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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뉴턴의 시계≫-과학혁명과 근대의 탄생-에드워드 돌닉2021-07-08 21:46
Writer

뉴턴의 시계

서문

완전한 질서로 작동하는 세계를 인류가 꿈꾸기 시작한 때를 꼽으라면, 단연 1600년대 후반일 것이다.
나중에 역사가들은 이때를 천재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격동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인간이 만든 빛이라고는 미약한 불꽃과 깜박이는 등불이 고작이었다. 달이 뜨지 않으면 밤은 어둡고 위험했다.
도둑과 강도가 득실거렸고 경찰은 한참이 지나서야 세상에 등장했다.
한낮에도 도시는 어둠침침했다.
석탄을 땔 때 나오는 연기가 닿는 곳마다 온통 거무튀튀한 검댕딱지와 얼룩을 남겼다.
런던은 전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큰 도시이자 학문의 중심지였지만 악취가 진동하고 진흙투성이인 데다가 오물로 뒤범벅된 대도시이기도 했다.

무지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1599년 셰익스피어가 글로브극장을 지었을 때, 관객을 2,000명을 수용할 규모였지만 화장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루이 14세가 죽던 해인 1715년경에 새로운 규칙이 시행되었지만, 베르사유 궁전 복도에 쌓인 배설물을 일주일에 한 번 청소해야 한다는 내용이 고작이었다.
왕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목욕을 하지 않았다. 해충, 벼룩, , 빈대 등이 곳곳에 들끓어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백성들의 삶은 온통 위험과 재앙의 연속이었다. 이 세기의 전반기 내내 독일은 30년 전쟁으로 고통을 겪었다. 영국도 내전에 휘말렸다. 1650년대에는 전염병이 유럽 대륙을 휩쓸었으며, 1665년에는 해협을 건너 영국 땅에 이르렀다.

이런 와중에도 세상을 뒤바꿀 사건들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몇몇 사람들은 천체 현상을 연구하며 공책에다 수식을 휘갈기고 있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연의 전반적인 패턴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인류는 똑같은 날은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법칙이란 진정한 법칙을 뜻한다기보다는 어림짐작에 가까웠다. 예외도 있을 수 있고 해석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도 있는 지침을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다가 1600년대 어느 시기에 새로운 개념이 세상에 등장했다.
자연계가 엉성한 규칙뿐만 아니라 정확하고 공식적이며 수학적인 법칙도 따른다는 발상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주는 위험천만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완벽하게 조종되는 정교한 시계였다.
광대한 천체에서부터 지극히 작은 물체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측면은 꼼꼼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고 우주의 모든 특징을 일일이 설계했으며 우주를 늘 섬세하게 감독하고 있었다.
신은 행성들을 각자 제 궤도에 올려놓았으며 집파리 한 마리에 달린 수천 개의 눈을 하나하나 돌보았다. 또한 지구의 회전 속도를 완벽하게 설정해놓았으며 아울러 호두 껍데기의 두께도 최적의 상태로 정했다.

신은 수학자였다. 17세기 과학자들은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신은 수학적인 암호로 자신의 법칙을 적었던 것이다. 자연의 비밀을 밝혀줄 법칙을.
이를테면 중력의 작동 방식을 알아냈을 때, 아이작 뉴턴은 단지 하나의 발견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아우르는 보편법칙을 선언했다.
바로 이 중력의 법칙이 지구 주위의 궤도를 도는 달의 운동,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나는 화살의 운동,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의 운동을 관장했으며, 운동을 개념으로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정량적으로 기술했다.

나는 주로 이야기를 뉴턴이 1687년 중력 이론을 밝혀내던 시기에 집중할 것이다.
뉴턴의 놀라운 업적은 선배 거장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르네 데카르트,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리고 요하네스 케플러 등이 우주에 숨겨둔 신의 암호 책에서 많은 문단을 해독했거나 심지어 한 쪽을 통째로 해독한 덕분이다.
우리는 이 선구자들이 겪은 장쾌한 성과와 온갖 시행착오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들 사상가들은 모두 천재였다는 사실, 우주가 완전무결한 수학적 진리에 따라 설계되었다고 철저하게 믿었다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내용은 신의 마음을 읽어내려고 했던 한 무리의 과학자들 이야기다. 

