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세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Title<박연폭포> 외≪여성한시선집≫ 황진이 외, 강혜선 옮김2021-01-22 23:36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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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한시선집≫ 

사또 남미로와 헤어지며 別主倅南眉老
    복아 福娥


봄바람만 공연히 불어오는데
밝은 달은 이미 황혼인 것을.
그대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문 닫기 아쉽기만 하네.

春風空蕩漾 明月己黃昏 춘풍공탕양 명월기황혼
亦知君不來 猶自惜掩門 역지군불래 유자석엄문

―『이재난고頤齋亂藁

이 시는 최근 새롭게 발굴된 작품이다. 제목에 보이는 사또 남미로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기생 복아를 아꼈던 수령임에는 틀림없다. 봄바람이 살랑이는 새벽에 임과 헤어지며 이 시를 써주었을 것이다. 3구와 4구는 임과 헤어진 뒤의 자신의 상황을 미리 그려 보인 구절로, 변하지 않을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은근히 전하고 있다.

 

둘째딸을 시집보내며 嫁二女
    김삼의당


딸아이 시집가던 날은
복사꽃이 피기도 전.
마부가 새 가마 메고 올 때
눈발이 나풀나풀 날렸지.
계집종은 앞길을 인도하고
막내는 울면서 작별했지.
문가에서 건넨 한마디 말
며느리 노릇 아내 노릇 부디 잘하렴.”

之子于歸日 未及桃夭節¹ 지자우귀일 미급도요절
僕父駕新轎 飄飄飛雨雪 복부가신교 표표비우설
侍婢行前導 季妹泣相別 시비행전도 계매읍상별
臨門贈一語 宜家又宜室² 임문증일어 의가우의실

―『삼의당고

 ————————
1) 이 구절은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도요>여리고 예쁜 복숭아나무, 그 꽃 곱고도 고와라. 이 아가씨 시집가면, 그 집안 화순케 하리라(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又歸, 宜其室家)에 그 용례가 보인다.
2) 이 구절 역시 위 <도요>의 구절에 용례가 보인다.
 

막내 동생을 떠나보내며 送舍季詩
    홍유한당


네가 찾아온 지 스무날도 채 안 되었는데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버렸구나.
부모님 슬하에서 함께 즐길 땐
색동옷 너풀거리며 마당에서 종종거렸지.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심중을 논하였고
책상을 나란히 하고서 책을 읽었지.
너 돌아갈 날이 어찌 이리도 빨리 이르렀나?
임금님 부르시는 길을 어찌 감히 어기랴?
봄추위가 아직도 풀리지 않아
성긴 눈발이 날려 얼굴을 내려치니
가는 길 얼음 덮여 험난할까 걱정인데
아쉬워하는 사이 어느새 동이 텄네.
벼슬살이 나가고 물러남은 모두 운수에 달렸으니
네가 오고 가는 것을 기약할 수가 없네.
네가 서울로 떠난 뒤에는
집 안에 웃음소리가 드물어지겠지.
문 앞에 버드나무 푸를 때
나 또한 친정을 떠나왔었지.
머지않아 우리 다시 만날 터
어깨를 나란히 해 돌아가고 싶구나.

君來未二旬 光陰苦不遲 군래미이순 광음고부지
繞膝供歎樂 趨庭舞彩衣 요슬공탄요 추정무채의
論襟開心豁 讀書供床帷 논금개심활 독서공상유
歸期何太速 王程¹不敢遠 귀기하태속 왕정불감원
春寒猶未解 踈雪撲面飛 춘한유미해 소설박면비
行藏²皆有數 來往不可期 행장개유수 내왕불가기
君去洛陽後 堂上笑語稀 군거락양후 당상소어희
門前柳綠時 我亦辭庭闈 문전유록시 아역사정위
相逢知不遠 願得聯袂歸 상봉지불원 원득연몌귀

―『유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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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정(王程)은 왕명을 받들어 파견 가는 길을 말한다.
2) 행장(行藏)은 나가서 일을 행하는 것과 물러가서 숨는 것을 뜻한다.

홍유한당의 친정 가족들은 함께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하거나 시를 짓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유한당의 오빠 홍길주의 회고에 따르면 어렸을 때 안방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가 연천 선생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형제자매들이 모두 둘러앉아 철인들의 행적과 경전과 사서에 나오는 좋은 구절들을 화제로 서로 토론하였으며, 틈나면 시를 지어 수창하기도 하면서 종일 놀았다.”라 하였다. 이 시는 그러한 유한당의 가족생활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박연폭포 朴淵
    황진이


한 줄기 긴 시내가 골짜기를 갈 듯이 뿜어내리니
용이 서린 백 길 못에 물이 휘돌아 넘치네.
거꾸로 쏟아지는 폭포는 은하수인 듯
가로 드리운 성난 폭포는 완연히 흰 무지개.
우박처럼 천둥처럼 치달려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구슬을 찧듯 옥을 부수듯 맑게 갠 하늘에 쏟아지네.
노니는 사람들아 여산이 낫다는 말 하지 마라
천마산이 해동에서 으뜸임을 알아야 하리.


