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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고전이 된 삶≫-≪사기≫부터 ≪모란정≫까지 동양고전 걸작과 함께 읽는 중국 문장가 열전-이나미 리쓰꼬2021-06-21 19:55
Writer

고전이 된 삶-사기부터 모란정까지 동양고전 걸작과 함께 읽는 중국 문장가 열전-이나미 리쓰꼬

편역자 서문(김태완)

문장가와 문학가

문장가라 하면 문학과 다른 울림이 있다. 문학이란 서사시와 서정시, 희곡, 소설, 수필 등 문자를 매개로 하여 여러 장르의 글을 다루면서 자기 세계를 펼치는 행위일 테고, 이런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을 문학가라 하겠다.
• 그러나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운문 장르와 산문 장르의 글을 합하여 시문(詩文)이라 하거나 문장이라 하였고 또 좁게는 운문을 제외한 산문 장르의 글을 따로 일컬어 문장이라고도 하였다.
 일반적으로는 글자와 글귀를 엮어서 사상을 담은 글을 한 편으로 완결되게 쓰는 일을 문장을 짓는다고 하고, 이렇게 사상을 담은 완결된 글을 문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문장이란 말은 좁은 뜻으로서 글로 쓰인, 독립된 저술과는 구별된 글들을 일컫는다.

문학이란 말이 보편화하면서 한편으로는 문장가가 문학가보다 격이 낮은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는 아마도 주로 구미(歐美)의 소설 장르에 속하는 글들을 모아서 엮은, 다분히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과 열등의식에서 나왔을 법한 세계문학 전집류의 책을 통해 문학의 이미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고전 텍스트의 창작자들은 문학가라고 하기보다는 문장가라고 해야 더 어울린다. 그래서 사마천이니 소동파이니 이태백이니 하는 사람들도 중국 문학가라고 하기보다는 중국 문장가라고 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 오늘날 문학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갖가지 장르의 글들은 동양에도 있고 서양에도 있으며,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다.
•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러 문장가의 글 또한 역사에서부터 시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여러 장르의 글을 포괄하고 있다.

열전

머리말

이 책은 전한(前漢, B.C. 206~A.D. 8)부터 청대(靑代, 1644~1911)까지 2천 년이 넘는 시간대에서 특기할 만한 중국의 문장가열 사람을 가려 뽑아서 그들의 삶의 자취를 추적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시문(詩文)을 뜻하는 좁은 뜻의 문학자는 물론이고 역사가, 희곡작가, 소설가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이들 문장가 열 사람을 우선 삶의 방식과 창작 태도의 차이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누고 각자의 생애를 더듬는 방식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부류인 위기를 살아간 문인으로는 위기 상황에 처해서도 글을 삶의 의지로 삼고 짓눌러 으스러뜨리려는 힘에 저항해나갔던 네 사람을 들었다.
궁형이라는 굴욕을 참아내고 분노를 폭발시켜 총체적인 역사서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 조롱 섞인 언사와 태도로 삼국지의 영웅 조조를 계속 도발했던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었던 공융(孔融).
사마씨(司馬氏) 일족이 조조의 자손이 세운 위 왕조 찬탈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친구 산도(山濤)에게 격렬한 분노의 편지(산거원山巨源에게 보내는 절교 편지)를 써 보내고, 사마씨 정권에 얽혀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자멸한 혜강(嵇康)이 그들이다. 혜강은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자 위 왕조 말기 최고 시인으로서 도가의 노장사상가이기도 하다.
이 첫째 부류의 마지막은 남북조 시대 말기, 남조의 한족 왕조인 양()이 멸망하는 바람에 북방 이민족 왕조에서 벼슬을 살아야 했던 안지추(顔支推). 안지추는 남과 북을 합하여 네 왕조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머물다가 자손을 위해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써서 남겼다.

