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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신친일파≫-≪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호사카 유지2021-03-24 22:51
Writer

신친일파

머리말

2019반일종족주의라는 기이한 제목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고, 뒤이어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그 책의 저자들은 한국인의 반일적인 상식이나 정서가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일본에 대한 노예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그들이 책 반일종족주의를 통해 주장하는 한국인의 상식이나 정서중 현재 한일 양국이 외교적 갈등을 빚고 있는 문제들, 즉 일본군 위안부문제, 강제징용 문제, 독도 문제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본서는 그들의 주장을 분석해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 일본 우파의 논리에 자신들의 생각을 더해 저술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일본 우파의 논리는 19938월 자민당의 미야자와宮澤 정권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고노 담화를 발표한 직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고노 담화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도 표했다.
그러자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여성에 불과하다며,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고노 담화폐기를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95815, 일본 정부는 종전 50주년을 맞이하여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당시 무라야마 도이치村山富市 총리가 세계 앞에 사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우파의 최종적인 목표는 고노 담화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데 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교수 등이 내세운 자유주의 사관을 도입하여, 일본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백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해방 전쟁을 수행한 것이며,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강제연행을 부인하며,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근대화시켰다고 강변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과거를 사죄하는 태도를 자학사관적 태도라고 매도하면서, 일본의 사과 외교는 일본의 진보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1998년 한국에서 김대중 정권이 성립한 이후, 한국 내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진보 세력에 대항하는 뉴라이트의 등장이다. 한국의 뉴라이트2000년경에 등장했는데, 일본과의 유사점은 한국 내 보수 우익이 정권을 상실한 것을 계기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보수 우익의 논리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2005118일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발족되었다. ‘역사에 대한 보복 정치로 대한민국의 가능성과 장래성이 소진되는 모습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 건전한 우파의 가치를 일상적이고 전국적으로 국민에게 확산시켜야 한다라고 천명했다.
• ≪반일종족주의의 대표 저자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은 안병직 명예교수(뉴라이트 초대 이사장) 등과 함께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경제사를 연구해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자인 셈이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 한국이 땅과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한국사 교과서의 저술은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인들이 식민지 시대를 아는 집단적 기억은 상당 부분 만들어진 것이고 교육받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본서에서는 그들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와 주장을 문제로 보았다. 본서는 특히 강제징용 문제, 일본군 위안부문제, 독도 문제 등에 관한 그들의 논리가 매우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나간다. …… 정치적 논리를 떠나서 오로지 역사적 진실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2020 봄 호사카 유지

   

프롤로그- 반일종족주의의 정체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
한국인의 거짓말 문화는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거짓말의 행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짓말의 행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습니다.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의 아낙네를 연행하여 끌어갔다는 통념은 한 건의 사례도 확인되지 않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이영훈은 한국의 모든 분야에 거짓말이 만연되어 있어, 그것이 국익을 크게 해치고’, ‘한국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밑밥을 깐 다음, 이러한 위기의식이 반일종족주의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강변했다. 공동 저자들은 이우연, 주익종 등이다.
이들에게서 학문적 깊이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사건의 진상이 다 밝혀졌다고 하는 천박한 인식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영훈은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피해 당사자인 문옥주 씨의 증언 대구에서 조선인 헌병과 일본인 헌병에게 납치되어 만주 동안성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하는 증언 마저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영훈은 201810월 말 확정된 강제징용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승소 판결 -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 기업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하여 위자료(배상금)를 청구한 소송에 대한 승소 판결 - 역시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 우파의 주장보다 훨씬 편협하다.

이영훈 등이 주장하는 반일종족주의의 정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지적 분별력이 낮고, 그에 대한 수치심이 없는 가운데 거짓말의 수익이 크기 때문이다. 즉 저변에 물질주의가 흐르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야에서 물질주의의 근원을 추구해 들어가면 한국의 역사와 함께 샤머니즘을 만나게 된. “샤머니즘의 현실은 벌거벗은 물질주의와 육체주의이다. 이 주장도 이해하기 힘들다. 억지 궤변이다.
샤머니즘이란 자신이나 가족, 혹은 공동체에서 행사를 할 때 그 공동체, 즉 이영훈이 말하는 종족의 성공을 위한 행사를 뜻한다.
이영훈은 이어서 종족은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는 일방적이고 상당히 왜곡된 이야기를 주장한다. 모든 종족이 대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족이 이웃을 적으로 간주할 때에는 이유가 있다. 이웃이 자신들에게 잘못된 행동을 했는데도 이웃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 종족이나 민족은 이웃에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혹은 종족 내부에서 이웃에 대한 왜곡된 교육이 실시되고 이웃을 적으로 간주한다고 가르친다면 종족 구성원들은 이웃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_ 이영훈
이영훈이 말하고 싶은 부분은 한국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그들이 말하는 반일교육이다. 민족이 이웃에 적대 감정을 갖게 한 원인을 제공한 행위에 대해서 이영훈은 철저하게 침묵한다.

한국인의 정신문화는 이런 샤머니즘 즉 반일 종족주의에 긴박되어 있다고 이영훈은 호소한다.
그런데 이영훈의 논리에는 자신이 거짓말로 간주한 것들을 공격하기 위한 또 다른 허위나 은폐가 너무나 많이 동원되었다.
이영훈이 말한 내용, 종족은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종족 모두가 이웃을 악으로 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쓴 반일종족주의는 전체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반일 종족주의라고 폄하하는 이영훈의 논리는 일본 극우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적행위와도 같다.

