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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소화(韶和)의 기성(棋聖)” ≪吳淸源 回顧錄≫ 오청원(吳淸源)2021-01-3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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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吳淸源 回顧錄≫   

()씨는 어릴 때부터 독학으로 수업하여 14세에 내일(來日)할 때는 이미 일류에 가까운 기력을 갖춘 천재다. 그와 나는 세고에(瀨越) 선생 문하의 동문으로 씨는 나의 동생뻘 되는 제자(弟弟子)’에 해당되며 그의 내일 시에는 세고에 선생의 뜻을 받들어 중국에 가서 시험시합을 2국 둔 적이 있다.

시합은 씨의 정선이었지만 승부는 2국 모두 씨의 승리였다. 내 앞서 이노우에 고우헤이(井上孝平) 5단과 대국했는데 그 기보를 본 세고에 선생은 홍인보 슈사꾸(本因坊 秀策)의 젊은 시절을 생각게 한다고 놀라고 있는데 내 대국후의 감촉도 역시 대단한 천재의 출현을 생각게 하는 것이었다.

씨의 발군의 기력과 고결한 인격을 대할 때, 진실로 소화(韶和)의 기성(棋聖)”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韶和 : 1925~1988) -吳淸源 回顧錄간행에 부쳐 198312월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

 

나의 생가인 오씨 집안은 복건성 민후현 토정에서 대대로 소금전매를 관장해 온 구가(舊家)였다.

외할아버지는 장원기라 하며 청나라 말기의 중신으로 광서제가 유폐된 다음에 서태후를 섬겼는데, 종종 우리들 손자들에게 서태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태후는 굉장한 미인으로서 외할아버지 장원기가 섬겼을 때, 아주 나이가 드셨는데도 아무리 보아도 서른살을 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정사에 관한 상주문의) 결재는 매우 빠르고 정확했으며, 상주한 내용에 대한 질문도 날카로와, 그 총명함에는 언제나 경탄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의(吳毅)이라 하며, 어머니는 서문(舒文)으로 장원기의 맏딸이다.

나는 45녀 중 3남으로 중화민국 3, 음력 519일 태어났다. 민국 3년은 1914년이다. 본명은 천()이고 청원(淸源)은 자().

아버지는 4세부터 나를 교육시켰는데 7세가 되자 도교(道敎)에 입신(入信)하더니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게 되었다.
형제 중에서도 내가 특히 잘 깨닫기 시작하자 점점 나에게만 주력하게 되었다.
기본 룰을 배우고, 바둑책에서 기보를 매일 두며, 기보 연구를 하였다. 한번 놓아본 정석(定石) 따위는 아무리 복잡한 것일지라도 한 번에 외워 버리고 잊는 일이 없었다.
실력이 늘자 아버지가 일본 유학시 가져온 일본의 기보를 보고 공부하였으며, 열 살이 되자 북경의 유일한 기원인 해풍헌(海豐軒)’도 드나들면서 당시 중국의 소문난 고수들과도 5점 바둑을 두었다.
 

1925 아버지의 사망과 동시에 나는 친일봉건파 군벌인 단기서(段棋瑞) 대통령 밑에 소년 기객으로 출입하였다. 1926년 바둑 천재소년으로 북경에 소문이 나면서 일본인 클럽에서 일본인 기객과 대국하여 면식을 얻은 다음, 1927년 일본 유학이 결정되고, 세고에 7단으로부터 정식 초청장이 왔다. -일본에 오기까지-

1928년 만 14세에 형과 함께 도일, 세고에 7단에게 입문단위 인정 시험대국에서 본인방 수재(秀哉)명인과 두점으로 대국하여 4집을 이겼다.
192915세에 일본기원으로부터 정식으로 3단을 인정받았다.

기다니 미노루(木谷實), 오청원의 신포석시대는 두 젊은 천재의 청춘시대였음에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현대 바둑의 청춘시대였다. 신포석은 청춘의 창조와 모험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며 기계(棋界) 자체를 선려현란(鮮麗絢爛)한 청춘으로 할 듯한 신풍(新風)이었다.”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신포석이라 하지만 하늘에서 별안간 쏟아져 내려온 것처럼 갑자기 내려온 것은 아니다. 신포석의 싹은 그것이 발표되기 몇 해 전부터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19314단 때에 이미 33을 둔 바 있고 19325단이 된 다음에는 이연성(二連星)도 몇 국 두고 있었다.

신포석이 나옴으로써 구래의 소목 정석에 구속되어 있던 포석이 해방되고 포석에 대한 사고가 자유롭게 되어 반상의 세계가 넓어진 것은 분명하리라. 신포석은 잠시 동안 기다니와 내가 열심히 두고 승률도 좋았으므로 크게 인기를 부추겼다. 때문에 다른 기사들도 우리를 본받아 우주류(宇宙流)를 두고, 반상에서는 화려한 공중전이 펼쳐졌던 것이다. -신포석의 청춘-
 

신포석 이후 오청원은 홍만교(紅卍敎)에 입신, 종교활동과 바둑에 전념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종교활동과 겹쳐 우여곡절이 있었으나(새우 신자로서의 생활, 국적 상실, 일본기원에서의 이탈 등) 바둑에서만큼은 불멸의 전적을 쌓는다. 동경 대공습과 히로시마 원폭에서도 겨우 살아남을 정도의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바둑판 앞에 앉기만 하면 모든 것을 잊고 승부에 전념하였다.
일본의 일류 프로기사와의 치수고치기 십번기는 바둑역사상 불멸의 대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치열한 승부정신과 도인과 같은 삶이 오청원회고록속에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다.