둘째 부류인 쾌락을 추구한 문인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즐겼고, 글 쓰는 일을 쾌락의 일종으로 여긴 세 사람을 들었다.
관료사회의 당파 싸움에 휘둘려 부침을 거듭했으면서도 엄청난 시문을 써낸 북송의 대시인 소동파(蘇東坡), 그는 서예ㆍ그림ㆍ건축에서부터 음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과 취미에 통달하고 삶을 즐긴 달인이었다.
두 번째로 든 양유정(楊維楨)은 시의 대중화가 진행된 원() , 강남 각지 시사(詩社, 시 동아리)의 대지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대중 시단의 지도자로 활약하는 한편 철저하게 쾌락주의적인 생활태도를 지녔기 때문에 문요(文妖, 요사한 문인)’로 불렸다.
이 부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은 청대 중기의 문인 화가 정판교(鄭板橋)이다. 그는 시문도 지었지만 당시 강남의 대도회지 양주(揚州)에서 활약한 여덟 화가,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그림과 서예 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였다. 어떤 면에서 그는 문장가의 틀을 빠져나온, 더 넓은 뜻의 창작자이다. 정판교는 직업 화가였지만 빈궁의 밑바닥에 있을 때조차도 삶을 즐기는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을 지닌 삶이었다.

위의 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역사ㆍ서간ㆍ가훈ㆍ시문 등 모두 중국의 전통적인 장르를 표현양식으로 취한 인물들이다.
이와 반대로 전통 중국에서는 희곡이나 소설 같은 허구를 표현하는 장르는 속문학(俗文學)으로 내내 경시되어왔다.

셋째 부류인 이야기 세계의 창조자에서는 희곡과 소설 장르에서 걸작을 써낸 세 사람을 소개하였다. 덧붙이자면,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기구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중당(中唐)의 시인이자 자신의 연애 체험을 근거로 단편소설 <앵앵전(鶯鶯傳)>을 쓴 작가로 알려진 원진(元稹)은 중국 최초의 연애소설 작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인물이 살아오는 자취는 소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곡절이 많다.
이어지는 인물은 걸작 장편희곡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를 지은, 명 말의 대희곡작가 탕현조(湯顯組)이다. 신념이 확고한 반골 탕현조는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한 명 말의 에토스에 젖은 사람이었다.
셋째 부류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오경재(吳敬梓)는 청대 중기, 과거(科擧)에 휘둘리는 지식인의 모습을 신랄하게 풍자한 백화(白話, 구어체) 장편소설 유림외사(儒林外史)를 지은 작가이다.
그 전의 백화 장편소설 작가들은 경력이 알려져 있지 않고, 본명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문학관에 멸시당해온 백화소설을 지은 작가라는 점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오경재는 삶의 열정을 쏟아 부어 유림외사를 지어서 종래의 견고한 문학적 가치관을 온몸으로 역전시키고자 한 인물이다.

열전

1장 사마천_ 절망의 심연에서 분노를 터뜨려 글을 쓴 역사가
역사가 집안에서 태어나다아버지 사마담의 꿈역사가 수업을 위한 여행사마담의 죽음이릉 때문에 일어난 재앙궁형의 굴욕분노를 저술로 터뜨리다│≪사기집필사마천이 묘사한 무제불행한 역사가들

2장 공융_ 조롱과 독설, 촌철살인에 능한 스타일리스트
조조의 문학 살롱열 살에 넘쳐난 재기당고의 금과 소년 공융황건적과 동탁의 대두북해의 장관으로서건안칠자의 한 사람으로서공융의 문장조조와 불화하다공융 처형반골 문인의 자기 주장

3장 혜강_ 불의한 권력을 거부하고 절대 자유를 추구한 노장사상가
사마씨의 위 왕조 찬탈 계획죽림칠현궁정재자 하안미장부 혜강의 풍모사마씨 정권과 칠현혜강, 거병을 단념하다산속을 거닐고 대장 일에 열중하다속물 혐오산도에게 보낸 절교장반유교적 발언으로 투옥되다옥중의 시와 <자녀에게 주는 훈계>사마씨, 위 왕조를 찬탈하다사마씨 정권에 몸을 바친 혜소

4장 안지추_ 시대의 가혹한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한 지식인
난세를 살아간 지식인의 증언9대조 안함의 좌우명양 무제후경의 난생사의 갈림길에 선 방탕한 귀족 청년강릉 정권 붕괴처자를 거느린 필사의 탈출학문을 직능으로 여기다북제 문화에 공감하다북제 멸망, 다시 장안으로│≪가훈으로 본 문장가 안지추자손에게 이어진 재능