1부 강제징용 문제에서 드러난 노예근성

1장 조선인들이 강제연행된 일본 탄광의 실상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이하 이우연)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2000년을 기점으로 일본 우파가 주장하기 시작한 논리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갔다’, ‘임금차별은 없었다’, ‘일부러 조선인을 어려운 노동에 배치하는 등의 민족차별은 없었다’, ‘식사 등의 차별은 없었다등 핵심 부분이 거의 흡사하다.
일본 우파의 논리적 목적은 19399월부터 시작된 전시 조선인 동원 체제에서 주로 일본 내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들이 일본인 노동자와 똑같은 대우나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있다.
이우연 등 소위 강제연행 허구론자들은 이런 일본 우파의 논리를 수용하여 그 바탕 위에 자신들의 새로운 논리를 추가해 나가고 있다.

일본 최대 탄광 미이케三池탄광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본질
미이케탄광은 일본인에게 친숙한 최대 탄광으로 1873년 일본 정부의 관영 탄광이 되었다. 광부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탄광 측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주변 형무소와 의논해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을 작업장에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그 이후 19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여러 대형 탄광까지 위험하고 힘든 노동에 죄수들을 투입했다. 당시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는 일본에서 천시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일반인 노동력 확보가 더욱 어려웠고, 이에 탄광들은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어 죄수 노동을 적극 도입한 것이다.
결국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 등을 전시 동원 체제로 연행해 탄광에 투입한 것은 이와 같은 죄수 노동을 계승한 것이다.
탄광에서의 노동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만큼 처음부터 강제적이었다. 일제는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 전쟁에 필요한 석탄을 채굴하려고 죄 없는 조선인, 중국인, 나아가 전쟁 포로 등을 동원해서 탄광 노동이라는 죄수 노예 노동을 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우연 등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당시 탄광에서는 탄광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나야納屋 제도로 불리는 노무관리 제도를 도입했다.
나야란 창고를 뜻하는 일본어인데, 창고 같은 곳에 광부들을 거주시키면서 관리인에게 관리를 맡기는 제도를 말한다.
나야 관리자는 광부들이 많이 일할수록 수입이 늘어나기 때문에 광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쉴 틈조차 주지 않고 광부들을 탄광 노동에 투입했다.
나야 제도하에서 광부들의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는데, 탈출을 시도한 광부들에게는 무조건적인 폭행이 가해졌다.
결국,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와 대규모 탄광들의 죄수 노동 정책이 나야 제도하에서 광부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들의 강제연행과 강제 노동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일본인들도 기피하는 노예 노동에 조선인 등 타민족을 강제적으로 동원하였다.
일본인들에게 노예노역이었던 탄광에서의 지옥 같은 착취 중노동을 타민족에게 시켰다는 사실을 강제연행 허구론자들은 왜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18839월 미이케탄광 오우라大浦갱도 내에서 죄수들이 나야 제도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나야 관리자들은 폭동 진압을 종식시킨다는 명목으로 갱 밖의 죄수들을 모두 죽창으로 찔러 죽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탄광의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889년 대기업 미쓰이三井가 미이케탄광사를 만들고, 1893년에는 미쓰이광산합명회사(이하 미쓰이광산)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미이케탄광 경영을 시작했다.
미쓰이광산은 일본의 극빈층을 중심으로 일반 광부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해 취업시켰다. 하지만 대부분은 중도에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야 제도라는 노예 노동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미쓰이광산은 나야 제도를 폐지하고 나야 관리자 대신 광부들의 생활지도를 하는 감독관을 두어 도주 방지에 주력했다.
그러나 탄광 노동이라는 중노동 때문에 광부들의 도주는 끊이지 않았다. 이는 취업할 때의 이야기와는 달리 저임금에다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이었다.
전시동원 기간에 미이케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 다수가 탄광에서 도주했는데, 탄광 노동자가 도주하는 현상은 1945년 환경이 개선되지 않았던 일본 대부분의 탄광이 비슷했다.

1946년 일본 후생성 근로국에 의하면 1940년부터 미이케탄광으로 잡혀간 조선인 연행자는 총 9,264명으로 조사되었다. 반면에 중국인은 2,480명 정도였고, 포로는 총1,700명이었다. 194411월을 기준으로 한 광부의 숫자는 일본인 약 17,000, 조선인 3,459, 중국인 917, 포로 1,117명이었다.
194411월 기준, 미이케탄광으로 연행된 9,000명 중에서 38% 정도인 3,459명만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통계는 계약 만기로 귀국한 사람과 도주한 사람 등 중도 퇴직자를 뺀 숫자이다.
19434월에 연행된 이강원 씨의 증언, 194311월에 연행된 이종필 씨의 증언, 19455월에 징용된 신용재 씨의 증언으로 집단적 연행이 실시되고 다음과 같은 여러 사실이 확인되었다.
부상이 일상적이고 일을 쉬면 식사량이 줄어들었다. 탄광 측이 조선인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폭력적으로 관리했다. 조선인들은 강제적으로 저축해야 했다. 장시간의 과중 노동으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주하는 조선인들이 속출했다. 즉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노예 사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장 강제징용의 진실은 무엇인가

