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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中國歷代詩歌選集 1≫-시경ㆍ초사ㆍ악부시ㆍ남북조-기세춘ㆍ신영복 편역2021-05-2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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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代詩歌選集 1

머리말

사상(思想)은 선택(選擇)이다.
작게는 사소한 일상사의 선택에서부터, 크게는 목표의 설정과 방법의 확정 등 실천의 전 과정에 이르기까지 사상은 어김없이 자신을 실현한다.

중국역대시가선집의 편역 과정에서 가장 먼저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 선택의 문제였다.
3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관류해온 수많은 중국시가 중에서 우리나라에 소개된 중국시가는 그것을 선별하는 관점에서 심한 편향성을 띠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편향성은 중국시가의 참모습을 온당하게 이해할 수도 없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중적 진실과 그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마저 비하(卑下)하고 나아가서는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고 당대의 실천적 과제를 무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된다.

문화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살아가고 노동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따라서 시가(詩歌) 역시 인간의 삶과 노동과정 속에서 그것과 혼연한 일체가 되어 생장하는 것이다.
사회의 동질성이 해체ㆍ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는 문화는 마땅히 그 사회의 생산적 다수인 민중들의 삶과 생산노동 속에 그 뿌리를 뻗고 그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돌려야 하는 것이다.

중국시가의 정신적 원류인 시경(詩經)은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민중들이 부르던 노래를 모아 기원전 500년경에 편찬한 인류 최고(最古)의 시가선집으로서 중국과 우리의 시가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그야말로 경전이다.
이 시경은 지배계급의 시가보다는 민중의 고통을 살피려고 관리들이 수집한 민중의 노래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중국 최초의 문학비평서인 유협(劉恊, 466~520)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이 변하여 정()이 생기고 그 정()을 나타내는 것이 사()”라는 물색론(物色論)을 주장하였으며, 512년에 발간된 중국 최초의 시 평론집인 종영(鐘嶸)시품(詩品)에서는 인민의 생활과 감정을 줄기로 하여 형식과 색깔을 물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가장 오래된 작품집인 소통(蕭統, 501~531)문선(文選)에서는 문장이란 사실이 깊은 생각 속에서 뜻이 되고 그것이 다시 아름다운 문장 속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는 인민의 고통을 알리는 것이라고 단언한 두보(杜甫, 712~770)를 비롯하여 오늘까지 민중의 가슴속에 살아남은 시인들의 시론 또한 그 맥을 잇고 있다.

부패한 시대에는 반드시 뜻있는 시인들이 일어나 시문혁신운동(詩文革新運動)을 일으켰다. 고문운동(古文運動),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 시계혁명운동(詩界革命運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다름 아닌 시경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며 동시에 민중에게 다가서려는 운동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중국시가의 전통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중국시가의 전통인 민중 시나 민중의 노래[詞曲(사곡)]는 시집에서 제외되고 묻혀버려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역자는 이 선집의 편역에 있어서 선시(選詩)(북경(北京)대학의 임경(林庚), 산동(山東)대학의 풍원군(馮沅君)을 책임자로 하여 공동 편찬한) 중국역대시가선(中國歷代詩歌選)을 저본으로 하였으나 저본에 실린 시가의 상당 부분을 제외하거나 그 이외의 것을 보충하였다.
이러한 산시(刪詩)의 과정은 역자들의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가 얕아서 자칫 그 결과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마지막 교정이 끝날 때까지 줄곧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이 선집은 인민의 삶과 질고(疾苦)를 외면하지 않은 중국시가의 전통을 소개하는 데 최소한의 뜻을 두고 있을 뿐이다. (……)

19942월 새봄을 맞이하며
기세춘 신영복 씀

 

先秦時代

󰋯 詩經

시경은 중국 최초의 시가선집으로 처음에는 시전(詩典)이라 했으나 후세의 유가(儒家)들이 경전으로 삼으면서 시경이라 불렀다.
시경은 은말(殷末) 주초(周初)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春秋) 중엽인 기원전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시()와 가()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이다.
시경에는 모두 305편의 시가가 수록되어 있는데 내용상 이 시가들은 풍(), (), ()으로 분류된다.
풍은 주남(周南), 소남(召南), (), (), (), (), () 15개 나라(제후국)에서 수집하여 정리한 민요를 말하는데 160편이 있으며 국풍(國風)이라고도 한다.
아는 정악(正樂)을 말하는데, 이는 다시 궁중에서 잔치할 때 쓰는 소아(小雅), 의식을 거행할 때 쓰는 대아(大雅)로 나뉜다. 소아는 74, 대아는 31편이 있으며 민요는 몇 수밖에 안 되고 대부분이 귀족의 작품이다.
송은 궁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무용곡으로, 주송(周頌) 31, 노송(魯頌) 4, 상송(商頌) 5편 등 모두 40편이 있다.
원래 시경의 시가는 가시(歌詩), 즉 악가(樂歌)였으나 악곡(樂曲)은 없어지고 가사(歌詞)만 남았다.

