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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명산답사기≫ 김창협 외 -“산의 꼬리는 깊은 곳에 서리고”-2020-11-2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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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답사기名山踏査記

백두산 기행 서명응(徐命膺)

(전략) 꼭대기에 오르니 사방에 솟아 있는 여러 봉우리들이 발밑에 깔리고, 시야 끝에서 탁 트인다. 다만 시력의 한계 때문에 끝까지 보지 못한 게 한스럽다.
추측건대 저 북쪽은 영고탑(寧古塔)ㆍ오랄(烏剌)ㆍ길림(吉林) 땅이겠고 서쪽은 요동ㆍ심양의 땅일 것이며, 서남쪽은 혜산진ㆍ인차(仁遮)ㆍ폐사군(廢四郡) 땅이요, 동쪽은 무산ㆍ회령ㆍ종성ㆍ온성 땅일 것이다.
동남쪽 한 줄기가 소백산ㆍ침봉ㆍ허항령을 거쳐, 보다산ㆍ마등령ㆍ덕은봉ㆍ완항령ㆍ설령ㆍ참두령ㆍ원봉ㆍ황토령ㆍ후치령ㆍ퉁파령ㆍ부전령ㆍ죽령ㆍ상검산ㆍ하검산이 되니 이들은 한양(漢陽)산의 주맥(主脈)이다.
이들 산봉우리를 내려다보니, 높고 낮고 뾰족하고 둥글며, 파도가 일렁이는 듯 구름 안개에 만 리 끝까지 싸인 채 밀려온다. 두 봉우리가 갈라진 곳에서 보니 봉우리 아래 5, 6백 길 떨어진 곳은 넓고 평평한데 큰 못이 그 가운데 있다. 못의 둘레는 40리쯤 되는데 아주 푸르러 맑은 하늘빛 그대로를 이루었다.
그 못의 동남쪽 연안에 진노랑색 바위산 세 봉우리가 있으니, 높이는 몇 자쯤 되고 그 둘레의 세 봉우리는 마치 입안에 있는 혀처럼 보인다. 뒤쪽 사면에는 열두 봉우리가 못 둘레를 성처럼 감싸 신선이 밥상을 인 듯, 큰 새가 부리를 쳐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기둥처럼 솟고 뛰어오르는 형상이기도 하다.
그 안은 모두 깍아지른 절벽으로 붉고 푸른색이 감돌아 마치 베의 무늬처럼 둘렀고, 그 밖은 희고 푸른 벽이 솟았으니 수포석이 엉긴 것이다.
몇 걸음 옮기니 봉우리 몇 개와 큰 못이 혹 둥글기도 하고 모나기도 하여 각각 다른 모습으로 동남쪽에 앉았다. 조금 평평한 봉우리에는 검은 돌이 많은데 작은 것은 주먹만하고 큰 것은 됫박만큼씩 크다. 그 돌 속에 검은 모래가 점점이 박혀 갑산 사람들이 주워다가 갈아서 갓에 다는 구슬을 만든다고 한다.
아래 큰 못을 보니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넘쳐흐른 물이 돌 틈으로 흘러나와 혼돈강(混沌江)이 되어 곧바로 영고탑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니 압록강과 토문강이 이 큰 못에서 근원한다는 말은 망발이다.
사슴들이 떼를 지어 물을 먹는 놈, 뛰어노는 놈, 뒹구는 놈, 천천히 달리는 놈이 있으며, 검은 곰 두세 마리가 절벽을 오르내린다. 이상하게 생긴 새 한 쌍이 훨훨 날아와 못의 물을 스치고 노는 게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하략)

동유기ㆍ同遊記 이곡(李穀)

충정왕(忠定王) 1년 가을, 금강산을 구경하기 위해 14일 송도(松都)를 떠났다.

