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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자유와 예속의 원류-박홍규2021-06-27 21:34
Writer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자유와 예속의 원류

머리말

이 책에 나오는 두 사람 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다.
디오게네스는 길거리의 통 속에서 개처럼 살았다. 그는 당시에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찾아와 소원이 뭐냐고 묻자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했고, 벌건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다니면서 인간을 찾는다고 외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었다. 그는 모든 학문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철학자이고, 특히 인간은 정치적(폴리스적) 동물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다. 이 정도의 상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다.

그런데 그런 토막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면 두 사람이 아주 다른 대접을 받는다.
디오게네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몇 줄 정도의 전설이나 동화 같은 에피소드 쪼가리로 끝나기 때문에 흔히 어느 한쪽 중 절반을 차지할까 하는 정도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 대한 대단히 복잡한 학문적 체계의 방대한 논저가 연구실과 도서관마다 가득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너무나 어렵고 그 내용도 너무나 뒤죽박죽이어서 그를 모든 학문의 아버지라고 하고 그의 책을 세계의 고전 10따위의 앞부분에 집어넣는 사람들의 상식을 의심하게 한다. 물론 방금 말한 상식(박홍규)가 이해한 수준의 얕은 상식에 불과하다.
어쨌든 국내외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논저는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반면에 디오게네스에 대한 논저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이 책처럼 두 사람을 함께 제목에 넣은 책은 세상에 달리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나는 국가권력과 돈을 우습게 알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세계시민으로서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자연에 따라 소박하게 살기를 원했던 디오게네스에게는 크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 국가권력과 부를 가장 중요한 인간사로 여기고 특히 노동에서 해방된 엘리트가 권력을 쥐고 노예를 비롯해 노동하는 사람들을 타고난 열등분자로 보면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그러니 우월한 그리스가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아무런 호감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생각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ㆍ디오게네스=비권력ㆍ비경제=무지배=무계급=자유ㆍ평등=노예철폐ㆍ인간해방
ㆍ아리스토텔레스=권력ㆍ경제=엘리트지배=계급=무자유ㆍ불평등=노예억압ㆍ인간예속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산더미 같은 논저는 그가 소수에 집중된 권력과 부를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등 불평등사회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반대했음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 변명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거의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대체로 음흉한 보수반동의 기만술책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 여름휴가 때 이명박 대통령이 마이클 샌델이라는 미국 학자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새로운 국정지표로 공정사회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됐다.
• ≪정의란 무엇인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 입각해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Communitarianism)의 대표 격인 샌델이 자유가 아닌 미덕이 정의의 원리라고 주장한 책이다.
자유와 미덕의 대치2500년 전에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상반된 입장에 그 뿌리를 갖고 있다.
•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미덕으로 번역된 arete라는 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의 번역서에는 탁월성으로 번역된다는 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소수에게만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미덕이라는 말 자체가 그야말로 미덕적이다. ‘미덕이라는 말은 탁월성, 훌륭함, 뛰어남, 우월함, 우수함, 수월함등으로 번역된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 엄청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은 정의를 자유가 아닌 미덕으로 보지 못한 탓이라는 샌델의 말은 지극히 황당무계하게 들린다.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내세우면서 그에 대해서도 오로지 미덕의 사람으로만 설명한다.
샌델이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제국주의자나 국가주의자나 계급주의자나 불평등주의자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샌델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들은 그가 하는 말의 진정한 뜻을 독자가 알지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히 어렵다.
민중을 철저히 경멸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중에게 읽히려고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처럼 훌륭한 사람인 철학자들만을 대상으로 책을 썼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들은 참으로 난해하다. 그가 독자로 삼은 철학자들은 과연 알아먹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렵다.
2천 년이 넘도록 그가 쓴 책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논저가 나왔는데도 여전히 논쟁이 끊이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그 내용은 복잡하지만 내용은 별 게 아니고 그 진정한 뜻은 분명한데 그 분명한 뜻을 전해주는 철학자들의 논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충분한데 현학적으로 비비 꼬는 헛소리가 왜 저리도 많은가?
그런 짓을 수천 년 되풀이한 서양의 철학자라는 자들도 웃기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한 말을 다시 앵무새처럼 복창하는 우리의 철학자들은 왜 그러고 있는가?
그런 꼴들이 너무나 한심해서 나는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치학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2천 년 넘게 읽혀온” “국가와 정치에 관한 고전으로 칭송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다고 생각한 것도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또 하나의 이유다.
가령 정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은 정치적(또는 사회적) 동물로 번역되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말은 인간(정확하게는 그리스 폴리스 시민’)은 국가적(정확하게는 폴리스적’) 동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그 말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니 별 의미가 없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폴리스 시민이야 당연히 폴리스적 동물 아닌가?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따르는 샌델에 대해서도 나는 비판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신종하는 나로서는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식의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 대해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샌델보다 더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소위 네오콘이 그런 사람들이다. 네오콘은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국가주의자 내지 제국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스승인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찬양하고, 독일의 나치와 관련성이 있는 니체, 하이데거, 슈미트도 찬양한다.
미국의 네오콘도 문제이지만 그들과 유사성을 보이는 한국의 네오콘은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네오콘과 위에서 언급한 철학자들 사이의 연관이 밝혀지기도 하고 그런 내용의 책이 나오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네오콘은 자신들의 생각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생각과 같다고 노골적으로 밝히지만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특히 한국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밝히지 않아 더욱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1장 무엇이 문제인가?

자유와 예속의 원류

예속은 남에게 지배를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는 것을 말하고, 자유는 예속 없이 사는 것을 말한다.
예속은 남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니 불평등한 관계와 연결되는 반면에 자유는 그런 지배가 없으니 평등한 관계와 연결된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은 별개이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평등은 자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불평등은 그런 지배를 수반하지 않고 재화의 불평등에 그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하나의 사회 전체 속에서 보면 경제적 불평등도 역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예속의 반대말로는 독립이나 자립도 있지만 역시 자유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 자유라는 말을 쓰겠다.
자연의 보편적 원리를 디오게네스는 자유로 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속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가 주인에게 예속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시민은 엘리트에게, 개인은 국가에, 세계는 그리스라는 국가에 예속돼야 한다고 보았고, 육체는 영혼에, 물질은 정신에, 우주는 신에게 예속돼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디오게네스는 그 모든 것이 다 자유로워야 한다고 보았다. 요컨대 디오게네스는 자유의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속의 사상가였다.