1부 혼돈

1. 런던, 1660

이 도시에 처음 발을 들어놓은 이라면, 길게 무리 지어 사내들이 끊임없이 잡담을 나누며 토머스 그레셤의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는 매우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레셤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s)라고 불렀던 이들로, 비둘기에서부터 행성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작동 원리를 알아내고자 일찍이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불타는 호기심 말고는 비슷한 점이 거의 없는 사람들로, 무리의 한가운데에는 젓가락처럼 길쭉하고 빼빼 마른 로버트 보일-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아버지를 두고 온순한 성격이었던지라 대부분의 시간을 자연의 비밀과 신의 은총 그리고 온갖 질병에 대한 민간요법을 궁리하는 데 바쳤다-이 서 있었고, 가까이에 로버트 훅-등이 구부정한 데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에, 지칠 줄을 몰랐고 명석한 데다가 어떤 것이든 만들어낼 수 있으며, 5년 동안 보일의 조수로 일하면서 온갖 실험을 고안해냈다. 그의 최신 발명품은 펌프질을 해서 안에 있는 공기를 빼낼 수 있는 유리 용기였다-, 자그마하고 날렵한 체구의 사내 크리스토퍼 렌-번쩍이는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는 천문학자 겸 수학자로 망원경, 현미경, 기압계를 만들었으며, 잠수함의 설계도를 작성했으며, 세인트 폴 대성당도 설계했다-도 있었다.
자연 지식의 향상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는 천재들, 외골수들, 그리고 괴짜들이 왕창 모여 있는 곳의 공식 명칭으로서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과학 단체였다.(1660년 창립)
왕립협회 회원들이 세계 최초의 과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특히 데카르트, 케플러 및 갈릴레이 같은 대가들이 이미 오래전에 학문 분야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겼다.

1660년 당시 열일곱 살이던 뉴턴은 어머니의 농장에서 뭉그적거리며 맥 빠진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혹자는 뉴턴을 가리켜 내가 아는 가장 두려움이 많고 조심스러우며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라고 말했다.
뉴턴은 평생 고독하고 은밀한 삶을 살았으며 여든넷의 나이에 총각으로 생을 마감했다.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신경이 예민했던 그는 언제나 광기의 가장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리고 적어도 한번은 그 가장자리를 넘어 쓰러지고 만다.
뉴턴은 왕립협회의 다른 이들과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초기의 과학자들은 모두 하나의 정신적 풍경을 공유하고 있었다.
모두들 두 세계, 즉 자신들이 태어나서 자란 중세적인 세계와 그들이 힐끗 엿보았을 뿐인 새로운 어떤 세계 사이에서 위태롭게 살았던 것이다.
이들은 총명하고 야심만만하면서도 또한 혼란스러워하고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천사와 연금술과 악마를 믿었으면서, 아울러 우주가 정교한 수학 법칙을 따른다고 믿었다.
이윽고 이들은 근대 세계로 통하는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된다.

2. 사탄의 발톱

1660년대 과학자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들을 찾아 나섰지만, 정작 그들이 사는 세계는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죽어나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는데, 사실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다.
런던은 질병이 들끓는 도시여서 사망률이 출생률을 앞질렀다.
죽음을 몰고 오는 것들 중에서 특히 두 가지가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전염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화재였다.
당시에는 아무도 화재나 전염병을 지금 우리들이 지진이나 화산을 대하듯이 자연재해라고 여기지 않았다.

17세기는 문자 그대로 신을 두려워하는 시대였다.
자연재해는 죄악에 물든 인간에게 신이 보내는 메시지이자 경고였다. 화를 잘 내며 참을성 없는 신이 더 이상 벌을 내리지 않도록 생활 방식을 바꾸라는 계시였다.
1662년 왕립협회가 공식 승인된 그해에 열아홉 살이던 아이작 뉴턴은 자신이 이제껏 저지른 죄의 목록을 작성했다.
모두 쉰여덟 가지 항목 가운데 집에 불을 질러 어머니와 아버지(계부)를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한 것외에는 죄다 평범한 내용-주일에 쥐덫을 만든 것, 누이를 꼬집은 것, 불결한 생각과 말과 행동과 꿈 등-이었다.
이런 죄들은 우리로서는 사소하고 흔하게 여겨지지만 뉴턴의 눈에는 자신과 하느님을 속이는 아주 수치스러운 짓이었다.