周南(주남)

나물 캐는 처녀(卷耳)

하루 종일 나물을 캐도
바구니는 차지 않고
! 님 그리워
바구니는 밭두렁에 던져두네

높은 언덕에 올라 바라보네
님의 말은 비루먹었겠지
님은 잠시 금술잔 기울이며
그리움을 잊겠지

높은 산에 올라 바라보네
님의 말은 눈병 났겠지
님은 잠시 뿔술잔 기울이며
슬픔을 달래겠지

저 바위산에 오르는 님이여
말은 병들고
종들은 발이 아프니
! 얼마나 상심하실까

周南: 주나라의 周公(주공단周公旦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지방의 민요.
卷耳(권이): 도꼬마리를 캐는 여인이 남편을 그리는 노래다.

衛風(위풍)

황하는 넓어(河廣)

누가 말했던가
황하는 넓다고
갈대 하나로
건널 수 있는 것을
누가 말했던가
송나라는 멀다고
발돋음하면
바라볼 수 있는 것을

누가 말했던가
황하는 넓다고
이제껏 쪽배 하나조차
띄우지 못하였네
누가 말했던가
송나라는 멀다고
이제껏 아침 문안조차
드리지 못하였네

衛風: 셋으로 나뉜 은의 옛 땅 기현의 동쪽 지방에서 수집된 민가(民歌).
河廣(하광): () 문공의 누이동생이 송() 환공에게 시집가서 양공(襄公)을 낳고 이혼했다. 이 시는 송에 남겨두고 온 자식을 그리며 부른 노래라 한다.

唐風(당풍)

갖옷 입은 대부들(羔裘)

흰 염소가죽 옷과 표범가죽 옷
우리네 임금과 대부님들
인민을 쥐어짜네
어찌 다른 임금이 없으리오
이놈의 벼리는 우리의 잘못이네

흰 염소가죽 옷과 표범가죽 옷
우리네 임금과 대부님들
인민을 들들 볶네
어찌 다른 임금이 없으리오
이놈의 벼리는 우리가 착하기 때문이네

唐風: 주 무왕의 아들로 성왕의 동생인 숙우(叔虞)에게 봉한 땅을 당()이라 하는데 지금의 산서성 일대 태원 일대로 도읍지는 진양(晉陽)이다. 이 지방의 민가를 당풍이라 한다.
羔裘(고구): 숫양가죽 옷(羔裘), 표범가죽 옷(豹袪)大夫. 지배자를 뜻한다.

小雅(소아)

풀은 시들고(何草不黃)

어떤 풀이 시들지 않으리오
어느 날에 행역이 없으리오
어느 누가 행역을 피하리오
사방에 전쟁이요 부역이라오

어떤 풀이 마르지 않으리오
어느 누가 홀아비가 아니리오
슬프다 나는 군인이 되어
어찌 악한 백성이 되었는가

들소나 호랑이도 아닌데
나는 광야를 헤매야 하나
슬프다 나는 군인이 되어
아침저녁 쉴 틈이 없구나

: 정악(正樂)의 노래다. 연향(宴饗)과 조회(朝會)에 쓰인 음악이기 때문에 대부분 사대부의 작품이다. 불려진 시기는 주() 초기에서 주의 동천 이전으로 국풍(國風)의 후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지역은 하()로부터 음악적 전통을 이어받아 문화수준이 높은 황하 유역 일대인 중원에서 유행하였다고 본다.
주자(朱子)는 대아(大雅)와 소아(小雅)의 구별에 대하여 정소아(正小雅)는 향연 때 연주하던 음악이고 정대아(正大雅)는 회조(會朝) 때 연주하던 음악이라 했다.

