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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위대한 학문과 짧은 생애≫-나비박사 석주명 평전-, 이병철2021-08-26 19:21
Writer

위대한 학문과 짧은 생애

석주명은 19081113(음력 923) 평안남도 평양의 대동문(大同門) 근처의 이문리에서 아버지 석승서와 어머니 김의식 사이에 3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석주명은 195042세의 젊은 나이로 충무로 4가 근처에서 술 취한 청년들과 사소한 시비 끝에 피격당해 횡사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산을 오른 산악인
한국 최초로 방언사전을 펴낸 겨레 사랑 국학자
음악을 사랑하고 제주도 민요를 채보한 아마추어 음악가
국제어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쓴 평화주의자
포충망 들고 나비 쫓아 한반도를 종횡으로 뛴 곤충학자
일제치하에서 <국제 인시류학회> 정회원으로 피선된 조선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시간을 가장 잘 아껴 쓴 사람이었다.
* 인시류 : 날개에 비늘가루가 있는 무리. 전 세계 200만 이상 되는 곤충 가운데 인시류로 불리는 나방과 나비류는 두 번째로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세 번째로 많은 곤충 종류이다. 인시류는 매미나 여치처럼 울지 못하고, 벌처럼 쏠 줄도 모른다. 다만 꽃이나 나무에서 꿀이나 진물을 빨아 먹기 좋은 파이프 모양의 긴 주둥이가 있다는 것과 날개에 아름다운 날개 가루(인분鱗粉)가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책머리에

석주명(石宙明) 우리 현대사 초창기에 몇 안 되는 별이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세계에 떨친 그의 업적은 일제(日帝) 암흑기를 빛낸 눈부신 것이었다.
그는 평생 60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하고 측정하여 생물 분류학상, 새로운 학설을 제창하였고, 외국인들이 독점했던 한국산 나비의 계통분류를 완성했다.
또 제주도 방언 연구로 국어학계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고, 평화와 애국 운동으로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썼으며, 산악활동을 통해 국토 구명과 녹화사업을 벌인 다재다능한 학자였다.

이 글을 쓰면서 시종일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가 이룩한 숱한 업적보다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그의 후천적 노력이었다.
그가 비명에 간 까닭도, 온 세상이 뒤집힌 전쟁 중에 피난을 가지 않고 연구실을 지켰던 까닭이었다.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장과 미덕 중에 노력이란 분야에서 이토록 온몸을 내던져 학문에 몰두한 학자가 이 땅에 있었다는 새로운 발견에 독자들도 마음이 벅차리라 믿는다.
이 글은 차라리 인간이 쏟을 수 있는 피와 땀의 한계를 생각케 하기 위한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석주선 피난기

195114일 밤 신당동의 어느 한옥 안방, 희미한 등잔 불빛 아래서 석주선(石宙善)은 일손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석주선 앞에는 오빠 석주명의 유고(遺稿)와 그녀가 그동안 모아온 옛 옷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제 곧 날이 샐 터이고 그녀는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만을 꾸려서 서둘러 인천을 떠나야 했다.
석주선의 분신과도 같은 옛 옷들과 오빠의 생명이었던 지도 504, 날이 밝으면 길 떠날 일행 세 사람 중 늙으신 시어머니는 짐을 질 힘이 없었고 나어린 시누이의 보퉁이에는 피란 가서 생계를 꾸릴 재봉틀 몸체를 넣었다.
이제 그녀는 오빠의 유고와 자신의 수집품(옛 옷들-그것을 내놓은 가문들로서는 옛 모습 그대로를 소중히 물려온 가보와 같은 물건들) 중 어느 한 가지밖에는 가져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 아무래도 오빠 것을 가지고 가야겠어요.”
옛 옷 꾸러미들을 들보에 매달아 놓고 그녀는 오빠의 유고들을 배낭에 꾸렸다. 지도 5백여 장 말고도 미발표 논문인 <한국산 접류의 연구>, <제주도 총서 4, 5, 6>, <세계 박물관 연표> 등의 원고 7천여 장과 발표문 스크랩ㆍ일기ㆍ논문집들이었다.
195115, 밥도 못 지어 먹고 서둘러 떠나는 세 여인 앞에 1월의 바람은 너무나 차거웠다.