821, 천마령(天摩嶺)을 넘어 산 밑 장양현(長楊縣)에서 자니 산에서 30리 떨어진 곳이다.
아침밥을 먹고 산을 오르려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어두었다. 고을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이 풍악산을 구경하러 왔다가 안개 때문에 구경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예가 종종 있다 하므로, 일행이 모두 걱정되어 마음속으로 그런 일이 없기를 기원하였다.
산을 5리쯤 앞두고 어두운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퍼지더니 절재[拜岾]에 오르자 하늘이 걷히고 날씨가 맑게 개어 산의 모습이 칼로 도려낸 듯하고, 12천 봉우리 하나하나가 셀 수 있을 정도로 또렷이 드러난다. 금강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잿마루에 오르면 산이 보이고, 산을 보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므로 재 이름이 절재이다.
옛날에는 재에 집이 없었고,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쉴 곳을 마련했었다.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정해년에 지금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있는 강금강(姜金剛) 공이 순제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하여 재 위에다 종각을 세워 달고 그 옆에 중이 거처할 집을 지어 종 치는 일을 맡게 하였다. 그 우뚝한 단청이 설산(雪山)과 조화되어 산속의 장관을 이루었다. 정오가 채 못 되어 표훈사(表訓寺)에 도착해서 잠깐 쉬었다. 사미승이 길을 인도하면서,
동쪽에 보덕관음굴(普德觀音窟)이 있는데 경치가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길이 험합니다. 서북쪽에 있는 정양암(正陽庵)은 고려 태조가 창건한 암자로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상을 모셨는데, 약간 높지만 가까워 오를 수 있으며, 그곳에 오르면 풍악산 모든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관음보살이야 어디인들 없겠는가? 내가 여기 온 것은 산 경치를 보기 위함이니 그 암자로 먼저 가는 게 어떻겠는가?”
하고는 붙잡고 기어서 오르고 보니 과연 듣던 말과 같아 마음에 들었다. 보덕굴로 가려 했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고, 산속에서 잘 수도 없을 것 같아 신림암(神琳庵)과 삼불암(三佛庵) 등 여러 암자를 둘러보고 시내를 따라 내려왔다. 저물녘에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러 잤다. (하략)

금강산 기행 남효온(南孝溫)

백두산은 여진(女眞)의 경계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우리나라 해변 수천 리에 걸쳐 뻗었다. 그 중 큰 산으로는 영안도(永安道)의 오도산(五道山), 강원도의 금강산, 경상도의 지리산이 있는데 수석이 가장 아름답기로는 금강산을 첫째로 친다.
금강산은 이름이 여섯 가지이다. 그 하나는 개골산(皆骨山)이요, 둘째는 풍악산(楓嶽山)이요, 셋째는 열반산(涅槃山)인데 이는 방언이며, 넷째는 지단산(枳袒山)이요, 다섯째가 금강산인데 이는 화엄경(華嚴經)에서 나온 이름이며, 여섯째는 중향성(衆香城)인데 이는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에서 나온 이름으로 신라 법흥왕 이후부터 부른 이름이다.

금강산은 하늘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솟은 큰 땅덩어리인데 서른여섯 개의 큰 봉우리와 13천 개의 작은 봉우리로 되어 있다. 한 줄기는 남쪽으로 2백여 리를 뻗쳐 있고 뾰족한 게 금강산을 닮은 설악산이 있으며, 그 남쪽에 몇 개의 산을 거느리고 있다. 동쪽의 한 줄기는 또 다른 작은 산을 이루었으니 바로 천보산(天寶山)으로, 눈이나 비가 오려는 날이면 산이 저절로 운다고 하여 일명 읍산(泣山)이라 한다.
읍산이 다시 양양(襄陽) 후면을 돌아 바닷가로 뻗쳐 다섯 봉우리를 이룬 것이 낙산이다. 금강산의 한 지맥이 다시 북쪽으로 1백여 리를 뻗쳐 재를 이룬 것을 추지(湫池)라 하며, 추지가 다시 통천(通川) 후면에서 잔산(殘山)과 만나 실낱처럼 끊어질 듯 말 듯하면서 북쪽으로 돌아 바다로 들어간 것이 총석정이다. (하략)

동유기ㆍ同遊記 김창협(金昌協)