一派長川噴壑礱 일파장천분학롱
龍湫百仞水潨潨¹ 용추백인수총총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珠舂玉碎澈睛空 주용옥쇄철정공
遊人莫道廬山²유인막도려산승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대동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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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총(潨潨)은 물이 흘러 들어가는 소리.
2) 여산(廬山)은 중국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에 있는 산. 이 구절은 소식(蘇軾)<제서림벽題西林壁>가로로 보면 산마루요 곁에서 보면 봉우리가 / 원근에 따라 높고 낮음이 각각 다르네. /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 다만 이 몸이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일세(橫看成嶺側成峯, 遠近高低各不同.只綠身在此山中)”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시는 박연폭포의 웅장함을 묘사하였는데, 박연폭포의 호쾌한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장관을 시원스럽게 전하고 있다. 중국의 여산보다 송도의 박연폭포가 더 빼어난 절경이라고 은근히 자랑하는 데서 그녀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겨울밤 책을 읽으며 冬夜讀書
    서영수함

맑고 맑은 거문고 소리 휘돌고
검푸른 칼 기운 아득한데,
한밤중 눈 속에 매화 가지 비껴 있고
달빛은 책상 위 책을 가만히 비추네.
여린 불로 느긋이 차를 끓이고
술 데우자 은근한 향 넘치네.
흐린 등불이 걸린 오래된 벽으로
반짝반짝 새벽빛이 서서히 찾아든다.

淸切琴聲轉 滄茫劍氣虛 청절금성전 창망검기허
梅橫三夜雪 月照一牀書 매횡삼야설 월조일상서
細火烹茶緩 微香煖酒餘 세화팽다완 미향난주여
疎燈掛古壁 耿耿曉光徐 소등괘고벽 경경효광서

―『영수합고

이 시는 겨울밤 늦도록 조용히 책을 읽는 정경을 읊었다.

 

가난한 여인의 노래 貧女吟三首
    허난설헌


어찌 얼굴이 남만 못하겠어요?
바느질도 길쌈도 잘한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에서 자라 좋은 중매가 알아주질 않더군요.

豈是乏容色 工鍼復工織 기시핍용색 공침복공직
少小長寒門 良媒不相識 소소장한문 양매불상식

밤 깊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니
찰칵찰칵 베틀 소리 차갑기도 하지요.
베틀에 감긴 한 필의 명주로
마침내 누구의 옷을 짓게 될까요?

夜久織未休 戞戞鳴寒機 야구직미휴 알알명한기
機中一匹練 終作阿誰依 기중일필연 종작아수의

쇠 가위 잡은 손
추운 밤이라 열 손가락 뻣뻣해지네.
남을 위해 혼수 옷 지으면서도
해마다 도리어 홀로 자고 있어요.

手把金剪刀 夜寒十指直 수파금전도 야한십지직
爲人作嫁衣 年年還獨宿 위인작가의 연년환독숙 

돈을 구하러 가는 남편에게 甲子三月十六日
    김삼의당

장례 빚이 산처럼 쌓일 줄 누가 알았으리요?
울면서 동남쪽 영남 땅을 찾아 나서네.
온 살림 다 털어도 못 갚을 빚을
한 푼인들 어찌 내 몸 위해 구할까보냐?
지성이면 길에서 선녀를 만날 것이고
의리라면 필시 뜻밖의 부조를 얻겠지요.
떠나시는 낭군께 드리는 한마디 말
아아! 당신 같은 효성은 세상에 또 없지요.”

誰知喪債積如丘 수지상채적여구
泣向東南嶺海陬 읍향동남영해추
百橐元難傾産報 백탁원난경산보
寸金豈欲爲身求 촌금기욕위신구
誠應路上逢天女 성응로상봉천녀
義必丹陽有麥舟 의필단양유맥주
我以一言行且贈 아이일언행차증
嗟哉至孝世無儔 차재지효세무주

―『삼의당고

시아버지의 장례를 빚을 내어 치를 수밖에 없고, 빚을 갚기 위해 가장이 직접 돈을 벌러 나서는 조선 후기 향촌 사족의 궁핍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강혜선 옮김, 여성한시선집, 문학동네, 2012
이 책은 조선의 여성들이 남긴 한시 작품들을 국조시산國朝詩刪, 기아箕雅,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 대동시선大東詩選등 역대 중요 시선집에서 가려 뽑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은 시인이 조용히 내뿜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시인이 가만히 떨어뜨리는 눈물과 시인의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시인의 얼굴에 빙그레 퍼지는 기쁨과 즐거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신음조차 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눌려 안간힘을 쓰는 시인의 속내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에 살았던 다양한 여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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