일본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 데려간 곳은 주로 탄광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측이 처음부터 강제연행의 대상으로 삼은 조선인들은 젊고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 젊고 건장한 여자들위안부근로 정신대로 끌려갔다.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의 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이라는 약한 입장에 있는 젊고 건강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했다. 전쟁 시 동원이니 당연하다는 논리는 타당치 않다. 전범기업들은 조선인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만 신경을 썼고, 일본인들과 평등한 대우를 해주지도 않았다. 강제로 시킨 저축은 계약 기간 만기가 된 조선인 노동자에게만 돌려주었고, 도주하거나 중도 퇴직자의 저금은 모두 기업이 가로챘다.
작업장에서의 대우가 일본인과 조선인이 평등했다는 이우연의 주장은 허구민족차별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예컨대 일본인들은 연령별, 작업별로 임금이 결정되는데 반해, 조선인 첫 임금은 일률적으로 일본인 만 16세 광부에게 주는 최저임금으로 책정되었다.
조선인 노동자의 불만이 쌓여서 패전 후에도 그 한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불평등한 대우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일제강점으로 인해 일어난 부당한 동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민족을 가담시킨 일제의 만행 때문이다.

1965년 청구권 협정과 함께 일본이 지급한 무상 3억 달러의 보상금으로 모두 탕감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일본이 당시 보상금을 지급할 때 생환자, 즉 살아서 귀환한 자에게 보상금을 줄 수 없고 사망한 자에게만 준다고 했다. 따라서 1945년 시점에서 생존해 있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의 지급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우연이나 일본 우파들은 절대로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일부 부분적인 사실만을 부풀려 그것이 마치 전체적인 진실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일본 우파 논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구제하기 어렵다. ‘노예 근성이 정신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이하 주익종)7가지 이유를 들어 한일회담(1951~1965) 당시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몇 가지 주장을 따져보자.
국제법이나 국제관계에서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인데, 이는 가해자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 대법원 판결(신일본제철의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1억 원 위자료 지급 판결)은 개인 대 기업의 재판을 나라 대 나라의 재판으로 왜곡한 것으로, 본래의 개인과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일본 기업은 당연히 한국인 피해자 개인에게 배상해야 마땅하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과 연합국이 맺은 조약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피해국이 아니라 단지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이었으니, 일본은 한국이 일방적으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익종의 논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는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피해국 당국 및 그 주민의 청구권 처리는 일본과 피해국 당국 사이에서 특별히 결정하는 주제로 한다고 밝혔다.
(……)
“1965417일 한국 측은 이동원 시이나 합의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합의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합의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일 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입장이 아니다. 비록 국가에 의해 국민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주익종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의 과거사가 매듭지어졌고 청산되어졌음을 한국 측이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01810월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되었을 때 당시 일본 외무상 고노 타로(河野太郞, 20213월 현재 수상)1114일 일본 국회 외무위원회에 참석해 (201811월 시점에서도)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개인 청구권이 법적으로 구제받지 못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항상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라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뜻은 개인이 해당 기업에 보상이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불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에 대한 배상을 대법원이 명령했기 때문에 국가는 이번 판결 문제에서 빠지고, 전범 기업들이 성실히 판결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2부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최전선 성노예 제도

1장 위안부 관련 문서의 중요 부분을 은폐하는 사람들

이영훈은 1916년 이후 조선 내에서 공창제가 대중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위안부로 나간 여인의 상당수가 기생 양성소인 권번 출신이거나 요리옥의 기생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410월의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조선인 위안부들이 속아서 버마(미얀마)까지 연행된 사실을 밝혀놓았다. 이들은 대부분 매춘과 관계없는 여성들로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이영훈은 이 <포로 심문 보고서>의 핵심 부분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왜곡하고 조선의 위안부는 기생이나 조선의 공창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이영훈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여성들이 취업 사기로 속아서 버마로 연행되었고, 본인이 원하지 않은 매춘을 강요당했지만, 전차금 때문에 도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성을 착취당한 위안부의 상황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인용해 위안부가 성노예였음을 부정했다.
일본의 우파들은 위안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매춘부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주장도 이에 가깝다.

연합군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위안부들은 조선인 위안부들보다 안전한 후방 지역에 배치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그랬다면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최전선에 배치했다는 민족적 차별을 자행했던 것이다.
아무도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최전선에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선정한 포주들이 조선인 여성들을 취업 사기로 속여서 연행했다는 사실은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게 아니라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 우파나 한국의 신친일파들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인권유린주의자들이다.

2장 그릇된 위안부논리를 해부하다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공창제에서 만들어졌고 위안부들은 공창이었다고 하는데, 그 주장은 크게 잘못된 이야기이다.
일본군은 처음부터 작부를 모집하라고 업자들에게 지시했다. 즉 사창으로 취급할 여성을 모집하라는 지시였다.
작부란 일본의 요리점이나 술집에서 손님에게 술을 접대하는 여성으로, 손님의 요구에 따라 성매매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공창이 아니라 사창이었다.
이처럼 위안부제도가 사창인 작부 제도 개념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제도에는 통일된 규칙 자체가 없었고, 부대마다 제도 운영 방법이 달랐다.

