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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묵자墨子≫-“天下無人, 천하에 남이란 없다”-기세춘 역저2021-07-27 20:02
Writer

묵자墨子

다시 책을 펴내며

이제 생각해 보니 내 평생 20권 남짓의 책을 냈는데 그중에서 묵자(墨子)에 관한 것이 4분의 1이나 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벗들이 나를 소개할 땐 으레 묵자 전문가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또 나를 만나는 사람이면 묵점(墨店)’이라는 아호가 묵자에서 연유된 것이냐고 묻곤 한다. 사실을 밝히자면 내가 태어난 마을이 묵점이어서 그렇게 지은 것인데 공교롭게도 ()’이라는 글자가 돌림자가 되었다.
또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외우 신영복 교수와 함께 노촌 이구영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교실에 들어서니 스승님께서 벽에 걸어놓은 겸치별란(兼治別亂)’이라 쓴 편액을 떼어 주시면서 이제 이것은 기 선생이 가져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겸치별란이란 스승님께서 묵자 사상을 한 마디로 압축 표현한 것으로 강의실의 교훈이었는데 그것을 주신 것은 이제부터 나더러 묵자 강의를 맡으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묵자는 나에게 뗄 수 없는 운명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문가라는 딱지가 싫지는 않지만 너무 과분하니 그냥 묵자 학생이나 묵자 마니아라고 했으면 좋겠다. 

독자 여러분에게 몇 가지만 미리 말씀드린다.
첫째, 묵자를 읽지 않고는 결코 동양사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인류가 책을 펴내기 시작한 차축 시대(axle age)에 활동했던 공자와 묵자는 보수와 진보의 쌍벽을 이루는 사상가다. 그래서 일찍이 유가의 정통인 한유는 공자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묵자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쪽 벽만 보고는 그 골짜기를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차축 시대(axle age) : 추축 시대=문명의 대전환기.
둘째, 사람들은 흔히 동양고전이라면 고루한 봉건사상이라고 예단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일찍이 순자는 묵자를 노동자의 도라고 말했다. 묵자야말로 2,500년 전 인류 최초의 반전 평화운동과 절용 문화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인류 최초의 진보주의 사상가이며 노동자의 시조다. 그러므로 보수를 알려면 공자를 읽어야 하고, 진보를 알려면 묵자를 읽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회운동가들에게 묵자를 읽지 않고는 감히 진보를 말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셋째, 일찍이 중국의 쑨원고대의 사랑을 말한 사람으로 묵자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 묵자가 말한 겸애는 예수의 박애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한국의 유명한 성서학자 고 문익환 목사묵자의 하느님은 예수의 하느님과 쌍둥이처럼 닮았으며, 석가ㆍ묵자ㆍ예수는 한 뿌리에서 나온 세 가지라고 천명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들은 묵자를 읽음으로써 예수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완역판 서문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상가는 누구일까? 우리로선 공자ㆍ예수ㆍ마르크스 세 분을 꼽는다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묵자는 이분들과 비교하여 어떤 위치에 있는가?
세상에 회의와 염증을 느껴 속세의 모든 문화와 제도를 거부하고 산속에서 불사약초를 캐 먹고 숨어 사는 백발노인 노자와 장자와 달리, 이 세 분들은 모두 속세에서 인민들과 더불어살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공자는 지배계급에 유세하며 출세를 얻고자 권세가들을 찾아다니고, 상갓집마다 찾아가 두건을 얻어 쓰며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유식하고 똑똑한 호상으로 그릴 수 있으며, 묵자는 학벌도 없는 목수 출신으로 세상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사상가며 또한 반전ㆍ노동운동을 지도하는 노동자로 그릴 수 있고, 예수는 정치에는 눈을 돌리고 광야에서 양을 치며 지옥 같은 난세가 끝나고 새 세상이 오기를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착한 예언자로 그릴 수 있겠으며, 마르크스는 자본가계급을 몰아내고 노동자 권력을 쟁취하려는 탁월한 사상가며 동시에 지하혁명당 이론가의 모습일 것이다.

