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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中國歷代詩歌選集4≫-송대ㆍ금원ㆍ명대ㆍ청대ㆍ근대-기세춘 신영복 편역2021-05-25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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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代詩歌選集4-송대ㆍ금원ㆍ명대ㆍ청대ㆍ근대-

宋代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 함은 육조의 형식적인 변려문(騈儷文, 사육문)을 반대하고 사실과 사상을 통속적으로 표현하는 고문(古文) 문장가들인 당대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대의 구양수(歐陽脩), 증공(曾鞏),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왕안석(王安石)들을 하나로 묶어 말하는 것이다. 송대 문학은 대체로 당대 문학을 계승하였으므로 이 둘을 하나로 묶어 당송문학(唐宋文學)’ 또는 송대의 특색을 살려 당시송사(唐詩宋詞)’라 한다.

北宋(북송)

송 초기에 등장한 어용 문인들을 서곤파(西昆派)라 하는데 겉만 화려하고 내용이 없는 과거 오대(五代)의 문풍을 계승하여 지배 귀족들의 향락과 방탕적 수요에 편승 이바지했다. 이에 맞서 시문혁신운동(詩文革新運動)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시인이 한유의 문도합일론(文道合一論)’을 계승한 유개(柳開)와 두보ㆍ백거이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이은 왕우칭(王禹偁)이다.
뒤를 이어 구양수와 매요신(梅堯臣)시가를 인정하고 사물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시문혁신운동을 전개하여 송대 문학의 기틀을 세웠으며 왕안석과 소식은 생활과 사상을 표현하는 시를 써 송대 문학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뒤로 시는 의론(議論)이어야 한다는 경향으로 흘러 송시는 쇠미해지고 북송 후기에는 시는 글자마다 유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 강서시파(江西詩派)라 불리는 기교파가 나타나 시는 또다시 민중과 멀어졌다.
민중의 정서와 멀어진 송대의 시는 새로운 시가 형식인 사()에 그 지위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육조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는 당 중엽에서 말기에 걸쳐 고정된 격율과 형식을 갖추어 송대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 구양수ㆍ범중엄ㆍ왕안석 등은 사로써 서정을 표현했고, 유영(柳永)돈황곡자사(敦煌曲子詞)의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언어예술을 창조했으며, 소식은 사의 내용과 영역을 확대하여 호방파(豪放派)의 수령이 되었다.

돈황곡자사: 돈황에서 발굴된 당나라 때의 통속 문학의 한 종류. 보통 돈황곡자사敦煌曲子詞라고 하며, 돈황에서 발견된 유서遺書 가운데 돈황곡敦煌曲과 곡자조曲子調, 속곡俗曲, 소곡小曲, 곡자曲子, 를 모두 포괄한다. 이들은 가락에 의거하여 문장을 정하고, 음악에 따라 글을 정하는 원칙을 지켰으며, 곡조에 맞춰 악기와 합주하여 가창할 수 있었다. 때문에 돈황가사로 통칭하는 것이다. 돈황가사는 중국 사곡詞曲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그었으며, 한위육조漢魏六朝 때의 악부에서 송원대의 사곡 사이에 교량 역할을 담당하여 오대와 송나라 때 사가 성행하는 데 활로를 개척하였다. 돈황가사의 발견은 사곡의 기원과 발전, 음악과의 관련성을 추적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출처] https://blog.naver.com/yakchunlim/220922732334

王禹偁(왕우칭)
村行(촌행): 시골집

말을 타고 가는 산길에
누런 국화꽃 피고
말 가는 대로 유유자적
들의 흥취 뛰어나다
골짜기마다
들려오는 소리는
저녁 동굴의 메아리 머금었고
산봉우리는 말없이
저녁노을에 우뚝하다

팔배나무잎 떨어져
연지같이 곱고
메밀꽃은 활짝 피어
백설같이 향기롭다
어쩐 일인가
읊고 나서 홀연 슬퍼지나니
냇물 위 다리와 들판의 나무들
내 고향의 정경이구나

王禹偁: 왕우칭(954~1001)의 자는 원지(元之), 산동성 거야(鉅野) 사람이다. 정직하고 대바른 성품으로 인민의 고통을 깊이 동정하였다. 그는 두보와 백거이를 따라 배우자고 주장했으며 사실주의적 창작활동으로 한유의 문도합일론을 따르자는 유개와 더불어 오대의 형식주의적 문풍을 계승한 서곤파와 투쟁함으로써 후에 전개되는 구양수ㆍ왕안석 등의 시문혁신운동에 길을 열어놓았다.