만폭동에서 마하연까지

24(임인), 일찍 일어나 만폭동으로 들어섰다. 여러 개의 못을 지나 시내 왼쪽의 소롯길로 해서 보덕굴에 올랐다. 수백 걸음 되는 구불구불한 돌길이 끝나면 또 계단이 있다. 40계단이 끝나면 그제야 보덕굴이 나온다. 굴속에 조그마한 암자를 지었는데 생김새가 마치 경쇠를 매달아 놓은 것 같다. 앞 기둥이 바위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걸릴 곳이 없어 수십 자 되는 구리 기둥으로 받쳤고, 거기다 두 가닥 쇠사슬로 가로세로 붙들어 매었다. 그 위로 오르니 몸이 흔들거려 마치 공중에 뜬 듯 아찔하여 아래를 내려다볼 수가 없다. 그 암자 북쪽에 석대 하나가 역시 굴을 둘러쓰고 있는데 부시대(俯視臺)라 한다. 여기서 보니 그고 작은 향로봉이 마치 어린애를 업은 것같이 보인다.
잠깐 쉬었다가 서북쪽으로 내려오니 진주담(眞珠潭)이란 못 하나가 나온다. 폭포가 구슬이 쏟아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 왼쪽에 바위가 비스듬히 튀어나와 마치 지붕 처마처럼 덮어 대여섯 사람이 들어갈 만한데, 너럭바위 아래 물결이 이따금 밀려와 바위를 스친다. 1백여 걸음 앞에 벽하담(碧霞潭)이 있는데 진주담보다 더 아름답다.
절벽에 걸린 예닐곱 길이나 되는 폭포가 곧바로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지면 골짜기 안이 연기나 눈처럼 자욱하다. 못의 넓이는 거의 2백 평 정도인데 푸르고 깨끗한 물이 마치 유리 같다. 그 옆에 있는 바위가 모두 큰 자리를 깔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지팡이를 꽂아두고 그 위에 구부리고 앉아 가지고 온 술을 꺼내 마시면서 폭포 한 번 우러러보고 못 한 번 굽어보느라 해가 곧 지려는 것조차 몰랐다.
1, 2리를 가면서 여러 개의 못을 지났다. 그 중 화룡연(火龍淵)은 벽하담보다 10분의 1 정도 더 크다. 축담대(畜霮臺)에서 쉬었다. 물가에 바위가 있어 소나무와 회나무로 덮였는데 1백여 명이 앉을 만하다. (중략)

화룡연에서 1리를 가면 마하연이다. 암자 뒤로는 중향성이 병풍처럼 감샀고, 앞에는 혈망봉(穴望峯)ㆍ담무갈봉(曇無竭峯) 등 여러 봉우리가 또한 병풍처럼 둘러 참으로 좋은 가람이다. 뜰에는 삼나무ㆍ회나무가 울창한데 그 중 한 나무는 줄기가 쭉 곧으며 껍질이 붉고 잎은 삼나무처럼 생겨 예로부터 계수나무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밥을 먹고 뜰을 거닐었다. 중향성의 여러 봉우리가 은빛 수정처럼 반짝거려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기이하게 생긴 봉우리에 저녁놀이 깃들이니 정양사에서 보던 모습보다 더욱 아름답고 생김도 같지 않다. (하략)

속 두류산 기행 김일손(金馹孫)

선비로 태어나서 덩굴에 달린 박이나 외처럼 한 곳에만 매어 사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견문을 넓히지 못할 바에는 자기 고장의 산천이라도 두루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사람의 일이란 매사가 어긋나기를 잘해서 항상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한 경우가 십중팔구는 된다.
내가 진주(晉州)의 학관(學官)이 되기를 원한 것은 몸을 휴양하기 위함이었으니, 저 구루(句漏)의 원이 된 갈홍(葛洪)의 속셈이 단사(丹砂)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할까?
두류산은 진주의 경내에 있다. 부임하자마자 매일 신발을 준비하였으니, 두류산 골짜기의 안개와 원숭이ㆍ학들이 모두 나의 단사이기 때문이다.
두 해 동안 선생 노릇을 했으나 한갓 배만 불린다는 놀림을 받은 터여서 병을 핑계하고 고향으로 물러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평소의 소원이던 두류산 구경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류산 유람을 벼르고 있었다.
그래서 매양 태허 조위 선생과 함께 구경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그분은 벼슬살이에 얽매인 몸이어서 나는 자주 내왕하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후 태허는 부인의 상을 당해 천령(天嶺)으로 떠나고 말았다.
천령에 사는 진사인 백욱(伯勖) 정여창(鄭汝昌)은 나의 막역한 친구인데 올 여름 도주(道州)로 손님을 맞으러 가면서 우리 집에 들러 두류산 유람을 약속하였다.

