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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독부’ 이승만 평전≫-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김삼웅2021-08-3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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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부이승만 평전

여는글

독재자 이승만평전인가

한국 수구세력의 결정적 과오의 하나는 이승만과 박정희 등 독재자에 대한 비호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 미주 망명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독립운동보다 오히려 친일적인 언행이 적지 않았다.
독립운동단체를 분열시키고 장인환ㆍ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승만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에서 두 차례나 축출되었다.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3.15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시민ㆍ학생 200여 명을 죽이고 60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독재자다.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고 아직도 부상자가 그날의 분노를 삭이고 있는 실정이다.

3.15뿐 아니다. 이승만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을 통해 헌법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아무런 준비없이 구두선으로 북진통일을 되뇌다가 인민군이 남침하자 혼자 도망치고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서울시민을 적 치하에 남겨두었다.
원조물자는 특권층에게만 안겨주어 국가경제와 국민생계는 파탄지경이 되었다.
친일경찰을 등용하여 독립지사를 탄압하고 경찰국가체제를 만들었다. 총독부 판사 출신들로 사법부를 장악케 하여 숱한 독립지사, 민주인사들을 처형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를 중용하여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탄압했다.
그리고 일본군 출신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온상을 만들고 독립지사를 탄압했다.
김구 암살 배후, 조봉암 사법살인을 비롯하여 숱한 독립지사들과 그 후손들이 피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이승만 추종자들은 대법원의 조봉암 선생 무죄선고를 접하고도 한마디 사죄도 하지 않았다.

수구세력의 이승만 부활작업에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담겨 있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취약한 친일의 행적을 지우려는 것이다. 이것이 임시정부를 폄훼하고 단독정부 수립일을 건국절이라 우기면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내세우는 배경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세력이라 참칭하면서 항일독립운동, 평화통일운동, 민주화운동세력을 빨갱이친북용공좌경종북세력이라며, 그때그때 용어를 바꿔가면서 매도한다.

이승만 정권의 경찰과 검찰, 어용언론은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어린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불온 삐라를 투입하여 이들을 용공으로 몰고, 4.19시위 때도 그랬다.
지금도 저들은 비판세력의 입을 막거나 논리가 막히면 그 짓을 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항의 촛불시위, 심지어 일본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오염 우려, 한미FTA 반대, 이승만ㆍ박정희 비판에도 어김없이 용공ㆍ좌경 딱지를 붙인다. 가히 정신질환성 수준이다.

대한민국 헌법(전문) 임시정부의 법통과 4월혁명의 정신을 국가 정체성으로 선언한다.
이것은 친일세력과 독재세력을 배격하는 헌법의 기본 이념이고 정신이다.
그럼에도 친일파 후손들과 여기 빌붙은 언론인ㆍ지식인들이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ㆍ이명박으로 이어지는 독재세력이 마치 이 나라의 정통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은 망발이다.
역사와 국민과 정의에 대한 모독이. 도둑이 주인을 내쫓고 주인 행세하는 적반하장이다.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마치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아니 역사를 왜곡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제강점기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460개 중에 민주공화제 국가의 건설을 추구하는 민주지항형이 244개로 53퍼센트를 차지했고, 제헌국회의원 절대다수가 민주공화주의자였다.

군사독재자 박정희를 환생시켜 재미를 톡톡히 보아온 수구세력이 이번에는 이승만 살리기에 총력전이다.
그를 미화하는 책이 속속 출간되고, ‘국부’ ‘건국의 아버지란 용어가 거침없이 쓰인다.
수구족벌신문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비판을 자학사관이라 매도한다. 일본 우익이 전범재판, 군벌해체 등을 자학사관이라 비판하면서 교과서 왜곡을 주도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어법이다.
수구세력은 자신들이 현대사의 정통임을 내세우면서 거침없이 역사를 왜곡한다. 이승만 숭배자들이 역사를 왜곡하면서 애써 방점을 찍은 대목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여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라는 대목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짓밟았고 시장경제를 살리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남한의 경제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된 북한보다도 오히려 뒤처졌다.
원조 물자는 소수의 권력자와 기업인들의 배만 불렸다. 이것을 시장경제라고 우기는 것은 진실과 학문에 대한 모독이다.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제헌의원들 대부분이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을 민주공화제와 시장경제에 두었다.

