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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_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이상경 지음2021-03-02 20:23
Writer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인간과 인간 사이 _머리말

나혜석(羅蕙錫, 1896~1948, 호는 정월晶月)은 근대미술사상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알려졌을 뿐, 여성작가와 여성해방론자로서의 면모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혜석이 썼던 계몽적 논설뿐만 아니라 <()된 감상기>를 포함하여 <이혼 고백장><신생활에 들면서> 등 당대 사회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글들은 여성으로서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식민지 조선사회를 살아간 구체적 경험에 근거해서 기존의 통념들에 도전하고 여성에 대한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이었으며, 그의 파란 많은 삶은 그러한 자기의 이론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봉건적인 사회로부터 독립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개인의 확립이 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시절에, 나혜석은 여성화가로서, 여성해방론자로서, 그리고 여성작가로서 언제나 자신이 내딛는 한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 아직 조선 여성 대부분이 근대적 자의식을 가지기는커녕 그럴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근대적 자아를 확립하고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나혜석에게는 혜택이면서 한편으로는 커다란 의무였던 것이다.

여성에게도 자아가 있다는 것, 여성의 육체적 조건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여성의 입장에서 공론화시키겠다는 것, 그것이 물의를 일으키고 욕을 먹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여성의 역사에서 의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근대 조선 여성으로서 나혜석이 지닌 자의식이었다.

나는 18세부터 20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 우등 1등 졸업 사건, M과 연애 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 사건, 다시 K와 연애 사건, 황옥(黃鈺) 사건, 구미 만유 사건, 이혼 사간, 이혼 고백장 사건, 고소 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 이와 같이 사람 능력으로 할 만한 일은 다 당해보고 남은 것은 사람의 버린 것밖에 없다. 어찌하면 다시 내 천성인 순진하고 정직하고 순량하고 온유하고 부지런하고 총명하던 그 성품을 찾아볼까.”  _ 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수원의 나 부잣집(1896~1913)

나혜석은 189641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에서 태어났다. 나주 나씨 나기정(羅基貞, 1863~1915)과 수원 최씨 최시의(崔是議, 1860~1919) 사이의 5남매(계석, 홍석, 경석, 혜석, 지석) 중 넷째,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은 대한제국 말기에서 한일합방 초기에 이르는 동안 경제적 특권층으로 지배권력에 순응하면서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개명관료였다. 그래서 두 아들을 일본에 유학 보냈고 그 오빠들의 주장으로 나혜석 자매도 신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혜석은 일본 유학의 기회를 누릴 수도 있었다.

큰오빠 홍석이 둘째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자 둘째오빠 경석(景錫, 1890~1959)은 나기정의 대를 받아 아들 노릇을 했으며 나혜석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유학하여 화공학을 전공, 1914년 졸업한 그는 부모를 설득하여 여동생 나혜석을 일본으로 데려가 새로운 교육을 받게 했다.

나혜석은 열 살이 되었을 때인 19068월 집 근처의 삼일 여학교에 입학했다.

나혜석은 소학교를 다닐 때부터 집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연필로 그려보고 뒤란의 화초들을 사생하여 선생님께 보여 칭찬을 받았으며, 이것이 훗날 그가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나혜석이 어린 시절에 느낀 갈등이라면 억압받는 여성의 굴욕적 삶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축첩으로 어머니가 고통받는 모습을, 시집간 언니도 마찬가지로 고민하는 것을, 개명한 오빠에게 시집온 구여성인 올케언니의 불행한 삶을 곁에서 보았다.

조혼과 축첩이라는 서로 맞물린 봉건제도의 폐해는 본처이든 첩이든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엄청난 고통을 강요했다. 어린 나혜석에게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이런 경험들은 훗날 나혜석이 페미니스트로 자기 주장을 펴나가는 데 원초의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한 나혜석이니만큼 돈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강하게 지배하는지를 경험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돈에 대해 철저하지 못했다. 돈의 힘을 몰랐기에 여성의 자아각성을 주장하면서도 경제적 독립이 여성의 지위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다. 이 허술함은 뒤에 김우영과 결혼과 이혼 과정에서 드러나고 나혜석의 일생을 파멸로 몰아가는 데 한몫을 하게 된다.

나혜석은 19106월 열다섯 살에 수원의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91일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입학했다.

진명여학교에서 나혜석은 공부 잘하고 급장 노릇을 한 모범생이었다. 1913년 졸업성적은 전 과목 평균 99점이었다.