잠시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자!
혁명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한 혁신주의자였던 묵자는 공자가 봉건 귀족 계급을 편들고 입신출세하려 한다며 어린이만도 못한 지혜를 뽐내는 자’, ‘남의 창고로 배부르고 남의 밭으로 술 취하는 자’, 또는 희대의 간악하고 간사한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즉 같은 시대에 살았던 공자와 묵자는 보수ㆍ혁신의 견원지간이었다.
묵자는 또한 고귀하고 지혜로운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므로 의()는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하며 모든 가치의 근원이었던 왕권을 인민주권의 밑으로 끌어내리고 하느님은 온 인류를 평등하게 사랑하시므로 사람은 제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고 누구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전국시대에는 가장 많은 인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 탄생 70~80년 전인 한() 무제(武帝) 때 공자의 유교가 국교가 된 이후 묵자의 제자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마침 그때 예수가 동방박사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서 묵자가 하던 말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묵자의 인류적 하느님의 평등한 사랑은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그 해방 공동체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평등과 비전(非戰)과 개혁과 노동을 강조하는 겸()의 교리는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은 모세의 아버지 하느님이나 묵자의 평등의 하느님과 는 다른 점이 많다는 뜻이다.

묵자는 이 세상을 대동(大同)ㆍ평등 공동체 사회로 개혁하기 위하여 지배 문화와 착취 제도 및 지배계급에 대하여 전면적인 혁명을 주장했으나, 예수는 노예의 나라인 로마의 식민 세력과 그들과 야합한 매국적 귀족 계급과는 대결을 피하고 부패한 종교 세력들과의 투쟁만으로 이 세상에서의 인류 해방 사업을 제한했으므로 모세의 민족 해방 투쟁이나 묵자의 민중 해방 투쟁은 예수에게 계승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스승을 죽인 로마 제국주의에 협력한 제자들의 덕분으로 노예의 나라 로마의 인정을 받아, 동방의 예수는 서양의 신이 되었다.
묵자로서는 예수를 자기의 후계자라고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예수는 중요한 부분에서 묵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할 뿐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동일하므로 종교적으로 묵자의 계승자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노동자 출신인 묵자는 억압ㆍ착취당하는 기층 민중 편에 서서 평생을 바쳐 투쟁한 평등주의자로서, 그 억압과 착취의 고리가 재화의 소비구조 즉, 문화ㆍ제도 등 상부구조에 있다고 보고 재화의 본래 목적을 초과하는 소비의 전형적인 제도인 전쟁을 없애고, 지배계급의 무용한 낭비, 호화로운 장례 제도 등 과시 소비를 토대로 한 지배 착취 문화를 혁신함으로써, 노동 착취의 목적을 제거하여 착취구조를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평등주의와 노동자주의는 200년 후에 순자(荀子)로부터 묵가(墨家)의 주장은 노동자의 도()’일 뿐이라고 비난받았지만, 2천 년 후에는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에게 계승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제 생산양식에서의 착취의 고리를 자본의 물신화(物神化)와 임노동관계 등 생산관계의 사적 소유에서 찾았으나 그보다 2천 년 전, 신분적 농노제 생산양식과 소비구조에서 착취의 고리를 찾은 묵자와는 그들의 휴머니즘, 평등사상, 상부구조의 물적 토대에 대한 인식, 사적 소유에 대한 시각 등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묵자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선각자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들 묵자ㆍ예수ㆍ마르크스 등 세 사람이 지향한 이상사회는 모두 똑같이 천하무인(天下無人, 천하에 남이란 없다)의 대동사회(大同社會) , 해방된 평등 공동체였다는 것만으로도 피압박ㆍ피착취의 기층 민중에게는 어둠 속의 힘찬 햇살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인 묵자가 지금까지 왜 우리에게 생소해야 했던가?
전국시대의 사상을 지도했던 묵자의 반봉건 사상은 유가의 법통을 이은 순자로 하여금 공맹(孔孟)의 봉건 유교를 개혁하도록 영향을 미치며 급기야 봉건제도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격으로 무너졌던 봉건제도가 다시 부활하면서 그 반동 세력의 지도이념이었던 공맹의 유교가 국교가 되어 유교 유일사상이 되면서부터 묵자의 글은 그들 지배세력의 극심한 탄압으로 2천 년이 넘도록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묵자를 반대하는 유가들인 맹자ㆍ순자 등과 도가인 장자 등이 그들의 책에서 단편적으로 묵자를 비난한 글을 유일한 자료로 하여 간접적으로 알았을 뿐이다.
그러다가 17세기 초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묵자의 글이 도가들의 경전 속에서 발견되었다. 도가들이 자신들의 경전인 줄로 알고 묵자의 글을 끼워 간행한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간된 후에야 겨우 뜻을 통하여 읽을 수 있는 결정판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복권된 묵자는 초기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제자백가 중 가장 위대한 경험론자이며 평등주의자로 인정받으면서도, 비폭력과 사랑을 강조하는 하느님 사상으로 인하여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되어 비판을 받았고, 우파에서는 그의 세습ㆍ상속을 반대하는 평등사상으로 인하여 좌파의 시조로 배척당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간략하게 소개됐으나 유가적 시각에 구애된 중국 학자들의 왜곡된 교주(校注)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그 위에 묵자 사상을 모르는 고루한 한문학자들의 오역이 더해져 묵자는 전면적으로 왜곡됐으며, 그로써 뜻이 통하지 않으며 앞뒤가 맞지 않고, 유가(儒家) 같기도 하고 도가(道家) 같기도 한 의미도 없는 이상야릇한 책으로 둔갑하여 독자들의 관심 밖으로 버려졌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라면 누구나 공묵(孔墨)을 거론함에도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학생들뿐 아니라 학계에서조차 유독 묵자=겸애설이라는 한 마디를 아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괴이한 일이다.