3. 세상의 종말

1650년대와 60년대에는 신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심해졌다.
모든 그리스도교도가 성경 내용을 알았으니, 성경이 심판의 날을 언급한다는 사실 또한 알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상이 끝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종말이 얼마나 빨리 다가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의 답은 당시로서는 금방이었다.
거의 아무도 진보라는 개념을 믿지 않았다.
재림에 관한 책들이 이 시기에 숱하게 쓰였으며, 왕립학회의 회원들은 이 사건의 날짜를 맞히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많은 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특정한 수인 ‘1260을 조심스레 지목했다.
그들이 믿기로 과거의 어느 시점에 시계는 작동을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1260년을 지나면 세상은 끝날 것이다.
왕립학회의 가장 권위 있는 인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초읽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종종 거론되던 날짜는 참된 그리스도교가 전복되었던 거대한 배교의 해인 기원후 400년이었다. 기원후 400년에서 1260년이 지나면 1660년이 된다는 데에는 아이작 뉴턴 수준의 수학 실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무렵 땅과 하늘 모두 위험한 조짐들이 가득했다.
간음하는 자들, 신을 모독하는 자들, 그리고 불신자들이 런던을 새로운 바빌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1662, 영국 시골 지역에서 끔찍한 모습의 아기가 여럿 태어났다는 소식이 두려움에 벌벌 떠는 목격자들을 통해 전해졌다.
1664년 가을에 유럽 대륙과 영국은 불타는 혜성 하나가 나타났다. 17세기 사람들이 보기에 혜성의 출현은 불길한 소식이었다.
천상은 지상과 달리 질서와 조화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혜성은 상서롭지 못한 침입자였기에 수천 년 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1665년 두 번째 혜성이 출몰했다.

아이작 뉴턴을 시작으로 당대의 위대한 과학자들도 종말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고 여느 사람들처럼 확실하게 믿었다.
17세기는 자연법칙을 따르며 시계처럼 작동하는 우주를 믿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내려와 기적을 행하고 죄인을 벌하는 신을 믿었다.
초기의 과학자들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절박한 마음에서 성경을 파고들었다.
오늘날 화학의 아버지로 유명한 로버트 보일은, 성경의 숨은 의미를 캐기 위해서 그리스어, 히브리어, 고대 칼데아어인 성경까지 연구했다.
뉴턴도 다양한 번역본과 언어로 된 성경을 서른 권이나 갖고 있었다.
그는 중력 이론에 바친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바쳐 솔로몬의 성전에 숨겨진 메시지라든지 묵시록의 예언들을 후대의 전쟁과 혁명과 맞추어보려고 시도했다.

두려움의 파도는 불길한 해인 1666년이 다가오자 더욱 높게 치솟았다.
왜냐하면 이 해는 사탄의 숫자라고 하는 ‘666’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운명의 날을 한 해 앞둔 1665년에 전염병이 영국을 휩쓸자 두려움은 공황 상태로 치달았다.

4. 흑사병이 미친 듯이 골목골목을 휩쓸었을 때
5. 암울한 거리

신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마다 전염병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다.
천 년 동안 10년이나 20년을 주기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1347년에서 1350년 사이에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이 되는 2천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
흑사병으로 알려진 이 전염병은 벼룩이 감염된 쥐를 문 다음에 인간에게 옮긴 병이었다. 하지만 몇 세기 동안 이 사실을 몰랐다. 이후로도 이 전염병은 간간이 발생했지만 사이사이에는 잠잠했다.
1625년 이후로 런던은 무사했다. 영국은 17세기 이후로 무역을 통해서 부유해지기 시작했는데, 유럽 대륙은 1650년대와 60년대 내내 전염병이 휩쓸고 다니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가 맨 먼저 굴복했고 독일이 뒤따랐다. 1663년과 1664년에는 전염병이 네덜란드까지 덮쳤다.

1664년 크리스마스에 런던에서 한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전염병은 무작위로 고통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사람들을 죽였다. 일단 걸리고 나면, 의사들은 위로의 말 외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전염병이 급격히 퍼져나간다. …… 지난주에는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마흔세 명이었는데 이번 주에는 112명이다.”
여름 내내 사망자가 늘어났다. 급기야 6월 말 한 주에 몇백 명에서 8월 말 한 주에는 6,000명으로 불어났다.