일본군 위안부제도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공창제 흐름에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이영훈의 글 흐름은 일본의 우파학자들이 주장해온 내용과 거의 똑같다.
특히 한국의 위안부가 일본 관헌에 의해 강제연행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하타 이쿠히코의 위안부와 전장의 섬(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조선의 공창제와 일본의 공창제, 그리고 세계 각국의 군이 관여한 매춘 시설들을 서술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제도 역시 그중 하나이므로 문제 삼을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과 유사하다.
하타 이쿠히코의 위안부와 전장의 섬의 서술 목적은 한마디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기타 매춘 문제와 섞어 논하면서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범죄성을 은폐하는 데 있다.
이영훈 역시 여성들에 대한 취업 사기나 강제연행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로 중간업자들이 저지른 범죄이므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에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논리가 하타 이쿠히코의 핵심적 주장이다. 그러므로 이영훈의 일본군 위안부문제 서술방법이 하타 이쿠히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영훈은 해방 후 한국에서 위안부로 불린 여성들을 언급한다. 이들은 사창가 여성들로 모두 한국인들이었으며, 해방 후 한국 정부가 실태 조사를 했을 때 명칭을 위안부라고 했을 뿐이다. 이들 사창가 여성들은 위안부는 사창가의 매춘부라는 도식을 만들려는 이영훈의 속마음과는 달리 일본군 위안부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영훈은 한국전쟁 중 한국에 한국군 위안소, 위안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서술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사창가 여성으로 밝혀졌으며 강제연행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휘하 장병에게 위안부를 제공하는 일 그것은 전쟁의 문화라고 이영훈은 말한다.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제도 자체가 전쟁터 문화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이영훈의 물타기 서술방법우리 안의 위안부라는 글에서 기지촌 여성에게로 향한다. 그렇지만 기지촌 여성들 절반은 미군과 결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시작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취업 사기와 같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성매매를 강요당한 경우와는 전혀 시작부터 계기가 다르다.
항상 총이나 칼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는 이영훈이 거론한 1945년 이후 사창가의 위안부들, 한국군의 위안대 여성들, 기지촌 여성들과는 다르다.

한국의 성매매 문제와 일제강점기의 위안부문제는 그 억압성이나 폭력성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반일종족주의저자들은 그 차이를 무시했다.
그들은 일본이 역사적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서 생긴 반일 감정을 한민족의 미신이나 샤머니즘 같은 것이라고 갖다 붙여서 왜곡한다.
일본 우파는 과거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홍보와 연구, 집필, 언론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다.
반일종족주의저자들은 종족주의라는 말을 매우 교묘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신도 사상이야말로 일본식 종족주의이고, 일본이 바로 신도 종족주의의 나라인데,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말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신도나 신사의 사상은 일본식 샤머니즘이다. 그런 일본식 신도 종족주의에서 나오는 주장들이야말로 일본 신도가 국가 종교였던 1945년까지의 일본을 이상형 국가로 보는 일본 우파의 주장과 동일하다.
일본식 신도 종족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일본의 우파이자 역사 수정주의자들이다. 그런 일본 우파와 같은 주장을 하는 한국인 등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일종족주의저자들은 단어 하나만 바꾸면 자신들에게 딱 들어맞는 명칭을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3장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문옥주가 알려주는 성노예의 실태

16살의 가을, 하루코라고 일본식 이름을 쓰는 조선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인 헌병과 조선인 헌병 그리고 조선인 형사가 이유도 없이 문옥주를 헌병대기소로 연행해 심문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헌병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으므로 문옥주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문옥주의 아버지가 항상 헌병에게 쫓기고 다녔으니, 문옥주에게 있어 헌병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다음날 문옥주는 소녀 한 명과 함께 다른 일본인 헌병과 조선인 헌병에 인도되었고, ‘아가쓰키라는 이름의 열차를 탔다. 헌병 두 명은 계속 문옥주와 소녀를 감시했다. 신의주에 도착하자 열차를 갈아탔고 감시 역할을 하던 두 사람은 교체되었다. 23일 정도가 지난 후 도착한 곳은 북부 만주의 동안 성이었다. 연행된 위안소는 큰 민가였고, 20명 정도의 조선인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주인은 60세 정도의 조선인 남자였다. 매일 울면서 20~30명 정도의 일본인 병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문옥주가 끌려간 곳은 조선의 독립군과 싸우는 최전선이었다. 만주국 동안성에서 1년 정도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한 문옥주는 자신을 마음 들어 하는 헌병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도항 증명서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주 동안성 위안소에서 탈출한 문옥주는 기생 일을 하다가, 19427월 일본군의 군속으로 식당에서 근무한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버마로 가서 위안부가 되었다.
문옥주의 기억으로는 두 달에 걸쳐 대만 사이공(베트남)싱가포르버마 순으로 항해해 버마 랑군에 도착했다. 1942820일경이었다.
문옥주 일행 17명은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7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만달레이로 이송되었다. 일본군 제55사단 방패 8400부대였다. 이제 이들은 군인 군속 외는 출입금지로 되어 있는 일본군 전용 위안소로 들어가 위안부가 되었다.