졸업 당시 혜석은 18, 지석은 16세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동생 지석은 잠시 일본 유학을 시도했으나 얼마 안 되어 시집을 가고, 나혜석은 오빠 경석의 든든한 후원 속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유학, 낯선 세계로(1913~14)

도쿄 유학시절은 나혜석의 모든 생각과 인간관계와 그에 따른 인생이 결정된 때이다. 이곳에서 나혜석은 새로운 서구 사상과 일본의 신여성운동을 접했으며, 유화를 접했고, 글을 썼다. 당대 최고의 조선 청년 지식인들을 만났고, 그중에서도 빛나는 인물이었던 최승구(崔承九, 1892~1916, 호는 소월)와 예술을 논하며 연애를 했다. 불행히도 그 애인을 병으로 잃고, 후에 남편이 될 김우영(金雨英)도 만나게 된다.

1910년대 전반 나혜석이 접한 일본사회의 지적 분위기와 도쿄 조선유학생들 사회에서의 교유 및 유학생들의 사고방식은 나혜석의 이후의 삶, 영광과 비극을 모두 결정짓는 것이다.

이 시기 도쿄 유학생들은 1910년대 후반 우리 근대 부르주아 계몽주의 문화의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근대적 민족운동인 191931운동의 주체가 되며, 그 이후에는 운동의 분화 과정 속에서 후에 민족개량주의로 나아가는 민족주의 우파와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좌파로 나뉜다.

나혜석은 그중에서도 민족주의 우파와 지적 궤적과 거의 동괘에 있되, 여성이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의 교유관계도 대개 이 테두리 안에 있었다.

1910년대 일본사회의 지적 분위기란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의 연애도덕론과 세이토샤’(靑鞜社) 동인들에 의해 주도된 신여성운동에 의해 여성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라 여성의 자아각성과 여성해방이 강조되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엘렌 케이의 사상은 입센의 인형의 집과 특히 1910년대 일본 유학을 경험한 세대의 연애관, 결혼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남학생의 경우는 구여성과 이혼, 신여성과 결혼, 여학생의 경우는 신남성의 첩이 되기도 마다하지 않음과 육체의 정조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음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고, 인습과 갈등하여 피 흘려가면서 근대적 개성의 확립을 추구해나갔다. 엘렌 케이의 흔적은 나혜석의 글 곳곳에 남아 있으며, 이광수의 소설이나 주장에도 맨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런 지적 분위기 속에, 변화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청춘의 피가 끓기 시작하는 나혜석이 있었다. 게다가 특별히 나혜석은 주목받는 존재였다. 우선 오빠 나경석이 있음으로 해서 남자 유학생들과 자연스럽게 교분을 맺을 수 있었다. 나혜석과 보통 이상의 인연을 맺게 되는 최승구, 이광수, 김우영이 모두 오빠 나경석의 친구이다. 최승구의 후배인 소설가 염상섭도 있었다.

청춘, 그 안과 밖(1914~18)

❍ ≪학지광에 글을 발표하면서 여성의 선각자로서 자기를 정립해 나가고자 하던 나혜석은 처음으로 가부장제의 굳건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아버지의 결혼 강요였다. 19152학년이 되어 그녀는 학교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결혼을 강요하면서 학비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1년 동안 여주공립보고의 교사생활을 한 뒤, 19164월부터 서양화 고등사범과 1학년으로 들어가 공부를 했고 1917년에는 같은 과 3학년이 되었다. 장래를 생각해 고등사범과로 옮겼을 것이다.

191512월 결혼을 강요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곧바로 도쿄 미술학교에 복학한 나혜석은 1916년 불행히도 약혼자 최승구가 병으로 죽자 일시적으로 발광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오빠의 주선으로 김우영과 약혼을 하지만, 사랑과 예술을 논할 수 있는 동반자를 찾아 이광수와 가까워지고 오빠의 반대에 부딪혀 그 관계를 정리하는 등 파란을 겪었다.
최승구의 죽음이 준 충격으로 나혜석은 한때 발광상태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1916년 초 병세가 위독한 애인을 병문안 갔지만(일본에서 전남 고흥까지), 공부하는 도중이었고, 미래가 소중했기에 하루 만에 돌아왔는데 곧 최승구가 죽었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소중했으나 그가 죽고 난 뒤에 돌이켜보니 공부는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자신의 공부 욕심으로 애인을 빨리 죽게 했다고 크게 후회를 했을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혜석은 한()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삶의 태도를 정한 것은 아닐까.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회적 관습 따위는 무시할 수도 있는 용기를 단련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 그는 나를 버리고 갔다. 그가 내게 모진 풍파를 안겨주고 멀리멀리 가버린 때가 이 봄밤이다. 내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아래윗니가 서로 딱딱 닿는다. 할 수 있는 대로 생각지 않으려고 눈망울을 일자로 굴려 잠을 청한다.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 그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할 뿐만 아니라 빛까지 가리어 어두컴컴하다. 아아! 소월아? 소월아?” _ 나혜석, <원망스런 봄밤>