디오게네스=개 같은 거지=자유ㆍ평등=비국가주의ㆍ세계시민주의
아리스토텔레스=폴리스의 철학자=예속ㆍ불평등=국가주의ㆍ제국주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국가와 정치 그리고 행복에 관한 그의 사상은 철저히 엘리트 중심의 계급주의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오늘의 노동자에 해당하는 당대의 노예를 운명적, 자연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살도록 되어 있는 존재로 보았고, 동물이나 물건처럼 거래되는 재산 정도로 취급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이, 여성, 기술자, 노동자, 상인, 농민 등도 모두 노예와 유사한 존재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 이외의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를 야만민족과 야만국가로 보고 그리스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착취하는 것도 정당화했다. 그런 민족과 나라에 속하는 인간을 정복하거나 죽이는 것은 노예보다 못한 야만인을 정복하거나 죽이는 것이므로 불의이기는커녕 너무나도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전체는 물론이고 아테네도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아테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는 엘리트가 지배하는 계급체계였다. 그러니 그곳에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는 그 신화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철저히 엘리트가 지배하는 계급차별의 체제였다.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시체를 묻는 데 사용되는 통 속에서 벌거벗고 햇빛을 즐기고 있는 거지를 찾아온 자가 말했다.
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이에 거지 왈 나는 개 디오게네스다.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라.”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개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숨어서가 아니라 드러내놓고, 그래도 대왕은 그를 죽이기는커녕 잡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처가 그렇게 했다고 해도 인도의 어느 왕이 그를 죽이거나 잡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고대 그리스였고 고대 인도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무슨 이유로 어떤 생각을 하며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을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가 크레타에서 총사령관이 됐을 때 많은 철학자들이 그를 찾아왔건만 디오게네스만은 오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니 화가 나서 찾아갔을 수도 있겠다.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에게 소원을 물었다고 하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누린 특권과 비슷한 특권을 노예신분인 디오게네스에게 부여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자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재류외인이라는 비천한 신분(재류외인은 노예와 비슷한 신분이었다)으로 아테네에 살면서도 사립대학을 세우고 경영하는 특권을 알렉산드로스 덕분에 누렸는데, 이런 특권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스승인 플라톤만 제외하고는 재류외인에게는 물론이고 아테네의 시민에게도 부여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디오게네스=노예=비시민개 또는 거지
아리스토텔레스=재류외인=비시민사립대 총장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대 최고의 석학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웠다. 철인정치를 주장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철인과 비슷한 지위 또는 그 이상의 지위에 오르는 출세를 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자기 스승과는 반대인 디오게네스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속셈은 달리 있었겠지만 말은 그렇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디오게네스는 사는 꼴에서도 완전히 반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란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디오게네스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2천 년도 전에 그랬다.
노예제를 부정한 디오게네스의 철학이 아니라 노예제의 유지를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그 2천 년 동안 세상을 지배했다.
그래서 개처럼 사는 철학자들은 디오게네스 이후로 씨가 말랐고, 모든 철학자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철학을 한답시고 기를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지만 디오게네스의 저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2천여 년 동안 그 수백 배, 아니 수천 배, 아니 수만 배 이상의 방대한 논저로 해석됐다.
노예제를 유지하고 노동자, 농민, 여성, 아이, 외국인 등을 무시하고 소수의 엘리트나 군주가 다스리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 그리고 권력과 돈의 무한추구를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한국 학자들까지 부화뇌동하는 점에 대해 도저히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디오게네스에 대해서는 에피소드 외에는 알 길이 없다. 그에 대한 책은 한 권도 나온 적이 없다. 그러나 책이 없어도 상관없다. 그는 삶으로 자신의 철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실천한 철학자였다. 그는 자유를 자족이라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그는 욕망도 풍요도 아닌 자족과 무욕이라 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자율주의와 타율주의

자율주의=자유ㆍ자치ㆍ자연적, 반화폐주의적=디오게네스=노장, 부처, 예수
타율주의=반자유ㆍ반자치ㆍ반자연적, 화폐주의적=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와 네오콘

네오콘이란 신보수주의자라는 뜻의 neoconservative라는 낱말의 약자다.
네오콘은 대부분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이므로 그들을 가리켜 레오콘 또는 스트라우시언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네오콘을 알기 위해서는 레오 스트라우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트라우스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1930년대 말에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가서 시카고대학 등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대중에게 진리를 설파했기에 사형을 당했다고 하면서, 진리는 대중이 아닌 엘리트에게만 가르치고 대중에게는 종교와 신화와 같은 고귀한 거짓말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의 책을 읽어보면 그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중심의 제국주의론을 펼친 것은 네오콘이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론을 펼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네오콘과 부시가 악의 축이니 독재군이니 하는 말을 한 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이외의 다른 모든 나라를 가리켜 야만국이니 독재국이니 하는 말을 한 것과 같다.
역시 자유주의를 부정한 니체, 하이데거, 슈미트 스트라우스에게 중간스승 격이다. 니체, 하이데거, 슈미트는 진리를 부정하고 적과 동지 사이의 투쟁을 강조했다.
스트라우스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앨런 블룸이다. 그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자유주의 등의 상대주의를 비판한 미국정신의 종말(1987)’이라는 저서로 유명하다.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1989년에 우리말로도 번역됐다. 그런데 그 역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셰익스피어를 숭상하는 자였다.

2장 폴리스의 사회와 정치

고대문명의 형성

도시국가라는 것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도시국가는 그리스만의 자랑거리가 아닌 것이다.
고대 그리스를 자유의 나라였느니 민주주의의 나라였느니 하며 터무니없이 꾸며대서는 안 된다.