오늘날 세계는 좌편향으로 좌절한 좌파에서 다시 신()이 부활하려 하고, 우파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부활하려 한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시대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새 길을 찾기 위한 부흥이다.
지금까지 묵자를 모르던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기존의 왜곡된 묵자를 읽었던 독자들도 다시 읽어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보편성을 찾는 평등주의자인 묵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해설

1장 묵자는 누구인가?

노동자 출신
묵자의 출생 연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사마천(司馬遷)사기에는 묵자는 공자(기원전 551~479)와 같은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학자 첸무(錢穆, 1895~1995)는 기원전 479년경에 태어나서 기원전 381년경에 죽었을 것이라고 고증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볼 때 묵자는 기원전 5세기경에 활동한 과학자이며 운동가임에 틀림없다.
묵자의 출생 성분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목수 출신으로 방어 무기를 제작한 과학자요, 기술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묵자는 초나라와 월나라 등 여러 곳에서 봉토를 주겠다고 하며 초빙을 받았으나 귀족의 신분이 되는 것을 거절하고 노동자의 검은 옷을 입고 전쟁 반대 운동에 목숨을 걸었으며 평등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은 모두 노동자ㆍ농민ㆍ종묘지기 등 천민 출신이었다.

묵자49편 노문(魯問)
공수자(公輸子)가 대와 나무를 깎아 까치를 만들어
하늘에 날려 보냈는데 사흘 동안이나 내려오지 않았다.
공수자는 스스로 지극히 훌륭한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묵자가 공수자에게 말했다.
그대가 까치를 만든 것은
공인이 수레의 굴대 빗장을 만든 것보다는 못한 것입니다.
잠시 동안에 세 치의 나무를 깎아 굴대 빗장을 만들면
오십 석의 무거운 짐을 싣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공적이라 하는 것은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어야 훌륭한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이롭지 않은 것은 졸렬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국 최초의 철학자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학문은 대체로 경세치학(經世治學)이었다. 즉 정치론과 지도자의 품성론과 도덕론이었을 뿐 그리스 철학처럼 형이상학이 아니었다.
그래서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주역(周易)을 해석한 <십익(十翼)>을 붙여 이른바 형이상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묵자는 이러한 중국의 전통과는 색다르게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말한 철학자였다. 중국의 고대 문헌은 대체로 역사서이거나 언행록인 데 비해 묵자는 유일하게 체계적 논변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 체계적 논변은 묵자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라는 제목의 글도 묵자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다. 공자의 논어(論語)는 아무런 체계가 없는 언행록이다.
대안을 주장한다는 의미의 ()’이라는 말을 처음 만나게 되는 것도 묵자에서부터이다. ()은 구별한다는 의미인 변()의 파생어이며 시비를 가리는 합리적 담론을 의미한다.