梅堯臣(매요신)
汝墳貧女(여분빈녀): 여강의 가난한 여인

여강 뚝방에 가난한 여인이
길가에서 슬피 운다
그 여인의 넋두리를 들어보라
아들 없는 외로운 늙은 아버지가
군청의 관리가 어찌나 포악한지
징집 명령에 감히 항거할 수 없어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는 독촉에
휘청거리는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떠나면서
이웃들에게 간절히 하신 말씀은
제발 서로 의지하며 잘 살라고

내가 소문을 듣고 마을로 돌아와
문안드렸을 때 아직도 탈 없었는데
결국 양하의 찬비 속에
시체가 되고 말았다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부탁할 곳도 없고
뒹구는 시신을 장사도 지내지 못했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태어났으니
딸자식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가슴을 치며 하늘로 호소하노니
산 자나 죽은 자나 장차 어이할거나

梅堯臣: 매요신(1002~1060)의 자는 성유(聖諭)이고 의성(宜城)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완릉선생(宛陵先生)이라 불렀다. 당시 사회상을 평이하고 담백하게 표현하면서 시는 반드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양수와 더불어 시문혁신운동의 중견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汝墳貧女(여분빈여): 이 시에는 서문이 있다. 그 내용은 이때 재차 궁노수(弓弩手)를 뽑느라고 노소를 막론하고 다 잡아가는데 큰비가 내리고 추워 양하(壤河)에서 곤양(昆陽) 노우릉(老牛陵)까지 얼어 죽은 시체가 수백 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蘇軾(소식)
定風波(정풍파): 비바람 속에 맡긴 인생

숲속의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
들리지 않고
읊조리는 휘파람 소리 방해할까
잠시 걸음을 늦춘다
대지팡이와 짚신
말을 탄 것보다 경쾌하네
누가 겁내랴
사립 하나로
비바람 속에 평생을 맡긴 것을
봄바람이 으스스하면
취한 술이 깨고
조금 쌀쌀해져
산마루에 낙조 비끼면
도리어 서로를 마중하리
머리 돌려
쏴쏴 비바람 스산한 곳으로
돌아가자
비바람이 없으면
맑은 날도 없으리라

蘇軾: 소식(1037~1101)의 자는 자첨, 호는 동파거사이고 사천성 미산 사람이다. 구양수의 제자이며 정치가였다. 소식은 민중의 질고는 법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라 人事의 잘못에 있다면서 法治를 반대하고 德治를 주장하며 이른바 신보수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사상적으로 유교, 도교, 불교의 영향을 받은 소식은 독특한 자기 사상 체계를 이룩하려 노력하였다. 소식은 고난 속에서도 구양수ㆍ매요신의 성과를 계승하여 시문혁신운동을 발전시켜 북송 중엽 이후 문단의 영수가 되었다. 이 성과를 확대하여 남당(南唐) 오대(五代)의 사풍(詞風)을 일소하여 이른바 호방파라는 새로운 사풍을 일으킨 것이다. 수많은 산문과 수천의 시, 수백의 사를 남겼다.
定風波(정풍파): 10823월 황주 동남쪽 사호(沙湖)로 가던 중 비를 만나 일행은 모두 낭패하는데 홀로 그러지 않았다는 조그만 일을 빌려 해탈적 인생관을 보여주는 시다.

張耒(장뢰)
勞歌(노가): 노동자의 노래

염천의 삼월 날씨는 비가 오지 않아
구름은 모여들지 않고 흙먼지만 날린다
아무도 없는 깊숙한 방에서 낮잠을 자고 난 오후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땀이 비 오듯 한다
문득 무거운 짐 진 백성이 가엾구나
힘은 열 섬이 넘는 활을 당길 수 있으나
베적삼 하나로 등을 가리고 평생을 지내며
노동을 팔고 돈을 받아 자식들을 먹여 살린다
사람들은 말과 소를 나무 그늘에 매어놓고
더위를 먹을까 걱정을 하는구나
하늘이 백성을 점지할 때는
참으로 오랫동안 고심했겠지만
누가 알랴
노동자의 신세는 소나 말보다 못한 것을

張耒: 장뢰(1052~1112)의 자는 문잠(文潛)이고 강소성 회음(淮陰) 사람이다. 학관에 있을 때 소철의 아낌을 받았고 소식과 교류하여 그의 감탄을 받았다. 그는 강서파 문인으로는 드물게 백거이ㆍ장적(張籍) 등의 영향을 받아 인민의 고통을 반영하고자 노력한 시인이며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중시해 산문시의 멋을 풍긴다.

南宋(남송)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들어와서 애국시인 육유(陸游)가 나타나 강서파의 굴레를 벗고 굴원의 낭만주의와 두보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이어 구국항금(救國抗金)의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시를 썼으며, 범성대(范成大)와 양만리(楊萬里) 등도 당() 및 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계승하여 조국 강산을 노래하고 민중의 고통을 표현했다.
한편 혼란한 시국을 버리고 강호에 묻혀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강호파(江湖派)가 나타났고, 문천상(文天祥)이 민족의 절개를 표현하는 시를 창작하여 조국 수호를 외쳤다. 더욱이 남송 사()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신기질(辛棄疾)은 소식의 호매로운 풍격을 계승하여 항금구국(抗金救國)의 웅지를 피력하는 사를 써 송사(宋詞)의 사상성과 예술성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范成大(범성대)
後催租行(후최조행): 딸을 팔아 조세를 바치다

늙은 농부 묵은 밭에 가을비 내리고
옛날의 높다란 언덕이 지금은 강물이 되었네
언제나 굶주린 속에 사는 머슴과 농사꾼
잘 알지만 조세를 낼 방도가 없으니
고을 관장이 새로 부임한 이후
황제의 면세 조서는 제멋대로 없애고
고을 나리의 독촉 공문을 들이댄다
옷 팔아 돈을 마련해 몽땅 바쳤으니
병든 몸 추위에 떨어도 오랏줄만은 면했구나
작년에 식구마다 옷이 다 해어져
큰딸을 팔아 생이별했고
금년엔 정혼한 둘째 딸을 팔아
또 몇 말의 곡식을 얻어 입에 풀칠했다
집안에 또 셋째 딸이 있으니
명년에도 조세 독촉을 겁내지 않노라