그러면서도 1917학지광에 여성의 각성을 주장하는 두 편의 글을 발표했고 1918년에는 여자계를 창간하여 제3호까지 매번 소설을 발표했다. 그중 제2호에 발표한 소설 <경희>는 작가로서 나혜석의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이 한 편으로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당당하게 한 사람의 작가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절은 나혜석의 가장 화려한 시절이 되었다.

1917년 나혜석은 김우영과 이광수 사이에서 갈등했다. 오빠 나경석은 이광수가 친구이고 비록 문재(文才)를 떨치고는 있었지만 누이동생의 예술적 자질을 살려줄 수 있는 매부감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광수가 문벌도 없고 재산도 없는 고아라는 사실 때문에 반대했을 것이다. 나혜석은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이광수에게 마음이 기울었지만 한편으로 문벌 없고 병까지 있는 그와 일생을 함께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나혜석은 나경섭의 개입과 허영숙의 적극적인 의사표시로 춘원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나혜석 여권론의 핵심은 여성도 사람이다혹은 여자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데 놓여 있다.
20대 초반의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이라는 자각, 그 자각을 실천해야 할 책임과 의무, 그 실천에 뒤따를 모험과 실패에 대한 각오를 다지며 힘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죽든지 망신을 당하든지 실천에 나서겠다는 그의 부르짖음은 그 시기 모든 선각자들의 목소리지만 훨씬 더 비장하고 격하다.
이 비장함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여성의 외로운 각오와, 최고의 배필을 잃은 여성 나혜석이 더 큰 대의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을 추스르는 비통함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의 결과가 당대의 평범한 사람의 비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음을 스스로 만만찮은 현실안을 드러내 보인다. 이후 나혜석의 행적을 보면 나혜석 스스로 가치 있는 욕을 먹어가며 여성의 역사를 꾸민인물이 되었다.

자기를 세우는 길(1918~20)

19183월 도쿄미술여자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이듬해 121~27일까지 <매일신보>에 만평형식의 세시풍속을 그리면서 화가로 공식적으로 대중 앞에 자기를 내세웠다. 출발점부터 나혜석은 여성화가라고 하는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나이 만 24, 32일에는 31운동에 여학생들이 참가하는 계획을 논의하였으며, 자금을 구하고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33일과 4일 바로 개성과 평양을 갔다가 돌아와 8일경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가량 갇혀 있다가 84일 면소 결정을 받고 풀려났다.

5개월의 힘든 감옥살이 기간을 견디면서 나혜석은 인생에서 매우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마음만 잘 먹으면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자기 자신이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204,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은 여러모로 화젯거리였다. 최승구와 사별한 이래 나혜석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고 그런 점에서 김우영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제약과 현실적 계산 때문에 나혜석은 김우영을 결정적으로 내치지 못하고 질질 끌고 있는 상태에서, 어머니가 1919년 겨울 세상을 떠났다. 보호자 없이 혼자 남겨진 처녀에 대해 김우영의 부드러운 손길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고, 한편으로 주변의 권유와 압박, 첫 애인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혜석은 결혼을 승낙하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사랑만 뺀다면 김우영은 신교육을 받고 사회적 지위를 갖추었으되 유부남은 아닌, 흠잡을 데 없는 남편감이었다.

나혜석은 결혼에 임해서 김우영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아내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주시오.

이런 나혜석의 요구에 김우영은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신혼여행은 나혜석이 이끄는 대로 전라남도 고흥군의 오지에 있는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가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대신했다.

1920년에 결혼해서 1927년부터 1929년 사이의 구미 여행을 거쳐 1930년 이혼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나혜석의 생활은 조선사의 최상류층 여성의 생활이었다. 이제 그는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고, 서울에서 최초로 개인 유화전을 개최한 화가가 되었으며 계속해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특선과 입선을 하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식민지시대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외교관이 된 김우영이 부인으로서 은밀하게 독립운동가를 도와준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는가 하면 일제의 특전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구미여행을 하면서 바같세계를 경험하는 행운을 누렸다.