인류 최초의 반전 평화운동가
묵자가 활동한 기원전 5세기는 주()나라의 노예제적 봉건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춘추 말에서 전국 초에 해당된다. 이때는 이미 철기 사용이 보편화됐고 대규모의 쌀농사로 농업혁명이 일어난 제1물결의 변혁기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주()의 봉건 왕권이 쇠약해지자 국유지였던 농지의 사적 소유가 성행하고 이에 따라 귀족과는 별도로 농업자본가 내지는 상업자본가가 등장했으며,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생산을 담당하던 농노들이 사적 노예로 전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인(大人)이라 일컬어지는 봉건 귀족의 힘이 약화되고 소인(小人)이라 일컬어지는 패권을 추구하는 일부 귀족들과 신흥 자본가와 엘리트 관료 계급이 군웅할거하며 약육강식의 토지겸병 전쟁이 끊임없던 난세였다.
백성들은 전쟁에 나가 죽고 다칠 뿐만 아니라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더욱 착취를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쟁을 감당하고 수행했던 민중들이 자기들의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묵자가 나타난 것이다. 묵자는 평등과 사랑의 하느님 사상을 전파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펼치며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묵자26편 천지(天地)
의로운 정치는 어떻게 하는가?
묵자가 말했다.
대국이 소국을 공격하지 않고
큰 가문이 작은 가문을 찬탈하지 않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겁탈하지 않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고
다수가 소수를 학대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미신을 반대한 동양 최초의 과학자
묵자는 목수 출신의 동양 최초의 과학자였다. 그의 수많은 과학 이론은 <경설(經說)>편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미신을 반대한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천신과 산천귀신, 사람귀신 등 모든 귀신은 국가를 통치하고 인민을 이롭게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제사도 복을 비는 행위가 아니라 이웃들이 모여 친해지기 위한 문화 양식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무속 등 미신을 철저히 반대했다. 2,500년 전의 학자로서는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묵자49편 노문(魯問)
()나라 축관이 돼지를 놓고 제사를 지내면서
귀신에게 백 가지 복을 빌었다는 소문을
묵자가 듣고 말했다.
이것은 안 된다.
남에게 베풂은 작으면서 많은 보답을 바란다면
남들은 그의 베풂을 겁내고 의심할 것이다.
지금 한 마리 돼지로 제사를 지내면서
귀신에게 백 가지 복을 구한다면
귀신은 그들이 부해져 소ㆍ양으로 제사를 지낼까 꺼릴 것이다.
옛날 성왕들은 귀신을 섬기고자 그저 제사를 올렸을 뿐이다.
만약 한 마리 돼지로 제사를 지내면서 백 가지 복을 빈다면
귀신으로서는 그가 부해지기보다
도리어 가난해지기를 바랄 것이다.”

묵자48편 공맹(孔孟)
공맹자(公孟子)가 말했다. “귀신은 없습니다.”
또 이른다.
군자는 제사 지내는 예절은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묵자가 말했다.
귀신은 없다고 말하면서
귀신을 제사하는 예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손님은 없으나
손님 접대의 예절은 배워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 이것은 물고기는 없으나
어망을 만들라고 하는 것과 같이 모순된 말입니다.”