고대국가의 구조

고대 그리스가 이집트를 비롯한 다른 고대 사회와 달리 중앙집권적이지 않았던 것은 주로 그리스의 자연환경이 이집트의 자연환경과 달랐기 때문이지 그리스인이 자유를 발명했거나 특별나게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이나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는 천연적인 강우에 의존해 농사와 목축을 해야 했기에 치수를 하고 관개사업을 벌일 필요가 있었지만 그리스에서는 자연환경상 그럴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이른바 동양적 전제주의를 위한 통일국가의 성장은 처음부터 불필요해 폴리스라는 소규모 고립사회가 수백 개 형성된 것에 불과했다.
고대 그리스에는 파라오와 같은 강력한 왕이나 통일국가를 성립시킬 지리적 조건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집트를 모델로 한 강력한 독재국가를 이상국가로 상상했다. 그들이 수백 개의 폴리스를 통일해 이집트와 같이 강력한 국가를 수립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이 말한 정치는 어디까지나 아테네를 대상으로 한 정치였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 사회의 구조는 이집트 사회의 구조와 이미 유사했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들을 비롯한 그리스인은 피라미드를 짓거나 미라를 만드는 것은 미신으로 보고 물리쳤고,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집트 자체를 야만으로 보았지만, 이집트의 신이자 왕인 지배자와 그 지배자에 대한 이집트인의 생각은 자신들이 주장한 철인왕과 엘리트정의 모델로 받아들였다.

플라톤이 국가에 그려놓은 것과 같은 국가는 당대에는 이집트밖에 없었다.
에서는 플라톤이 철인정을 전제로 하되 현실적으로 가능한 법치국가의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그 모델은 우리나라 학자들이 흔히 주장해온 바와 달리 아테네가 아니라 스파르타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집트를 모델로 한 이상적인 정치를 철인독재로 구상했고, ‘에서는 그것에 스파르타적인 요소를 혼합했다고 본다.
그리고 아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플라톤의 학설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학설을 일부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테네 시민정을 부정하고 철인정 내지 엘리트정을 이상적인 정체로 봤다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다를 게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엘리트정은 최고로 탁월한 사람의 통치(aristokratia)’를 옮긴 말이다. aristokratia최고로 탁월한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hoi aristoi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지도자는 귀족이라고 부르기보다 엘리트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엘리트정의 폴리스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750~기원전 700년 무렵이었다.
참고로 올림픽 경기는 기원전 776년에 시작됐고, 호메로스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기원전 750년경에 성립됐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종교적인 영웅찬양의 노래이며 약탈행위와 해적행위를 찬양하는 엘리트 제국주의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올림픽 경기도 엘리트들의 놀이였고, 그리스 신화도 기본적으로는 제우스로 상징되는 군주와 그 부하인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체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헬레네스라고 부르면서 야만인인 비그리스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했다.

아테네와 이오니아에서는 시민정이 발달한 반면에 도리아인의 후예가 건설한 스파르타에서는 부자정이 발달했고, 도리스에서는 엘리트정이 발달했다.
부자정과 엘리트정이라는 말은 그동안 흔히 사용되던 과두정과 귀족정 대신에 내가 나름대로 새롭게 만들어 사용하는 말이다.
시민정이라고 하면 현대의 민주주의를 연상케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시민정은 전체 인구의 10% 정도만 정치에 참여하는 체제였다.
과두정이라는 말은 몇 개의 머리, 즉 몇 사람의 우두머리가 함께 지배했다는 뜻을 갖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의 과두정은 실제로는 부자들이 지배하는 체제였다.
귀족정이라고 하면 중세나 근대에 존재했던 세습귀족 가문의 지배를 떠올리게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귀족정은 사실은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체제였다.

도시국가의 형성에는 지리적 환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고대 그리스의 기후를 가리켜 흔히 지중해성 기후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 이후에 농업기술의 혁신, 인구의 급격한 증가, 경지의 상대적 감소로 인해 농업식민지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는 소아시아에서 화폐가 주조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점차 그리스의 각지에 보급됐다. 그 결과로 토지사유화의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고 그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가 된 사람들, 즉 엘리트들이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미케네 시대의 군주정이 무너지고 군주권이 쇠퇴했다.

폴리스는 흔히 도시국가나 국가로 번역되지만,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영토, 주민, 주권(통치구조 내지 정체)으로 이루어지는데, 작은 도시나 지역을 근거로 한 폴리스의 경우에 영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주민과 정체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폴리스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그것은 혈통주의의 원칙에 따라 구분된 시민(자유민)과 비시민(노예와 외국인) 사이의 차별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어느 폴리스나 시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가장 강력한 폴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그 둘은 각각 시민정과 부자정이라는 점에서 서로 달랐다.

스파르타의 부자정

그리스의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폴리스와 그 정체는 스파르타와 부자정이었다. 초기 스파르타인의 정착촌 가운데 두 곳의 세습 왕이 지배하는 부자정이 스파르타에 수립됐다.
자유민인 성인 남성으로 구성되는 민회는 원로원이 제출한 정책안을 부분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민회의 반응이 부정적인 경우에는 원로원이 정책안을 철회할 권리를 갖고 있었기에 민회는 제출된 정책안을 거의 그대로 통과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왕이 전쟁에 나가면 5명의 장관이 따라가서 왕을 감시했다.
스파르타에서는 엘리트, 시민, 천민(소위 이웃포로와 노예)이 철저히 구분됐다. 토지는 엘리트와 시민에게만 분배됐지만, 농사는 그들에게는 금지되고 천민에게만 허용됐다.
시민이 비밀경찰을 두고 1년에 1회씩 노예에 대한 전쟁을 벌여 반항하는 노예 청년을 합법적으로 죽였다.
시민에게는 노예를 해방시킬 권한이 없었다.
엘리트와 시민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
소년이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울면 비겁하다는 이유로 그 소년의 동성애 상대가 처벌받기도 했다.
아이를 셋 낳으면 병역이 면제됐고, 넷 이상 낳으면 모든 의무에서 면제됐다.
스파르타와 관련된 신화는 훗날 루소와 니체,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설명된 스파르타가 바로 플라톤과 투키디데스에 의해 이상화되고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에서 찬양한 스파르타이다.
스파르타를 모범국가로 찬양한 플라톤의 사상은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함께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실제 모습은 그렇게 그려진 모습과 달랐다. 스파르타의 전성기를 살았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인은 뇌물 앞에서 완전히 무력했고, 국가를 팔아먹은 스파르타의 왕도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 시민정의 역사