1665년 여름, 당국은 모든 개와 고양이의 즉각적인 살해를 요구했다.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겁에 질린 군중들은 오염된 도시에서 기를 쓰고 빠져나가려 했다. 런던을 빠져나가는 도로는 여름 내내 탈출 행렬로 꽉꽉 메워졌다. 가난한 자들은 남았다.
꽤 많은 이들이 죽은 데다 떠난 사람들이 많았기에, 도시의 광란은 이제 황량함으로 바뀌었다.
이제 사망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밤에 송장 수레가 시체를 찾아 빈 거리를 덜거덕거리며 지나갔다.

공정하신 하느님께서 지금 세상에 내려오셔서 회초리를 드시는도다.”
그런데 얼마 후 불가사의하게도 다행히 전염병이 끝났다.
도시인구의 5분의 1,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뒤였다.

이 시기에는 어디에서나 전염병이 발생했다.
케임브리지에 전염병이 생기자 19666월 대학교가 문을 닫았다.
이때 아이작 뉴턴이라는 젊은 학생은 책을 챙겨 어머니의 농장으로 내려가 고독한 사색에 잠겼다.

6. 화재

운명의 해인 1666년 두 번째 재앙이 런던을 강타했다.
결국 신은 죄 많은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두 재앙 모두 참을성이 다한 진노한 신의 섭리였다.
화재는 나흘 동안 걷잡을 수 없이 번졌는데, 처음에는 런던교 근처의 빈민가에서 시작하여 금세 도시의 넓은 지역을 위협했다.
누가 처음 불을 질렀는지는 핵심에서 벗어난다. 신은 하늘과 땅을 만들 때 자연의 법칙을 부여했으며, 이후에도 마음대로 법칙을 바꾸거나 중단시켰고, 자신이 적절하다고 여길 때면 언제든지 이 세상에 간여했다.
모든 일이 재앙이 일어나도록 돌아갔다. 도시는 1년 내내 가뭄으로 건조해 마른 낙엽 더미 같았고, 서로 맞붙어 나무로 지어진 건물에는 화마를 물리칠 수단은 거의 없었다.

강풍으로 탄력을 받은 불길은 계속 번지더니 곧이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갈래는 도시의 심장부로 향했고, 다른 갈래는 테스 강 및 강변에 늘어선 창고 쪽으로 향했다. 강가에 불길 높이는 15미터에 달했다.
불길은 길이가 3킬로미터에 폭이 1.5킬로미터나 되었다. 나는 허둥지둥 불타는 도시를 떠났다. 마치 소돔이 멸망하는 날 아니면 최후 심판의 날 같은 풍경이었다.” 

7. 제도판에 앉아 있는 신

1660년대는 세상의 끝이 아니라 근대 세계의 시작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천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주를 그리스 신전처럼 완벽한 비율로 만들어진 체계로 기술했다.
당대의 학자들은 자연을 조화로운 체계로 보았다. 모든 동식물은 저마다 자연의 완벽한 설계를 드러내주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뉴턴의 최대 맞수가 될 독일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는 세상만사를 폭넓게 사색하면서 가장 희망찬 소식을 전했다. 이 위대한 철학자는 우주의 온갖 분야를 살폈으며 모든 규모에 걸쳐 정교하고 완벽한 작동 원리를 찾아냈다.
신은 있을 수 있는 가운데서 최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우리는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아이작 뉴턴을 기린다.
하지만 뉴턴에게 과학은 관심사 중 하나일 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력 이론은 그가 <다니엘서>의 숨은 내용을 해독하려고 바친 긴 시간 동안 짬짬이 연구해본 결과물에 불과했다.
뉴턴이나 당시 사람들 모두에게는 당연한 태도였다. 하늘과 땅은 신의 작품이었으며 성경도 마찬가지였기에 이 속에 모든 진리가 담겨 있었다.