암자 동쪽에 있는 폭포가 눈발 같은 물줄기를 뿜으며 천길 벼랑으로 떨어져 학연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참으로 장관이다.
등귀사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열엿새가 되었다. 지나온 곳곳마다 높이를 다투듯 솟아 있는 수많은 바위들과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 기뻐했는가 하면 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이었다. 또 청학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인로(李仁老)가 찾던 곳이 거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골짜기가 너무 깊고 험해서 원숭이가 아닌 이상 오를 수 없는 곳이어서 처자나 가축이 함께 살 곳이 못 되었다. 암천이나 단속사는 모두 승려들의 고장이 되었고 청학동은 끝내 알 수 없으니 어쩌랴? 백욱은,
소나무와 대나무는 둘 다 아름답지만 대나무가 더 아름답고, 바람과 달은 다 맑지만 중천에 오른 달그림자를 보는 아름다움만 못하고, 산과 물은 모두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가 즐기는 것이지만 공자는 물이여, 물이여하고 칭찬했으니 그대와 함께 악양성(岳陽城)을 나가 큰 호수의 물을 구경하는 게 좋겠네.”
하므로 그렇게 하자고 했다.

가야산 기행 정구(鄭逑)

선조 12월 늦가을, 나는 이백유(李伯瑜) 형제와 사촌(沙村) 시냇가 글방에 있었는데, 양정(養靜) 곽준(郭䞭)도 와서 함께 글을 읽게 되어 즐거웠다. 며칠 뒤 내가,
가야산이 우리 고을 경내에 있는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네. 그런데도 겨우 한 번 구경했을 뿐이고, 그대들은 아직 구경하지 못했으니 어찌 섭섭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국화와 단풍이 한창일 터이니 가야산 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더군다나 덕원(德遠) 정인홍(鄭仁弘)도 방금 영양(永陽) 원을 그만두고 돌아와 있다니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쌀 한 자루, 술 한 통, 반찬 한 그릇, 과일 한 바구니를 꾸리고, 근사록(近思錄)남악창수(南嶽唱酬)한 권씩을 챙겨놓고 보니 심존중(沈存中)이 산 유람할 때의 채비보다 더 간단하다. 이 날이 910일이다.

임암에 도착하여 물 밖으로 나와 이쓴 너럭바위에 둘러앉아 부싯돌로 불을 피워 술을 데워 마셨다. 그런 후, 나는 경청과 숙부에게 줄 시 한 수씩을 지었다. 모두 술을 약간 취할 정도로 마셨는데 유독 계욱만이 곤드레가 되어 물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기에 내가 손으로 물을 움켜다가 얼굴에 뿌려주었더니 몹시 좋아하면서 깨어났다.
소나무 사이에 앉아 쉬다가 혁림재(赫臨齋)에 함께 들어갔다. 그가 감과 밤을 가지고 와 대접하므로 그걸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니 이 역시 산중의 한 재미다.
매우 피곤하여 잠이 들었는데 모두들 끙끙 앓는다. 지해가 기침을 심하게 하여 소나무숲에 나가 달구경을 하자던 약속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25, 맑음 아침을 먹은 후 모두 경청의 집에 가서 헤어지기로 의견을 모았다. 서로 손을 붙잡고 줄을 지어 시내를 따라가다가 다시 말을 타고는 송씨 어른을 찾아 산 유람한 얘기를 대략 나누었다. 정오에 경청의 집에 도착하였다.
정을 다 나누지 못하고 각자 남북으로 헤어지니 섭섭하기 짝이 없어 말 위에서 서로 돌아보면서 감회를 이기지 못했다.
오늘 나는 백유와 함께 시냇가 서당으로 돌아왔다.