5장 소동파_ 역경에 흔들리지 않고 생의 활력을 불태운 대문호
근세적 문인의 탄생소씨 집안 사람들소씨 형제, 과거에 도전하다아내와 아버지의 죽음정쟁에 지쳐서 지방 근무를 지원하다유형에도 꺾이지 않은 황주 생활의 즐거움밭일과 시 창작가장 사랑한 여인의 죽음해남도로 유배를 가다어찌 즐기지 않으랴

6장 양유정_ 사랑의 파토스를 대담하게 노래한 쾌락주의자
몽골족 우선 시대에 멸시받던 남인 출신맹렬히 공부한 끝에 과거에 합격하다시 창작과 지방관 직무관직을 사퇴하고 글을 팔아서 생계를 잇다문명과 방탕사랑의 파토스를 노래하다정치에 대한 관심과 홍건적의 난은둔, 그리고 변함없는 쾌락 추구출사를 거부하다쾌락 추구의 그늘에 숨어 있는 강단

7장 정판교_ 사대부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깨고 자립한 직업 문인 화가
양주팔괴의 한 명사랑으로 길러준 유모계모에 대한 고마움과 애도승려와 기녀의 도움을 받는 빈궁한 문인 화가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과거시험을 보다50세의 초임관, 명현령이 되다직업 화가로 자립하다의연하게 자립한 쾌락주의

8장 원진_ 감정에 몸을 내맡기고 에로스를 노래한 중국 최초의 소설가
가운이 기우는 가운데열다섯 살에 과거 합격생애 최대의 사랑에 빠지다<앵앵전>의 여주인공제거에 합격, 고급 관료의 길로좌천, 그리고 아내의 죽음백거이와 시를 주고받다빠른 전향은 천성장안에 돌아오다사랑하고, 살아가고, 삶을 다 태워버린 소설가 인생

9장 탕현조_ 유교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맞선 중국의 셰익스피어
명대 희곡의 발전중국의 셰익스피어│≪모란정의 세계유교 사회의 통념을 뒤엎은 여주인공의 사랑반골 기질과 과거 낙방권력자 장거정에 대한 분노이탁오의 영향남경 부임, 고문사파에 대한 공격상주문이 빌미가 되어 벽지로창작 삼매의 나날늙어서 더욱 반골 기질을 관철하다

10장 오경재_ 통렬한 풍자와 유머로 관료사회의 기만을 그려낸 이야기꾼
소설의 탄생│≪유림외사, 다큐멘터리 형식의 장편소설과거 수험생 범진 이야기인색한 엄 감생 이야기사회의 기만을 그려내는 붓명문 오씨의 후예탕진한 끝에 고향을 버리다시험을 거절하다빈궁함 속에 유림외사완성근대의 입구에서 문학관을 전환시키다

맺음말

별처럼 많은 중국 문장가 가운데 이 열 사람을 뽑으면서 유의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대부터 청대까지 두루 살피다가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시대를 살고,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인물을 고를 것.
둘째, 선택한 문장가가의 중요한 작품 형태, 표현양식이 역사ㆍ시문ㆍ희곡ㆍ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을 것 등이다.
이렇게 해서 고대에서 근세까지 문장가 열 사람의 모습을 열전 형식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중국 문학의 변천상을 구체적으로 더듬어보고자 했다.
마지막은 나 자신과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늘 마음에 걸렸지만 제대로 다루어보지 못했던 중요한 문장가에 대해 이 기회를 빌려 마음껏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작품

1장 사마천
사기<태사공자서>
<임소경에게 답하는 편지>
사기<평진후열전>
사기<백이열전>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다>

2장 공융
<예형을 천거하는 표>
<성효장을 논하는 편지>
<임종 때 읊은 시>

3장 혜강
<산거원에게 보내는 절교 편지>
<양생론>
<성무애락론>
<군에 입대하는 수재에게 드림>
<여장제에게 보내는 절교 편지>
<가슴에 맺힌 울분>
<자녀에게 주는 훈계>

