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세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樂人列傳≫-풍류가인을 즐긴 역사 속의 예인들-허경진 편역2021-07-04 08:24
Writer

≪악인열전樂人列傳

머리말 음악을 즐기고 지켰던 우리 예인(藝人)들을 만나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땅에 처음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악이다.
에드워드 벨처는 1845년에 지은 사마랑호 항해기에서 제주 어선의 악대가 연주하는 우리 음악을 최고의 불협화음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어디 벨처뿐이겠는가? 우리도 조선시대 음악, 특히 아악을 즐기기는 정말 힘들다.
19세기를 살았던 당대 선비인 이옥도 그랬다. 그는 장악원 악사들의 연주 연습을 들으면서 지겨워서 눕고 싶을 뿐 아니라, 곧장 졸 것 같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구경꾼이 많이 모였는데, 그 이유를 이옥은 마을의 한량들이 귀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을 위해서 온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바로 악사들의 복장이 화려하고, 악기들이 다양했으며, 아름다운 기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궁중에서는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예()를 갖추기 위해서 연주하고 들었다. 통치수단의 하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가장 먼저 용비어천가를 지었는데, ‘훈민정음을 실제로 사용해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왕실의 조상들에게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을 바꾸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왕실에서 음악을 즐기는 경우 음악은 당연히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남성 악사와 악공 들이 연주하였다.
남성 악사나 악공들이 여성들만 있는 후궁에 들어가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비나 대비를 위한 잔치를 베푸는 경우에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내연을 담당하는 여성 연주자들이 필요했는데, 여성 악공을 따로 육성하지 않고 기생들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기생들은 원칙적으로 남편이 없었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다 보니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실제로는 살림을 하는 기생이 많았다.
여성 연주자들이 기생이나 여종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성적인 노리개로 전락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음악이 상업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음악 연주를 듣기보다는 보러온 경우가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악공이나 악사들은 가장 낮고 천한 신분이었지만, 사대부 가운데에도 조예가 깊은 이들도 많았다. 이들도 이 책에서 함께 소개했다.
악인(樂人)’이라는 용어가 듣기에 좀 이상하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악공이나 악사에서 기생과 사대부까지 포함할 수 있는 용어가 따로 없기에 할 수 없이 악인이라는 용어를 썼다.
악인들은 대부분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남긴 글은 거의 없으며, 다른 문인들이 남겨준 기록도 별로 많지 않았다.
다른 분들에 의해서 앞으로 좀 더 많은 악인들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20052월 허경진

삼국시대

 왕산악(王山岳)

거문고(현금玄琴) 중국 악부(樂部)의 금()을 본받아 만들었다. 금조(琴操)를 살펴보니,
복희(伏羲)씨가 차라리 금을 만들어 심신을 닦고 본성을 다스려서 그 천진함을 되찾게 하였다.”
라고 하였으며,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금의 길이 366푼은 366일을 상징한 것이고, 너비 6치는 천지 사방(육합六合)을 상징한 것이다. 문의 위(문상文上, 무늬가 있는 위판)를 지()라 하고(는 물이니 그 평평함을 가리킨다) 아래를 빈()이라 하였으니(이다), 앞이 넓고 뒤가 좁은 것은 존귀함과 비천함을 상징한 것이다.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본받은 것이다. 다섯 줄은 오행(五行)을 상징하고, 큰 줄은 임금이며, 작은 줄은 신하인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두 줄을 더하였다.”
풍속통(風俗通)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금의 길이 45치는 사시(四時)와 오행을 본받은 것이고, 일곱 줄은 북두칠성을 본받은 것이다.”