가게시마 고농 시절

석주명이 나비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유학한 일본 가게시마 고농에서 만난 은사 오카시마(岡嶋銀次) 교수와의 의논 끝에 이루어진 결과이다.

내가 장담하지만 십 년만 죽어라고 하면 틀림없이 자네는 조선 나비에 관한 한 세계적인 나비학자가 될 수 있을 걸세. , 이래도, 주저할 텐가?”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10년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조선 나비를 연구하기로.”

그리고 10년 후 그는 정말로 그는 세계적인 나비학자가 되어 자기 제자들에게 이 “10년 공부라는 교훈을 기회 있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해주곤 했다.

세계의 걸작 나비 분포도

석주명의 학구열은 열심이란 말로는 충분히 표현했다고 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정말로 산 공부를 하려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 부스러기 시간, 토막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면 공부는 하나마나이다.”
이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결코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아주 가까운 친구가 찾아와도 10분 이상을 내주는 법이 없었다.
툭하면 식사시간을 잊고 연구에 몰두하는 그를 부인은 절대 재촉해서는 안 되었다. 그저 조용히 방문 밖에 밥상을 차려다 놓으면 석주명은 하던 일이 일단락되고 시장기를 느꼈을 때 비로소 밥상을 안으로 들여다가 혼자 먹었다.

불 꺼진 겨울에도 그는 밤늦게까지 연구를 했다.
왜 조수들마저도 다 퇴근한 방에 홀로 남았다가 밤이 늦게 밤이 깊어서야 퇴근했을까?
석주명은 가능한 한 많은 나비를 채집하여 조사하려는 원칙을 세웠다. 그 조사란 것은 같은 종 나비들을 암컷과 수컷 별로 한 마리 한 마리 앞날개와 뒷날개에 나타난 무늬의 숫자를 세고, 크기와 모양을 비교하거나 앞날개의 길이를 일일이 자로 재어 측정하는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할 만큼 엄청난 작업이었다. 그는 평생 70만 개체의 나비를 이런 방법으로 연구하였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전율을 느낄 정도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나비는 8251종으로 알려져 있는데, 희귀한 종류도 많은 데다 자기들이 살기에 알맞은 고장에만 있는 것들도 많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으로 한국산 나비를 모두 채집하기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국토까지 남북으로 잘려진 형편이고 보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볼 때, 민족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과학적인 학문 연구 방법이 확립되지 못한 시기의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국산 나비 248종의 학명과 분포 상황 등 분류의 기초를 확립한 석주명이야말로, 우리 생물학계에 끼친 공적은 세계 동물 분류학계로 보아서도 가장 뛰어난 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그는 남다른 집념과 연구 방법으로 일본 학자들에게 30년이나 선수를 빼앗겼던 나비 학문 분야를 오히려 일본 본토보다 먼저 자세히 구명하였으며, 특히 그가 남긴 한국산 접류분포도(The Distribution Maps of Butterflies in Korea)는 생물 지리학상 세계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국제무대에의 진출

석주명이 국제무대에 오르게 된 동기는 아주 우연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1931년 지질학자이자 앤드류즈 탐험대의 일행인 미국의 모리스(F. K Moris)가 게이조(Keijo, 경성)와 가이조(Kaijo, 개성)를 헷갈려 (경성에서 내려야 하는데) 개성에 내려 석주명의 나비 표본실을 들러 석주명을 운명적으로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석주명의 나비 표본을 보고 감탄한 모리스는 석주명에게 학술 자료 교환뿐만 아니라 연구비 지원을 주선해 줄 것을 약속하였으며 이것은 막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햇병아리 과학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석주명의 인생 항로를 결정지은 대사건이었다.