1660년대는 신에 흠뻑 젖어 있는 시대였다
신이 없을지 모른다는 무신론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신 말고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최고로 완벽한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다.”(볼레르 파스칼)
뉴턴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그 안의 모든 대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설계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으로 자신의 세계를 늘 감독하고 있었다.
또한 신은 한낱 창조자가 아니라 특별한 종류의 창조자였다. 신은 수학자이기도 했다. 만약 수학자라면, 모든 수학자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연의 법칙들은 신이 손수 만든 작품이므로 오류가 있을 리가 결코 없었다. 또한 법칙들은 개수가 매우 적고 간결하며 아름답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아이작 뉴턴은 이렇게 선언했다. 하느님의 작품들은 완벽하기에 어느 것이든 아주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다. 주님은 혼동의 하느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느님이시다.”

8. 근대 세계의 문을 연 열쇠

어머니의 농장에 머물던 스물세 살의 청년 아이작 뉴턴은 혼자 운동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몰두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삼각형이나 원이나 구에 관해서라면 그리스 수학자는 즉시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여겼던 그리스인들은 이 주제에 대해서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싫어했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얼마나 멀리? 얼마나 빨라? 얼마나 높이?”라는 질문에 즉시 답을 내놓는 도구가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이 도구는 미적분이라는 개념이었다. 이것은 근대 세계의 문을 연 열쇠였으며, 과학의 수많은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명했다.
미적분이야말로 모든 면에서 17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지적 성취였다
뉴턴은 그야말로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뉴턴의 아버지는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농부였고, 어머니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라이프니츠는 뉴턴만큼이나 대단한 인물로 어릴 때는 신동으로, 커서는 엄청난 박식가이자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그 둘은 신앙심이 매우 깊었으며, 이 때문에 하느님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죽을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지만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중력 이론에 따른 우주에서의 신의 역할에 관한 논쟁)
뉴턴은 여든네 해를 살면서 평생 좁은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뉴턴의 영역은 케임브리지와 런던 그리고 출생지인 링컨셔 주 울즈소프로 이루어진 160킬로미터 남짓이었다. 조수를 설명했던 사람인데 평생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9. 유클리드와 유니콘

왕립협회 초기에는 누구나 주간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1672년 겨울 오후 뉴턴은 학회에 처음 공식 등장했다.
회의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천재와 괴짜 내지 협잡꾼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놀랍게도 천재와 괴짜는 동일 인물이었다.
예컨대 뛰어난 과학자이자 존경받는 회원인 로버트 보일은 백내장 치료법으로 인분을 말려서 빻은 뒤에 환자의 눈에 불어넣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뉴턴과 친구 사이였던 철학자 존 로크도 바다에는 아마 인어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였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새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낡은 것을 고수하는 편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은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은 발견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개념 두 가지를 똑같이 중요하게 여겼다.
윌리엄 하비는 인체의 혈액순환을 설명한 인물로 유명한데,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서 낡은 것을 고수한 전형적인 사례다.
그는 마녀 전문가로, 마녀는 살해한 아기의 지방으로 만든 악마의 기름으로 몸을 문질렀는데, 이처럼 몸을 미끄럽게 만들어 희생자의 집에 난 틈 사이로 스며들어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금술은 옛것과 새것의 공존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사례다.
뉴턴은 연금술에 약 50만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의 단어 개수와 맞먹는다.
그의 관심사는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었으나, 어쨌든 연금술의 언어는 암호로 표시되어 있으며, “녹색 사자더러운 창녀의 생리혈따위의 성분들을 얻는 데 필요한 실험 철자들이 휘갈겨 적혀 있다.
뉴턴은 화학 연구를 시작했지만, 연금술이 더 심오한 불가사의라고 여겨 화학을 내팽개쳤다.
뉴턴의 신학 및 연금술 관련 저술은 뉴턴 사후 2세기 동안 아무도 살펴보지 않았다.
1936년 존 메이너스 케인스는 경매를 통해 뉴턴의 공책을 수중에 넣었다. 공책을 읽고서 케인스는 깜짝 놀랐다.
그에 따르면, 뉴턴은 새로운 시대의 첫 주민이 아니라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이었으며, 1만 년 전에 지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들과 동일한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본 최후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0. 소년들의 모임