아테네 민주주의의 진정한 상징은 그 아래에 있는 아고라라는 광장이자 시장인 곳과 그곳을 둘러싼 여러 공공건물들이다.
기원전 508년에 솔론계 평민파였던 클레이스테네스가 집권해 시민정의 기초를 놓았다. 1992년에 그리스에서 민주주의탄생 2500주년을 기념한 것은 바로 그 기원전 508년을 민주주의의 기점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민주정은 엘리트 세력의 파벌정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먼저 엘리트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그동안 유지돼온 혈연 중심의 부족별 구획을 버리고 그 대신 아테네를 도시부, 연안부, 내륙부의 3개 부로 나누고 그 각각을 다시 10개 구로 나누어 30개 구획을 설정한 뒤 3개의 부에서 각각 하나씩 3개의 구를 연결해 모두 10개의 구를 만들었다.
이어 그는 명문 엘리트의 정치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 도편(陶片)추방법을 만들어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를 구축했다.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협력에 힘입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두 차례(기원전 490년의 마라톤 전투와 기원전 480~479년의 살라미스 해전)나 승리했다.

이어 등장한 페리클레스(기원전 500?~429)‘15년 계획의 시대’(기원전 443~429)에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의 참된 중심으로 성장했고, 시민정도 완성했다.
유급 배심원 제도를 도입해 빈민도 재판에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빈민에게 수당을 주어 극장에 가서 공연을 볼 수 있게 하는 조치도 취했다.
페리클레스가 통치하던 시기에 세계문학의 효시가 되는 그리스 희곡이 씌어지고 역사와 철학이 꽃피었다.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소크라테스가 활동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 시작되어 404년까지 이어졌는데, 이 전쟁은 아테네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이 끝난 지 4년 뒤에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았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스파르타를 좋아했고 그의 제자 중에 스파르타 편이라고 볼 만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플라톤이 23세가 될 때까지 28년간 이어졌다.
그가 28세가 된 기원전 399년에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했다. 20대를 그렇게 보낸 플라톤이 시민정에 대해 적대감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지 4년 뒤에 코린트 전쟁이 터졌고,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다시 스파르타에 패배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36~323년 재위)이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 것을 계기로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됐고, 이로써 그리스의 시민정과 고전문명은 끝났다.

고대 그리스 시민정의 구조

아테네의 시민정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원리, 또는 헌법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형성된 토착적인 것이었고, 참여와 책임을 그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가능한 한 많은 시민에게 정치참여의 기회를 주고(아마추어리즘), 정치가와 공무원에 대해 시민이 철저히 책임을 묻는 시스템(탄핵제도)을 갖춘 것이었다.
아테네의 시민정은 민회와 시민법원이 다수결로 국장을 결정하고 공무원의 권력은 추첨과 임기 1년제의 순환에 의해 가능한 한 세분화되어 특정인에게 권력이 장기적으로 집중되는 것을 철저히 막는 것이었다.

폴리스란 도시이상의 것, 곧 독립된 주권국가이자 자유인의 자율적 자치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즉 소수의 부자가 다스리느냐, 아니면 다수의 빈민이 다스리느냐는 문제가 중요했다.
아테네인은 다수의 빈민이 다스리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테네 시민정의 조직이 민회, 평의회, 시민법원, 책임지는 공무원제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중우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중우정이라는 말 자체, 어리석은 무리의 정치라는 말 자체에 이미 편견이 숨어있으므로 객관적인 용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말인데, 그들은 본래 시민정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계층인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엘리트이기는커녕 재류외인이었으나 시민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평생 비엘리트를 경멸하고 엘리트처럼 노동을 하지 않고 살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디오게네스만은 노예였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시민정 자체를 부정했다. 따라서 그가 시민정에 의해 재판을 받은 것은 어쩌면 사필귀정 같은 것이었다.
스승을 죽인 시민정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보다 더욱더 철저히 증오하면서 철인정치라는 이상국가를 몽상했다. 플라톤보다는 정치적으로 중용의 입장을 취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정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는 호의를 품기도 했으나 아테네의 현실 시민정에 대해서는 역시 비판적이었다.
시민정에 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그들에 의해 씌어진 자료는 전해내려온 것이고 시민정에 대해 호의적인 내용의 자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아테네 시민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로마시대, 르네상스시대, 계몽시대를 거쳐 19세기까지 이어지면서 유럽의 사상에 깊은 뿌리를 내렸고, 지금도 그러한 평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시민정의 한계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기 4년 전인 기원전 403년에 부활한 시민정은 그 뒤로 80년간 안정된 길을 걸었다. 아테네는 국제적으로는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국내적으로는 과거보다 더욱 충실한 시민정을 이루었고 그 경제도 부흥됐다.
이때부터는 참정권이 2천 드라쿠마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는 시민 9천 명에게만 인정됐고, 정치는 부자정으로 변했다.

페리클레스

고대 그리스에서 공직자를 선출하는 경우란 매우 드물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는 전문적인 능력을 보지 않고 훌륭한 덕성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특히 노예제를 기반으로 했고, 같은 시민이라도 여성은 제외됐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3장 폴리스의 사상가들

고대 그리스의 반민주주의 사상가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모두 반민주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플라톤을 비롯해 반민주주의적인 철학을 주장한 자들이 우리에게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더 유명하다.
여기서는 그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대해 살펴보자.
기원전 500년경에 활동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한다는 역사주의적인 주장과 변증법으로 유명한 철학자로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이고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등 여러 반민주주의자들의 스승이 됐다.
그는 남을 철저히 멸시하고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군중은 금수처럼 배를 채운다. 그들은 음유시인과 대중적인 미신을 그들의 길잡이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이 나쁘고 오직 소수만이 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도 역시 일인의 지배에 복종해야 함을 요구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선과 악은 동일하다는 가치상대주의에 서면서도 전쟁은 곧 정의라는 입장에서 전쟁에서 죽은 자는 신과 인간에 의해 찬미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몰락일수록 그 운명은 더욱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위대한 인간이라면 그는 만 명보다도 더 가치 있다.”

우리에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로 더 유명한 투키디데스는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그가 반민주주의자로서 조국인 아테네에 적대적이었으며. 최근에는 미국 네오콘의 원조로 숭배되고 있다.