혁명가
묵자는 철학자이며, 과학자요, 경제학자요, 반전 평화운동가였으나 그보다는 혁명가라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는 실천하고 조직하고 투쟁한 사회혁명가였다. 그는 내 말은 반석과 같으니 깨뜨릴 수 없다고 외치며 ()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요구했다.
백성()의 입장을 대변한 묵자는 기존 체제를 지키는 것을 거부한다.
백성이 보고 들은 것, 백성의 이익, 이 세 가지를 모든 가치의 절대 조건이라고 하며, 이 삼표론(三表論)을 근거로 전통적 도덕 체계를 모두 뒤엎어 버린다.
그는 천자 통치의 근원인 천명론(天命論)을 부인했으며, 통치의 두 수레바퀴인 주례(周禮)와 숭악(崇樂)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대표적인 상징이라 할 장례(葬禮)와 상례(喪禮) 제도의 낭비를 반대했다.

묵자32편 비악(非樂)
묵자가 말했다.
인자(仁者)의 정서는
반드시 천하의 이익을 찾아 일으키고
천하의 해로운 것을 없애기 위해 힘쓴다.
이것을 천하의 법도로 삼고
인민에게 이로운 것은 즉시 행하고
해로운 것은 즉시 그친다.
인자의 천하를 위한 헤아림은
눈에 아름답고
귀에 즐겁고 입에 달고
몸에 편안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로써 백성들이 입고 먹는 재물을 축내고 빼앗는 일을
인자는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묵자가 음악을 비난하는 까닭은
큰 종과 북, ()와 비파(), 크고 작은 생황들이
그 소리가 즐겁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한 조각한 무늬와 색깔이
곱지 않아서가 아니며,
굽고 찐 가축의 고기 맛이
달지 않아서가 아니다.
비록 몸은 편안함을 알고 입은 단 것을 알고
눈은 그것이 아름다운 것을 알고
귀는 그것이 즐거운 것을 알고 있으나,
위를 상고해 볼 때 성왕의 법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자가 음악을 비난한 것이다.

묵자(墨子44편 대취(大取)
천하를 위해 우임금을 후대한 것은
우임금이 인민을 사랑한 것을 위해 주는 것이다.
우임금이 한 일을 후대하는 것은 천하에 이익이 되지만
우임금을 후대하는 것은 천하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천하의 만국 만민을 두루 평등하게 사랑하라
공자와 묵자는 다 같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리고 옛 성왕의 도()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치한다.
공자는 관료 출신으로 당시 패도주의가 풍미할 때 왕도주의와 귀족주의의 깃발을 들고 천하를 유세하고 돌아다녔다. ()나라에서 쫓겨난 후 13년 동안 벼슬을 구하려 했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그를 채용해 주지 않았다. 큰 나라 제후들은 그의 왕도주의가 싫었고, 당시 실권자인 신흥 관료와 지주 계급은 그가 귀족을 편들고 자기들을 소인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에 공자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즘 말로 하면 공자도 정치가이며 운동가였다.
그러나 공자에게 성왕의 도천명(天命)을 받은 성인(聖人)인 천자(天子)가 신민(臣民)을 다스린 말씀이었으나, 묵자가 말하는 성왕의 도백성에 의해 선출된 천자가 천제(天帝)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天志)’하늘의 신민인 백성의 뜻과 민()의 이익이라고 보았다. 이 점에서 공자와 전혀 다르다.
또한 공자는 성왕의 도를 주례(周禮)’라고 했으나, 묵자는 성왕의 도를 겸애(兼愛)라고 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다시 말하면 공묵(孔墨)이 다 같이 사회 평화와 민생을 걱정하지만, 공자는 지배계급의 시각이었고, 묵자는 민중적 시각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운명론은 폭군이 지어낸 속임수
묵자는 천제와 귀신을 인정했으나 운명론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운명론은 지배자들이 민중을 속이려고 퍼뜨린 정치적 술수라고 주장했다. 민중이 모든 개혁과 혁명에 소극적인 까닭은 운명론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혁파하지 않고서는 혁명을 할 수 없다.