4장 안지추
안씨가훈<지족편> <면학편> <섭무편> <치가편>
<내 인생을 돌아보는 부>

5장 소동파
동파지림가운데 소동파와 관련한 수필 한 편
<죽은 아내 왕씨 묘지명>
<신축 1119일 자유와 정주 서문 밖에서 이별하며 말 위에서 시 한 편을 읊어서 준다>
<처음 황주에 이르러서>
<전적벽부>
<후적벽부>
<염노교적벽회고>
<서강월>
<여량의 중둔전에게 답하다>
<제서림벽>

6장 양유정
<궁사>
<염상행>
<염거중>
<서호죽지사>
<소대죽지사>
<삼사정통변>
<속렴집>
<노객부요>
송렴의 <양염부를 오절로 보내며>

7장 정판교
<칠가>
<판교자서>
원매의 수원시화에서

8장 원진
<이종형 호령지에게 답하는 50> 서문
<앵앵전>
<염시>
<구구를 대신하여>
<잡다한 생각 다섯 수>에서 두 수
<이사육수>
<슬픈 마음을 보내는 세 수>의 나머지
<연창궁사>
구당서<원진전>
<낙천의 편지를 받고>
백거이의 <남교역에서 원구의 시를 읽고>

9장 탕현조
모란정환혼기가운데 제10척 경몽과 제36척 혼주
<보필의 신하와 감찰의 신하를 논하는 소>

10장 오경재
유림외사
정진방의 <문목선생전>

사마천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노라(悲士不遇賦)>


슬프다!
때를 잘못 만난 선비가
자기 그림자를 돌아보니 고독한 존재일 뿐이라 부끄럽도다!
늘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 것은
의지와 행동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재능은 높았으나 세상이 험하였고
죽음에 이르도록 늘 부지런하였다.
비록 몸은 있으나 명성을 드러내지 못했으며
재능은 있으나 펼치지 못했다.
곤궁과 통달은 그리도 쉽게 사람을 미혹하며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참으로 변별하기 어렵다.
시간은 유유히 기세 좋게 흘러가서
나는 장차 스러질 뿐 펼치지는 못하리라.
공정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는
내 그에게 동조하고
사사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위하는 자는
내 그를 위해 슬퍼한다.
하늘의 도리는 미묘하나
! 넓어서 헤아리기 어렵고,
사람의 이치는 뚜렷하나
사람들은 서로 다투며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
삶을 추구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재질이 비천한 사람들이고
부귀를 좋아하고 빈천을 가벼이 여김은
지혜가 어지러워진 것이다.
밝고 밝게 통달한 것은
가슴이 탁 트였기 때문이고
어둡고 깨닫지 못함은
마음에 해를 끼친다.
내 마음은
지혜로운 자가 이미 헤아리고,
내 말은
지혜로운 자가 이미 택하였으리라.
죽을 때까지 명성이 나지 않음을
옛사람은 오직 부끄러워했나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을
뉘라서 사리에 막혔다 할까!
역경과 순조로움은 돌고 돌아
사라졌다가도 나타난다.
이치는 의거할 바가 아니고
지혜는 믿지 못할 것이다.
행복을 얻으려고 먼저 나서지도 말고
재앙의 시초를 건드리지도 말라.
저절로 그러함에 맡겨서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리라!

* 풀이 : 는 당 때 편찬된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전한다. 그래서 사마천의 글이 아닐 수 있다고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사마천의 진작(眞作)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때를 만나지 못한 선비의 울분은 어느 시대나 보편적인 일이며 또한 사마천만큼 시대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한 사람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어서 소개한다.

소동파


<서강월(西江月)>


옥골(玉骨)¹이 어찌 장무(瘴霧)²를 근심하랴.
얼음 같은 자태에 선풍(仙風)³이 어려 있네.
해선(海仙)이 때때로 초록 털 작은 봉황 도괘(倒掛)를 보내
꽃떨기 가운데서 찾게 하였다.

흰 얼굴은 분을 발라 도리어 더럽히기를 싫어하고
화장을 씻어도 입술의 붉은 기운 바래지 않네.
고결한 뜻 새벽구름(曉雲)따라 공중()으로 퍼져서
배꽃과 더불어 꿈을 꾸려 하지 않네.