인류 역사의 거의 내내, 새로운 발생은 위험한 생각이었다.
진리를 배울 최상의 방법은 과거의 권위자들이 발표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의 권위 있는 대학들의 임무는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의 말대로 새로운 지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14세기에 옥스퍼드 대학교는 이런 학칙을 내걸었다.
교양학부의 석사와 박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따르지 않은 자는 의견 하나당 5실링의 벌금을 내야 한다.”
독립성과 회의주의를 중세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비난했다. 한 해의 수확이 신의 손에 달려 있는 세상에서 회의주의는 이단으로 빠지는 지름길이었다.
선량한 그리스교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믿으려 하는 태도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보여야 했다. 기적과 신비가 널려 있고, 천사와 악마가 개와 고양이처럼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몇 세기 전에 이런 주장을 펼쳤다.
하느님이 전능하신 까닭은 단 한 가지 때문이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명백히 불가능한 것들을 아주 많이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신은 의도적으로 어떤 불가사의들을 인간의 통찰 너머에 남겨두었다.
하느님의 비밀로 하신 것은 너희들이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너희의 능력 밖의 일로 수고하지 마라.”
호기심을 맹렬히 비난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1000년이나 득세했다.

그러나 왕립협회가 실험을 강조한 것은 정말로 혁신적인 태도였다.
새로운 과학자들은 처음으로 실험의 가치를 역설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조를 선호했다.
실험은 무언가를 직접 행한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오히려 위험한 것을 더 좋아했다.

11. 바리케이드를 향해

16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새로운 발견을 하면 그 지식을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다들 당연시했다.
보물 지도처럼 비밀로 간직해야지 세상에 알렸다가는 소중한 재산을 날려버린다고 여겼던 것이다.
왕립협회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접근법을 밀어붙였다. 새로운 발견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누구나 읽도록 발표하면 지식이 더 빠르게 발전하리라고 보는 관점이었다.
왕립협회가 새로운 발견을 완전히 공개하라고 요구한 것은 전면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과거에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겼으며,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들먹였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자들은 똑같은 노선을 따를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훅이 보기에 과학의 목표는 이러했다. 자연 현상 및 모든 유용한 기술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키며…… 신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문법, 수사학 또는 논리학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초창기의 선언에서처럼 번지르르한 말장난이 아니라새로운 연구 방법을 찾아 나섰다.
왕립협회가 규칙을 깨기 시작했다. 은유, 직유 그리고 오랫동안 존중받아온 다른 모든 형식적인 표현들은 산만하고 부수적인 장식일 뿐 진리 탐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제는 없애야 할 것들이었다!

12. 개와 악당들

새로운 변화가 정착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달라진 풍경의 윤곽은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냈다.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왕립협회 설립 이전부터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1655년에 홉스는 새로운 철학자들과 의기투합했다. 그는 과학자들처럼 일상적인 언어로 사고하며 공개적인 실험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전부 초대했다. 방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원한다면 여러분도 얼마든지 이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불신하던 세계에서 무척이나 민주적인 발상이었다.
어떤 사람이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었으며, 어떤 아이디어든 그것에 대해 반박할 자유가 주어졌다. 바로 이런 점에서 과학혁명은 혁명적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평범한 교육을 받은 일반 독자들의 구미에 맞춘다는 생각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연금술에 관한 저술을 결코 공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력에 대한 위대한 연구를 발표하긴 했지만 가급적 자연스러운 말하기라는 개념에서 벗어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뉴턴이 발표한 명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틴어 단어에서 한 단어를 따와 프린키피아라고 한다)는 엄청나게 긴 수학적 논증의 형태로 쓰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프린키피아를 난해하게 만들었다라고 밝혔다. “수학을 겉핥기로 이해하는 이들로부터 공격당하지않기 위해서였다.
뉴턴은 반항아들과 적의를 품고 있으면서도 반항아들과 한패였다.
자신을 존경한다고 여기는 이들을 정작 뉴턴은 경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학은 다툼을 부추기는 분야처럼 보였다.
아이작 뉴턴과 존 플램스티드는 둘 다 최초의 왕립 천문학자였는데 서로를 미워했다.
뉴턴은 훅한테도 시비를 걸었는데, 그러자 훅도 뉴턴을 경멸했다. 게다가 훅은 위대한 네덜란드 물리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를 비롯한 열 명 남짓한 다른 과학자들도 미워했다. 훅은 자신의 적들을 향해 ’, ‘악당그리고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자기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뉴턴과 라이프니치는 무지막지한 말들로 서로 험담을 퍼부었는데, 훅의 비난은 애교 수준이었다.
뉴턴은 한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 유명한 선언은 대체로 뉴턴한테는 드물었던 겸손함의 사례로 인용되곤 하지만, 겉보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뉴턴의 의도는 분명 여러 선배 과학자들을 칭찬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아울러 자신의 적인 훅을 조롱하기 위함이다. 거인이라기보다는 곱사등이에 가까웠던 왜소하고 구부정한 훅을 경멸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은유는 없었을 것이다.
학회 회원은 어쩌다가 가끔씩 고결해질 뿐이다.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들이 망해야 한다.”(고어 비달Gore Vidal)