거문고의 제작에 대해 신라고기(新羅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처음에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지만, 그 악보와 타는 법은 몰랐다. 그래서 나라 사람 가운데 그 음을 알아서 탈 수 있는 자를 찾으며, 많은 상을 걸었다. 그때에 제2(第二相) 왕산악이 그 본래 모양을 보존하면서 그 법제를 좀 고쳐서 새 악기를 만들고, 아울러 100여 곡을 만들어 연주하였다. 이때 검은 학(현학玄鶴)이 와서 춤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이라 이름 지었는데, 그 뒤에는 다만 현금(玄琴, 거문고)이라고 하였다. _삼국사기(三國史記)32 <()>

 백결(百結)

백결선생(百結先生) 어떤 사람인지 내력을 알 수 없다. 남산(南山) 아래에 살았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옷을 백 번이나 기워 입었다. 마치 메추리를 거꾸로 매단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동리(東里)의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일찍이 영계기(榮啟期, 춘추시대 공자와 동시대에 산 현인. 열자<천서편>에 나온다)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그리고 마음에 편치 않은 일들을 모두 거문고로 폈다.
어느 해 세밑에 이웃 동네에서 곡식을 방아로 찧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절구 찧는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방아를 찧는데 우리만 곡식이 없으니, 어떻게 해를 넘길까요?“
그러자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이오. 오는 것은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은 따라잡을 수 없는 법인데, 그대는 어찌 마음 아파하시오? 내 그대를 위해 절구 찧는 소리를 내어 위로해주리라.“
이에 거문고를 뜯어 절구 찧는 소리를 내었다. (이 곡조가) 세상에 전해져서, 그 이름을 방아타령(대악碓樂)이라고 하였다. _삼국사기열전 제8 <백결선생>

○ 우륵(于勒)

가야금(加耶琴) 중국 악부의 쟁()을 본받아 만들었다. 풍속통,
쟁은 진()나라 음악이다.”
라고 하였다. 석명(釋名)에는,
쟁은 줄을 높이 매어 소리가 쟁쟁하며, 병주(幷州)ㆍ양주(梁州) 두 주의 쟁은 모습이 슬()과 같다.”
고 하였다. 부현(傅玄, 나라 문신, 진나라 종묘의 악장을 지었다)이 이렇게 말했다.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다.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육합六合)을 본받고, 줄과 기둥은 12달에 비겼으니, 이는 곧 인()과 지()의 악기이다.
완우(阮瑀, 나라 문신)는 이렇게 말했다.
쟁은 길이가 6지이니 음률의 수에 응할 것이다. 줄이 12개가 있는 것은 사철을 상징하고, 기둥의 높이가 3치인 것은 하늘ㆍ땅ㆍ사람(삼재三才)을 상징한다.
풍속통(風俗通)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금의 길이 45치는 사시(四時)와 오행을 본받은 것이고, 일곱 줄은 북두칠성을 본받은 것이다.”

가야금은 비록 쟁과 제도가 조금 다르지만 대개 그와 비슷하다.
• ≪신라고기(新羅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가야금은)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음악이 어찌 한 가지로 같을 수 있으랴?’ 하고는 성열현(省熱縣, 경남 의림군 부림면의 신라시대 행정구역) 사람 악사(樂師)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그 뒤로 우륵은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왕은 그를 받아 국원(國原, 충북 충주의 옛 지명)에 살게 하고 대나마 주지(注知)ㆍ계고(階古)와 대사 만덕(萬德)을 보내 그 업을 전수받게 하였다.
세 사람이 12곡을 전수받고 서로 말하길, ‘이것은 번잡하고 음란하니,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줄여서 5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 제멋대로 줄였다는 말을 듣고 노했지만, 그 다섯 가지 곡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구나. 너희는 그것을 왕의 앞에서 연주하라.’
왕이 이를 듣고 몹시 기뻐했는데, 간언하는 신하가 의논하여 아뢰었다.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이니, 이는 취할 것이 못 됩니다.’
왕이 말했다. ‘가야 왕이 음란하여 스스로 망한 것이지, 음악이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 대개 성인(聖人)이 음악을 제정한 것은 인정에 연유하여 법도를 따르도록 한 것이니,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것은 음악 곡조 때문이 아니다.’
드디어 그를 행하게 하여 대악(大樂)으로 삼았다.”(하략) _삼국사기(三國史記)32 <()>