소피스트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뒷받침힌 사상가들은 우리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사상가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소피스트하면 흔히 궤변론자를 연상하며 멸시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란 단순히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궤변론자, 즉 소크라테스 같은 참된 철학자가 아닌 경박한 박식가거만한 허풍선이를 뜻하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이다.
당시의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나 소피스트나 마찬가지였다.
소크라테스는 군인연금과 상속재산 덕에 돈 걱정 없이 살았고, 플라톤은 엘리트 출신이었다. 반면에 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외국인으로서 당시의 아테네에서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돈을 벌어야 했다.
소피스트들은 엘리트에 대항하는 신흥 중산계급에게 웅변술과 논리학을 가르쳤다. 소피스트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엘리트들의 자녀들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엘리트의 반감을 샀다.
엘리트계급은 영웅적 기사를 숭상하고 이상적인 올림픽 경기자를 찬양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시민적 탁월성이 새로운 덕목으로 떠올랐고 그것은 지식, 논리적 사고, 정신과 말의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가치관을 갖게 된 아테네 시민들을 가르치는 시민의 철학자였다. 반면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엘리트의 철학자였다. 소피스트들은 세계시민주의자, 문화상대주의자, 경험주의자였다. 노모스, 즉 실정법에 거스르는 반체제적인 주장이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보았고, 국가와 법도 그런 이성의 표현이므로 모든 개인이 국가와 법에 종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노예제도 이성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 보았다.
그들과 달리 소피스트들은 노예제를 반대하고 국수주의를 비판했다. 소피스트들의 이런 태도는 선천적 노예론을 주장하고 시민탁월한 인간을 구별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엘리트교육론을 주장한 것과 달리 소피스트들은 모든 인간에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 아래 일반교육론을 주장했다.
소피스트들의 생각에 입각하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은 모든 사람이 발언권을 동등하게 허용받고 모든 의견이 대등하게 존중받는 데 있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지도자는 도덕적 우월성을 요구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조정하고 정리하여 합의를 형성하는 능력을 요구받는 존재다. 소피스트의 변론술은 바로 그런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시민정에 대해 철저히 반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비해서는 상당히 중립적이긴 했지만 역시 시민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당시의 학문은 우리의 실학자와 비슷한 소피스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평생 그들과 싸웠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프로타고라스가 죽은 뒤에 그의 책을 불태우는 데 앞장섰다. 그가 만일 그렇게 극단적인 증오를 표현하지 않았다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을 것이다
흔히 원자론자로 불리는 데모크리토스도 위와 같은 생각을 소피스트들과 공유했다. 그런데 플라톤은 그가 쓴 책의 어디에서도 데모크리토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데모크리토스가 플라톤이 반대하는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의 책을 모두 불태우고 싶어 했다.

소크라테스

그는 사회에 나와 처음에는 아버지를 이어 조각가로 일했으나 얼마 안 가 아버지가 죽으면서 유산을 남기자 조각가의 일을 그만두고 평생 장돌뱅이 또는 철학자로서 무위도식하게 된 것 같다. 이는 그가 조각을 비롯한 예술을 경멸한 탓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지의 자각에 대한 강조, 그리고 무지의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문답식 대화에 의한 토론, 그런 토론의 방법에 의해 밝혀졌다고 하는 탁월성은 지식이지만 그것은 결코 가르쳐질 수 없다는 명제 등이다. 이것이 그의 철학이다. 내가 그의 철학을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는 것에 대해 철학자들이 분노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의 철학은 이런 정도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절대적인 정의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 지식은 소수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탁월성이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탁월성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지성과도 관계없이 신의 은혜로 얻은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게주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갖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제한적 천부탁월성설이라고 할 만하다. ‘제한이 없는 천부탁월성설이라면 인간이면 누구나 탁월성을 갖는다는 말이 되겠지만, 소크라테스는 특별한 사람인 철학자만이 신으로부터 탁월성을 얻는다고 보았다.
소피스트들은 스스로 지식과 탁월성의 교사를 자처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지식과 탁월성을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그들에 대해 사기꾼이라 욕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런 비난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그 뒤로 오랜 세월에 걸쳐 두고두고 비난을 받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지식과 탁월성은 가르쳐질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그들의 반민주주의 때문이었다. 둘째는 절대적 확실성을 부정하는 그들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욕한 더욱 기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고 노예제도를 부정한 데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빈민을 멸시하고 노예제도를 긍정했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지식인 중에는 탁월성이 낮거나 아예 없는 사람도 많다.
지식이 없다고 해서 탁월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지식이 곧 탁월성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적 독재주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대조되는 전체주의 독재국인 스파르타를 이상국가로 보고 동경했다.
소크라테스는 군주정을 독재정과 구별했다. 군주정은 사람들이 이것을 승복하고 국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지만 독재정은 사람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법에 의하지 않으며 위정자의 멋대로 다스리는 것이라고 그는 구별했다.
사실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도 벌을 받아야만 비로소 독재자로 불리고, 그전에는 성공한 정치가로 여겨지는 일이 흔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사회를 시민의 자치조직이 아니라 목자나 왕을 필요로 하는 무리로 보았다. 반면에 아테네인들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성을 갖고 있으며, 폴리스를 이루어 자치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시민이라고 믿었다.
외국여행을 금지하는 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이상적인 정책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가 크레타나 스파르타에 가지 않은 것은 그곳 사람들이 철학자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 것은 사실 폴리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을 두고 한 말이었고, 그러한 정치참여는 그리스 시민들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영혼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도시의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부정한 것이었다.