모리스의 약속대로 1931년부터 미국의 여러 박물관들과 표본 교환이 시작되었다. 이 일은 훗날 석주명이 한국산 나비의 국외분포 지도를 만드는 대작업의 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 연구가 국제적으로 뻗어 나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으로부터 소명

석주명은 자기의 채집 여행을 거미가 실을 뽑으며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다.
내가 돌아다닌 곳을 표시했다면 꽤 복잡할 것입니다. 사실 나는 백만분의 일 지도에 내가 다닌 길을 붉은 금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거의 거미집 모양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몇 군데가 파손된 거미집 모양이니 몇 해 뒤에는 아마 숭하지 않은 거미집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몇 해 후 나비 종류 수대로 적선(赤線) 거미집이 완성되면 이 나비 분포 지도를 보고 채집지를 택하여 여행을 떠나게 될 겁니다. 처음엔 전국 어디서나 쉽게 잡을 수 있는 종류의 지도를 보고 아직 기록되지 않은 지역을 택할 것이고, 그 뒤에는 현저한 종류들의 분포 경계선을 추궁하여 채집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니, 나의 채집 여행은 체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며, 설령 체력이 부족해진다 해도 조수를 써서라도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하겠습니다.”

제주도 박사

19434,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시험장이 제주도에 개설되어 석주명은 그곳의 책임자로 가게 되었다.
석주명이 제주도에 부임한 것은 그 자신으로 보나 국가적으로 보나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었다.
1943년부터 4월부터 19455월까지 불과 21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할 엄청난 학문적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를 일명 제주도 박사로도 불리게 한 제주도 연구는 나비 연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업적으로, 나비 연구가 십수 년에 걸친 끊임없는 노력과 정진의 결과였다면, 제주도 연구, 특히 방언(方言) 연구는 어학(語學)에 대한 천재적인 소양이 단시일에 이룩한 위업이었다.

석주명은 제주도에 부임하자 육지와 너무나 판이한 여러 가지 현상에 흥미를 느끼고 나비와 더불어 제주도(濟州島)’를 그의 연구 테마로 삼았다.
그는 곤충 채집부터 사투리ㆍ인구(人口)ㆍ제주도에 관한 문헌과 자료 등, 제주도의 모든 것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읽는 것 중 제주도에 관한 것이 나오면 즉시 적당한 제목을 붙여 카드에 쌓아 두곤 했다.
그 결과가 1948년부터 간행된 제주도 총서(叢書)’ 여섯 권이다.
1제주도 방언집, 2제주도의 생명 조사서-제주도 人口論, 3제주도 문헌집, 이 세 권은 석주명 생전에 서울신문사에서 출판되었으며, 4제주도 수필-제주도의 自然人文, 5제주도 昆虫相, 6제주도 자료집은 그의 사후 석주선이 보진재(寶晋齋)에서 출판했다.
석주명은 처음에 이 제주도 총서를 열 권까지 낼 계획이었으나 이숭녕(백제문화연구소장)의 만류도 있고 해서 여섯 권에 그치고 말았다.

꽃 모르는 나비학자

석주명에게는 잠자는 시간뿐만 아니라 점심 먹을 시간도 제대로 없었다.
아니, 그 시간을 아꼈다고 함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의 주머니엔 늘 땅콩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바삐 걸으면서 땅콩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잦았다.
석주명은 저녁을 먹고 나서도 방금 자기가 먹은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어떤 날 오빠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드렸더니 참 맛있게 드시더군요. 만든 나도 흡족하여 무슨 이야기 끝에 저녁의 요리는 맛있었지요?’ 했더니 글쎄뭐였더라, 확실히 맛은 있었던 것 같은데.’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웃을 수밖에 없었지요. 오빠는 의복에도 무관심해서 깨끗한 것으로 족했습니다. 양말이 두 컬레만 되어도 찾아온 제자에게 한 컬레를 주었고, 부하 직원들이 도시락을 못 싸 오는 것을 아시자 오빠도 도시락 없이 출근하여 찐 고구마를 사다가 직원들과 나누어 먹곤 했지요. 6.25로 모두가 야단들인데, ‘이런 때에 더 공부해야 한다고 하며 원고지를 한 보따리 사 들고 와서는 이 정도면 몇 달은 쓸 수 있겠지하시던 오빠의 모습이 선합니다.”