이승만이 제헌헌법 제정 과정에서 가장 관심을 보였던 대목은 헌법의 내각책임제 초안을 대통령중심제로 바꾼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독점을 위해서는 몇 차례나 헌법을 헌신짝 버리듯 바꾸고, 각급 선거를 경찰, 관권을 동원하여 조작했다.
헌법은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장식물이 되고, 선거는 3.15부정선거가 말해주듯 선거라는 이름의 협잡이었다.
외신이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조롱했을 만큼, 그는 민주주의를 짓밟았고 국격을 실추시켰다.
이승만식 폭압 통치나 형편없는 국정운영, 장기집권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면, 그의 국부추대를 위한 수구세력의 재평가 작업은 어떤 의미로도 용납될 수 없다.
사마천이 말한 대로 역사는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해서 거기에 필주(筆誅)를 가함으로써 있어야 할 모습을 살리는 일이다.”

01 젊은 날의 이승만, 출생과 성장
02 일신의 영달을 앞세운 겉치레독립운동
03 분열을 부른 야망, 순진한 외교주의
04 자주독립민족통일을 외면한 권력의 화신
05 실질 없는 허세만 부리다가 전쟁만 부른 무능 대통령
06 상상을 초월한 세상의 모든 악행 그리고 파멸

07 검은머리 미국인 이승만의 슬픈 귀거래사

파멸의 길로 이어진 ‘3.15부정선거 비밀지령

이승만의 권력욕은 나이가 들수록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집요해졌다.
19605월에 실시 예정인 제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나서기로 했다. 1875년생이니 86였다.
19593, 이승만과 이기붕은 제4대 정ㆍ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가장 믿음직한 충견 최인규를 내무장관에 앉히는 등 소규모 개각을 단행했다.
이기붕은 자신의 장남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으며, 처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의 충실한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이승만으로서는 그런 이기붕 부부가 더없이 고마웠다.
그래서 이승만은 1960년 새해 첫날 자유당과 반공청년단 간부들을 경무대로 불러 금년 선거에서는 반드시 같이 일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며 이기붕을 당선시킬 것을 공개적으로 지시했다.
자유당 정부는 19602월 하순 내무장관 최인규의 이름으로 선거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전국 시장, 군수, 경찰서장에게 내렸다.

무법천지 깡패들 세상, 어린 학생들의 경고음

이승만 정권의 불법과 횡포는 끝 가는 줄을 몰랐다.
1960년이 열리자마자 진행되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과 부정선거운동이 민주주의의 기본마저 허물어뜨리고 전개되자 학생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맨 먼저 나선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대구 경북고교생들이었다. 228, ‘민주당 선거강연회 참석을 방해하기 위한 일요일 등교에 항의하여 그동안 관제 데모에만 동원되어온 학생들이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학생들은 학원의 정치도구화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저항에 나섰다.
315일 실시된 정ㆍ부통령선거는 자유당 정권의 사전 계획대로 철저한 부정선거로 진행되었다. ‘4할 사전투표‘3인조, 9인조 공개투표외에 유령유권자 조작과 기권 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내통식 기표소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시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ㆍ발표 등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태양도 빛을 잃은 3.15 그리고 시민 봉기

1960315일은 대한민국에서 태양이 빛을 잃은 날이었다.
3.15선거가 부정과 폭력으로 얼룩진 것을 지켜본 대다수 국민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가장 먼저 마산 시민ㆍ학생들이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섰다. 격분한 시민들이 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는 등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은 주모자로 구속한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정부는 마산의거를 공산당의 조종으로 몰아붙여서 다시 시민의 분노를 샀다. 경찰과 자유당, 반공청년단 단원들은 시위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공산당을 찬양하는 전단을 투입하여, 이들을 공산당으로 조작하려 들었다.
315, 광주 민주당원 50여 명도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곡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될 기미를 보였다.

이승만은 마산사건의 보고를 받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학생 데모를 관대하게 조치함으로써 일어난 일이 아닌가? 철저히 배후 관계를 규명하여 의법 처리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대통령의 배후 규명의법 처리지시는 시위에 나선 학생과 시민들에게 살상과 고문, 용공조작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국민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겁먹지도 않았다. 317일 진해 고교생, 서울성남 고교생, 전남여고생들이 데모를 벌였다.
318, 부통령 당선자로 공고된 이기붕은 마산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시위진압에 나선 일선 경찰들에게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경찰은 마산시위에 참여한 시민ㆍ학생 부상자를 마산시청 지하실에 감금하고 고문하여 희생자가 생겼다. 마산사건 희생자가 16명으로 확인되었다.
AP통신(318) 한국의 민주주의는 썩은 나무에 핀 곰팡이에 지나지 않는다. 마산사건의 경찰행동은 정복을 노리는 침략자의 수법과 같다고 논평했다.