고려시대

 예성강 부부

옛날에 하두강(賀頭綱)이라는 중국 상인이 있었는데 바둑을 잘 두었다. 일찍이 예성강에 이르렀다가 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났다. 그래서 바둑으로 내기를 해서 빼앗으려고, 그 부인의 남편과 돈내기 바둑을 시작하였다. 거짓으로 바둑을 지고 곱으로 돈을 주자, 그 남편이 입맛을 붙이고 자기 아내를 걸었다. 그러자 두강이 단판에 바둑을 이기고 그의 아내를 배에 싣고 갔다. 그래서 그 남편이 후회하고 한탄하면서 노래 <예성강>을 지었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부인이 끌려갈 때 옷매무새를 아주 단단하게 하였으므로, 하두강이 그 부인의 몸을 다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배가 들어설 무렵에 뱃머리가 들고 가지 않았다. 그래서 점을 쳐보니,
정절 있는 부녀가 신명을 감동시킨 탓이다. 그 부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파선되리라.”
라는 점사(占辭)가 나왔다. 뱃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두강에게 권고하여 돌려보냈다. 그의 아내도 또한 노래를 지었으니 <예성강> 후편이 바로 그것이라 한다. _고려사(高麗史)71 <악지(樂誌)ㆍ예성강(禮成江)>

* <예성강곡>은 가사는 전하지 않고 노래의 유래만이 전한다. 

조선시대

 노래 - 황진이

진이는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남에게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
한번은 산수를 유람하면서,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거쳐 나주까지 왔다. 고을 사또가 절도사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진이는 다 떨어진 옷에다 때 묻은 얼굴로 그 자리에 끼어 앉았다. 태연스레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탔지만, 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여러 기생들이 기가 죽었다.
그는 평생 화담 선생(花潭 서경덕, 황진이ㆍ박연 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하는 송도삼절로 유명하다)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야 떠나갔다. 진이는 늘 말했다.
지족선사(知足禪師)30년이나 벽을 두고 수양했지만, 내가 그의 지조를 꺽었다. 오직 화담 선생만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그는 죽을 무렵 집사람에게 부탁하였다.
상여가 나갈 때에 부디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
아직까지도 노래하는 사람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또한 기이한 인물이다. (하략) _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24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노래 - 금향선(錦香仙)

내가 시골집에 있을 때 이천(利川) 오위장(五衛將) 이기풍(李基豊)이 퉁소 <신방곡(神方曲)> 명창인 김군식(金君植)으로 하여금 한 가기(歌妓)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의 이름을 물으니 금향선이라 하였는데, 겉모습이 곱지 않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당대의 풍류가 지목하여 보냈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개 아무개 친구들을 불러 산속 절에 올랐는데, 모두 이 여인을 보고는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춤판이라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그 여인에게 시조(時調)를 부르게 하자, 그 여인이 단정히 앉아 蒼梧山崩湘水絕(창오산붕상수절)” 구절을 불렀다. 그 소리가 애원(哀怨)하고도 처절(悽絶)해서 구름을 멈추게 하고 들보의 티글을 날렸다. 시조 3(현대식으로 고치면, “창오산 무너지고 상수 끊어져야 이내 시름 없을 것을 / 구의봉 구름이 갈수록 새로워라 / 밤중만 월출우동령月出于東嶺하니 님 뵈온 듯하여라.”)을 부른 뒤에 잇따라 우면조와 계면조 1()을 부르고, 또 잡가(雜歌)를 불렀는데, 모흥갑(牟興甲)이나 송흥록(宋興祿) 같은 명창들의 조격(調格)보다 못하지 않았다. 참으로 절세(絶世) 명인(名人)이라 할 만하였다.
자리에서 눈을 씻고 다시 보니 전의 추악한 모습이 이제는 예쁜 얼굴이 되어, 모두 눈길을 모으고 정을 보냈다. 나도 또한 춘정을 금하기 어려워, 남보다 먼저 눈길을 보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_안민영 금옥총부(金玉叢部)157

 거문고 - 매창(梅窓)

부안의 기생 계생은 시를 잘 짓고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는데, 그와 가깝게 지낸 태수가 있었다. 태수가 떠나간 뒤에,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서 그를 사모하였다. 어느 날 달도 밝은데, 계생이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긴 노래로 하소연하였다. 이원형이 지나가다가 보고서 시를 지었다.