范成大: 남송의 유명한 시인 범성대(1126~1193)의 자는 致能(치능)이고 강서성 蘇州(소주) 사람이다. 황정견 등의 강서파와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민의 질고에 관심을 가져 中唐(중당)新樂府的(신악부적) 전통을 계승했다. 그는 농촌의 자연 풍물과 함께 농민의 노동을 질박하게 노래하며 봉건적 수탈을 고발했다.
後催租行(후최조행): 1155년 시인이 신안에서 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재직할 때 쓴 작품이다.

陸游(육유)
示兒(시아): 아들아 보아라

죽어버리면
만사가 헛된 것임을 잘 알지만
오직 슬픈 것은
나라의 통일을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 군대가 북진하여
중원을 평정 통일하는 날
집에서 제사를 올리고
잊지 말고 나에게 말해다오

陸游: 육유(1125~1210)의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며 절강성 산음 사람이다. 아버지 육재(陸宰)는 애국적인 지식인이었다. 25세경에 애국시인 증기(曾幾)에게 배웠다. 육유는 평생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불타는 창작열로 1만여 수의 시를 쓴 애국시인이었다. 사회적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시들로 인해서 그를 소시사(小詩史)’라고 불렀으나 비분강개한 서정성이 강해 두보(杜甫)에 비하면 사실주의적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굴원과 이백을 학습하여 이상에 대한 열렬한 추구로 낭만주의적 색채가 강한 시를 써 그를 소이백(小李白)’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이백에 비하면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그는 강서시파의 형식적인 결점을 제거해 칠언율시를 발전시켜 대구가 엄격하지만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근체시 특히 칠언율시를 집대성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대복고(戴復古), 유극장(劉克莊) 등의 남송 시단에 큰 영향을 끼친 애국시인이며 동시에 빈부격차, 통치계급의 착취와 억압과 모순을 폭로한 인민시인으로서 남송 시단의 영수였다.
示兒(시아): 유언시(遺言詩). 시인이 죽은 해인 1210년 봄에 지은 절필시(絶筆詩).

文天祥(문천상)
金陵驛(금릉역): 포로가 되어 금릉역을 지나며

잡초 무성한 남경
저녁놀 비꼈으니
떠도는 외로운 구름아
어디에 다시 의지할꼬
조국 산천은
예와 다름없는데
성안 인민들 절반은
이미 죽고 없네
대지에 가득한 갈대꽃은
나를 따라 시들었고
옛집의 제비는
뉘 집으로 날아가는가
오늘 강남땅을 떠나지만
슬피 우는 두견새 되어
피를 물고 돌아오리

文天祥: 문천상(1236~1282)의 자는 이선(履善)ㆍ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 강서성 길주 사람이다. 1278년 항전하다가 포로가 되어 연경에 4년간 구금되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죽었다. 남송 멸망 때의 민족영웅이며 시인이다.
金陵驛(금릉역): 1279년 시인이 포로가 되어 연경으로 압송되었는데 그해 7월에 남경을 지나면서 이 시를 지었다. 두 수 가운데 1수이다.

金元

()

동아시아는 오대로 분열되어 있었고 북아시아는 대조영이 세운 발해(713~926)가 쇠퇴하던 916년에 거란족[契丹] 아율보기가 를 세워 황제를 칭했다. 요는 ()를 숭상하는 유목민족으로 920년에 거란 문자를 창제하였고 1044년에는 거란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들 문학은 보잘것없으나 중국문학과 별개로 독특하였다.

()

女眞族(여진족)1115會寧(회령)에 세운 나라로 1125년 중국 북부를 장악하던 거란족의 요를 멸하고 남쪽의 ()을 신하의 나라로 복속시켜 남북조 시대를 열어 1234년 몽고에 망할 때까지 120년간 중국 전체를 사실상 장악했다.
금나라는 1119년 자신의 고유한 문자를 창제하였고 武勇(무용)만을 숭상하고 문학은 도외시했다. 금대의 서민문학으로는 원본(院本, 중국 남송 때 북방의 금나라에서 행하던 연극의 극본), 제궁조(諸宮調) 등의 설창문학(說唱文學)이 발전했다. 원본은 남조의 송에서는 화본(話本, 중국 송ㆍ원나라 때 성행하던, 당시의 생활상이나 역사적인 說話의 대본)이라 불렀으며 특히 동해원(董解元)<서상기제궁조>는 원대의 대표적인 희곡인 왕실보의 <서상기(西廂記)>에 영향을 미쳤다.
금대의 시인으로는 元好問(원호문)을 들 수 있는데 그는 금 후기 몽고의 침략으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첨예해지는 시기에 나라의 운명과 인민의 고통에 관심을 가진 작품을 남겼다.