————————————
1) 옥골 : 매화의 자질을 가리킨다.
2) 장무 : 독한 안개.
3) 선풍 : 신선 같은 풍모.
4) 도괘 : 거꾸로 매달리기를 좋아하는 앵무새를 닮은 새.
5) 새벽구름 : 조운을 가리킨다.
6) 공중 : 죽음을 의미.

* 풀이 : 이 시는 사랑하는 아내 조운을 잃고 나서 그 슬픔을 나타낸 시다.


오경재


유림외사(儒林外史)

(전략)
이웃 사람은 나는 듯이 시장으로 갔으나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시장 동쪽에서 범진을 발견했다. 그는 닭을 품에 안고 팔 물건이라는 표시로 풀을 손에 든 채 느릿느릿 걸음을 떼며 사갈 사람이 없나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웃 사람이 소리쳤다.
범 상공, 어서 갑시다! 거인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들로 집이 그득하답니다.”
범진은 자기를 놀리는 줄로 알고 못 들은 척 고개를 푹 숙이고 앞만 보고 걸었다. 이웃 사람은 범진이 아랑곳하지 않자 쫓아가서 손에 든 닭을 빼앗으려 하였다.
닭은 왜 빼앗으려 하는 게요? 살 것도 아니면서.”
당신이 향시에 붙었소. 합격을 알리러 집에 사람들이 와 있다니까요.”
고씨, 오늘은 집에 쌀이라곤 한 톨도 없어서 이 닭이라도 팔아야 입에 풀칠이라도 한단 말이오. 왜 그런 말로 나를 못살게 구시오? 당신과 노닥거릴 생각 없으니 돌아가시오. 괜히 남이 닭을 파는 데 훼방이나 놓지 말고.”
그가 믿지 않자 이웃 사람은 닭을 휙 낚아채서 바닥에 동대이치고 그를 잡아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셨다! 새 거인 나리께서 돌아오셨다!”
보록인(報錄人, 과거시험 합격이나 승진을 알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범진을 발견하고 소리치고는 그를 둘러싸고 축하 인사를 건네려 하였다. 그가 몇 걸음 들어서며 보니 통지서가 집 안 가운데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귀객 범자 진자 어른께서 광동 지역 향시에서 7등으로 합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회시에도 꼭 합격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범진은 방문을 눈으로 보고 다시 또 소리 내어 읽고 하더니 손뼉을 치며 웃어대기 시작하였다.
! 붙었다. 내가 붙었어!”
이렇게 말하면서 뒤로 넘어지더니 이를 앙 다문 채 정신을 놓아버렸다.
마님은 놀라서 황급히 뜨거운 물을 먹였다. 범진은 기어서 일어나 또 박수를 치면서 큰소리로 웃어댔다.
! 붙었어! 내가 붙었어!”
웃으면서 다짜고짜 문밖으로 뛰쳐 나가버리니 보록인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범진은 대문을 나서서 몇 걸음 가지 않아 못에 풍덩 빠져서 발버둥을 치며 기어 올라왔다. 머리는 산발하고 양손은 진흙투성이인 데다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이 붙잡아도 소용없이 박수를 치다가 웃다가 하면서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지켜보다가 입을 모아 말했다.
거인이 되더니 너무 기뻐서 돌아버렸어.”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더냐! 거인인가 뭔가가 되자마자 이런 몹쓸 병을 얻었구나! 이렇게 돌아버렸으니 언제 제정신이 돌아온단 말이냐?”
마님이 통곡하였다.
아내 호씨가 말했다.
아침에만 해도 멀쩡히 집을 나서더니 어쩌다 이런 병을 얻었을 까! 이를 어쩌면 좋아요?”
마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당장 몇 사람을 보내 범 나리를 뒤따르게 할 테니까요.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집에서 달걀과 술과 쌀을 좀 가져다가 우선 희소식을 전하러 온 분들을 대접한 다음 다시 상의해보지요.”
이렇게 이웃 사람들이 달랬다. 당장에 이웃들이 누구는 달걀을, 누구는 백주(白酒), 누구는 쌀 몇 말을 지고 왔고 닭 두 마리를 붙잡아온 이도 있었다. 범진의 아내는 훌쩍거리면서도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해 초막으로 내왔다. 이웃들은 탁자와 의자들을 옮겨다놓고 보록인들에게 술을 대접하며 범진의 광증에 대해 상의했다.
괜찮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어떨까 모르겠네요,”
보록인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사람들이 어떤 방법인지 물었다.
나리께서 평소에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나리는 너무 기뻐서 담()이 치받쳐 올라와 심규(心竅)를 막은 거지요? 그러니 그분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따귀를 한 대 때리면서 합격했다는 말은 다 너를 놀려먹으려는 소리야. 네가 붙긴 뭘 붙어!’ 하고 호통을 치게 하십시오. 그럼 그분은 깜짝 놀라 가래를 토한 다음 바로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아주 좋은 생각일세. 정말 기막히군! 범 나리가 무서워하는 사람이야 푸줏간을 하는 호씨만 한 이가 없지. 좋아! 얼른 호씨를 모셔 오세. 그이는 아직 이 소식도 모르고 시장에서 고기를 팔고 있을 거야.”
한 사람이 말했다.
시장에서 고기를 팔고 있다면 벌써 알았겠지. 새벽 5시쯤 시장 동쪽으로 돼지를 받으러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지. 어서 찾아서 데려 오자고.”
한 사람이 나는 듯이 호가를 데리러 가다 도중에 마침 축하 하러 오는 그를 만났다. 그의 뒤에는 물 끓이는 일을 하는 일꾼 두 사람이 고기 일여덟 근과 돈 4, 5천 전()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호가가 문 안에 들어서서 마님을 보자마자 마님은 그를 붙잡고 울면서 한바탕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호가는 이렇게 박복할 수가!” 하면서 깜짝 놀랐다. 밖에 있던 사람들이 호가에게 이야기해보라고 말했다. 호가는 고기와 돈을 딸에게 주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사정이 이러저러하다면서 그와 상의하였다. 호가는 난처해하면서 말했다.