13. 독약 한 방울

그 무렵은 일상생활에서든 과학에서든 비정한 시대였다.
약점이 있는 사람은 동정을 받는 게 아니라 조롱을 당했다.
눈이 멀거나 귀가 멀거나 발이 기형이거나 다리가 뒤틀린 사람들은 하느님이 버린 자들이었다.
종교적인 이단아들도 범죄자들처럼 끔찍한 처벌을 무릅써야 했다.
가장 무시무시한 처벌은 거열형이었다. 내장은 불태워졌고, 내장을 빼낸 시체는 네 조각으로 잘렸다. 머리와 함께 도시 이곳저곳에 못으로 박아 매달았다.”

14. 조롱꾼들의 비웃음

과학은 기어코 세계를 뒤바꾸게 되지만, 초기에는 존경보다는 비웃음을 더 많이 샀다.
왕립협회를 승인한 왕도 학회의 총명한 회원들을 어릿광대라고 불렀으며, 한번은 공기의 무게나 잰답시고 종일 죽치고 앉아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라며 왕립협회를 한껏 비웃었다.
1676년 왕립협회는 런던 코미디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과학을 조롱하는 데 가장 특출한 재능을 보인 사람은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너선 스위프트이다.
그는 과학자들이 아는 체나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기며 과학자들한테 분개하고 치를 떨었다.

15. 관객 없는 연극

새로운 과학이 조롱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일단 과학이 새롭기 때문이기도 했다.
새로운 사상가들은 오랫동안 존중되어온 이해할 만한 상식적인 세계관을 일상생활의 단순한 사실과 어긋나는 세계관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분노의 깊은 원천이 있었다.
우리가 굳건한 지구 위가 아닌 새총에서 쏘아 올린 돌멩이처럼 우주를 가로지른다면 왜 우리는 느끼지 못할까? 왜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인들 및 이들의 후예들의 목표는 오직 천상의 완벽한 질서를 찾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물리학자들은 운동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으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 ① 하늘 위 우주에서는 운동이 사물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나타내며 영원히 지속된다. 하늘 아래 지구에서는 정지가 자연스러우며 운동에는 설명이 요구된다.
하늘은 예측 가능했지만, 지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구에서는 그 어떤 조화로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수 탄생 약 300년 전에 하늘 및 지상에서 모든 물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했다.
거의 2000년 동안 모든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지상의 모든 물체들은 땅, 공기, 불 그리고 물로 이루어져 있다. 천상은 다섯 번째 원소이자 다섯 번째 본질인 제5 원소, 정수이고 순수하며 영원한 물질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학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이러한 완벽한 천상의 영역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마침내 밀어내는 사람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코 갈릴레이였다.
수학적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것은 단지 하늘뿐만 아니라 지상의 평범한 사물도 마찬가지였다.
갈릴레이는 자연은 수학이라는 문자로 쓰인 책이라고 주장했으며, 방정식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운동을 논의하기는 했지만, 수학적인 방법을 쓰진 않았다. 항해하는 배, 녹이 스는 쇳조각, 늙어가는 사람 등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서 말하는 운동은 잠재성의 현실화였다.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지 말장난, 그것도 매우 애매모호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비웃었다.