()

1206년 태무진[鐵木眞(철목진)]이 흩어져 있던 몽고 각 부락을 통일하여 몽고 제국을 건설하고 징기스칸[成吉思汗(성길사한)]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1234년 그의 아들 오고타이가 금나라를 멸하고 황하 유역을 점령하고, 1279년에는 쿠빌라이[忽必㤠(홀필열)]가 송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전 국민을 몽고인(蒙古人), 색목인(色目人, 몽고인을 제외한 유목민과 아라비아인, 유럽인), 한인(漢人, 요ㆍ금 치하의 한인), 남인(南人, 남송 치하의 한인) 4등급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잔혹한 계급적 착취와 민족적 압제의 기초 위에 있는 원 왕조는 봉건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자의 묘를 세우고 봉건 윤리를 강조하였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종교를 이용해 각 민족들의 고유사상을 마비시키려고 불교, 도교, 회교, 기독교, 유대교 등이 전파되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이로써 유교의 천명론(天命論)과 불교의 숙명론(宿命論)이 문학 창작에 크게 작용하였다.
중요한 문학 장르는 잡극ㆍ산곡ㆍ시문이었는데, 원대는 희곡의 황금 시기였다. 북조의 화본, 諸宮調(제궁조) 등 설창문학 형식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원 잡극은 그 성과가 대단했다.
한편 금나라 때부터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시가 형식인 散曲(산곡)을 쓰는 작가들이 늘어났고, 이들 잡극 작가들도 잡극 속에 산곡을 포함시키거나 별도로 창작하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여, 옛 시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宇文虛中(우문허중)
在金日作(재금일작): 금에 억류되어

긴 밤 깊어가고
장막에 서리 가득해도
꿈속에서만은
내 고향에 돌아간다네
듣자니 우리를 가두어둘
서하관을 다 지었다니
항복을 거절할 소무가 북해에서 양을 쳤듯이
나도 살찌게 키울 자신이 있노라
머리 돌려 옛 왕조를 바라보니
모두가 다 풀덤불
마음으로 달려가는 농사꾼도 끊긴 만 리 길
사람이란 한 번은 죽는 것
어리석게 피하려 할 것인가
눈동자를 부릅뜨고 가슴에 새겨
너희놈들 결코 잊지 않으리라

宇文虛中: 우문허중(1080?~1146?)의 자는 叔通(숙통)이고 사천성 성도 사람이다. 북송 말 금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한림학사를 지냈다. 熙宗(희종) 황통 6, 금의 황제를 급습하여 포로가 된 송 欽宗(흠종)을 구출해 남으로 돌아올 모의를 하다가, 일이 실패해 전 가족이 피살되었다.
在金日作(재금일작): 모두 3수로 된 시 중 1수이다.

元好問(원호문)
岐陽(기양): 왜 병기를 만들었나

백 개도 넘는 관문이 있었건만
막아내지 못하고
십 년 병화에
암담한 진나라 서울
서쪽으로 기산을 바라보니
봉황의 소식은 끊어지고
농산의 물은 동으로 흘러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
들풀도 정이 있는 듯
병사의 백골을 덮어주는데
석양은 무슨 일로
빈 성터를 비추는가
지금까지 누가 자세히
하늘에 물어보았으랴
어찌하여 치우천왕을 보내어
온갖 병기를 만들게 하였는지

元好問: 원호문(1190~1257)의 자는 裕之(유지), 호는 遺山(유산)이며 산서성 忻縣(흔현) 사람이다. 고전 詩歌(시가)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계승하여 금말 원초의 사회적 모순과 인민들의 고통을 반영했다. 그는 소식에게 배웠으며 나아가 두보를 스승으로 삼아 시풍이 雄渾(웅혼)하고 광활하며 情思(정사)가 침울하고 비장하다. 선조는 선비족 拓拔氏(탁발씨).
岐陽(기양): ()의 발상지. 지금의 협서성 기산현 鳳翔(봉상) 부근이다. 이 시는 모두 3수로 되었으며, 그 중 1수이다.

張翥(장저)
題牧牛圖(제목우도): 목우도에 부쳐

작년에는 심한 가뭄으로
말굽소리가 북소리 같았고
금년에는 홍수로
코가 석 자나 빠졌는데
소는 죽을힘을 다해 밭을 갈았으나
가뭄과 홍수로
무정하게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림 속에는
이곳 동쪽 정원은 따뜻한 봄날
목동은 신선인 듯 초연하고 송아지는 순하여
손으로 구관조를 어르며 소 등에 앉아 있고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와 안개 낀 초원은
나를 견딜 수 없도록 슬프게 한다
저 목동이 자라고
송아지가 커서 황소가 되면
반드시 죽도록 일할 것이다
어찌 고통스런 노동을 애석하게 여기랴
기꺼이 농사일을 하다가 설사 헐떡이며 죽는다 해도
죽으면 곧 쉬리니
다만 세금 대신 관청에 바쳐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만은 원치 않으리

張翥: 장저(1287~1368)의 자는 中擧(중거)이며 산서성 臨汾(임분) 사람이다. 당시 민중시인으로 이름이 있었다.

