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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공정하다는 착각≫-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마이클 샌델2021-02-08 21:50
Writer

공정하다는 착각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 _마이클 샌델 교수를 대신하여 _김선욱

이 책은 미국 사회에 대한 샌델 교수의 고민을 담고 있다. 능력주의(혹은 실력주의, meritocracy)가 바로 그 화두이다. 국가는 시스템을 만들고, 개인은 열심히 노력하여 자부심을 갖고 그 대가를 향유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는 비단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목표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회, 즉 능력주의 사회는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미국적 현상이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포플리즘 정부의 출현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소위 아빠 찬스라는 말로 제기된 공정성 문제와 인천공항공사의 계약직 정규화 관련 논란들이 이와 연관된다.

샌델 교수는 현대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한다.
자유주의의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오늘과 같은 글로벌한 기술 시대에는 고등 교육이 신분상승과 물질적 성공 및 사회적 존중을 얻는 길이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신분상승을 위한 고른 기회를 통해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의 결실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
샌델 교수는 이런 가치관과 관점이 국가 정책의 중심이 된 것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능력주의적 관점은 아메리칸 드림과 잘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주 어두운 이면이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적 이상은 미국의 경우 대학 학위 소지 여부와 관련된 학력주의 문제와 직결된다(물론 우리는 학력주의보다 더 중증인 학벌주의에 감염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대학 학위가 좋은 직장과 사회적 평가의 전제조건이 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부패시킨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어두운 이면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잘못에 따른 것이기에 자괴감을 갖게 된다. 그들이 성공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정당한 것인 반면 자신은 모멸을 당해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능력주의에 대한 강조는 미국에서는 곧바로 학력주의로 나아가고, 이로 인해 대학 학위를 갖지 못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점차 널리 퍼지게 된다.
학력주의라는 편견은 성공한 자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준다. 이들은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에 대해 반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편견을 갖고 있다.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노력은 패배자도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재능을 가진 것은 우연한 운이다. 나의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내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인 것이다.
내가 받은 사회적 명성과 대가가 행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런 겸손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다. 우리를 분열하게 하는 성공의 거친 윤리에서 돌아와, 능력주의 폭정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런 샌델의 웅변은 곧 우리 사회의 웅변이기도 하다.

 

서론-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입시문제에 사회가 목을 매는 현상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점점 불평등이 늘어난 데서 기원한다. 누가 어디에 발을 들여놓느냐에 의해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이다. _입시의 윤리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_능력 지표 따내기

승자와 패자

최근 수십 년 동안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킨 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_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노력과 재능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한 능력주의 제도를 마련하자’, ‘사회적 위치가 재능과 노력을 반영하게 하자며 되풀이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성공(또는 패배)을 해석하는 방식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 _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재능과 노력을 보상을 보상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건, 승자들이 승리를 오직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게끔 한다. 그리고 그보다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깔보도록 한다.
민주정치가 다시 힘을 내도록 하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보다 건실한 정치 담론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우리 공통의 일상을 구성하는 사회적 연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능력주의를 진지하게 재검토함으로써 가능하다.

선량하니까 위대하다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사람을 채용할 때 후보자의 능력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효율성이며, 다른 하나는 공정성이다.
능력주의 사회는 이중으로 고무적이다.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각자 스스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능력주의 이상의 가장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_왜 능력이 필요한가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기독교에서 등장한다. _구원과 자기구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피어났다. 당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저항은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일탈에 대한 것이었다. 부자들이 구원을 돈으로 사는 부패한 관행에 대한 반발이었다.
구원이란 오직 신의 은총일 뿐이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터에게 있어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 개인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성도들과의 교우나 미사 참석, 그 밖의 일들로 신을 윽박질러 우리의 구원받을 자격을 인정받도록 하는 일, 그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었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능력주의적이었다.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뱅주의의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의 함의는 더 이상 제어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구원은 힘써 얻는 것이며, 직업은 그 수단이지 단순한 증표가 아니다.
이는 실질적으로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칼뱅주의자는 때때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 자라고 표현하고 더 정확하게는 자기 구원의 확신자라고 표현한다.” _막스 베버
칼뱅의 예정설과 구원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과 결합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베버단 한 사람 예외없이 신의 섭리는 각자 어떤 직업을 갖고 뭐에 힘써야 할지 제시하였다고 설명한다.
세속적 활동으로 자신의 구원 여부를 증명하는 일을 통해 능력주의는 복귀한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세속주의적 추구를 금욕적으로 외면함으로써 일종의 영적 귀족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칼뱅주의와 함께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수도원의 문을 박차고 나와, 생활의 장바닥으로 나와 발을 내디뎠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직업을 갖고 세속적 활동에서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도록 요구받았다.
예정설에 뿌리박은 교리를 세움으로써칼뱅주의는 수도사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상 밖 영적 귀족주의를 대신하여, 세상 속에서 신의 예정된 성자들로 이루어지는 영적 귀족주의를 수립했다.