아이들은 천지가 뒤집힌 것처럼 놀랐다.” “17명은 일제히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위안부였다는 것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다. 나는 전생에 어떤 나쁜 짓을 했으니 이런 응보를 받았는가, 라고 생각한다. / 나는 그때 열심히 위안부를 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노래를 부르면서……. 폭격받아 도망치거나, 정글 안을 며칠이나 굶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정말 기가 막혔다. /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 죽지 않았으니 그것으로도 운이 좋았다. 아버지가 나를 살려주었으니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아카브에서, 사이공에서, 랑군에서 몇 번이나 죽을 경험을 했지만 죽지 않았으니……. 대구로 돌아온 후에도 얼마나 육체를 사용해서 일을 해왔는지, 대구의 친구들이면 누구나 얼마나 내가 고생해서 가족 모두를 돌봐주었는지를 알고 있다. _문옥주

그런데 이영훈은 유언과 같은 위의 말을 조금씩 왜곡해서 소개했다.
예를 들어 나는 그때 열심히 위안부를 했다는 그녀의 말을 이영훈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왜곡했다. 문옥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위안부 생활을 한 적이 없고,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속아서 위안부가 된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자신의 처지를 토로했다. 그리고 위안부생활을 죽을 만큼 참고 견뎠던 것이다.
더욱이 이영훈은 그녀는 죽는 날까지 결코 일본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물론 문옥주는 일본 군인들 중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다들 고생해서 불쌍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애인이었던 야마다 이치로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함께 지냈던 일본 군인들에게 한 말이다.
문옥주는 모든 일본 군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문옥주는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운동을 하고 싶다.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일본으로 가서 위안부시대를 증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항상 차가웠다. 국회에도 갔다. 미야자와 총리가 우리에게 사죄했는데, 왜 우리는 문전박대를 당해야만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내가 일본으로 가서 돌려달라고 하지 않아도 일본 정부가 (내 예금을) 돌려주러 오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정말 기가 막힌다.”라고 말했다.

이영훈은 위안부가 일본의 전쟁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당시 일본 형법을 기준으로 해도 그들은 범죄자다. 당시의 형법 제226조 등을 보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형법 제226: 제국 외로 이송하는 목적으로 사람을 약취 또는 유괴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한다. 제국 외로 이송할 목적으로 사람을 매매하여 또는 피유괴자 혹은 피매자를 제국 외로 이송한 자도 마찬가지다.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공창제가 아니라 형법 제226조를 어기고 약취, 유괴에 의해 이루어진 일본 정부, 일본군, 조선총독부가 전쟁 당시 저지른 형사 범죄다.

4 ≪반일종족주의 ‘위안부의 관련 주장 비판

이영훈은 위안부문제에 있어서 확실하지 않은 숫자를 늘어놓았다.
이영훈은 위안부는 대개 병사 150명 당 1명의 비율로 충당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병사 100명 당 1명을 배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해군 보고서에는 70명당 1명 정도였다. 그러므로 위안부 배정 비율은 병사 70~150명 당 1명의 위안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영훈은 근거 없이 병사의 위안소 방문을 월 1회로 계산하여노동 강도는 하루 5명이라고 거짓말을 썼다.
실제로는 병사들이 대략 일주일에 한 번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게 배정되었다. 게다가 장교들은 매일 이용이 가능하였으니 병사 150명 당 1명의 위안부비율을 가정하더라도 각 위안부들은 하루 2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으며, 150명의 비율의 3분의 2 정도로 계산해도 14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이영훈은 위안부의 인원수가 20만 명이라는 것이 허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위안부총수를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 근거는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이영훈은 위안부가 병사 150명 당 1명의 비율이었고, 전 일본군은 280만 명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앞에서 본대로 150명 당 1명은 설득력이 없으며, 280만 일본군 숫자는 1942년의 숫자에 불과하다.
통계를 보면 1938년부터 1940년까지의 일본군 병사 인원수는 205만 명이었고, 1941250만 명, 1942280만 명, 1943310만 명, 1944470만 명, 1945, 720만 명이었다. 그러므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 인원수는 한 해 평균 약 380만 명이었다. 이 숫자를 100으로 나누면 1년에 평균 약 38,000명의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위안부들은 형식적으로는 기한이 있는 성노예였다. 짧은 사람은 6개월, 길어도 2년 정도로 전차금을 갚아서 자유의 몸을 갚아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평균 1~2년에 한 번씩 위안부가 교체되었다고 여겨진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간 매년 38,000명의 위안부가 1년에 교체되었다면 위안부총수는 304,000명이고, 평균 2년마다 교체되었다면 152,000명이다.
그들 중 조선인 위안부는 통설 40%로 보는데, 그러면 그 숫자는 약 6만 명에서 12만 명이 되는 것이다.
이영훈은 근거 없이 조선인 위안부를 20%로 보고 결론적으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조선인) 위안부의 연인원은 (중략) 7,200명쯤으로 짐작해봅니다만, 무슨 근거가 있는 추산은 아닙니다라고 썼다.
이영훈의 이러한 계산은 일본군 300만 명에, 위안부 총수 2만 명, 일본군 병사 30명에 위안부 1명의 비율로 2년마다 위안부 교체라는 1999년에 주장한 하타 이쿠히코의 가장 적게 계산한 위안부 계산법에 가까운 숫자를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연구원 주익종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쓴 글에서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를 통해 한국의 위안부문제는 1990년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1989년 요시다 세이지의 저서 나의 전쟁범죄(일본판 1983, “나는 제주도 성산포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을 목격했다”)의 한국어판이 한국에서 출판되고, 199011월에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규탄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결성되었으며, 19918월 일본군 위안부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한국에서는 일본군의 성노예라는 가공의 새 기억이 만들어졌다고 주익종은 주장했다.
“1970년대까지 위안부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을 때에는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40년도 넘게 지나 이제 그런 사람들이 없어지고 그 기억이 희미해지자 가공의 새 기억이 만들어지면서 위안부 문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_주익종
주익종의 말과는 달리 1990년대에도 위안부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다. 전쟁을 경험한 생존자들이 김학순의 고백에 반론하지 않았던 이유는 김학순의 이야기가 주익종이 말하는 가공의 새 기억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주익종은 정대협이 위안부를 정신대와 혼동하여 패전 후에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선입관을 갖고 결성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하지만 정대협 결성 당시 (199011) 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를 몰랐다는 서술은 주익종의 주장일 뿐이다. 정대협 결성 당시 그 이전에 이미 위안부정신대의 일부라는 인식이 일본에 상당히 퍼진 상태였으며, 1984년 송건호가 일본에서 출판한 일제 지배하의 한국현대사에서도 위안부정신대의 일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서술하였다.
일본의 위안부학살 역시 중국 국민당 기관지 소탕보’(1944918) 등 일부 언론의 기사로 남아 있으며, 미중연합 제54군이 보고한 정보 문서에 “913일 밤 일본군이 (텅충) 성내에 있는 조선 여성 30명을 총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익종은 위안부가 속아서 위안부가 된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차금을 상환하거나 계약 기간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는 허가가 났기 때문에 성노예라기보다는 성노동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익종은 일본군 위안부제도가 성노예제라면 조선의 공창제, 해방 후의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모두 성노예제라고 해야 한다면서 일본군 위안부제도만을 성노예제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영훈과 똑같은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첫째, 조선인이나 대만인 등 일본 민족이 아닌 타민족을 해외의 침략 지역이나 격전지에 배치했다. 조선의 공창제나 해방 후의 사례는 모두 조선/한국 내에서 같은 민족인 한국 여성만을 동원했다. 일본군 위안부제도가 타민족에 차별적인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둘째, 일본군은 생명의 위협이 큰 해외 최전선에 주로 조선인 여성들을 배치했다. 안전한 후방부에 일본인 여성들을 배치했다는 점에서 민족적 차별을 했으며 조선 여성들의 목숨을 경시했다. 실제로 적군의 폭격으로 많은 조선인 위안부가 목숨을 잃었다.
셋째, 일본군 위안부들은 공창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포주와 위안부가 직접 계약하게 했으며, 실제로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통제했다.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여성의 인권을 완전히 짓밟은 제도였고, 당시 일본이 가입한 국제 조약에도 위배되는 제도였다. 옛날이었다거나 전쟁 중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주익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했을 때 독일 여성 중 최소 5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했지만 별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일본군 위안소도 문제가 없었다는 이상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물론 독일은 이에 대해 소련에 어떤 문제 제기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소련 병사의 독일 여성에 대한 강간 사건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독일이 이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같은 사례는 일본에도 있다. 현재 원폭 사용은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 그러나 19458월 일본에 투하된 두 발의 원폭에 일본은 어떤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연합국의 원폭 투하는 당시도 금지되고 있던 비전투 일반 국민에 대한 대량 살육 행위다. 그러나 피해자 일본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독일이나 일본이 연합국에 입힌 침략 전쟁범죄가 훨씬 컸기 때문에, 두 나라는 심대한 전쟁범죄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여성 강간과 원폭 투하에 어떤 문제 제기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은 식민지 피해국이다. 그러므로 조선인 여성에 대한 일본 정부, 일본군, 조선총독부의 집단 성폭행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더는 왜곡해서는 안 된다.