明代

정치와 사회

명 태조 朱元璋(주원장)은 원말 농민봉기의 틈을 타 1368년 금릉에서 왕조를 세우고 중국을 통일했다. 주원장은 봉건 전제주의적 황권(皇權)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초기 10년 동안에 개국공신들을 포함하여 3만 명을 처형하였다. 문화면에서도 모든 학교에서 봉건 이데올로기의 성경인 공자의 경서만을 가르치도록 명령하여 정주리학(程朱理學)을 국학으로 삼고 사상을 통제하여 복고주의가 판을 쳤다.
1500년경 명대 중엽에 이르자 사회는 현저하게 변화하였다. 경제번영으로 농업ㆍ수공업과 더불어 인쇄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동남 연해 일대에는 자본주의적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 발전과 더불어 통치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만연되고 민중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심해지는 등 전제주의적 계급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남에 따라 정주학을 대신하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양명학이 그것인데, 하지만 양명학으로는 봉건 전제정치의 모순을 대처할 수 없었다. 양명학 자체가 봉건적 도덕규범은 천리(天理)’, 즉 절대적 우주의 근본법칙이므로 신성불가침하다는 봉건질서의 어용철학이기 때문이다. 이에 왕좌학파가 나타나 도학에 반기를 들고, 공맹을 멸시, 비난하기도 했다.
결국 통치집단은 동림당(東林黨)과 사당(邪黨)으로 내부 분열되고, 민중은 지배자들의 강화된 착취에 더하여, 자연재해로 인한 고난까지 겹쳐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이원랑(李圓朗), 양응덕(楊應德), 이자성(李自成), 공유덕(孔有德), 장헌충(張獻忠) 등이 일으킨 대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여진족 누르하치의 남침으로 명 왕조는 멸망했다.

시문

명나라의 탁인월(卓人月)명시(明詩)는 당시(唐詩)보다 못하고 명사(明詞)는 송사(宋詞)보다 못하며 명곡(明曲)은 원곡(元曲)보다 못하지만, 민요는 명이 절창(絶唱)”이라고 말했다.
명 초기에는 문화 통제가 극심하여 시인 고계(考啓)는 벼슬을 거절한 죄로 허리가 잘렸으며, 소주의 문인 姚潤(요윤)王謨(왕모)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죄로 목이 잘리고 가산을 몰수당했다. 주원장은 문자옥(文字獄)이라는 해괴한 제도를 시행하여 문인들의 글에서 몇 자의 흠을 잡아 목을 베곤 했다. 이러한 초기 100년간은 중국 문학의 암흑기라 할 수 있다.
중엽에 들어서자 산문은 진한(秦漢)을 본뜨고 시는 성당(盛唐)을 본받아야 한다는 복고파인 李夢陽(이몽양), 何景明(하경명) 등 전칠자(前七子)李攀龍(이반룡), 王世貞(왕세정) 등 후칠자(後七子)가 나타났고, “산문도 당송의 古文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문()은 도()를 담아야 한다는 당송파(唐宋派)가 활동했다.
()元明(원명) 교체기에 宋濂(송렴), 劉基(유기) 등 몇 사람이 성과를 이루었을 뿐이지만, 소설에서는 원대에서 발전한 설창문학과 잡극 등의 토양에서 지어진 羅貫中(나관중)의 장편소설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施耐庵(시내암)水滸傳(수호전)이 나타나 중국문학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시기의 문학적 성과는 시문이 아니라 희곡과 소설 등 통속문학에 있었다. 잡극으로는 徐謂(서위)<四聲猿(사성원)>이 대표작이고, 전기(傳奇, 南戱)로는 湯顯組(탕현조)<牡丹亭[모란정]>, 소설로는 <西遊記(서유기)>, <金甁梅(금병매)> 등이 있다.
말기에 들어서는 후기 왕좌학파 대표인 李贄(이지)를 스승으로 모시는 삼원(三遠, 袁宗道袁宏道袁中道)이 일어나 擬古主義(의고주의)를 반대하고 옛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가슴에 우러나오는 性靈(성령)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公安派(공안파)들이 활동했다.
그 외에 말엽에는 顧炎武(고염무), 장황언, 구대균, 하완순 등 애국주의 시인들이 일어나 민중의 고통을 반영하는 산곡을 썼다. 특히 馮夢龍(풍몽룡) 등은 민요를 수집 정리하여 挂枝兒(괘지아), 山歌(산가)등 민요집을 편찬했는데 이들 책에 수록된 민요는 1,000편이 넘는다.

劉基(유기)
田家(전가): 농민의 소원

농민이 바라는 것이란
고작 의식주뿐이다
사내는 농사짓고
아낙은 길쌈하고
새벽에 괭이 들고 나가
밤늦도록 쉴 틈이 없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은 하늘 때문이 아니고
그들 노동의 대가일 뿐이다
세금도 여기에서 나오는 것
관청은 마땅히 이들을 아껴야 하거늘
어떻게 함부로 착취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짠단 말인가
괴이한 것은 이 광명천지에
여기저기에 도둑놈이 득실대는 것이다.
사랑과 정의의 칼을 뽑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도둑놈의 칼끝을 멈추게 할 것인가
어찌 청렴하고 의로운 관리를 뽑아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
맑은 마음으로 뇌물을 뿌리치게 하여
백성을 보살피고
나라의 명맥을 살리려 하지 않는가

劉基: 유기(1311~1375)의 자는 伯溫(백온)이며 절강성 청전 사람이다. 명 태조에 협조한 개국공신으로 誠意伯(성의백)에 봉해졌다. 韓愈(한유)를 따라 古體詩(고체시)를 썼으며 時政과 백성의 고통을 詩題(시제)로 했다.
田家(전가): 1279통일 후 72년 만인 1351년에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이 시는 농민봉기의 폭발 원인을 지적한 것으로 1355년경 작품이다.