선택된 자들과 성스러운 자들에게 주어진 은총을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들은 그 이웃들의 죄에 대해서도 일정한 태도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약한 자들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동정적 이해가 아니다. 신의 적으로써 영원히 정죄 받은 자 등에 대한 증오와 혐오다.” _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다.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윤리의식은 큰 부를 축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과 함께, 자수성가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는 불안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초래한다. 은총 앞에서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아이젠하워)는 문구는 그 섭리론적 의미를 잊었기에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
이 말은 미국은 세계에서 뭔가 신성한 의무를 띠고 있다는, 말하자면 하나의 대륙을 정복하거나 세계를 민주주의 실현에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할 명백한 운명을 부여받았다는 오래 묵은 신념과 짝을 이룬다. _자유주의적 섭리론

그것은 능력주의 신념을 국가에 적용한 것이다. _역사의 옳은 편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요즘 우리는 성공을 청교도들이 구원을 바라보던 방식과 비슷하게 본다.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자유와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시장 신앙의 시대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 가치와 행동방식이 부흥하도록 길을 열었다. _시장과 능력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는 전제 아래, 시장은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준다고 여겨졌다. 모두가 경쟁에서 공평한 기회를 가지는 이상, 시장에서 결과는 능력주의적 보상을 받을 만했다.
기회가 진실로 평등한 사회에서 시장은 개개인에게 그들에게 합당한 몫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능력주의적 전환이 갖는 일부 측면은 그 부정적 성격을 드러내 준다.
첫째, 책임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복지국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련 리스크 부담을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기려는 태도다. 둘째, 이는 사회적 상승에 대한 언어적 포장이라 불릴 만한 표현들에 나타난다.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 말이다. (물론 그런 사회는 이룩하기 어렵다.)

2016년 노동자들에 대한 세계화의 가혹한 부작용이 가시화되자, 진보 엘리트들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더욱 엄격한 성격을 띠어갔다. 불평등이 증대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우리 운명의 책임자는 우리 자신이며 따라서 성공과 실패는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_보는 것과 믿는 것
불평등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 더욱 힘을 실었다. 세계화에 따른 이익을 긁어모은 사람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뒤떨어진 사람은 그래도 싸다는 믿음이 한결 굳어졌다.

성공의 윤리

완벽하게 실현된 능력주의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_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오르거나 떨어지거나 모두 그들의 노력과 재능의 소관이다. 그 누구도 편견이나 특권에 따라 억지로 아래로 떨어지거나 위로 올려질 수 없어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능력주의의 옹호자들은 노력과 수고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_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그렇지만 비록 노력이 그만큼 중요하더라도 노력만 가지고 성공하기란 드문 일이다. 내가 밤낮으로 수영 연습을 한들 마이클 펠프스보다 빨리 헤엄칠 수 없을 것이다.
노력은 다가 아니다.

능력주의가 각자 개인이 신이 부여한 재능이 허락하는 한 성공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추정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_재능 계산하기
돈을 많이 버는 데 성공하려면 생득적 지능은 큰 관건은 아니다. 어느 정도 관건이 되기는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천부적 재능 차이를 소득 불평등의 주원인으로 놓음으로써,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할을 과장하며 부지불식간 그 명예까지 과장하고 있다.