이 십번기(1955719~19551127)에서 다까가와 홍인보(高天 本人坊)를 격파(치수를 고침)하였으므로 당시의 일류기사와 나의 치수는 모두 1단차인 선상선(先相先) 내지 2단차인 정선(定先)으로 되었다. 이 때문에 그 후 십번기의 적당한 상대도 없어져 다까가와 홍인보와의 대국을 끝으로 요미우리 신문사는 치수고치기 십번기 기획을 종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로서도 전전(戰前)의 가마꾸라(鎌倉) 십번기를 시발점으로 하여 15년 이상 계속된 십번기가 끝났다는 것은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한 가닥 쓸쓸함도 수반되어 감개가 무량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십번기를 두어 온 15년은 나의 기력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연이은 십번기-
 

나는 내일하여 수년 동안은 일류기사를 목표 삼아 바둑 외길을 걸었는데 그 후 홍만(紅卍)을 알고 종교나 동양철학을 배워가는 가운데 자기의 운명은 바둑이나 신앙을 통하여 일본과 중국의 친선에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의식하게 되었다.
나는 다행스럽게 기사로서도 실력 이상으로 큰 실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실적을 통하여 일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십수억 사람들과 무형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히 행운이었으며 중일친선의 역사 속에 내 이름이 남는 것은 거만(巨萬)의 부를 얻기보다 훨씬 기꺼운 일이다. 그런 만큼 나는 후세의 사람 등에게 부끄럽지 않을 발자취를 남겨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의무를 수행하려면 금후에도 사욕(私慾)에 빠져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항시 자신의 행실을 바로잡고 어디에 나가도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문회우(以文會友)-
 

吳淸源, 편집부 역, 吳淸源 回顧錄, 玄玄閣, 1992

    <목차>
1장 일본에 오기까지
2장 신포석의 청춘
3장 홍만입신(紅卍入信)
4장 승부와 신앙두갈래 길
5장 방랑의 나날
6장 연이은 십번기
7장 명인전 이후
8장 이문회우(以文會友)
오청원 연보
 

오청원(吳清源, 고 세이겐(구레 기요하라), 우 칭위안, 1914612~20141130)은 중국 푸젠성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동한 바둑 기사이다. 9. 본명은 오천(吳泉, 우 취안, 구레 이즈미)이다.
일본 유학 전인, 중국 시절 소년 오천(吳泉)’의 스승은 고수여(顧水如). 고수여는 북경 어느 기원에서 우연히 소년 오천의 바둑을 구경하게 되고, 소년의 재주에 반해 한판 시험기를 둔 후 제자로 삼았으며, 이후 자기집으로 출퇴근시키며 소년을 가르쳤다. 하루는 오천의 어머니가 소년과 같이 와서는 소년의 이름을 지어 주십사 요청했다. 그날은 마침 고 선생의 형인 淵如(연여)가 함께 있었는데, 연여가 샘물은 맑지(泉水是淸的)."라고 말했다. 이어 고 선생이 말하기를, “샘물은 아득한 곳에서 솟아 멀리까지 흐르지(泉水是源遠流長的).”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오천은 吳淸源(오청원)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생겼고 이후 이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그는 바둑을 좋아하는 부친의 영향으로 7살 때부터 바둑을 배웠다. 1928년 어머니, 형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 세고에 겐사쿠의 문하에 들어갔다.
1934년 라이벌 기타니 미노루와 공동으로 '위기(圍棋)의 혁명 신포석법'을 발표, 1939~1941년 기타니 미노루와의 치수 고치기 십번기에서 승리해 바둑계의 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다른 일본 정상급 바둑 기사들과의 십번기에서도 승리해 약 20년 동안 1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1983년 은퇴하였고 문하에 린하이펑, 루이나이웨이를 뒀다.
오청원은 1930~1950년대 일본 정상급 바둑기사들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모조리 상대의 치수를 고쳤다. 치수고치기 십번기는 일본 에도 시대에 시작된 바둑계의 '끝장대결'이다. 바둑을 10번 둬서 4판 차이가 나면 치수(기력의 정도에 따라 누가 먼저 둘 것인가를 정하는 기준)를 고친다.
바둑을 둘 때 중용(中庸) 33장에 나오는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군자의 도는 어두워 보이나 날로 빛난다)을 적어넣은 휘호 부채를 들고 두었다.
바둑은 조화(調和)”, “묘수를 세 번 내면 진다라는 말을 남겼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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