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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여름> 외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2021-06-07 20:26
Writer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여름
여름, 나 이제 가련다. 오후의
부드러운 네 손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그런데 내 영혼에서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을 거다.

여름, 죽어버린 연인들의
동강난 반지를 찾아 저 멀리서
축복하러 왔다가 실의에 찬 주교처럼,

나는 자수정과 금으로 된 커다란
로사리오를 들고 내 발코니로 지나갈 것이다.

여름, 나 이제 가련다. 저기, 9월에 심은
내 장미를 네게 부탁하마.
죄악의 나날, 죽어버린 모든 날,
그 나무에 성수(聖水)를 주렴.

하도 울어서, 무덤이 신앙의 빛 덕분에
날개짓을 하면,
연령(煉靈)을 위한 기도 소리 드높게, 신께
이렇게 기도해라. 장미를 영원히 죽은 채로 두시라고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거다.
그리고 내 영혼에서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을 거다.

울지 마라, 여름아, 저 이랑에서는
죽은 장미 한 송이가 수없이 다시 태어난단다.

 

시골

아련히 울리는 서글픈 저녁 종.
고통으로 얼룩진 시골 내음,
공기 중에 흩뿌린다.
적막한 뜰에선
지는 해가 이별을 고하며 피를 흘리고.
황금물결 가을 들녘은
가슴 에이는 회색빛 추위에 떤다.

세월의 발톱이
무수히 구멍 뚫은
대문 앞으로
조용히 나타난
거세된 누런 황소,
이내 외양간으로 향한다.
저녁 기도를 들으며,
선한 눈으로
기운찼던 시절을 그리는 황소!

고뇌에 차 소리지르며
서글픈 날갯짓으로
채전(菜田) 담을 오르는 착한 수탉,
사위어가는 오후에
눈물방울 같은 두 눈이 떨고 있다.

기타에 실린
구성진 야라비
마을에 아련히 퍼지고,
그 깊고 영원한 비탄의 가락에 담긴
인디오의 슬픈 목소리
공동묘지의 낡은 종처럼 동동댄다.

어두움이 내 영혼에 밀려들면,
가녀리고 수줍게 흐느끼는 피리 소리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 바람에 실린다.
황금빛, 붉은빛이 교차하는 어둠 속에
가버린 사랑의 파란 비극이 울고,
담장에 팔 올리고
나는 깊은 한숨 한줄기 내뱉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노동의 결과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며,
상사이며, 부하인 존재.
세월의 도표는 상사의 명패에
빠짐없이 투사되지만,
까마득한 그 옛날부터
백성의 굶주린 방정식에 대해
상사의 눈은 반만 열려 있음을 고려해볼 때

인간이 때로 생각에 잠겨
울고 싶어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 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 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
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이 진정
하나의 동물이기는 하나,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슬픔이 내 뇌리에 박힌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이 가진 물건, 변기,
절망, 자신의 잔인한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 하루를 지우는 존재임을 생각해볼 때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의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XI

거리에서 여자애 하나를 만났습니다.
저를 껴안더군요.
이름은 모()씨라 합시다. 그녀를 만났거나 만날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 아이는 제 사촌입니다.오늘 그녀를 어루만졌을 때
제 두 손은 나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훼손된 무덤,
헤어질 때 그녀는 또같은 절망을 안고 같습니다.
안개 낀 태양의 삼각주
둘 사이 오가는 불평 소리

나 시집갔어.”
내게 말했습니다. 돌아가신 고모네 집에서
어려서 하던 놀이였습니다.
시집갔대요.
시집갔대요.
가로지르는 세월.
우리는 황소놀이, 멍에놀이가 정말
얼마나 하고 싶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속이는 놀이, 천진한 놀이였지요.