周頌(주송)

귀한 손님(周頌)

반가운 손님
백마 타고 오셨네
삼가고 공경하는 모습
우아한 일행이어라
평안히 묵으소서
믿음직한 모습
말고삐를 이리 주소서
마구간에 매겠습니다
손님을 보내야 하오나
좌우에서 말고삐를 잡습니다
그 위엄 크시나니
동이의 나라까지 복을 내리소서

周頌: ()은 조정 종묘의 제악(祭樂)으로 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한다. 이 노래는 제사에서 연주하는 것이므로 조상의 공덕을 찬미하고 제주의 공경스러움을 노래하였으며 제사에 참여한 제후를 칭송하기도 한다.
有客(유객): ()는 은()을 멸망시킨 후 주왕(紂王)의 형인 미자(微子)를 송()에 봉작하여 선조의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하였으며 결코 신하로 대하지 않고 손님으로 대우했다. 이 시는 그 미자가 주에 와서 주의 복색을 하고(검붉은색) 주의 종묘에 제사한 것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은의 미자는 백마(白馬)를 타고 왔으며, 예기(禮記)의 단궁편(檀弓篇)에는, 은나라 사람은 흰색을 존숭하여 싸움터에서 백마를 타며 제사의 희생물도 흰 것을 쓴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은의 지배종족이 동이족(東夷族)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 楚辭

본래 초사(楚辭)란 한나라의 유향(劉向, 기원전 77~7)이 굴원(屈原)과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묶어 펴낸 책의 이름이었는데, 그 이후 초()나라의 시체(詩體)를 가리키게 되었다.
초사는 초나라의 독특한 문학양식, 방언, 성조, 음운, 풍습, 특히 무속을 반영한 남방문학으로, 초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풍부한 민요 특히 무풍(巫風)의 토양 위에서 북방의 시경의 영향을 받아 생성 발전한 것이다.

屈原(굴원)
황하의 신(河伯)

님과 노니는 황하
세찬 바람 큰 물결 일고
타고 가는 연꽃배
네 마리 용과 이무기가 이끄네

곤륜산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마음은 끝없는 황하를 날아
날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고
멀리 강 포구를 그리네

물고기비늘 집과 용비늘 마루
자줏빛 대궐문에 붉은 궁전
신령께선 어이해 물속에 계시나
그대와 노니는 황하 물가
우르르 콸콸 아홉 갈래 물이 흘러드네

손을 흔들며 떠나는
님을 송별하는 남포
도도한 물결은 님을 맞이하고
고기떼들은 좋아라 줄지어 따르네

屈原: 굴원(기원전 345~295?)의 이름은 평()이고, 전국시대 초나라 왕족의 후예로 태어나 기원전 295(?) 55일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안고 투신 자결했다. 굴원의 대표작은 이소(離騷)이며 이는 초사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河伯(하백): 전국시대 황하의 신 이름. 이 노래도 무가(巫歌)인 구가(九歌)의 하나다.

宋玉(송옥)
구변 1(九辯 其一)

슬프다 소슬한 가을이여
초목은 시들어 쓸쓸히 떨어지는데
슬픔에 지친 먼 나그네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또 한 해를 보내는구나

고요하여라 하늘은 높아 기운이 맑고
드넓어라 큰비 그쳐 물이 맑구나
슬픔에 젖어 거듭 탄식하노니
추위에 떠는 사람들
슬프고 비통하여라
옛것은 가고 새것이 오는구나

宋玉: 송옥의 생졸은 알 수 없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史記)<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는 굴원이 죽은 후로 초나라의 송옥ㆍ당륵ㆍ경차 등이 나와 시부를 즐겨 써 이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九辯: 초의 대부요 굴원의 제자인 송옥이 스승의 구장(九章)을 모방하여 지었다. 다만 자유분방한 <이소(離騷)>에 비해 구변(九辯)은 관직을 잃은 가난한 선비의 비애를 겸허하게 노래하는 애상적인 장편 서정시다. 노신(魯迅)비록 분방한 정신과 풍부한 사상은 이소보다 못하나 처절한 정감을 표현한 경물묘사는 실로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구변은 9수이다.

漢代

󰋯 漢代詞賦

사부(詞賦)는 시경의 아송(雅訟)과 초사(楚辭)를 기초로 발전한 것으로 귀족들이 태평성쇄를 노래하고 통치자의 공덕을 찬양하면서 끝부분에서 약간의 규간(規諫)과 풍유(諷諭)를 덧붙이고 있다.
사부는 소체(騷體)처럼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운문과 산문이 결합된 문답형식을 취하여 사물이나 뜻을 직접 서술 묘사한다.
한대에는 사부와 산문만 발달했을 뿐 시단은 숨을 죽이고 있어서 민요가 크게 일어났다. 한대 시문의 성과는 악부민요(樂府民謠)와 고시(古詩)에 있다 할 것이다.