플라톤

플라톤이 태어났을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다. 이 전쟁은 30년 가까이 계속돼 플라톤이 23세가 된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의 패배로 끝났다. 그때 패전국인 아테네에 승전국인 스파르타의 괴뢰정권이 수립됐다. 플라톤의 외가 친척들도 포함된 30인의 엘리트정이 그것이었고 이 엘리트정은 1년 만인 403년에 시민정에 의해 무너졌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기 8년 전인 기원전 407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됐다. 20세 무렵에 이미 60세가 넘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됐으며, 28세이던 기원전 399년에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했다.
플라톤은 스승의 재판을 지켜보았으나 그의 임종에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철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 아니 부당한 죽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말한다. 아니 성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박홍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정에 반대하고 적국인 스파르타에 동조했기 때문에 처형을 당했다고 본다.
외국에 나갔다가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35세 무렵인 기원전 394년경에 다시 전쟁에 참전하고, 40세경에는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을 방문했다.
또 시칠리아의 동해안에 있는 시라쿠사이를 여행하며 독재자 디오니시오스 1세와 교분을 맺은 뒤 42세 무렵인 기원전 385년경에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일 년 정도 뒤인 기원전 386년경에 학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비공식적인 모임인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은 그 근처에 사당을 둔 지방 유지의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철학자가 지배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폴리스나 정치를 위해서라기보다도 철학과 철학자의 안전을 위해주장된 것이었다.
진리에 따르는 소수와 철학자를 위해 그가 만든 것이 동굴의 비유였고, 그 진리에 따르지 않는 다수를 겨냥해 그가 만든 것이 내세에서 보상이나 처벌을 받는다는 지옥의 신화였다.
플라톤은 설득과 토론은 동굴 안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의견(doxa)의 차원에서만 유효하다고 보고, 이것을 참된 지식(episteme)에 대치시켰다.
국가에서 좋은 국가는 영원한 진리에 의해 질서가 잡히고 통치됨으로써만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그런 영원한 진리에 따른 철인의 지배는 철인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기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성만이 이데아를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므로 그런 능력에 따라 사람들을 동급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플라톤은 비민주주의적인 닫힌 사회를 구상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4장 디오게네스

그리스 철학자열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기원후 3세기경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그리스 철학자열전이다.
디오게네스는 평생 주류를 거스르는 생각과 행동만 했다. 그는 당시의 계급제와 노예제에 반대했고, 그리스 중심주의에 반대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최초의 비주류였고, 최초의 반체제 인사였다.
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반화폐주의, 반물질주의, 반경제주의, 반자본주의, 반성장주의에 있다. 요컨대 돈, , 돈 하는 것에 대해 그가 반대했던 것이다.

통화위조 사건과 반경제주의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날 죽었다고 하니 기원전 323년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나이 56세 전후에 발생한 통화위조 사간은 디오게네스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었고 금전에 대한 사랑은 모든 화의 근원임을 일깨워주었다.
디오게네스는 통화위조 사건으로 추방당하게 되고 그런 일이 있었기에 나는 철학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디오게네스에게 시노페인들이 당신에게 추방을 선고한 것이로군이라고 말하자 디오게네스는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고국에 머물도록 선고했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물음에 디오게네스는 세계시민이라고도 말했다.

노예

노예와 관련된 디오게네스의 일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만년에 노예로 살았다는 점이다.
디오게네스는 배를 타고 아이기나 섬으로 가던 중에 해적들에게 붙잡혀 크레타 섬으로 끌려가서 노예 매물로 나오게 됐다. 그때 고시(告示)하는 일을 맡은 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사람을 지배하는 일라고 대답했다.
디오게네스가 노예해방에 적극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그의 친구들이 노예인 그를 자유로운 몸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려고 하자 사자도 이를 기르고 있는 자들의 노예가 아니고 오히려 기르고 있는 자들 쪽이야말로 사자의 노예라면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기록은 전해진 것이 없다.

제논

디오게네스에게는 몇 명의 제자가 있었다.
히파르키아라는 여성도 있었다. 히파르키아는 디오게네스의 제자답게 구혼자의 재산, 출신성분, 용모에 무관심했고, 역시 디오게네스의 제자인 크라테스와 결혼했다.

크라테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조국을 재건하길 원하느냐고 묻자 다른 알렉산드로스가 그걸 파괴할 것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크라테스는 디오게네스의 충고에 따라 양목 농장을 포기하고 갖고 있던 재산과 돈을 모두 바다 속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거지의 상태가 되기를 거부하고 최소한의 물질소유를 긍정한 점에서는 디오게네스와 달랐다.

크라테스의 제자 중에 제논(기원전 335~263)이 있었다. 제논은 디오게네스가 죽기 10여 년 전에 키프로스 섬에서 태어나 20대에 아테네에 가서 크라테스의 제자가 됐다.
그가 스토아 포이킬레’, 즉 채색된 주랑(柱廊)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스토아학파로 불리게 됐다.
그는 아름다움(탁월성)과 절제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탁월성이 없는 한 부모나 가족도 원수라 했고, 부녀는 공유이고 남녀가 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또 도시 안에 신전, 법정, 체육장을 지어서는 안 되고, 화폐를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명백히 디오게네스를 잇는 사람이었다.
스토아학파는 대체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영혼불멸에 관한 논증을 거부했다.

제논은 당시 그리스의 상식인 유물론으로 플라톤 등의 형이상학과 맞서 싸웠다.
개인의 삶에서 선은 건강, 행복, 재산과 같은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개인적 의지의 탁월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속적 욕망에서 해방되어야만 자유로워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스토아학파라고 해서 다 같은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너스봄 등은 디오게네스와 같이 세계시민주의자로 보지만, (박홍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본성은 이성적이고 국가적이다. 내가 속하는 도시와 조국은 황제 안토니우스로서 로마이지만 인간으로서 우주다”.
이 말은 로마시대 가톨릭 학문의 일반적인 사고방식, 즉 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회 안에 있는 존재이지 교회 위에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우주는 정신의 고향이었고 지구는 그 우주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로마인으로서, 남성으로서최후까지 지켜야 할 조국은 로마였다. 이러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입장은 디오게네스가 말한 세계시민주의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예수는 디오게네스의 정신적 제자임이 분명하다.
우선 두 사람은 집이 없는 홈리스였다는 점이 같다. <마태복음> 820절과 <누가복음> 958절을 보면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다.
디오게네스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집과 가정을 부정했다. <마태복음> 1035~36절을 보면 나는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다투게 하려고 왔다. 나보다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다.”
그러나 예수와 디오게네스 사이의 사상적 연관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1021~31절에 나온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쉽다.” “나의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모든 것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아울러 핍박을 받겠지만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앞선 사람이 뒤떨어지고 뒤진 사람이 앞설 것이다.”