XV,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

세상 아이들아!
스페인이 무너진다면, 아니, 그저 해보는 말이다마는,
만일
고삐로 묶여진 두 개의 대륙판을 부여잡은
앞팔이 아래로 떨어진다면 말이다.
얘들아, 오목한 이마는 몇 살이나 먹었을까?
밝은 세상에서 얼마나 일찍 너희들에게 말한 건지!
늙은이가 하는 말이 너희들 가슴에 얼마나 빨리 담겨진 건지!
공책에 쓴 너희들의 2자가 얼마나 오래된 건지!

세상 아이들아!
어머니 스페인이 배를 쭉 깔고 누우셨다.
우리 스승이 부목을 대고 계신 거야.
우리 어머니, 우리 선생님은
십자가와 나무가 되어버렸어. 너희들에게 고소공포증,
분열, 합산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지.
소송 중에 계신 아버지들은 선생님과 함께 계신단다.

무너진다면, 그냥 해보는 말이다마는, 만일
스페인이 땅속으로 떨어진다면,
얘들아, 너희들은 성장을 멈추게 될 텐데!
해는 달을 막 야단칠 텐데!
이빨은 10개만 남고,
이중모음은 막대기에, 메달은 눈물 속에 있게 될 텐데!
큰 잉크병에 다리를 묶인 채 있을
새끼 양은 어쩌고!
어떻게 알파벳 계단을 내려와
고통의 고향인 글자까지 온단 말이냐!

얘들아,
전사들의 아이들아, 그동안에라도
목소리를 낮추렴. 스페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동물의 왕국, , , 인간 사이에서
힘을 쪼개고 있단다.
목소리를 낮추렴. 스페인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단다. 어찌할 바도
모르는데, 손에 있는
해골들은 말을 한다. 말을 해.
저 머리 땋은 해골,
저 살아 있는 해골.

얘들아, 목소리를 낮추라니까.
소리를 낮춰, 너희들의 노래, 물질의
흐느낌, 피라미드의 작은 소리, 게다가,
두 개의 돌을 들고 걸어가는 소리까지 들린단다.
숨을 죽이렴.
앞팔이 내려오면,
부목이 소리 나면, 밤이 되면,
하늘이 두 땅의 명부에 들어오면,
문에서 어떤 소리가 나면,
내가 늦으면,
너희들이 아무도 보지 못하면,
심 없는 연필이 너희들을 놀라게 한다면,
어머니 스페인이 무너진다면, 그냥 해보는 말이다마는
만일 그리되면, 얘들아, 어머니를 찾으러 나가야 해!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고혜선 옮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다산책방, 2017

20세기를 대표하는 페루 시인 저자 세사르 바예호1892년 페루의 광산촌 산티아고 데 추코에서 인디오와 메스티소의 혼혈로 태어났다. 1915년 대학을 졸업하며 신문과 잡지에 시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1919년 첫 시집 검은 전령을 발표했고, 1920년의 정치적 긴장 상태에서 방화범으로 오인되어 체포, 3개월여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대표작 트릴세를 완성해 1922년 출간했다. 이듬해 파리로 이주했으나 소련을 방문하고 공산주의 신문에 기고한 것이 문제가 되어 1930년 추방, 스페인으로 갔다. 그해 희곡 록 아웃, 이듬해에는 장편소설 텅스텐과 단편소설 <파코 융케 이야기>를 발표했다. 1932년 정식으로 영주권을 획득하고 파리에 머무르며 희곡 콜라초 형제≫ ≪지친 돌등을 발표했다. 경제적 고통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자 스페인을 두 차례 방문했다. 1938년 건강이 악화되어 파리에서 사망했다. 1939년 시집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인간의 노래가 출판되었다.

파블로 네루다의 친구이지만 다른 길을 갔던 시인,
체 게바라의 유품 녹색 노트
가장 많이 필사된 세사르 바예호!”

바예호는 진짜 시인임에 틀림없다. 읽는 사람의 가슴을 흔드는 그 고유의 강렬함과 밀도는 그의 비상한 진정성의 소산이다._정현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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