시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 411일 실종되었던 마산 상고생 김주열의 사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올랐다.
이를 지켜본 시민들이 궐기하여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월혁명의 불길을 당겼다. 김주열에게 정면에서 최루탄을 쏴 죽인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악질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2의 마산사건은 경찰의 발포로 2명 사망, 14명 부상 등의 희생을 치르면서 며칠째 계속되었다. 검찰은 2차 마산사건과 관련하여 시민, 학생 30명을 구속하고 2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승만은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ㆍ학생들을 끝까지 공산당 조종이란 용공사건으로 몰아 위기의 국면을 벗어나고자 했다. 이승만의 추종자들이 3.15 부정선거는 최인규 등 내각에서 저지른 것이고, 이승만은 몰랐다는 주장은, 그의 거듭된 용공 담화발표에서 거짓임이 확인된다. 이승만은 3.15부정선거와, 이에 항거한 마산 시민ㆍ학생 학살의 주범이다.

혁명의 불길에 껍데기로 사그라진 독재자

4.19 독재권력의 심장을 겨눈 거대한 해일

반이승만 태풍이 서울에 상륙한 것은 418일이다.
이날 고려대 4천여 학생들은 대규모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이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반공청년단 소속의 100여 명의 정치깡패(조직폭력배)들이 부삽, 쇠갈퀴, 몽둥이, 벽돌 등으로 학생들을 습격하였다.
다음날, 서울의 대학가는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제히 폭발하였다.
흔히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419일 오전, 서울대생 2천여 명이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체주의에 항거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출발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다.
이와 함께 서울 대부분의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한 10만여 학생들의 광화문으로 밀려왔다. 거대한 해일이고 용암이었다.
학생들은 학교 주변에 배치된 경찰의 저지선을 육탄으로 뚫고 <해방가> 등의 노래를 부르며 광화문 쪽으로 밀려왔다. 시위대는 중앙청 앞에서 경찰의 실탄 사격을 받고 수명이 쓰러졌다. 서울에서의 첫 사상자였다. 피를 본 학생, 시민들은 더욱 격렬하게 경무대를 향해 전진했다. 경무대 앞에서 다시 경찰의 사격으로 많은 학생들이 살상되었다.
학생들의 희생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더욱 크게 불어나고, 흥분한 시민들 중에는 총으로 살인경찰을 없애버리자는 구호에 따라 시경의 무기고로 몰려가 총기 탈취를 시도했다.
경무대 앞에서 증원된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받고 후퇴한 시위대는 자유당사, 반공회관, 서울신문사 등에 방화하고, 중앙방송국 점거를 시도했으나 경비 강화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날 하루 서울시내 곳곳에서 수차례 시위대와 경찰의 접전이 이루어지고,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00여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을 업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성을 잃은 경찰은 최루탄, 기관포를 가리지 않고 난사하여 사상자가 더욱 늘어났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의 사망자와 62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승만의 폭정과 영구집권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민주주의 수호자들이었다.

위기에 몰린 이승만은 419일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국무원 공고 83호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의 정당한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물리적으로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경찰은 계엄이 선포되자 장갑차를 동원하여 반격을 개시하고, 시민들까지 다수 합세한 시위대는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총기를 탈취하여 경찰에 응사했다. 서울의 시위는 시가전을 방불케 할 만큼 격렬했다.
계엄사는 이날 오후 탱크를 포함한 예하부대를 서울에 진주시켰다. 한국 민주주의 투쟁사에서 가장 긴 하루였던 419일은 계엄군이 서울과 주요 도시에 진주하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계엄령 아래서도 시민,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는 계속되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이승만은 일단 위기를 벗어나고자 제스처를 취했다.
경찰책임자들의 사퇴, 내각 총사퇴,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 사퇴에 이어 422일 성명을 통해 자신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국무에만 전념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권력을 내놓으려 하진 않았다.