賈誼(가의)
굴원을 추도함(弔屈原)

황공하옵신 은혜를 입어
소신도 장사로 귀양을 왔습니다
듣자니 이곳은 굴원 선생이
스스로 멱라에 몸을 던지신 곳
나는 이 강물에 노래를 띄워
삼가 선생께 조문합니다

망극한 세상을 만나
선생은 돌아가셨습니다
! 슬프도다
나쁜 시절을 만난 탓입니다
봉황은 엎드려 숨고
대낮에 올빼미가 훨훨 납니다

용렬한 무리가 높은 곳에 앉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출세합니다
성현은 거꾸로 끌려가고
방정한 선비를 넘어뜨리며
충신을 더럽다 욕하고
도둑놈을 청렴하다 말하며
명검 막야를 둔하다 하고
둔도 납칼을 예리하다 합니다

불우하신
선생은 돌아가셨습니다
주나라 황금솥을 던져버리고
질그릇 바가지를 보배라 합니다
늙고 여윈 소가 수레를 끌고
절름발이 노새로 곁마[驂馬를 삼습니다

천리마는 두 귀를 늘어뜨리고
소금마차를 끌고 있습니다
머리에 쓸 고운 관을 신발로 삼았으니
잠시인들 오래갈 리 없습니다
! 선생께서
유독 이 허물에 걸리셨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 나라에 날 알아주는 이 없으니
답답한 이 마음 누구에게 말하리오
봉황은 훨훨 가볍게 날아올라
스스로 물러나 멀리 떠납니다
깊은 연못의 신령스러운 용은
스스로 깊이 잠겨 자중합니다
교달(蟜獺을 피해 숨은 곳에
어찌 새우나 거머리 따위가 용납되리오

귀한 것은 성인의 마음과 덕이니
혼탁한 속세를 멀리하여 몸을 숨깁니다
기린도 고삐를 매어두면
어찌 개나 염소와 다르다 하겠습니까
도리어 분분한 속세에서 해를 입으셨으니
역시 선생의 잘못이었습니다
어찌 꼭 초나라만을 사랑했습니까

봉황은 천길 높이 날아
덕이 있는 곳에 내리며
덕이 쇠해 간악한 징조 보이면
다시 나래를 펴 날아갑니다
저 조그만 더러운 웅덩이에
어찌 배를 삼킬 큰 물고기가 용납되리오
강과 호수를 떠난 고래가
! 개미에게 제압되셨습니다

賈誼: 가의(기원전 201~168)는 낙양인이며 나이 20세에 한 문제에게 발탁되어 박사가 되고 계속 승진되자 주위의 참소로 장사로 귀양간다. 이때 이 부()를 지어 자기의 불우함과 시대의 암흑상을 비판한다.
1) 곁마[驂馬(참마)]: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서 바깥의 두 마리의 말.
2) 교달(蟜獺): 소충으로 물고기를 해치는 벌레.

󰋯 樂府詩

악부(樂府)란 한() 무제(武帝, 기원전 141~87)가 세운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의 명칭이다.(반고, 한서<예문지>) 악부에서 나라의 제사, 궁중의 향연, 군대에서 필요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일과 여염의 민가를 수집하여 곡조를 붙이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악부에서 만들어낸 음악을 악부라 불렀으며 후세에 악부를 모방하여 지은 시체(詩體) 혹은 곡조가 있는 시가를 모두 악부라 불렀다. 따라서 한나라 때의 악부뿐만 아니라 주나라 때의 시경도 악부시라 할 수 있으며 후세의 사()나 곡()도 악부시라 부를 수 있다.
민간 악부민요는 지배계급의 압제와 착취를 폭로하고 봉건제도의 반인간적 계급모순에 항거하고 고발한 민중들의 노래로 시경과 마찬가지로 주린 자는 먹을 것을 노래하고 고된 자는 일을 노래했다.”
민간 악부민요는 민중의 삶의 애환과 정서를 작가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서사시가 대부분이나 낭만적인 노래도 있다. 악부의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적 전통은 뒤이어 이른바 건안풍골(建安風骨)의 꿋꿋한 시풍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악부민요는 시경 민요의 사실주의적 문학 전통을 계승하여 민중의 삶과 정서, 사상과 염원을 담고 있는, 시경과 더불어 중국문학의 성전이다.