그밖에도 성경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 중에 디오게네스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와 유사한 것이 많다.
가령 디오게네스가 동물에 비유해 무소유의 사상을 피력하곤 했는데 예수도 공중의 새(,마태복음> 626), 까마귀, 백합화, 양떼(<누가복음> 1224) 등에 비유해 그런 사상을 피력했다.

5장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 ≪그리스 철학자열전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리는 가늘고 눈은 작으며 화려한 옷을 걸치고 반지를 끼었으며 머리는 짧게 깍았다고 하니 용모부터 디오게네스와 달랐다.
또한 플라톤은 마치 망아지가 자기를 낳은 어미를차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인 자기를 차버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에 칼키디케 반도의 스타케이로스에서 마케도니아 왕 아뮌타스 2세의 시의(侍醫) 니코마코스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는 소피스트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7세쯤에는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였는데, 그때는 플라톤이 두 번째 시라쿠사 여행을 떠난 직후였다.
몇 년 뒤에 플라톤이 아카데미아로 돌아온 뒤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강의를 듣게 됐고, 그곳에서 수사학을 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에서 수학, 윤리학, 정치학 등을 공부하는 학생 겸 교수로 20년을 지냈다.
기원전 346년에 플라톤이 죽자 그는 아카데미아를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부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했다.
현상이 이데아를 모방하고 분유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시적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데아와 현상의 관계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내세웠지만, 형상의 능동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플라톤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기원전 34836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소아시아 트로아스 지역의 해안 도시인 아소스로 가서 그곳 왕의 궁정에서 강의와 저술을 했다.
3년 뒤인 345년에 그곳 왕이 페르시아 군에 의해 처형당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미텔레네에 가서 2년을 보낸 다음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당시 13세였던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쳤다.
기원전 336년에는 아테네로 가서 뤼케이온을 세우고 그곳에서 12년간 문학, 과학, 철학 등을 가르쳤다. 당시의 아테네에서 그는 시민이 아닌 재류외인이었으므로 원래는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지만,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이미 알렉산드로스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였으므로 그가 재산을 소유하고 뤼케이온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이 가능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자 벌어진 반()마케도니아 운동으로 인해 61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고발됐다.
그의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고 독배를 받아 마셨던 것과 달리 그는 아테네를 도망쳐 예우보이아 섬의 칼키스에 가서 살다가 이듬해 62세로 그곳에서 죽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에 의해 발생한 것이며 그 목적은 윤리의 실현에 있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기원을 신화나 위대한 정치가의 역량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달리 비종교적인 기원론을 펼친 셈이다.
이상국가를 구상한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은 국가 속에서만 발전되고 따라서 국가를 떠난 개인은 윤리적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국가의 과제는 참된 인격의 도야와 개발에 있었다.
시민정을 비판한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물론 노예를 제외한)들이 집단적으로는 옳은 결정을 할 수도 있지만 개인별로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고위관직은 엘리트층에 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를 유지하는 직종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시민은 인격의 완성에 방해가 되는 농사나 수공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도 두 사람이 똑같았다.
교육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국가주의 교육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책을 썼다. 지금 전해지는 그의 저작은 50편 정도인데, 이는 그가 실제로 쓴 저작 전부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며 대부분 강의 초안이다.
• ≪그리스 철학자열전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실천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으로 나누어지고 전자에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후자에는 자연학과 논리학이 포함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와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그리스에서는 토지분배를 둘러싸고 한편으로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시민계급,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거나 적게만 갖고 있는 빈곤한 시민계급과 비시민계급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부유한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시민계급을 정치적으로 배제하고 시민계급끼리의 타협을 도모했다.
당시 아테네의 인구는 20만 명 정도였고 그 가운데 시민계급은 2만 명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개념의 핵심이 되는 중간또는 중용은 그런 소수의 시민계급에 국한한 타협책이었고, 그 내용은 사실은 이었다.
돈이 결정하는 가치가 정의라는 개념의 핵심이었다.
이런 식의 정의 개념은 당시의 시민계급 내부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개념으로는 유용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다수의 비시민계급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사회 전체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 수는 없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 왕인 필립포스 2세가 주도한 코린토스 동맹(기원전 338~337)에 참여하여 각자의 자유를 포기한 상황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비시민계급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이 양심적인 지식인의 태도였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리어 그러한 연대를 부정하고 그리스의 자유 포기를 이론적으로 합리화했다.
즉 그는 소수 토지소유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보수적 이론을 수립하고, 빈곤한 다수의 비시민계급은 물론이고 빈곤한 시민계급도 부유한 시민계급의 지배를 받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그리스인을 노예와 같이 취급해 그들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주의적 정복을 합리화했다.
이런 점에서 나(박홍규)는 알렉산드로스를 제국주의자로 보고, 그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제국주의 철학자이자 반민주주의 철학자로 본다.

6장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모든 국가(폴리스)는 분명 일종의 공동체라는 말로 시작된다.
여기서 국가로 번역된 폴리스(polis)도시도시국가로 번역하는 이들도 있다.
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은 크게 자유민과 비자유민으로 구분됐다. 비자유민에는 외래인, 이방인, 노예가 포함된다. 자유민은 엘리트와 비엘리트로 구분된다. 비엘리트는 참정권을 갖지 못하는 여성과 노동자(농민, 기술자, 상인).
비엘리트외 비자유민은 참정권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시민권을 갖는가 갖지 못하는가에서는 달랐다. 비엘리트는 시민권은 갖고 있었다.
다만 여성의 경우는 시민권의 제한을 받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원에 나설 경우 이익을 대변할 남자를 앞세워야 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폴리스는 비자유민을 제외하고 자유민만이 참가하는 공동체이고, 특히 엘리트가 지배하는 공동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 엘리트 중에서도 철학자가 지배하는 공동체임을 주의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공동체라는 말을 한 다음에 인간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모든 공동체는 어떤 선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되는데 공동체 중에서도 으뜸가며 다른 공동체를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야말로 분명 으뜸가는 선을 가장 훌륭하게 추구할 것이라면서 그런 것을 바로 국가 또는 국가공동체라고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도덕적 탁월성을 국가와 연결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 개념은 현대 민주주의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탁월성에 입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은 결국 국가란 최고의 도덕적 탁월성을 갖춘 공동체라는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 런 이론이라면 독재국가의 권력집단이 독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는 물론이고 그 밖에 모든 비도덕적인 권력집단이나 국가가 자신을 도덕적으로 탁월한 존재로 미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국가적 동물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알려진 그의 말은 사실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고나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이거나 인간 이상”, “친족도 없고 법률도 없고 가정도 없는 자”, “전쟁광이며 장기판에서 혼자 앞서 나간 말처럼 독불장군이라고 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없거나, 자급자족하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들짐승이거나 신일 것이다라는 뒤의 말과 연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적 동물이라는 말을 그 저작에서 8회 사용하는데 그중 6회에서 그 말을 국가에 연결시키고, 나머지 2회에서는 그 말을 국가공동체와 시민에 한 번씩 연결시킨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는 국가적 동물이라는 말이 8회 중 7회에서 국가와 연결되고 나머지 1회에서만 시민과 연결되는 셈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국가적 동물에서는 시민 이외의 노예뿐만 아니라 비시민도 제외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군서 동물보다 더 국가공동체를 추구한다고 보며, 그 근거를 인간은 언어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고 그것에 근거해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데서 찾는다.
그러나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은 모든 인간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은 당시의 인간 중에서 지극히 제한된 소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과 가족관