어머니의 길과 화가의 길(1920~21)

결혼 후 당혹스런 출산을 겪은 나혜석은 아기가 첫돌이 될 때까지 겪은 임신과 출산ㆍ육아의 경험을 19231<모된 감상기>라는, 내용과 형식 모두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글을 발표한다.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던 19217월에는 소설 <규원>을 발표했는데, 봉건적인 결혼제도와 정조관에 희생되는 구여성의 비극을 그린 소설이다.

1918<매일신보>에 연재한 만평과 1920신여자에 실은 목판화에서 여성화가의 눈을 뚜렷이 했다면, 목판화 <조조>(1920. 9)와 개척자(1921. 7)에서는 나혜석이 힘의 예술’, ‘민중을 위한 예술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에 호흡을 같이하고 있음이 분명히 보인다.

절정, 여성의 당당한 삶(1921~27)

1921년 나혜석과 김우영은 만주 안동현으로 이사했다. 나혜석 김우영 부부는 구미 여행에 오르기 전인 1927년 봄까지 햇수로 6년간 안동현에서 살았다. 이 기간은 나혜석 인생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나혜석은 여성화가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제 나혜석은 배운 대로 따라 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 세계를 가진 진정한 화가의 길에 대해 모색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다. 그런 만큼 여성으로서의 처지 때문에 더 큰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바로 이런 때에 구미 여행이라고 하는 출구가 열렸다.

구미여행, 진정한 예술을 찾아서(1927~29)

귀국, 그리고 이혼(1929~30)

자기를 잊지 않는 행복(1930~33)

날아간 청조(1933~37)

세간과 불륜 사이(1937~48)

나혜석 부부는 모스크바,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노르웨이 등을 관광하고 김우영은 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가고 나혜석은 파리에 머무른다. 나혜석은 파리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그림공부도 하고 박물관이나 전시회를 다니며 안목을 넓혔다. 이 자유롭고 개성적인 파리에서 나혜석은 최린을 만나게 된다. 인생의 절정에서 나락으로 가는 첫걸음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최린은 목소리가 크고, 정치가로 웅변술이 뛰어나고,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에도 박식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한시도 잘 짓고, 서화(書畫)에도 많은 취미를 가졌으며, 풍류를 가진 호걸풍의 남자였다. 나혜석은 이런 최린과 사랑에 빠지고 이는 이후 그의 나머지 삶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혜석은 그림, , 소설, 논설 등 각 분야에서 나서는 자리마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다는 선각자가 되었지만 그러한 재능이 그의 삶의 부유함과 안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귀국 후 파리 시절 연애 사건 때문에 이혼을 하지만 그 과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형식의 <이혼발표장>을 발표하면서 나혜석은 이혼 초기에는 아직 그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 관습과 제도는 그의 재능을 억누르고 그의 인생을 가난과 그리움이라는 절망의 나락으로 이끈다. 그는 봉건적 가부장제에 맞서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지만 남는 것은 점점 사라져가는 천부의 재능과 자식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나혜석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조선 현실에서는 너무 앞서가는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식민지 조선에서 자각한 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장애에 부딪치고 어떤 결과를 낳는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봉건적인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각성한 개인은 강고한 인습의 벽에 부딪쳐 오히려 더 고통을 받기 때문에 조선의 사회구조와 법률, 관습이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짜져 있는지를 처절하게 깨닫는다.” (자유스럽게 날고 싶었던 나혜석..... http://booklog.kyobobook.co.kr/hyunjung57/530133)

나혜석은 해방 후 1948, 생활고에 시달려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다 지켜보는 가족도, 눈을 감겨주는 따뜻한 손길도 없는 추운 겨울날 행려병자로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진보적 여성 운동가요, 당대의 문필가의 참으로 비참한 말로였다.

이상경 지음,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_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한길사, 2009

아껴 무엇하리 청춘을 나혜석

(……)
그러나 나는
장차 올 청춘이었던들
아꼈을는지 모르나
이미 간 청춘을
아끼지 않나니
(……)
청춘을
헛되이 보내었던들
아끼지 않을 바 아니나
빈틈없이 이용한 청춘을
아낄 무엇이 있으며
지난 청춘을
아껴 무엇하리요
장차 올 노경이나
잘 맞으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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