袁宏道(원굉도)
櫂歌行(도가행): 뱃사공 아낙의 노래

고기잡이 아낙네의 집은 부평초 시든 섬
바람 따라 흘러든 것이 어느덧 고향이 되었네
노젓기가 바느질보다 좋아
일찍 실 한 오라기 잡아보지 않았어라
사월 고기새끼 바람에
낭군 따라 파동에 왔는데
시월 은하 씻은 물에
양자강에서 낭군을 이별했네
양자강은 파도가 험해
바람이 없어도 물결이 일고
강이 깊어 고기 잡기 어렵지만
가마우지에겐 좋은 음식 가득한 곳
내 아이는 마치 오리새끼 같아
강을 건너 다시 호수로 들어가
연꽃잎을 따다가
아이들과 오랫동안 옷을 만든다

袁宏道: 원굉도(1568~1610)의 자는 中郎(중랑)이고 호북성 供案(공안) 사람이다. 그의 형 종도, 중도와 더불어 문명을 얻어 세칭 三遠(삼원)이라 불렸다. 그는 복고주의를 반대하고 獨抒性靈 不受格套”(옛 틀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형식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性情 또는 性靈을 써야 한다)를 주장하는 공안파를 형성했다.
櫂歌行(도가행): 樂府(악부)의 옛 제목이다.

民謠(민요)

挂枝兒(괘지아)
荷珠(하주): 연잎의 이슬

이슬비에 젖은 연꽃의
진주이슬처럼
여인의 애타는 마음
창자를 도려내는 듯
누가 알았으랴
너의 물 같은 마음은 잘도 변하는 것을
그쪽에서 흩어진 마음이
이쪽에선 둥그레지니
믿을 수 없는 얄미운 원수
바람 따라 오락가락

山歌(산가)
有心(유심): 우리들의 마음

낭군도 마음이 있고
소녀도 마음이 있다오
무엇이 두려워 사람들은
쓸데없이 집이 그렇게 깊을까요
사람들은 어찌 쓸데없이
많은 외눈박이가 있을까요
집에는 어찌 쓸데없이
많은 겹문이 있을까요

挂枝兒(괘지아), 山歌(산가): 풍몽룡(馮夢龍)이 편찬한 민요집.
荷珠(하주): 연꽃잎의 이슬방울.
有心(유심) : 생각이 있다. 마음이 있다.

靑代

청은 정치 문화적으로 명 왕조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과거제도는 명의 제도를 계승하여 팔고문(八股文)으로 관리를 뽑았으며, 문인들의 결사(結社)를 금지하고 문자옥안(文字獄案)을 일으켜 사상을 탄압했다. 또한 강희제는 성리대전을 다시 찍어 전국에 배포하는 등 명대의 봉건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정주리학(程朱理學)을 대대적으로 선양했다.
하지만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鍾禧), 왕부지(王夫之) 등은 민족적 억압과 봉건 독재를 반대하는 항청(抗淸)운동을 계속 전개하면서 민주사상에 기초한 개혁을 주장했다. 황종희는 천하의 가장 큰 해악은 임금이다라고 주장했으며 당견(唐甄)진ㆍ한 이래 제왕은 모두 도적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균전(均田)과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강렬한 민족의식을 가졌던 명대 말기와 청대 초엽의 애국시인들은 사라져갔다. 1650년 이후 강희연간(1661~1772)의 시의 영수는 왕사정(王士禎)으로 그의 시론은 의론(意論)을 반대하고 신운(神韻)을 주장하며 서정과 경물 묘사에 그쳤을 뿐 사회적 현실을 외면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대각체(臺閣體) 시인 심덕잠(沈德潛), 시는 부드럽고 돈후하여 봉건 예교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격조파(格調派)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같은 복고파를 반대하고 시는 성정을 토로해야 한다는 명말의 공안파를 이은 원매(袁枚)는 공안파의 추상적인 면을 극복하고 상당한 정도의 진보적인 시들을 남겼으며, 특히 정섭(靜攝)은 시대를 압도했던 복고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천지간에 제일 높은 사람은 농민이라고 주장하며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시를 발표했다.
청대 중엽 이후에는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사와 시문은 더욱 쇠퇴하고 설창문학, 희곡, 소설 등이 성행했다. 설창문학인 탄사(彈詞)는 남방에서 유행했는데 제자가인들이 삼현과 비파에 맞추어 불리던 애정 노래이며, 고사(鼓詞)는 북방에서 유행했는데 삼현에 맞추어 불리던 전쟁 이야기였다.
청대에 가장 큰 성과를 거두고 후세에 영향을 미친 장르는 소설이었다. 1700년대 초에 나온 백화(白話, 중국에서 일상생활에서 쓰는 구어체)로 쓰인 장편소설 홍루몽(紅樓夢)은 애정비극을 통하여 봉건제도 멸망을 암시한 고전소설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吳嘉紀(오가기)
朝雨下(조우하): 비오는 아침