공후인(公無渡河)

님이시여
강을 건너지 마소서
님은 기어이 강을 건너시네
강물에 빠져 함께 죽으니
님이시여 어이할꼬

公無渡河(공무도하): 한 악부에서 가장 짧은 상화가사(相和歌辭). 최표(崔豹)고금주(古今注)에는 이 노래에 대하여 공후인(箜篌引)은 조선의 수병인 곽리자고(霍里子高) 아내 여옥(麗玉)이 지었다. 이날 백수광부(白首狂夫)가 술병을 들고 물을 가로질러 건너다 빠져 죽자 이를 말리던 아내는 공무를 타고 공무도하를 부르며 그녀도 물에 빠져 죽었다, 이를 본 자고(自高)가 아내에게 전하자 아내는 슬퍼하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라고 쓰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이것은 조선의 노래인 것이 분명하다.

슬픈 노래(悲歌行)

슬픈 노래를 부르는 때는
꼭 울고 싶을 때라오
먼 곳을 바라볼 때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을 때라오
고향 생각에
답답한 마음 쌓여만 가네

돌아가고파도
집에 아무도 없고
건너가고파도
강엔 배가 없네
내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
내 가슴에 수레바퀴가 굴러가네

悲歌行(비가행): 이 노래는 민간에 떠돌던 악보 없는 가요를 모은 도가(徒歌)인 잡곡가사(雜曲歌辭)에 속하는 악부시다

󰋯 古詩

고시 혹은 고악부시(古樂府詩)라 함은 후한(後漢) 말엽에 불린 작가 미상의 5언시를 말하는데, ()나라 이후에 고시라 불렀다. 이 고시는 악부의 잡어체에서 발전하여 완벽한 5언시로 정착된 것인데, 후세의 오언시의 기초가 되었다.

강 건너 부용을 꺽다(涉江采芙蓉)

부용을 꺾으러 강을 건너니
연못가에 난초가 가득 피었네
이 꽃 꺾어 누구에게 주려는가
그리운 님은 객지에 계시는데

고개를 들어 고향 하늘 바라보니
멀기만 하여라 아득한 고향길
마음은 하나인데 몸은 헤어져
이별의 슬픔에 늙어만 가네

涉江采芙蓉(섭강채부용): 이 고시는 나그네가 고향을 그리는 노래. .

魏晉時代

󰋯 建安風骨

건안시대(196~220)는 후한 말엽과 위() 초엽, 즉 조조(曹操)가 패권을 잡고 있던 시기를 말하며 建安(건안)은 후한 헌제(獻帝)의 연호이다.
건안시대의 시들은 한()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안정된 생활을 쟁취하려는 정치 이상을 표현하고 의기가 솟아오르는 독특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시 형식에서도 오언시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曹操(조조)
죽은 병사에게(蒿里行)

함곡관 동쪽의 용장들이
군사를 일으켜 동탁의 무리를 치려고
비로소 맹진에서 맹약을 맺고
함양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군사는 모였으나 정연하지 못해
기러기 대형으로 대치하고 머뭇거리며
주도권 다툼으로 우군끼리 싸우고
후계자가 되려고 서로를 죽이는구나

화남의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고
북방의 원소는 몰래 옥새를 새기는데
병사의 갑옷엔 이가 득실거리고
백성들은 다 죽어가는구나

온 들판에 백골이 뒹굴고
천 리에 닭 울음소리 끊겼으니
살아남은 사람은 백에 하나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누나

曹操: 건안풍골의 대표적인 시인 조조(155~220)의 자는 맹덕(孟德)이고 그의 아버지 조숭(曹嵩)은 환관 조등의 양자였다. 조조는 황건적 진압에 두각을 나타냈고 동탁(董卓) 토벌에도 참가하였으며, 후에 원소 등을 평정하고 북방을 통일하였다. 후한 헌제 때 대장군 승상에 임명되었다가 魏王(위왕)에 봉해졌다.
조조의 시는 현재 22수기 전하는데, 조조는 사언시 창작에도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오언시의 기초를 닦은 개척자이기도 하다.
蒿里行(호리행): 호리(蒿里)는 죽은 자의 혼이 돌아가는 마을. 악부 상화가사(相和歌辭)의 곡명을 딴 노래로 원래 만가(挽歌)이다.