한 가락 거문고를 뜯으며 자고새를 원망하는데
거친 비석은 말이 없고 달마저 외로워라.
그 옛날 현산에 세웠던 남녘 정벌의 비석에도
그 또한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 흘렸던 일이 있었나.

당시 사람들이 절창이라고 하였다. 이원형은 나의 관객(館客)이다. 젊어서부터 나와 이재영과 함께 지냈으므로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다른 작품 가운데에서도 또한 좋은 것이 있었고, 석주 권필은 그 사람됨을 좋아하여서 칭찬하였다. _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25 <성수시화(惺搜詩話)> 86

* 매창(1573~1610)은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이라고 불렀다. 기생이 된 뒤에는 계생(桂生), 또는 계랑(癸娘)이라고도 한다. 유희경ㆍ이귀ㆍ허균 같은 문인들과 사귀며 시를 주고받았다. 지봉유설에 의하면 그가 죽었을 때에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피리 - 옥금(玉金)

옥금이 밤에 소금을 불다

가냘픈 피리 소리가 어슴푸레한 마을을 꿰뚫고
계곡에 비친 반달이 주렴에 가득하네.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청상조만은 불지 말게
옛 동산에 매화가 떨어질까 걱정이라네. 

 해금 혜금수(嵇琴叟)

내가 내가 대여섯 살 때로 기억된다. 해금을 켜면서 쌀을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을 보았는데, 얼굴이나 머리털이 예순 남짓 된 사람이었다. 곡을 연주할 때마다 문득 누군가 불렀는데,
해금아 네가 아무 곡이나 켜라.”
하면 해금이 응답하는 것처럼 곡을 켰다. 늙은이와 해금이 마치 영감과 할미 양주 같았다. 콩죽을 실컷 먹고 배가 아파 크게 소리 지르는 흉내도 내고, 빠른 소리로 다람쥐가 장독 밑으로 들어갔다고 외치는 흉내도 냈다. 남한산성의 도적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달아나는 흉내도 정녕 그럴듯하게 냈다. 그게 모두 사람을 깨우치는 말이었다. 내가 회갑되던 해(1862)에 노인이 다시 내 집으로 와서 예전같이 쌀을 구걸했다. 노인의 나이가 이미 100살은 넘었을 테니, 기이하다. 기이해! _조수삼 추재집(秋齋集)기이(紀異) <혜금수(嵇琴叟)> 86

영감과 할미가 콩죽 먹고 배탈났다네.
다람쥐가 장독 밑을 뚫지 못하게 해라.
스스로 조카와 묻고 답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모두 사람을 깨우치는 말일세. 

 음률 장영실(蔣英實)

특진관 이장곤이 아뢰었다.
우리나라 악은 옛 뜻(古意)을 조술(祖述)한다고 하지만, 순수한 정악이 아닙니다. 신이 정악원의 일을 보는데, 전조(前朝, 고려) 말 우왕 때의 악이 급촉하고 비속하였는데, 우리 왕조 태조ㆍ태종에 이르러서도 미처 개정하지 못했습니다.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박연(朴堧, 1378~1458)이 악률(樂律)에 정하였으며, 장공(匠工) 장영실도 악기를 제작하는 것이 극히 정교하였습니다. 세종께서도 제도를 증감하여 의물(儀物)이 비로소 이때에 마련되었습니다. _ 중종실록(中宗實錄)1422