범상한 사람으로서 그의 인간적인 면만을 본다면 석주명은 한없이 불행한 사람이었다.
192619세 때 결혼한 그는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 유학 생활을 하였고, 귀국하여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 취직하자 곧 부인을 사별(死別)하였다. 늦게 맞은 두 번째 부인 김윤옥과도 오랜 갈등과 별거 생활을 거쳐 세상이 떠들썩한 가운데 법정에서 15년간의 부부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리고 두 해 뒤, 외동딸 윤희를 남기고 노상에서 비명횡사한 것이다.

에필로그-누가 그를 죽였는가-

빈대떡 집 아주머니 말로는, 그 전날 빈대떡과 술을 먹는 사람들로 그 일대가 어수선했는데, 까무잡잡한 사람이 급히 뛰어가다가 발로 어떤 청년을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러자 술 취한 그 청년이 저놈 인민군 소좌다!’ 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 청년의 패거리들이 우르르 쫓아와 석 선생님을 잡자, 선생님은 나는 인민군 소좌가 아니야, 나는 나비학자 석주명이야!’ 하고 소리쳤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술 취한 청년들이 막무가내로 선생님을 잡아끌고는 인민군 소좌가 틀림없다며 총을 겨누자, 석 선생님이 다시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하고 외치는데 누군가가 총을 쏘았다는 겁니다. 아주머니 말로는 구경꾼들이 많이 있었지만, 청년들이 국방색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든 데다 술에 취해 있어서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 하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거지요. 그 사람들은 석 선생님을 쏘고는 인민군 소좌 한 놈 잡았다!’ 하며 거적대기를 주워다 시체를 말아서 개천에 내던지고는 도망가 버렸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구경꾼 중의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은 내 스승인 나비박사 석주명이라고 하더랍니다.”
누가 석주명을 죽였는가?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하고 외치는 그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긴 자가 누구인가?
17권의 저서 128편의 논문은 세상에 남겨졌다. 그러나 산적한 연구 과제를 남겨놓은 80도 짧다 할 그의 인생이 너무도 푸른 나이에 지고 말았다. 평생을 그랬던 것처럼 그가 나비들의 뒤를 따라서간 뒤, 계속된 전진(戰塵) 속에서 그에 대한 기억은 점차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병철 지음, 위대한 학문과 짧은 생애-나비박사 石宙明 評傳-, 성현출판사, 1993

국학(國學)과 생물학(生物學) 석주명

O 국학이란 국가를 주체로 한 학문이니 국가를 가진 민족은 반드시 국학을 요구하는 것이다. 종래로 국학이라면 한문(漢文)책이나 보고 읽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지마는 국학이란 인문과학(人文科學)에 국한될 것이 아니고 자연과학(自然科學)에도 관련되는 것으로 더욱 이 생물학 방면에서는 깊은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에 많은 까치나 맹꽁이는 미국에도 소련에도 없고, 조선 사람이 상식(常食)하는 쌀은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그리 많이 먹지를 않는다. 그러니 자연과학에서는 생물학처럼 향토색이 농후한 것은 없어서 조선적 생물학 내지 조선 생물학이란 학문도 성립될 수가 있다.
그런데 생물학은 우리 사람까지도 자연과학적으로 취급하는 학문이니 적어도 문화인은 최소한도의 생물학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지(北之)의 경기가 좋다면 그곳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전라도에 쌀이 많다면 그곳에 사람이 많이 달려감은, 사탕물 방울에 파리가 많이 모여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이것들을 우리는 주향성(走向性, Taxis)이라고 부른다. 기타 인구와 식량 문제 등 중요한 정치 문제가 대부분이 생물학적 기초가 없이는 해결되지 않을 것을 생각할 때, 생물학이 목하(目下) 세계적으로 각 대학에서 많이 요청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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