曹植(조식)
태산의 노래(太山梁甫行)

사방 팔방 각각 기후가 다르듯
천 리에 사람 살아가는 고초도 다르구나
비참하구나 변경의 백성들
풀숲에 목숨을 맡기네

아내와 자식들은 짐승처럼
험한 숲속에서 지내는데
사립문은 얼마나 쓸쓸한가
여우와 토끼들은 제집인 양 드나드네

曹植: 조식(192~232)의 자는 자건(子健), 시호는 사()이며 조조의 셋째아들이다. 건안시대의 가장 걸출한 시인이다.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를 지었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네 煮豆燃豆萁 /콩은 솥에서 울며 말하길 豆在釜中泣/원래 한뿌리로 태어났것만 本是同根生/어찌 이다지도 들볶는 건가 相煎何太急)
조식은 시경, 악부, 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계승ㆍ발전시켜 현실을 소재로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아름답게 나타내었다.
太山梁甫行(태산양보행): 일명 梁甫行. 樂府 相和歌辭 슬조곡명(瑟調曲名). 양보는 泰山 부근에 있는 산. 이 산은 사람이 죽으면 혼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전설이 있으나 노래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 변경 바닷가의 빈곤한 인민들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 正始太康

正始(정시)는 위말(魏末) 제왕(齊王)의 연호이며 太康(태강)은 진() 무제(武帝)의 연호이다. 정시문학은 위나라 말엽의 문학을 말하고, 태강문학은 조()씨가 망하고 사마(司馬)씨의 진초 즉 서진(西晉)의 문학을 말한다.
이 시기의 문학은 건안 시기의 사실주의적 정신이 쇠퇴하고 현실도피와 형식에 치우쳤으며 노장(老壯)사상에 경도되었다.
정시문학은 죽림칠현(竹林七賢, 원적ㆍ혜강ㆍ산도ㆍ유령ㆍ원함ㆍ향수ㆍ왕융)이 주도하였고, 태강문학은 삼장(三張, 장재ㆍ장협ㆍ장항), 이육(二陸, 육기ㆍ육운), 이반(二潘, 반악ㆍ반니) 그리고 左思(좌사) 등이 중심이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司馬氏가 유교를 앞세우면서 曺氏를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자 사마씨의 폭력과 폭압을 비판하는 양심적인 몰락 선비세력이 노장사상을 들고나와 공맹(孔孟)을 비판하면서 아울러 공맹의 봉건세력에 대항하여 노장(老壯)식 민중사상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시ㆍ태강 문학은 서진 말년의 극심한 혼란 상태에서 출현한 현언시(玄言詩)로 이어졌다.

嵇康(혜강)
군에 입대하는 형에게(贈秀才入軍)

차고 맑은 고요한 밤
환한 달빛이 마루를 비춘다
산들바람은 옷깃을 흔들고
비단 휘장을 걷어 올린다
맛 좋은 술이 잔에 가득한데
같이 즐길 벗이 없구나
[]를 앞에 놓았으나
누구를 위해 탈거나
우러러 사모하는 동지여
우애의 향기는 난초와 같아라
이제 그대는 떠났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으랴

嵇康: 혜강(223~262)의 자는 숙야(叔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문학가이자 철학자이며 음악가. 허식적인 예법을 설교하는 유생들을 증오하고 주 무왕을 비판하고, 주공과 공자를 반대하는 언론을 발표하였다. 유교를 앞세워 위의 정권을 찬탈하려는 사마소의 비위를 거슬려 난군감중(亂君感衆)의 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贈秀才入軍(증수재입군): 秀才는 무재(茂才). 재덕이 뛰어난 사람. 수재는 이후 인재를 발탁하는 제도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혜강의 형인 혜희(嵆喜, 자는 공목公穆)를 지칭한다. 이 시는 18수 중 한 수이다.

張協(장협)
속세를 버리다(雜詩)

아침 안개는 붉은 해를 맞아
붉은 햇무리가 양곡을 덮는가 했는데
뭉게뭉게 구름이 모여들더니
주룩주룩 빗줄기를 뿌린다

가을바람은 마른풀을 꺽고
서리 맞은 높은 나무 앙상하구나
무성하던 잎이 하루하루 성기어가고
울창하던 숲은 자제하듯 엄숙하다

젊어서부터 불우함을 한탄하더니
슬프다 이제 늙어 만년을 재촉하누나
또 한 해가 저무는데 가슴속엔 온갖 근심 걱정
차라리 점쟁이나 되어 속세를 버리리라

張協: 장협(?~307)의 자는 경양(景陽)이며 하북 안평 사람이다. 세상이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혔다. 형 장재(張載), 장화(張華) 등과 함께 3장이라 불렀다. 태강문학에 속했지만 비교적 청신하다.
雜詩: 모두 13수가운데 1수이다.