아침부터 비가 내려
밭에 물이 들어 곡식이 물에 잠겼다
배고픈 새들이
지지배배 산뽕나무에서 운다
저녁에 비가 내려 부잣집 아이들이
술을 걸러 패거리를 부른다
맛 좋은 술 다만 걱정은
술에 취해 죽을 지경이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부잣집의 여름날은 날마다 가을 날씨
낙숫물 방울방울 서늘하게 둘러앉아
경박스러워라 벌써 갖옷을 입었구나
빗줄기 더욱 굵어지자
가난한 집은
저녁도 되기 전에 문을 닫고 누웠다
그저께도 어제도 사흘을 굶었는데
지금 문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없구나

吳嘉紀: 오가기(1618~1684)의 자는 賓賢(빈현), 호는 陋軒(누헌)이며 강소성 秦州(진주) 사람이다. 빈한 속에 평생 벼슬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고결하였다. 그의 시는 인민의 질고와 통치자의 폭거를 고발하였다.
朝雨下(조우하): 청 세조 순치 18(1661)경 작품. 계급모순을 고발하였다.

靜攝(정섭)
竹石(죽석): 대나무와 바위 그림

야박한 청산이
여간해서 열어주지 않아
본원적인 생존에 뿌리를 박아
바위 속을 뚫었구나

천만 번 갈고 부딪쳐도
도리어 굳세어지리니
바람이야 어디서 불든
되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靜攝: 정섭(1693~1765)의 자는 克柔(극유), 호는 板橋(판교)이며 강소성 興化(흥화) 사람이다. 그는 빈한한 출신으로 백성의 질고를 동정하고 현실을 직시한 서화시가(書畵詩家)였다. 양주팔괴(揚州八怪, 금농ㆍ나빙ㆍ정섭ㆍ이선ㆍ왕사신ㆍ고봉한ㆍ황신ㆍ민정ㆍ고상ㆍ화암)의 한 사람으로 전통화법과 의고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했다.
竹石(죽석): 그림의 제목을 노래한 시다.

民謠(민요)

四川山歌(사천산가): 꼬마신랑

신부는 열여덟
신랑은 아홉 살
저녁이면 신랑을
침상에 안아올려 재우네
부모님께서 짝을 지어 맺어주지 않았다면
그대는 내 아들이고
나는 그대 어머니라 하겠네

四川山歌(사천산가): 민요집의 이름.

近代

1840년 아편전쟁은 중국 근대사의 서막을 열었다. 청대 중엽부터 침체해 있던 시문은 근대를 맞아 새로운 변화를 보이면서 복잡한 양상을 나타냈다. 아편전쟁 이후 공자진(龔自珍), 위원(魏源) 등은 복고주의와 형식주의를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시는 사회와 역사를 비평할 책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시를 사회개혁의 정치적 무기로 삼았다. 태평천국의 수령인 홍수전(洪秀全), ()은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는 기실문학운동(記實文學運動)을 벌이면서 문학은 혁명투쟁에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평천국혁명이 실패하자 사회는 반봉건 반식민지로 가속화됐다. 양계초(梁啓超), 담사동(譚嗣同), 황준헌(黃遵憲) 등은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일어나기 전에 시계혁명(詩界革命)을 제창하고 신시(新詩)를 쓰기 시작했다. 황준헌은 신시파의 기수였다.
중화민국 성립 전후의 활기찬 민족민주운동 시기에는 문학이 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로 기능하였다. 유아자(柳亞子), 고욱(高勖) 등은 혁명문학단체인 남사(南社)를 조직하여 투쟁했다. 특히 신해혁명 전야에 민족민주운동의 혁명대열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여성 혁명영웅 추근(秋瑾)은 돋보이는 시인이었다.
이러한 개혁의 시기에도 반동문학은 항상 존재했다. 봉건문학의 고문(古文) 유파인 동성파(桐城派), 송시운동(宋詩運動)의 계속인 동광체(同光體), 의고시파(擬古詩派) 등이 그것으로 이것은 역사의 물결에 밀려날 한낱 포말이었다.

林則徐(임칙서)
塞外雜詠(새외잡영): 귀양길

천산은 만 개의 홀을 들고 있는 듯
옥구슬이 우뚝우뚝 솟았는데
나의 귀양길엔
쓸쓸한 침묵뿐이다

그러나 나의 산신령은
서로를 보며 빙긋이 웃노라
너와 나의 머리에 가득한 눈발을
쓸어버릴 수 없구나

林則徐: 임칙서(1785~1850)의 자는 少穆(소목)이고 복건성 민후 사람이다. 사회의 신뢰를 받던 세계적 안목을 갖던 대관료로 특히 외세의 침략에 항거한 영웅이다. 특히 그는 아편전쟁 시기에 항전파의 수령이었다.
塞外雜詠(새외잡영): 1842년 시인이 禁煙抗英(금연항영) 투쟁으로 귀양을 가서 위구르 자치구 서북 伊犁(이리, 지금의 신강성)에서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일이나 그 일을 하는 병사)할 때 天山(천산)을 바라보면서 쓴 작품이다. 모두 8수로 그 가운데 1수이다.