비록 내 사위이기는 하나, 이제 나리가 되었으니 하늘의 별이란 말일세. 하늘의 별을 때릴 수는 없지! 스님(齋公)들 말씀이, 하늘의 별을 때리면 염라대왕이 즉각 잡아다 쇠몽둥이로 1백 대를 때리고 18층 지옥에 던져서 영원히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더군.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나!”
입바른 소리 잘하는 이웃 하나가 말했다.
관두쇼! 호씨는 날마다 돼지 잡는 게 생업이잖소. 하얀 칼날이 들어갔다가 시뻘겋게 되어 나오니 염라대왕께서 판관을 시켜 생사부에 당신 몫으로 쇠몽둥이 몇 천 대를 달아놓았는지 모르죠. 거기에 1백 대쯤 더하는 일이 뭐 대수롭다고? 곤장을 다 맞아도 이승의 죗값을 다 못 치를 텐데. 혹시 아오. 사위의 병을 구해주면 염라대왕님이 공로를 인정해서 17층 지옥으로 올려주실지?”
자자, 싱거운 소리는 그만들 하시오. 호씨, 이번 일은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소. 어쩔 수 없으니 한 번 시도나 해봅시다.”
보록인이 말했다.
호가는 사람들이 하도 부추기는 바람에 연거푸 술 두 사발을 들이키고 담을 좀 키웠다. 그랬더니 조금 전의 사소함은 사라지고 평상시의 험악한 모습이 되살아났다. 그는 기름이 번질번질한 소매를 둥둥 걷어 올리고 시장으로 갔다. 이웃 사람 대여섯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마님이 얼른 쫓아 나와 소리쳤다.
사돈어른, 놀라게만 하고 심하게는 때리지는 마소!”
당연하지요.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이웃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따라갔다.
시장에 도착해보니 범진은 산발을 하고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신 한 짝은 어디다 내팽개친 채 어느 사당 앞에 서서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붙었어! 붙었다고!”
호가는 악귀처럼 그 앞으로 달려가 말했다.
뒈질 놈! 붙긴 뭐가 붙어?”
그리고는 따귀를 한 대 철썩 갈겼다. 그걸 본 군중과 이웃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호가는 대담하게 한 대 때리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겁이 났고, 때린 손이 벌써부터 부들부들 떨려오자 한 대 더 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범진은 이 한 방에 나가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이웃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가 가슴을 쓸어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하면서 난리를 쳤다. 그랬더니 조금씩 숨을 몰아쉬며 눈빛이 되살아나고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이 그를 부축해 일으켜서 사당 앞에 있는 돌팔이(跳駝子)’ 외과의사의 집 걸상에 앉혔다. 호가는 한쪽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때린 손이 슬며시 아파왔다. 손바닥을 들어보니 더 이상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겁이 더럭 났다.
정말 하늘의 문곡성을 때리는 게 아니었어. 이제 보살님이 벌을 내리기 시작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통증이 더 심해져서 허겁지겁 의사에게 부탁해 고약을 얻어 붙였다.
범진은 돌려선 사람들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
한나절 내내 가물가물하고 몽롱한 것이 꿈만 같네.”
이웃들이 말했다.
나리, 합격을 축하합니다. 아까는 기쁨에 겨운 나머지 담이 막히셨지요. 이제 그걸 뱉어내셨으니 됐습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보록인들을 대접하시지요.”
그렇군, 그러고 보니 7등으로 붙었다는 사실이 기억나네.”
범진은 머리를 다시 틀어 올려 묶는 한편, 의사에게 세숫물 한 대야를 청해 얼굴을 씻었다. 이웃 사람 하나가 어느새 신발 한 짝을 찾아놓았다가 신겨주었다. 범진은 앞에 있는 장인 호가를 보자 또 욕을 먹을까 봐 겁이 났다. 호가가 앞에 나서며 말했다.
사위 나리, 방금 내가 무례했던 것은 사돈 마님의 뜻이었다네. 자네 정신을 돌려놓아 달라고 해서 말이야.”
이웃 사람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호씨가 좀 전에 올려붙인 따귀는 정답기 그지없었지만, 범 나리가 잠깐 세수를 하려면 돼지기름 반 대야는 씻어내야 할 것 같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호씨, 내일은 그 손으로 돼지를 잡으면 안 되겠소이다.”
호가가 대꾸했다.
내가 아직도 돼지나 잡아야겠어? 이렇게 든든한 사위 나리가 있으니 남은 평생을 기대도 다 못할까 봐 걱정이구먼. 내가 늘 그랬지. 우리 사위는 재주와 학식이 높고 생긴 것도 훌륭하니 성안의 장() 나리나 주() 나리조차 우리 사위같이 풍채가 번듯하지는 않다고 말이야. 자네들은 몰랐겠지. 미안한 말이지만 이 몸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거든. 생각해 보면 예전에 우리 딸아이가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부잣집에서 사돈을 맺자고 했는지 몰라. 그렇지만 난 우리 애가 복을 타고 나서 결국 높으신 나리에게 시집을 가게 될 줄 알았지. 이제 보니 틀림없지 뭐야!”
말을 마치고는 하하 소리 내어 웃자 사람들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략)