아리스토텔레스는 도구로서의 노예에서 노예는 일종의 살아있는 재물”, “노예는 주인의 노예일 뿐 아니라 전적으로 주인에게 속한다.” “본성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노예라는 등의 말을 한다.(정치학14)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람은 지배하고 얻던 사람은 지배받아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이고 유익하기 때문에” “노예제도는 자연에 배치되지 않는 정당한 정의라고 말한다.(정치학115)
그것은 2천 년 이상 읽혀온 고전의 내용이라기에는 참으로 유치찬란하다. 그럼에도 이런 그의 말을 정당하거나 미화하는 논저가 국내외에 수없이 많으니 더욱더 황당무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컷이 본성적으로 더 우월하고 암컷은 열등하다. 그래서 수컷이 지배하고 암컷은 지배받는다. 그리고 이런 원칙은 인간관계 전반에 적용되어야 한다.”(정치학15) 그런데 자유민의 경우는 아내에 대한 지배와 자식에 대한 지배가 다르다고 말한다.
즉 아내에 대한 지배는 정치가가 동료 시민을 지배하는 것과 같고, 자식에 대한 지배는 불평등한 지배는 왕이 피치자를 지배하는 것과 같다. 자식에 대해서는 불평등한 지배를 인정하는 데 비해 아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평등한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완전한 남녀평등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지배와 피지배의 필연적 관계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본 것이 분명하다.(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남자와 여자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의 남자와 여자라는 점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
플라톤이 주장한 아내와 자식 공유론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반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플라톤의 주장은 지배계급에 한정된 자식 공유론이었지만, 디오게네스는 모든 계층과 계급에 대해 아내와 자식의 공유론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산관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산획득 기술을 본성적으로 가사관리 기술의 일종으로 본다. (정치학18)
그는 재산획득 방법을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으로 나눈다. 가사관리가 전자이고 상업과 관련된 것이 후자인데, 그는 전자는 칭찬받아 마땅하지만후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상업을 통한 재산획득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남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리대금이 가장 나쁘다고 그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재산 공유론을 비판하고 땅은 사유하되 거기서 생산되는 작물은 공동으로 소비하기 위해 공동출자하는 방식의 공유제를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공유제는 아버지가 땅을 소유하되 가족이 함께 일해 그 결과물을 공동으로 소비하는 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산관은 대부분 성직자였던 중세의 철학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그들이 속한 교회의 재산은 토지였다.
고리대금에 반대한 그들의 입장은 반유대주의로 이어졌다. 베네치아의 상인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이 유동성 자금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관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관을 살펴볼 때에는 그가 노동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생산을 그가 말하는 실천(praxis)’이나 제작(poieesis)’과 구별한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에는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다고 하고, 실천과 제작을 이성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실천의 단적인 보기는 정치와 윤리이고, 제작의 단적인 보기는 수사와 시다.
따라서 생산은 제작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관에 대한 오해는 이러한 구별을 무시하고 생산과 제작을 혼동하는 데서 생겨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산으로서의 노동을 가장 비천한 직업으로 멸시했고, 수공업이나 직공기술자 등 노동자의 노동도 노예노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노예노동의 폐지를 위한 어떤 구상도 제시한 적이 없다.

7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정의의 분류와 문제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역시 그의 다른 논의처럼 대단히 복잡하다.
그가 말하는 정의의 본질은 결국은 돈인데, 그냥 그렇다고 간단하게 말하지 않고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간단하게 마라면 속셈이 너무 쉽게 드러나게 되니 그렇게 하기를 싫어하는 지식인의 원조여서였을까?

8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정체의 구분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기피하는 저명인사를 투표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를 탁월성에서 추중하는 자에게는 적용할 수 없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모두가 그러한 지배자에게 기꺼이 복종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은 종신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주정을 최고 정체로 지지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 점도 치자와 피치자의 평등한 지배라고 한 전제와 모순된다. 이처럼 군주정이나 엘리트정의 경우 그들을 탁월성을 이유로 종신의 지배자로 정당화되고 누구나 복종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독재의 합리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9장 다시 무엇이 문제인가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은 자유시장이나 민족주의에 맡겨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시민주의의 관점에 입각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10장 맺음말

자유와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인권의 존중에 우리의 정의가 있다고 믿는다.
자유는 기본권 차원의 헌법적 자유는 물론이고 평등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고, 더 나아가 물질적 욕망에서 해방된 정신적 자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경제적, 제도적, 사회적, 문화적 굴레, 즉 모든 부당한 억압적 굴레에서 해방된 자유를 말한 것이다.

인간이 이런 자유를 누리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국가적 존재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디오게네스가 말한 더욱 자연스러운 존재로 변해야 한다. 이는 단연히 기존 질서에 대한 반역을 뜻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다.
2500년 전에 디오게네스가 살았던 현실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리 다르지 않다. 어쩌면 2500년 뒤에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그렇게 난망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옳은 길이라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박홍규,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자유와 예속의 원류, 필맥,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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