 

南北朝時代

265년 위()의 호족 사마염(司馬炎)이 조()씨 왕조를 찬탈하여 세운 서진(西晉, 265~316)은 통치계급의 내부 모순과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317년 사마씨의 잔존세력이 남으로 피난하여 동진(東晉)을 세우고 약 100년 동안 남조만의 반쪽 안정을 누렸으나 곧 멸망하였다. 420년 유()씨의 송()이 동진을 잇고 척발(拓跋)씨의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하여 약 100년간의 남북조시대가 열렸다.
여기에는 송 이후, 송을 이은 제(, 479~502)와 제를 이은 양(, 502~589)과 진(, 557~589)의 영명체(永明體) 및 신체시(新體詩)를 포함하여, 317년 동진으로부터 589년 수()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간의 시를 포괄하기로 한다.
이 시기에는 진말(晉末)의 현언시(玄言詩)와 송초(宋初)의 산수시(山水詩)가 주류를 이루었다. 현언시는 노장(老壯)사상을 시에 옮긴 것이며 산수시는 자연 경물의 묘사에 주력한 것이다.
사마씨의 동진이 유씨의 송으로 교체될 시기에 도연명과 사령운(謝靈運)이 나타나 산수전원시를 크게 흥성시켜 중국 시가 발전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 사대부들은 자기들의 감정을 반영하기에 급급했을 뿐 민중의 고통은 외면하였다. 자연히 민중의 소리인 민요가 크게 일어났다. 북조에서는 목란시(木蘭詩)가 널리 퍼지고 남조에서는 이미 건안 시기에 생성된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 육조시대-위진남북조 시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중국의 서사시)가 널리 전파되었다.

󰋯 東晉

陶淵明(도연명)
이른 봄의 시골(癸卯歲始春懷古田舍)

공자께서 남기신 가르침에
도를 걱정하되 가난은 걱정하지 말라 하셨는데
우러러보아도 아득하고 도달하기 어려워
마음을 바꾸어 오래도록 농사나 힘쓰고자 마음먹었네
때를 맞춰 즐겁게 쟁기질을 하며
다정한 얼굴로 농부들을 격려하네
너른 밭에 멀리서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오니
좋은 싹들이 생기를 품는다네
비록 수확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농사일은 마냥 즐거워라
밭 갈고 씨 뿌리며 때때로 쉬는데
나룻길을 묻는 나그네 하나 없네
해가 지면 모두 함께 돌아와
술병 들고 이웃들을 위로하네
길게 읊조리며 사립문을 닫나니
그럭저럭 농사꾼이 다 되었네

가난한 선비(詠貧士)

만물은 제각기 의탁할 곳이 있는데
외로운 구름은 의지할 곳이 없구나
아스라이 높은 하늘로 사라져가나니
어느 날에 후인들이 끼친 빛을 우러러보랴

아침노을에 밤새 낀 안개 걷히니
뭇 새들 서로 짝지어 날아가는데
뒤늦게 숲을 빠져나온 한 마리 새는
해가 지도록 아직 돌아오지 않는구나

힘껏 성현의 가르침을 지키려 하니
어찌 헐벗고 굶주리지 않을 수 있으랴
비록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해도
어찌 슬퍼하랴 어쩔 수 없는 노릇을

사계절(四時)

봄물은 못마다 가득한데
여름 구름 떠가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

가을달은
휘엉청 밝은데
겨울 산마루에
빼어난 외로운 소나무

陶淵明: 도연명(365~427)의 이름은 잠(), 자는 원량(元亮) 혹은 연명(淵明)이다. 도연명은 가난 때문에 벼슬을 했지만 내 어찌 쌀 닷 말에 허리를 굽힌단 말이냐!”고 한탄하며 곧 그만두는 등 가난에 굴복하지 않고 고고한 삶을 살았다. 그가 죽은 후세인들은 그를 정절(靖節) 선생이라 불렀다.
도연명은 분명 인민의 친구요 농민이었다. 그는 농민의 이상형인 무릉도원을 그리워했으며 끝까지 귀족 통치계급과 타협하지 않고 농민의 삶에 다가간 시인이다.
癸卯歲始春懷古田舍(계묘세시춘회고전사): 403년 시인이 돌아가신 어머님 상을 모시고 농업에 종사하며 지은 시다. 2수 중 1수다.
詠貧士(영빈사): 모두 6수가 있다.
四時(사시): 오언절구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명구이다.