묵자(墨子35편 비명(非命)
이제 운명론자의 말을 채용한다면
이는 의()를 제거하자는 것이다.
천하의 의를 제거하려는 자들은
운명론을 퍼뜨려
백성들이 실망하도록 유세한다.
백성들이 실망하도록 유세하는 것은
어진 사람을 없애버리자는 수작이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을 윗자리에 앉히려는 노력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의로운 사람이 임금으로 선출되면
천하는 반드시 다스려지고
하느님과 산천귀신들도 제주(祭主)를 얻고
인민은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묵자가 운명을 존재하지 않는 허구임을 입증하고, 유가들의 운명론을 폭군의 속임수라 비난한 것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유사계급인 유가들은 현상이 유지되어야 이로웠고, 공민(工民) 계급인 묵가들은 현상이 파괴되어야 이로웠다. 그러므로 귀족들과 유가들은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도 좋지만, 공상(工商)과 천민들은 정해진 운명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운명론을 지어낸 성인(군주는 모두 성인 계급이다)은 빈부(貧富) 수요(壽夭, 장수와 요절)를 천명(天命)에 속한 것으로 믿으면 이익을 위해 불의를 행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유가들은 운명론을 믿음으로써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에 실행한다는, 이익을 초월한 의연함을 존귀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유가들은 천제와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도 천제와 귀신이 정말 존재하는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반면 묵가들은 운명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정의를 행하면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가들의 운명론은 비참한 처지의 민중을 자포자기하게 하고, 도덕적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묵자(墨子36편 비명(非命)
옛날 폭군 걸()이 어지럽힌 짓을 탕 임금이 다스렸고
폭군 주()가 어지럽힌 짓을 무왕이 다스렸던 것은
세상이 변하고 인민이 바뀐 것이 아니고
지도자가 정사를 변경했고, 인민이 교화를 바꾼 것이다.
탕 임금과 무왕에게 맡기면 잘 다스려질 천하가
폭군인 걸ㆍ주에게 맡기면 어지러워졌으니
안정과 위험,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지도자의 정치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운명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삼가라! 천명(天命)은 없다!
오직 나는 사람을 높이고 말을 지어내지는 않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얻는 것이다.

묵자(墨子48편 공맹(孔孟)
공맹자가 말했다.
가난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하늘이 빈틈없이 미리 정해 놓은 것이므로
한 치도 덜고 보탤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 이른다.
군자는 반드시 학문에 힘써야 합니다.”
묵자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학문에 힘쓰라 가르치면서
동시에 운명론을 가르치는 것은
마치 사람들에게 관을 쓰는 상투를 틀라고 명령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관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묵가는 협객 집단
묵가들은 묵자 당시부터 협객 집단으로 출발한 듯하다.
묵자 스스로도 어느 군주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그는 봉토를 떼어 주겠다고 초청해도 가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반전운동을 했던 협객이었다.
묵자를 따르는 무리는 180여 명인데 칼날 위를 걷고 불길 속을 뛰어드는,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용사들이었다고 한다.
묵가들은 공동체 생활을 한 것 같다. 그리고 겸애(兼愛)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자식도 남과 구분하지 않고 같이 사랑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냉엄함으로 묵가의 겸애는 비정하고, 공자의 인()은 자비로운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회남자(淮南子)20편 태족훈(泰族訓)
공자의 제자는 칠십 인이고
가르친 사람은 삼천 명에 이른다.
묵자에게 복역하는 무리는 백팔십 명이었으며
모두가 불 섶을 짊어지고 칼날을 밟으며
죽어도 돌아서지 않았으니, 교화되어 그렇게 되었다.

묵자의 제자들은 장자(莊子, 기원전 369~289?)가 활동하던 전국 중기에는 3파로 분열된 것 같다.
• ≪묵자라는 책이 상ㆍ중ㆍ하로 나누어진 것은 이 3파의 글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상편을 순수파, 중편을 절충파, 하편을 반동파의 글이라고 본다.