이나미 리쓰코 지음, 김태완 옮김, 고전이 된 삶, 메멘토, 2013

저자 이나미 리쓰코(井波律子)1944년 도야마(富山) 현에서 태어났다. 삼국지연구와 삼국지연의번역으로 유명한 중국 문학 연구자로, 중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활달한 필력을 가진 저술가로 정평이 나 있다. 1966년 교토(京都)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1972년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가나자와(金澤) 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명예 교수로 있다. 2007트릭스터의 군상중국 고전소설의 세계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 학예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중국적 수사학의 전통, 중국의 그로테스크ㆍ리얼리즘, 삼국지 깊이 읽기, 인물 삼국지, 논어 입문30여 권이 있다. 그 밖에 중국사의 주요 인물 101, 고다 로한(幸田露伴)의 세계, 아시아가 만들어내는 세계상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가 남긴 것등 편저한 책들과 삼국지연의(7) 등의 번역서가 있다.

역자 김태완(金泰完)은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초, 중등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서울로 올라와 숭실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 율곡 이이의 책문을 텍스트로 삼아 실리사상을 연구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학교, 경원대학교, 성결대학교, 호남신학대학교 등에서 교양철학과 동양철학, 한국철학, 한문 등을 강의하였고 광주광역시 소재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율곡문답, 사자소학, 어울림을 배우다, 중국철학우화 393, 경연, 왕의 공부,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맹자,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성학집요, 상수역학, 도교, 중국의 고대 축제와 가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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