주익종은 일본 정부 편을 들면서 마지막 속내를 피력했다. 정대협과 문재인 정부가 같은 입장이라고 하면서 한일관계를 파탄 내어 한미일 삼각협력 체제를 무너뜨릴 거라고 주장한다. 이는 아마도 그들의 속셈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권문제와 안보문제를 일부러 혼동하는 척하는 것 같다. 일본 우파가 원하는 대로 신친일파는 안보문제의 협력을 거론하면서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자 문제와 같은 인권문제의 대폭 양보를 요구한다.
한국의 신친일파는 일본이 제대로 사죄를 하고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했을 때, 그 후에 전개될 진상 규명으로 자신들이나 선조의 친일 행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3부 일제 강점은 원천적으로 범법 행위였다

1장 독도에 대한 거짓 주장들

이영훈의 독도에 대한 서술은 그동안의 독도 연구 성과를 전혀 모르면서 마치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우기는 글이다.
예를 들어 독도의 기초문헌인 세종실록지리지간행연도가 1454년인데 1451년으로 썼고, 일본이 독도를 불법 편입한 연도인 1905년을 1904년으로 잘못 썼다.
이영훈은 조선왕조는 1417년 이래 울릉도를 비웠습니다라고 했지만 태종이 울릉도를 비우라고 명령을 내린 해는 1403년이었다.
사실관계에 있어서도 틀린 것이 많은데 그는 삼국사기신라 본기 지증왕 13(512)에 나오는 우산국을 사람들이 독도라고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산국은 울릉도와 독도를 칭하는 나라였다. 이는 보통 한국 사람들은 삼국사기우산국은 울릉도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이영훈은 독도라고 사람들이 주장한다고 우기고 있다. 그의 억지 주장이다.

이영훈은 조선시대에는 독도에 관한 인식이 없었는데, “지난 20년 사이에 반일 종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인식 자체가 굉장히 잘못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독도를 우산도라 불렀고, 날씨가 맑을 때만 보이는 섬이라고 정확하게 묘사해 놓았다. 울릉도에서 날씨가 좋을 때 보이는 섬은 옛날에도 지금도 독도 이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된 우산은 정확하게 독도이다.