결론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_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계층, 인종, 민족, 신앙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은 얼마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40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_민주주의와 겸손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봐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운명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공정한 사회는 공공선과 시민성이 바탕되어야 한다! _ch**g1999-<교보문고>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부의 양극화, 경제적 불평등, 불공정, 인간의 존엄성 하락, 노동의 가치 하락의 이유를 능력주의의 환상’, ‘학력지상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꼬집고 있다.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이야기하는 미국의 한복판에서 말이다. 원래 전통적 능력주의는 공공선과 시민성을 포함한 개념이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기원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의 능력주의는 변질된 능력주의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미국이라는 국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3개 주의 연합체로 시작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떠난 청교도들,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유럽 대륙을 떠난 이주민들(카톨릭의 아일랜드 주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독일 이주민들이 두 번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도망자의 신분으로 찾아온 정치인 등 그야말로 자유라는 핵심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겼고, 연방국가의 헌법에 그 가치를 담아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연방헌법이든 각 주의 헌법에서 마스크가 반드시 써야 한다는 행정명령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유라는 가치를 어떤 이유에서든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국가 단위뿐만 아니라 광역단체, 지방자치단체도 시민의 안전을 위해 행정명령을 언제든지 발령낸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본다.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소위 알려진 미국의 전통적 능력주의는 자유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상의 거센 물결 속에서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과거 전통적 능력주의에서는 능력 자체가 개인이 노력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운, 또는 신의 은총의 결과로 보았다.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리거나 명예를 얻는 것을 당연한 자격으로 여기지 않았다. 독일에서 촉발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 또한 그렇다. ‘엄격한 은총론을 기반으로 한다.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나 행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다시 말하자면 반능력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격 없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몸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죄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돌아가셨기에 지금 살아가는 삶 자체는 은혜 그 자체다. 인간의 삶 속에 능력과 노력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이런 종교적 정신으로 세워진 국가가 미국이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은 비대졸이다. 미국 최고의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히는 해리 트루먼도 비대졸자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을 미천한 학력의 소유자들에게 맡겼다. 법무장관은 법학 학위가 없는 사람이었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장은 작은 마을의 은행원이었으며, 농무장관은 지방 주립대 출신에 불과했다. 당시 대서양 반대쪽 나라인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노동당 당수였던 애틀리 내각은 장관 가운데 일곱 명이 탄광 갱부 출신이었다. 특히 외무장관은 11세 때 학교를 중퇴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결코 능력이라는 것 자체가 학력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학력과 국정 운영 능력은 관련성이 없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 그리고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정책을 결정하는 대부분 사람들이 명문대 출신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만큼 미국도 입시부정, 입시경쟁, 명문대학 입학을 위한 경쟁이 심각할 정도라고 마이클 샌델 교수가 이야기한다. 왜 미국인 부모는 자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문대학에 입학시키려고 할까? 명문대학 입학 그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과외에 들이는 돈이 예일대 4년 과정보다 더 많이 들며, 명문대 입학을 위해서라면 지체장애자 특별 선발전형에도 기웃거리며 기부금을 들여서라도 어떻게든 입학시키려고 하는 것은 능력주의 환상, 학력주의 환상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본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소득의 불평등, 사회적 명망의 불평등(노동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이 일어나는 원인을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고등교육(명문대 입시), 시장중심적 세계화 프로젝트(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앞질렀다), 현대정치의 기술관료화다. 공공선이라는 가치는 이미 버려진 지 오래다. 공공선이라는 무엇인가?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 모두를 위한 선을 말한다. 청소노동자도 사회를 지탱해 가는 꼭 필요한 존재다.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공공선을 위해 애쓰는 이들은 돈을 떠나서 존중받아야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관점에서 그들은 낙오자며 패배자로 취급된다. 배관공이나 전기 기술자, 치과 위생사도 공공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은커녕 하급자로 바라본다. 공공선이 무너진 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라고 볼 수 없다. 대학이 언제부터인가 교육을 수행하는 장소가 아니라 학력을 부여하는 공장으로 변질되고 학위라는 그럴싸한 딱지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를 독점하다 보니 시민성을 구현하는 일은 찬밥신세가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근원은 공공선과 시민성이다. 이것은 능력이나 학력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도덕적 미덕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타인을 위해 겸손하게 내려 놓는 시민성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민주주의 사회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라는 사회가 아니다. 그 자유가 오만이 될 수 있다. 다른 이에게는 굴욕을 줄 수 있다. 가난과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굴레를 씌우는 사회가 아니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환경을 수정해 가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공공선과 시민성은 공동체의 책임을 요구한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책임 말이다. 공공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이 뒤따른다. 누군가는 양보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의 행위에 엄격한 잣대를 부여해야 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교만이며,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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