 아쟁 김운란(金雲鸞)

김운란은 성균관 진사(進士)인데, 진사에 합격한 뒤에 눈병을 앓아 두 눈을 잃었다. 눈먼 봉사들이 대개 점치는 것을 업으로 하였지만, 그는 선비로서 음양(陰陽) 복서(卜筮)를 배워 점쟁이 노릇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쟁 켜는 법을 배워 자신을 달랬는데, 그 수법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폐질(廢疾) 때문에 하늘의 해도 볼 수 없고, 다시는 대과(大科)를 치를 수도 없었으며, 조상이 뛰어나지 못해 음직(蔭職)을 얻을 수도 없고, 여느 잡상인들같이 선비들과 어울리며 사귈 수도 없었다. 그는 어느 날 밤에 그러한 자신을 슬퍼하면서, 그 끝없는 슬픔을 아쟁에 부쳤다.
남쪽 산기슭에 낡은 사당에 있었는데, 그 담장에 기대어 서너 곡조를 연주하였다. 그 소리가 몹시 씩씩하면서도 애달팠다. 그러자 갑자기 사당 안에서 뭇 귀신들이 일제히 소리 내어 대성통곡하는데, 그 처량한 소리가 물 끓듯 했다. 운란은 깜짝 놀라 아쟁을 가지고 달아났다. 이는 성조(聲調)가 조화롭고 기묘하여 귀신을 감동시켰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운란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극성(克成)과 극명(克明) 모두 무과에 합격하였다. _유몽인 어우야담(於于野談)

황해도 연안부에서 달밤에 김운란이 쟁을 켜는 소리를 들었다. 김은 옛날에 같은 마을 사람이었는데 쟁을 켜는 소리가 당대에 절묘하였다. _율곡 이이(1574)

빈 누각에 쟁 소리가 나자
깜짝 놀라서 말소리도 끊어졌네.
줄마다 손에 따라 소리 나는데
시냇물이 깊은 곳에서 흐느끼는 듯해라.
가을 매미가 이슬잎을 안고 우는 듯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옹달샘 소리인 듯,
하늘 향해 귀를 기울이자
여음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네.
내가 젊고 그대가 장부였던 시절
정겨운 마을에서 서로 친하게 지냈었건만,
슬픔과 기쁨이 엇갈린 30년 동안
동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했었네.
오늘 밤에야 우연히 만나게 되니
옛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구나.
술잔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푸른 하늘엔 개인 달만 높이 걸렸네. 

 허경진 편역, 樂人列傳, 한길사, 2005

<목차>
머리말ㅣ 음악을 즐기고 지켰던 우리 예인들을 만나다
삼국시대: 여옥 외 11
고려시대: 진경ㆍ초영 외 9
조선시대_ 노래: 동구리 외 29
조선시대_ 거문고: 김일손 외 20
조선시대_ 피리: 세조ㆍ허오 외 12
조선시대_ 해금: 광한선 외 2
조선시대_ 비파: 송태평ㆍ송전수 외 6
조선시대_ 가무: 가희아 외 7
조선시대_ 음률: 박연 외 16
조선시대_ 악보: 안상 외 5
조선시대_ 기타: 김운란 외 18
해설ㅣ 세월을 건너 살아오는 악인의 향기
찾아보기

허경진은 1952년 목포 출생.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시를 썼다. 연세대 국문과 졸업하면서 <요나서>(1974)로 연세문학상을 받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를 받았다. 대학원 시절 도서관 고서실에 쌓인 한시 문집을 보고,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한시 번역에 힘써 최치원부터 황현에 이르는 한국의 한시40여 권을 출간했으며, 100권을 채우는 것이 꿈이다. 삼국유사, 서유견문과 한국의 한시 50권의 번역이 있다. 저서로는 허균평전,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하버드대학 예친도서관의 한국고서들,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 한국의 읍성, 악인열전등이 있다.

Comment
Captcha Code
(Enter the auto register prevention c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