󰋯

謝朓(사조)
심산에 올라 노을 진 장안을 돌아보며(晩登三山還望京邑)

파숫가에서 장안을 바라보며
하양에 당도하여 낙양을 바라본다
햇빛 아래 빛나는 줄지은 대마루들
높고 낮은 집들이 완연하구나
지는 노을 흩날려 수놓은 비단 같고
맑은 강물 고요해 흰 비단 같구나
물새들은 봄 모래톱에서 울고
온갖 꽃향기 들판에 가득하구나
오랫동안 머물렀소 이제 가리라
잊지 못할 송별잔치도 끝나고
돌아올 기약 알면서도 서러운 걸 어이하랴
진눈깨비 녹는 듯 눈물이 흐르네
짐승들도 고향이 그리운 줄 아나니
누군들 검은 머리 세지 않으리

謝朓: 사조(464~499)의 자는 현휘(玄暉)이고 하남성 사람이다. 사령운을 대사(大謝)라고 하고 사조를 소사(小謝)라 한다. 이백과 두보가 모두 높이 평가한 시인이다. 사성(四聲), 팔병(八病) 등 엄격한 성율(聲律)을 따르는 영명체(永明體)를 흡수하고 민가의 활달함을 산수시에 흡수하여 품격 높은 오언신체시를 개척하였다.
晩登三山還望京邑(만등삼산환망경읍): 이 시는 시인이 의성 태수로 부임하기 위해 남경을 떠나며 지은 것이다.

󰋯

何遜(하손)
밤의 송별연(臨行與故遊夜別)

여러 해를 함께 노닐다가
어느 날 홀연 무리를 떠나네
천년을 동쪽으로 흐르는 물
서쪽으로 돌아올 날 없어라

밤비는 빈 섬돌에 뚝뚝 떨어지고
새벽 등잔불만 방안에 희미한데
이별의 슬픈 술자리도 파했으니
언제 다시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으랴

何遜: 하손(?~517?)의 자는 중언(仲言)이며 산동 담성(郯城) 사람이다. 8세에 부시(賦詩)를 지은 재원으로 당대의 명사들이 중히 여겼다. 당시 궁체시 분위기에서 남다른 민가의 장점을 살려 청신한 품격의 신체시를 써 당시 사조(謝朓)와 나란히 일컬어졌다.

󰋯

江總(강총)
규원의 한(閨怨篇)

큰길가의 적적한 청루
비단 창문에 백설이 분분한데
연못의 원앙처럼 혼자는 마음 스산해
장막으로 돌아와 공연히 향불을 피운다

병풍은 일부러 밝은 달을 가리는데
무심한 등불은 홀로 누운 내 모습 비춘다
요서는 아직도 물이 얼어 봄소식 없고
계북의 기러기떼 수천 리 길 날아오네

원컨대 님이시여
관산은 아침이겠지요
첩을 생각하소서
복숭아꽃 오얏꽃도 한때뿐이라오

江總: 강총(519~594)의 자는 총지(總持)이다 일찍이 후주와 더불어 연회에서 후궁들과 염시(艶詩)를 짓기 좋아하여 압객(狎客)’이라 불린 궁체시인이다.

󰋯 民謠

선비족의 민요(勅勒歌)

칙륵천 물은
음산 아래로 흐르고
동그란 하늘은 천막 천장인 듯
온 광야를 뒤덮었다
하늘은 푸르고
초원은 끝이 없는데
바람에 풀잎 물결
소떼 양뗴 보인다

勅勒歌(칙륵가): 칙륵은 철륵(鐵勒)이라는 당시(남북조시대) 산서성 북부 일대에 살던 선비족(鮮卑族). 이 노래는 선비족의 민요로 본래 선비 말로 된 것을 제(齊)의 말로 바꾸었기 때문에 시구의 장단이 맞지 않는다.

기세춘ㆍ신영복 편역, 이구영ㆍ김규동 감수, 中國歷代詩歌選集 1-시경ㆍ초사ㆍ악부시ㆍ남북조-, 돌베개,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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