갈릴레이가 급진적으로 선언한 관점에 따르면, 과학자의 임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지 보이는 대로 주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라고 물었다. 왜 돌이 떨어지는가?(땅에 속하기 때문이다.) 왜 불꽃이 위로 속하는가?(불꽃은 공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들은 자신의 본향으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에 움직인다.
갈릴레이는 어떻게를 물었다. 어떻게 돌은 떨어지는가? 돌은 끊임없이 점점 더 빨라질까? 아니면 일정한 속력에 이를 때까지만 빨라지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가 세계를 설명했다면, 갈릴레이의 어떻게는 세계를 묘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문에 답을 내놓았지만, 갈릴레이는 다른 대답이나 더 나은 대답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16. 산산조각이 나다.

갈릴레이, 뉴턴 그리고 동료 혁명가들은 또 하나의 낡은 관념에 재빨리 등을 돌렸다. 이번에 그들은 상식을 내다버렸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겉보기와 다른 것은 하늘만이 아니고 운동만이 아니다. 온 우주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참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세계는 훌륭하고 생명력이 가득 차 있는 듯하다. 하지만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최초로 상식에 가장 세게 타격을 가했던 사람은 폴란드 사제이자 천문학자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였다.
태양이 우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상식에 대해서 코페르니쿠스는 모두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태양 중심 우주론은 성경 말씀과 어긋났다. 여호수아가 태양에게 명하여 하늘에 가만히 멈추어 있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유일한 저서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간하기를 수십 년 동안 주저하였다. 아마도 과학계뿐만 아니라 종교 당국의 분노를 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1543524일 그는 이 걸작의 최초 판본을 받아보았는데 너무 쇠약해서 자기 책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죽음이 임박한 시점이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630년대에도 갈릴레이는 태양 중심 우주론에 찬동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할 위협에 맞닥뜨렸으며 가택연금 상태로 살다가 죽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이론은 조롱과 혼란뿐 아니라 두려움도 불러일으켰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학이 맞닥뜨린 최대의 도전은 행성의 희한한 운동을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 행성은 단순한 경로를 따르지 않고 왔던 방향으로 고리를 이루며 되돌아가는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관람차의 각 객차가 또다시 회전하는 모습과 같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아주 복잡한 체계를 내다버렸다. 단지 태양주위를 돌 뿐이라고 주장했다. 행성의 궤도가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에서 행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심성 많은 사상가는 지구를 운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돌은 왜 떨어진단 말인가?
왜 행성은 궤도를 따라 돌고 별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가?
이런 질문에 코페르니쿠스는 전혀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별과 행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새로운 철학은 죄다 의심만 불러일으키나니 / 이리하여 모든 것은 산산조각 나고 모든 일관성은 사라지고 말았네.”

2부 희망과 괴물

3부 빛 속으로

옮긴이의 말

_문화와 역사가 살아있는 과학혁명 이야기

아마도 글을 다루는 사람의 일은 마감과의 싸움인 듯하다.
저자 에드워드 돌닉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17세기 전후 기적의 시대, 과학혁명의태동과 그 후폭풍이 세상을 뒤흔들던 시대를 소설 대목처럼, 영화 장면처럼, 역사책의 구절처럼 풀어냈다.
나는 저자가 첫 장에서 그려낸 1660년의 런던의 풍경, 즉 수상한 사람들이 토마스 그레셤의 대저택에 모여 비밀스런 회합을 갖는 장면에서부터 마음을 뺏겼다. 이어지는 런던 대화재의 생생한 묘사,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죄인들의 처형 장면, 초기 왕립협회에서 행해진 온갖 기이하고 끔찍한 실험들, 과학자들 사이의 반목과 시기와 기벽들, 마법과 과학 사이의 희한하고 아찔한 줄타기, 현미경으로 처음 소우주의 세상을 들여다본 이들의 반응, 똑같이 신을 숭배하고 찬양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의 사상이 신의 완전성을 해친다고 맞섰던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대결, 과학적 사고와 실험의 기초를 마련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연구에 대한 저자의 쉽고 상세한 설명 등등. 감탄의 목록은 페이지를 더해가고 장을 더해가며 늘어만 갔다.
그리하여 이 책의 번역을 마쳤을 즈음에는, 과학혁명을 위해 세상을 바꾼 이들의 생활과 생각과 꿈과 전망 그리고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와 역사가 그들의 과학적 이론과 더불어 친근한 어떤 풍경으로 다가왔다.
이런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에드워드 돌닉, 노태복 옮김, 뉴턴의 시계-과학혁명과 근대의 탄생, 책과 함께,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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