이영훈은 우산은 원래 나라 이름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것을 섬으로 간주하는 오해가 생겼다. 그러니까 우산도는 실재하지 않은 환상의 섬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일본 측 주장과 흡사하며,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에게서 나온 망언일 뿐이다.
우산국이라는 말은 울릉도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육지 사람들은 우산국을 울릉도라 불렀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우산국울릉도라는 두 가지 이름이 존재했다.
1412년 울릉도에서 도민 12명을 태운 배가 표류해 강원도 고성(高城) 어라진(於羅津)에 왔다. “우리는 유산국도에서 왔다. ……라고 했는데 우산국유산국도라고 잘못 듣고 기재한 것으로 추정한다.
1417년 안무사 김인우는 울릉도를 수색하고 귀환했을 때 울릉도를 우산국이라 하지 않고 우산도라 하였다.
1438년 조선인 관리인 호군 남희와 사직 조민이 무릉도에서 돌아올 때 66명의 도민을 데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울릉도를 무릉도라고 불렀다.
1438년에 울릉도 도민을 모두 육지로 데려와서 울릉도를 비워놓은 데 성공한 조선왕조는 이후 5년에 한 번씩 울릉도에 배를 보내 울릉도와 그 주변을 돌며 수색했다. 이후 울릉도와 그 주변을 우산국으로 불렀고, 우산국의 중심 섬인 울릉도를 우산도라고 불렀던 도민들은 거기에 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육지에서 부르는 울릉도와 무릉도라는 이름만이 남았다.
1454세종실록지리지간행 당시에는 육지에서는 울릉도는 무릉도라 부르고 우산도라는 이름은 독도의 이름으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산과 무릉 두 섬은 정동(正東)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가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고도 했는데 지방은 100리다.” _세종실록지리지 

이영훈은 조선왕조는 울릉도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산도에는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494년 조선왕조는 무신 장한상을 울릉도로 파견 울릉도 사적이라는 글 속에 독도 조사 내용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16965월 안용복이 울릉도, 독도에 가서 그곳에 있던 일본인들을 쫓아냈고, 일본인들이 독도를 송도라고 불렀다는 사실과 안용복이 송도는 우산도이고, 이 섬도 조선 땅이라고 천명한 내용이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8세기에는 조선왕조는 3년에 한 번씩 그 주변을 수색했다.
영조 46(1770) 동국문헌비고<여지고>에는 우산도가 현재의 독도임을 정확하게 서술해 놓았다.

여지지(輿地志)가 말하기를 울릉ㆍ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왜가 말하는 송도(松島)이다.” _동국문헌비고<여지고>

<여지고>의 근거는 신경준의 강계고疆界考라고 알려져 있다.
우산국=울릉도=우산도(독도)+무릉도(울릉도)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해 확정되었다.

19001025일 반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여 도감을 군수로 승격시켰고 군의 이름을 울도군이라고 정했다. 현재 울릉군의 시작이다.
그리고 울도군의 범위를 울릉도와 죽도, 석도라고 규정했다. 죽도란 일본이 말하는 다케시마가 아니라 울릉도 동쪽 2km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을 말한다.

이 칙령에서 말하는 석도가 바로 독도인데, 이영훈은 1900년 칙령 이후로 우산도가 그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면서 우산도는 환상의 섬이라고 주장하는 독도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1908년 대한제국이 출판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우산도가 우산국의 땅, 즉 한국의 영토라고 기재되어 있고, 우산도는 일본이 말하는 송도, 즉 독도라고 기재되어 있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러면 왜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는 우산도라는 명칭 대신 석도라고 기재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18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고종은 울릉도를 유인도로 바꾸기 위하여 이규원을 감찰사로 임명하여, 울릉도로 떠나기 전에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우산이란 우산국의 도읍 이름이라는 의견을 이규원이 피력하자, 섬의 명칭에 혼란이 생길까 염려한 고종은 그 자리에서 우산도라는 당시의 독도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
고종은 송도, 죽도라고도 하는데 우산도와 함께 세 섬을 통칭해서 울릉도라 하였다라고 다시 말했다. 즉 고종은 우산도를 옛날처럼 울릉도의 뜻으로 말했고 여기에 죽도와 송도를 합해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1882년에 독도의 옛 이름인 우산도라는 명칭은 고종과 이규원의 대화를 끝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이영훈이 말한 그렇다면 우산은 왜 버려졌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이다.

석도(石島)1882년에 (우산도라는) 이름을 상실하고 이후 울릉도 사람들이 돌섬이라 부른 독도를 한자 이름으로 부른 명칭이다.
1882년 고종은 40년 만에 울릉도에 관리를 보냈는데, 거주민이 40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전라도 사람이었다. 강원도나 경상도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았다.
전라도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승전 이후 우수한 배 만드는 기술이 전해지고 있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 만든 단단한 배를 타고 전라도에서 멀리 떨어진 울릉도까지 몰래 왕래했고, 그중 40명 정도가 울릉도에 정착했다. 고종은 그들을 용서해주고 울릉도의 첫 번째 도감이 그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이후 전라도 사람을 중심으로 울릉도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주 처음에는 도민이 120명 정도였으며, 대부분 전라도 사람들이었기에 돌섬을 전라도 방언인 독섬으로 불리게 되었고 한자 표기도 석도(石島)라고 써서 중앙에 보고되었다
1403년 태종이 내렸던 울릉도 무인도 정책(공도 정책)480년 만인 1882년 유인도 정책으로 바뀌었고, 이후 울릉도는 전라도 사람들이 개척하여 이 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영훈은 일본이 독도를 자국에 편입한 해를 1904년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이 독도를 불법 편입한 해는 1905년이다.
1904925,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가 울릉도에 기항했을 때 일본 군인이 울릉도 주민에게 멀리 보이는 섬의 명칭을 물었다. 맑은 가을 날씨에 독도가 울릉도에서 잘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울릉도 주민들은 멀리 보이는 섬의 이름을 독도獨島라고 써서 일본 군인에게 알려주었다. 그 기록이 일본 도쿄에 있는 국립 공문서관에 있는 군함 니타카 행동 일지라는 공문서에 남아 있다. 독도라는 명칭이 일본에서 처음 쓰인 공문서기록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독도를 리안코르트 열암이란 프랑스식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으니, 일본 영토라고 인식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리안코르트 열암이란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호 선원들이 독도에 붙인 이름 리앙쿠르 락스의 일본식 발음으로, 일본 어부 등은 랸코도로 줄여서 불렀다.