洪秀全(홍수전)
吟劍詩(음검시): 장검을 들고

삼 척 장검을 손에 들고
천하를 평정하니
천하가 한 집 되어
마음까지 화목하리
요사한 무리들 잡아다가
지옥으로 보내고
간악한 원수놈들 쓸어다가
하늘의 체로 체질하리라
동서남북 모든 인민
하늘의 도리로 돈독하니
해와 달과 별들까지
개선가를 부르리라
일찍이 범과 용이 노래하는
광명한 세계
태평천지 통일되니
이 즐거움 어떠한가

洪秀全: 홍수전(1814~1864)은 광동 화현의 농민 가정 출신이다. 농민혁명군의 수령으로 태평천국을 세웠다. 7세에 화숙(和塾)에서 글을 읽다가 16세에 가정 곤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지었다. 18세에 마을 화숙의 훈장으로 초빙되었다. 농민의 혁명적 요구와 서양 기독교 평등사상을 흡수하여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하고 原道救世家, 原道醒世家(원도구세가, 원도성세가)’ 등 혁명의 글을 써서 선전, 대중을 조직하였다. 1851년 광서 계평의 전전촌(全田村)에서 봉기하여 국호를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하고 1853년 남경을 점령하고 수도로 정하고 천경이라 고쳤으나, 1864년 남경이 포위된 후 불행히도 서거했다.
吟劍詩(음검시): 이 시는 1843, 혁명 봉기 7년 전에 쓴 작품이다.

黃遵憲(황준헌)
海行雜感(해행잡감): 바다 위에서

총총한 별빛같이
세계는 하늘에 널려 있어
삼천세계인지 대천세계인지
셀 수 없구나
만약 은하로 올라가는 뗏목을 타고
나그네가 그곳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우리들의 지구는 둥글겠지

黃遵憲: 황준헌(1848~1905)의 자는 公度(공도)이며 광동성 매현 사람이다. 강유위, 양계초 등과 변법유신의 주요 인물이다. 무술변법 실패 후 고향에 돌아와 시계혁명을 창도했다. 풍격(風格)은 옛것이나 뜻은 새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海行雜感(해행잡감): 1882년 시인이 일본에서 미국 총영사로 부임하던 중 바다 위에서 별을 보며 환상한 작품이다.

康有爲(강유위)
出都留別諸公(출도유별제공) 2: 서울을 떠나며 벗들에게

천룡을 올라타니
만백성이 따랐더라
이제 구름 속에 은연한
비래봉에 홀로 섰노라
가슴에 품은 난초
향기로운데
세계는 종횡천리
겹겹이 안개로 덮였구나

제국주의 열강은
연약한 사슴을 먹이로 다투는데
나라의 인재들아
와룡선생은 누구인가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하고
돌아가누나
온 산에 비바람 소리
푸른 칼이 우는구나

康有爲: 강유위(1858~1927)의 자는 광하(廣廈), 호는 장소(長素)이며 광동성 남해 사람이다. 서양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나라를 구하려고 변법(變法)을 주장했으며 무술변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세기 마지막 개량파 사상가였으나 무술변법 실패 후 외국에 망명하였다. 봉건 황제에 의존하여 변법을 실행하려 하였으므로 손중산(孫中山, 손문)이 주도하는 자산계급 혁명운동에 반대하고 반동적인 보황(保皇)의 깃발을 들었다. 문학상으로는 무술변법 이전에는 두보를 본받고 공자진(龔自珍)에 가까웠으나 이후 타락했다. 노신은 강유위는 원래 수레를 앞으로 끄는 시대를 이끌던 시대의 영수였으나 후에는 수레를 뒤에서 당기는 복고의 조사로 타락하였다고 꼬집었다.
出都留別諸公(출도유별제공): 이 시는 1889년 쓴 작품으로 모두 5수가 있다. 스스로 주()를 달기를 자기가 여러분에게 변법을 주장했으나 개국(開國)은 되지 않고 여러 의문이 번갈아들어 이에 떠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秋瑾(추근)
鷓鴣天(자고천): 밤마다 용천검이 우노라

몰락한 조국
이 울분 참을 길 없어
해외에 나왔다가
동지를 만났네
깨진 금항아리
고쳐야 하듯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친들
무엇이 아까우리

! 험한 길
조국의 영락함을 탄식하며
관산 만릿길
용감하게 걸어가리니
여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밤마다 벽에 걸린
용천검이 우노라

秋瑾: 추근(1875~1907)의 자는 선경(璿卿), 호는 경웅(競雄) 또는 감호여협(鑒湖女俠)이며 절강성 소흥(紹興) 사람이다. 1904년 남자로 가장하고 일본에 유학, 1905년 겨울방학에 귀국하여 손중산이 영도한 중국동맹회[浙江主盟人]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중국여보(中國女報)를 발행하였다. 각지로 돌아다니며 봉기를 꾀하다 1907년 체포되어 32세 나이로 산화한 혁명영웅이며 여류 시인이다.

民謠(민요)

還我江山(환아강산): 우리 강산을 돌려다오

우리 강토를 돌려다오
우리 주권을 돌려다오
칼산 불바다라도
우리는 뚫고 나아가리라
어찌 황제인들 겁내며
어찌 외세에 굴복하랴
양키놈들 박살내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還我江山(환아강산): 제목은 머리글자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의화단 운동 때 부른 노래라 한다. 

기세춘 신영복 편역, 中國歷代詩歌選集4-송대ㆍ금원ㆍ명대ㆍ청대ㆍ근대-, 돌베개,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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