <애국가>의 출현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찬미가재판본이다.
이 책의 역술자 윤치호는 두 편의 <무궁화>를 애국찬미가로 규정하면서 두 곡 모두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부른다고 표기했다.

민족의 수난 속에 퍼져나간 주권재민 애국가

1907년 처음 출현한 동해물과 애국가(무궁화가2)’(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창호와 관련이 깊다.
당시의 수많은 애국가류는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외에서 독립기지를 세우려 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되었다.
그 중 동해물과 애국가(무궁화가2)’는 가장 큰 결집력과 호소력으로 부각되었다.
특히 19193.1운동 때에는 당시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숨겼던 태극기를 들고나오고, 누구라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도록 닳도록을 목청껏 따라 불렀다.

안창호의 <애국가> 노랫말의 실마리는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작사자 규명의 결정적 증거는 <애국가> 노랫말 그 자체이다.
안창호는 청년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개화사상가인 유길준의 영향을 받았으며, ‘흥사단이라는 명칭을 계승할 만큼 그를 존경했다.
유길준이 작사한 독립경절가를 존중한 안창호는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하던 차에 동경에 망명 중인 유길준을 만나 그에게 새로운 애국가 가사를 지어줄 것을 부탁했으나 유길준은 사양했다.
귀국한 안창호가 선천예배당 찬미가에서 착상을 떠올리고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를 되살려 지은 노랫말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현행 <애국가>이다.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에 들어 있는 장백산이 높다한들 헤아려보자’. ‘동해물이 깊다한들 헤아려보자.’ ‘이 기상과 진심으로 둘을 합하여같은 가사들이 10여 년 후 <애국가>의 본가사 노랫말로 자리 잡은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강력한 물적 증거이다.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애국가> 가사에 들어 있는 흥사단 4대 정신

박재순은 애국가 작사자에게 필수적인 사상과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절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염원을 가졌는가?
둘째, ‘철갑을 두른 소나무처럼어떤 환경과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와 투쟁 정신을 품었는가?
셋째, 우리 민족과 민중을 불변하는 기상(氣像)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밝은 달처럼 일편단심을 가진 존재로 보았는가?
넷째, 어떤 처지와 경우에도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결의와 다짐을 가졌는가?
그러면서 박재순은 윤치호에게는 없고 안창호에게는 있는 것이 바로 이 애국가의 정신과 신념이라고 갈파(喝破)했다.

그는 흥사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애국가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청년학우회와 흥사단의 이념과 정신인 무실(務實)ㆍ역행(力行)ㆍ충의(忠義)ㆍ용감(勇敢)’이 담겨 있다.
애국가 1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도록 닳도록은 삶의 껍질인 물질과 욕심에 메이지 않고 삶의 알맹이인 생각과 뜻이 알차게 차오르도록 충실하자는 무실(務實)의 정신이다.
애국가 2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는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와 도전에도 꿋꿋하게 자기를 지키고 나아가는 기개(氣槪)와 용감(勇敢)을 나타낸다.
애국가 3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는 나라의 주체인 국민과 국민의 한 사람인 나 자신을 향한 단심(丹心) 속에서 우러나온 정성스런 마음으로 어떤 유혹과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충의(忠義)를 나타낸다.
애국가 4이 기상과 이 맘으로 정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는 어떤 조건과 경우에도 쉽게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한결같이 꾸준하게 정성과 힘을 다해 행동하는 역행(力行)을 나타낸다.
흥사단은 안창호가 세운 단체인데, 애국가 노랫말의 시상(詩想)과 흥사단의 4대 정신(務實力行忠義勇敢)이 담긴 뜻이 이처럼 서로 통한다면, 애국가 노랫말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임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애국가! 노랫말은 살리고 곡조는 바꾸자

어떤 노랫말을 짓자면 작사자의 머릿속에 그 노랫말 내용과 성질에 맞는 의지와 정신과 신념이 들어 있어야 한다.
안창호는 애국가를 몸으로 살았다. 그의 삶과 정신 속에는 언제나 애국가가 살아 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안창호가 드린 예배이고 기도이며, 비나리이고 염원이며, 투쟁이고 해방이었다.
<애국가>의 노랫말(본가사+후렴)에는 도산 안창호의 생각과 정신, 사상과 신념, 의지와 염원, 민족관과 세계관이 절절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나는 기독교인도 흥사당원도 아니지만 자신 있게 간파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는 만고의 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이에 나는 애국가 개체(改替)의 방향을 자신 있게 천명하고자 한다. “안익태 애국가 곡조는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대한민국의 소중한 <애국가>! 노랫말을 살리고 곡조는 바꾸자.”

글을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애국가들로 민족정기를 되찾고, 향후 국민의 뜻과 지혜를 모아 국민 모두가 동의하고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임진택 지음, 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

임진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방송국 프로듀서로 재직하였으나, 1981TBCKBS로 통폐합되어 강제 해직된 후, 문화운동가이자 명창으로 활동 중이다. 전통연희에 바탕을 둔 민중연극인 마당극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문화운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했으며, 시대와 역사를 담아내는 새로운 창작판소리를 실현했다. 민족예술과 민중예술의 지평을 확장함과 동시에 민주화운동에 기여했으며, 새로운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여 <백범 김구>, <남한산성>, <다산 정약용>, <윤상원가>, <세계인 장보고>, <전태일> 등의 판소리 사설을 창작해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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