북한산 기행 이덕무(李德懋)

이틀 밤을 자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북한산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ㆍ정자ㆍ누각을 각각 하나씩 구경하였다.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는 구경하지 못했으나 중의 말로는 별로 보잘것없는 절이라고 한다. 일행은 자휴 남복수(南復秀)와 여수 남홍래 그리고 나, 모두 세 명이었다. 우리가 본 곳에 있는 시는 마흔한 수이며, 암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기 기()가 있었다. 이 산은 백제의 옛 도읍지이니 대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던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의 서문으로 나왔으니, 때는 영조 37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가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자니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정자 왼쪽에는 선돌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하략)

천관산 기행 석천인(釋天因)

천하를 통한 것이 기()이다. 기가 새면 개천이 되고 쌓이면 산이 된다.
조령(鳥嶺) 남쪽 바닷가 오아현(烏兒縣) 경내에 천관산이 있는데 산의 꼬리는 깊은 곳에 서리고 머리는 바다에 잠기어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여러 고을에 걸쳐 자리 잡고 있으니, 이는 큰 기가 쌓인 것이리라. 이 산을 지제산(支提山)이라 전하기도 한다.
화엄경(華嚴經),
보살이 머물던 곳을 지제산이라 하며, 현재 보살이 있는 곳을 천관산이라 한다.”
하였다.
산 남쪽 기슭에 두어 길이나 첩첩으로 쌓인 돌이 있는데, 이는 서천축국의 아육왕(阿育王)이 성사(聖師)의 신통력을 빌려 만든 84천 개의 탑 중 하나이다.
탑 앞 절벽 위에 한 길 남짓 되게 솟은 층대는 부처님과 가섭이 앉았던 곳이다. 불원기(佛願記),
나 죽은 후 가섭과 내가 앉았던 곳에 아육왕이 탑을 세워 공양하리라.”
하였으니 아마 이곳이리라. 신라 효소왕(孝昭王)이 유밀(宥密)에 있을 때 부석존자(浮石尊者)가 그 아래에 살았다 하는데 지금의 의상암(義湘庵)이다.
산이 요지를 차지하여 있으며 아름답기가 천하 제일이어서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면 호수와 수많은 봉우리가 한꺼번에 책상 앞에 와 닿는다. 그런 모습을 한가롭게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엉기고 형체를 잊어 심오한 경지로 들게 한다. 이것을 보면 부처님과 가섭이 이곳에 조용히 앉아 계셨다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하략)

한라산 기행 최익현(崔益鉉)

고종 10년 계유년 겨울에 나는 조정에 죄를 지어 탐라(耽羅)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루는 섬사람들과 산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가 말하기를,
한라산의 명승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읍지(邑誌)를 보거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구경한 이가 아주 드무니 이는 못 가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가?”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이 산은 4백 리에 뻗쳤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서 5월에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상에 있는 백록담(白鹿潭)은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으로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항시 흰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영주산(瀛洲山)이라 일컫는 곳으로 삼신산의 하나에 들어가는데 어찌 범상한 사람들이 쉽게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놀랐다.

맹자(孟子)바다를 본 자는 바다 이외의 물은 물로 보이지 않으며,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했는데 성현의 역량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소동파에게 이 산을 먼저 보게 하였다면 그의 이른바,

허공에 떠 바람을 다스리고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

憑虛御風 羽化登仙
(빙허어풍 우화등선)

 
는 시구가 적벽(赤壁)에만 어울리는 게 아닐 것이다.

이 산은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어서 고결하며 고상하고 기온도 낮으므로 지기가 견고하며 근골이 강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른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관장(官長)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들의 훌륭한 문장으로는 한 번도 그 참모습을 적어놓은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가들이 신산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우선 이 말을 써서, 가서 구경하고 싶은데도 못 가는 자들에게 고하는 것이다.

      고종 125월에 찬겸 최익현은 적는다.

김창협 외, 민족문화추진회 편, ≪명산답사기, 나랏말ᄊᆞᆷ,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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