2장 보수와 진보의 쌍벽
3장 종교사상
4장 철학사상
5장 논리학
6장 정치사상
7장 공동체론
8장 경제사상
9장 사회ㆍ문화사상
10장 반전평화론

원전 읽기

14편 겸애(兼愛)
천하가 모두 두루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되
남을 제 몸같이 사랑한다면 불효자가 있겠는가?
부모, 형제, 임금 보기를 제 몸같이 한다면
어찌 효도하지 않고 자애롭지 않겠는가?
아우, 자식, 신하 보기를 제 몸같이 한다면
어찌 자애롭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불효하고 자애롭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도적도 마찬가지다.
남의 집안을 제 집같이 본다면 누가 훔치겠는가?
남의 몸을 제 몸같이 여긴다면 어찌 남을 해치겠는가?
그렇게 되면 도적도 없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부들이 서로 남의 가문을 어지럽히고
제후들이 서로 남의 나라를 침공하는 것도
남의 가문을 제 가문같이 여긴다면 누가 어지럽히겠는가?
남의 나라를 제 나라같이 여긴다면 누가 침공하겠는가?
그러므로 대부들이 남의 가문을 어지럽히고
제후들이 남의 나라를 침공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만약 천하가 두루 평등하게 서로 사랑한다면
나라끼리는 전쟁이 없고
가문끼리는 서로 어지럽히는 일이 없고
남의 집안을 훔치고 빼앗는 도적도 없을 것이며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효도하고 자애로울 것이니
이렇게 되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는 성인으로서
어찌 미움을 금지하고 사랑을 권면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천하가 두루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면 다스려지고
서로 차별하고 미워하면 어지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묵자가
남을 사랑하라고 권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39편 비유(非儒)
공자는 노나라 사구(司寇, 형조판서의 다른 이름)가 되었을 때
노나라 공실을 배반하고 권세가인 계손(季孫)씨를 받들었다.
공자가 노나라 재상을 대리하고 있을 때
군주를 버리고 도망칠 때
마을의 관리와 다투게 되었는데
이때 공자는 빗장을 들어 문을 열고 계손씨를 도망치게 했다.
또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쫓기고 있을 때
싸라기도 없는 명아주 국물로 열흘을 견디어야 했다.
제자인 자로(子路)가 돼지고기를 구하여 삶아 주자
공자는 그 고기를 어디에서 훔쳤는지 묻지도 않고 먹었다.
또 남의 옷을 빼앗아 술을 사다 주자
공자는 술이 어디서 났는지도 묻지 않고 마셨다.
그리고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를 맞아들이니
그는 방석이 바르지 않으면 않지 않았고
고기를 바르게 썰지 않았다고 먹지 않았다.
자로가 딱하여 물었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고생할 때와 왜 그토록 다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오너라! 내 너에게 말해 주리라.
그때는 그대와 구차하게도 살아남는 것이 급했지만
지금은 그대와 진실로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 급하다.
누구나 굶주리고 곤궁할 때는 속여서라도 빼앗아
자기 몸을 살리기 위해 사양치 않는 법이며,
살찌고 배부르면 거짓된 행동으로 자기를 꾸미는 것이다.”
이 얼마나 더럽고 사악하며 거짓된 위선인가?

47편 귀의(貴義)
묵자가 말했다.
상인들은 사방으로 다니면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몇 배로 남긴다.
비록 관문과 다리를 지나는 어려움과 도적의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무릅쓰고 반드시 장사를 하고 만다.
오늘날 선비들은 앉아서 의로움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관문과 다리를 통과하는 어려움과 도적의 위험도 없이
몇 곱의 이로움이 생기는지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도 선비들이 의로움을 행하지 않는 것은
선비들의 이로움을 헤아리는 것이
장사치의 지혜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기세춘 역저, 묵자墨子, 바이북스, 2021(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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