사면초가, 고립무원, 버림받은 독재자

이승만에게 더욱 절박한 위기가 다가왔다.
422일부터 시민, 학생들은 사태 해결에 미온적인 이승만을 직접 겨냥하고 저항에 나선 것이다.
4.19 이후 시위대의 구호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에서 이승만 물러나라로 바뀌었다.
기대했던 대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진압하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학생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 군인들을 격려하고, 이런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계엄군에 박수를 보냈다.

더욱 중요한 변수는 미국의 태도 변화였다.
정권을 잡고 12년간 권력을 유지해온 버팀목이었던 미국이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이미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늙은 독재자를 더 이상 비호할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
그리고 격양된 민심의 불길이 반미감정으로 옮겨붙기라도 하게 되면 게도 구력도 다 놓칠 판이었다.
미국무성은 한국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강경한 성명을 420일 발표했다.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이승만은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게 되었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발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시민, 학생들이 다시 가두시위에 나섰다.
425일 서울시내 258명의 교수들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운명의 날 426일이 밝았다.
오전 7시부터 3만여 명의 시민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고, 광화문 거리에 모인 1만여 시민은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시내를 누볐다.
계엄군 일부는 최루탄과 공포탄을 발사했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남산과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끌어 내려져 동아줄에 묶여 끌려다니는 수모를 당했다. 우상화를 위해 세운 독재자의 동상은 그 주인의 처지를 예고하듯 시민들의 발길에 채이며 조롱거리가 되었다.
1020분경, 이승만은 학생, 시민대표와 가진 면담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고 하야 의사를 밝혔다. 이날 오후 1시 이승만은 전국에 대통령직 하야를 녹음으로 방송했다.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하는 그날의 시위에서도 사망 24, 부상 113명이 발생하여 국민의 분노가 다시 들끓었다. 하야 발표가 늦어졌다면 경무대는 시민들에게 포위당하고 그는 어떠한 변을 당했을지 모른다.

427일 오후 3, 국회는 이승만의 사임서를 즉시 수리하고, 헌법 규정에 따라 허정 수석 국무위원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다.
다음날 오후 경무대 관사 36호실에서 이기붕 부부를 비롯한 장남과 차남 등 일가족이 장남 이강석이 쏜 총으로 자살했다.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에는 의문이 따랐다. 모든 책임을 이기붕에게 떠넘기고 이승만을 구하려는 측근들의 소행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역사는 집단자살로 기록하고 있다.
이승만은 하야 한 달여 만인 529일 오전 85,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하와이 교포 몇 사람이 제공한 대만 CAT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했다. 망명 사실을 국민에게는 밝히지 않고 꼭두새벽에 줄행랑을 친 것이다.
이승만은 하야성명 발표에서부터 이화장에서의 칩거, 망명길을 떠나기까지 한 번도 폭정 12년과 4.19학살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4.19혁명은 민주공화정을 수립하고도 전제군주로 군림한 국부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장미가 피지 않는 쓰레기통으로 비하되다가 장미와 무궁화를 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4.19혁명의 현장에서 무자비한 경찰에 의해 살상당하는 어린 학생들을 지켜본 시인 김수영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를 발표했다. 그 첫 연이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김삼웅 지음, 독부김삼웅 평전-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책보세, 2012

독부에 관하여

심산 김창숙 선생은 자유당 정권 당시 대통령 이승만을 일러 독부獨夫라 했다. 독부란 인심을 잃어 잔적殘賊이 된 일부一夫(한낱 사내)”를 일컫는다. 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 하고 인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한다. 맹자<양혜왕>조에 보면,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과 무가 저마다 걸과 주를 쳤다는데,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고 따져 묻자 맹자는 잔적殘賊은 일부一夫(독부獨夫)에 불과하다. 일부인 걸주를 죽였단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단 말은 듣지 못했다고 일갈한다. 조선조 태종은 재위 5년 어느 날 세자(양녕)와 마주한 자리에서 걸ㆍ주는 비록 천하의 주인이었지만 인심을 잃자 하루아침에 독부가 되고 말았다. 하물며 너와 내가 인심을 잃으면 하루도 이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깨우쳤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진영에서 한때 명망을 얻어 지도자로 부상하고 해방 조국의 초대 대통령까지 되었으나 크게 인심을 잃어 독부로 전락하여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 사특한 독부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건국의 아버지니 뭐니 하며 찬양하고 미화하는 나라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대한민국 말고 어디에 또 있을까. 독부는 백성(국민)을 해치는 자 곧 민적民賊이니, 그런 민적을 국부라 희롱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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