일본 정부는 19052월 독도를 시네마현으로 부당하게 편입시킨 다음, 일본 영토로 변경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883년부터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발행한 수로지에 그 내용이 들어 있다.
1905년까지 독도는 조선수로지리안코르트 열암이라는 명칭으로 조선 동해안에 항상 표기되었다.
그런데 19066, 일본 해군성은 독도를 조선수로지에서 일본수로지로 갑자기 바꿔서 기재하여, 일본 북서쪽 해안에 있는 일본의 한 섬으로 정했고, 이후 독도를 조선 소속에서 일본 소속으로 변경해버렸다.
독도는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수로지1905년까지 조선(한국)으로 명시되었지만, 19052월 일본 정부가 시네마현으로 부당하게 편입시킨 다음, 일본 영토로 변경했다.

이영훈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어떤 언급도 없이,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에 대해 중앙정부는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중앙정부는 일본의 독도 편입을 부당한 조치로 결론을 내렸고, 춘천군수를 통해 울도군수에게 지령 제3호를 하달했다.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설은 사실무근이다. 일본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조사하여 보고하라.”

뿐만 아니라 이영훈은 지금까지의 일부 증거에도 불구하고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의 고유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보여줄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영훈은 일본 측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러스크 서한을 꺼내 든다. 러스크 서한은 일본 외무성 사이트의 독도 관련 페이지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그들의 억지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대표적인 거짓 증거자료이다.
러스크 서한은 1951810일 미 극동 담당 국무차관보 딘 러스크 명의로 주미 한국대사관으로 보낸 서한으로 독도 또는 다케시마 내지 리앙크루 암()으로 알려진 섬에 관해서는, 통상 무인(無人)인 바위섬은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조선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결코 없으며,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네마현 오키섬 지청의 관할 하에 있다. 이 섬은 일찍이 조선에 의해 영유권 주장이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는 내용이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이 부분을 크게 선전하면서 독도가 일본 영토로 남았다고 주장하는데, 이영훈도 일본 측의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이라고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본이 제공한 정보를 말한다.
한편 미국 외의 연합국들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 영토는 1946년 연합국 사령부가 일본 정부에 송부한 훈령인 SCAPIN 677호에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연합국이 설치한 맥아더 라인에서도 독도는 분명히 한국 측 수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변경이 있을 시에는 연합국 대표들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미국은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으므로 독도는 한국 영토로서 그대로 남았다.
1953129일 러스크 서한과 관련 있던 덜레스 국무장관은 비밀문서를 통해 독도에 대한 미국의 견해는 많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서명국 중 하나의 견해일 뿐이라고 밝혔고,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견해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내용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그 인식을 토대로 1954년 이래 미국은 미국지명위원회 사이트를 통해 독도의 주권국가는 한국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2장 일제강점이 원천적으로 무효인 이유

일제강점은 원천적으로 범법행위였다.
190511월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로 인해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침탈해버렸다. 을사늑약은 무효다.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국회가 없어서 황제의 윤허로 국가의 대사가 결정되었다.
을사늑약의 체결을 토대로 조인된 19108월의 한일병합조약도 당연히 무효다. 원천적으로 무효인 협정이나 조약이 1945815일 일본 패전까지 유효인 것처럼 시행되었다.
일본 측은 독도가 1905222일에 시네마현 오끼섬에 편입되었으므로 을사늑약 이전의 문제라며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 국내법으로 볼 때만의 이야기다.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일본이 한국에 알린 시점이 19063월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이므로 국제법상 독도 편입 자체가 무효다.
1965622일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한국과 일본 간에 “1910822일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조문은 19108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비롯해 그 이전에 체결된 한일 간의 모든 조약과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뜻이다.
한국 측의 법적 입장은 일제강점이 어디까지나 불법이고, 당시의 조약 및 협정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한국인 강제 징용자 문제, 일본군 위안부문제, 한국인 학도병과 한국인 징병자 문제도 모두 일제강점기에 일제 침략이 원인이 되어 생긴 문제이므로 죄다 불법이다.
이처럼 한국의 입장이 분명한데도 신친일파들은 일본 측 입장을 옹호한다. 여기는 한국이다. 한국에는 한국법이 있다. 신친일파 청산은 국가의 존망과 연결된다. 친일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신친일파의 잘못된 사상도 바로잡아야 한다.

호사카 유지, 신친일파-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봄이아트북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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