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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수사고신여록≫ 최술 “성인의 말씀을 그릇되게 따를 수는 없다”2020-10-20 19: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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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고신여록

고신록의 부활과 중국의 사학계 이재하

최술의 자는 무승(武承), 호는 동벽이다. 건륭(乾隆) 5(1750) 729일 대명부(大名府) 위현에서 태어나, 가경(嘉慶) 21(1816) 26일 일흔일곱에 죽었다.

최술은 고신록이라는 이름으로 위서(僞書)의 견강부회를 바로잡고, 이단(異端)의 그릇된 망언을 도려낼 생각이었다. 고증학이 본격적인 발전 단계에 접어들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실로 엄청난 젊은이의 포부였다.

수사고신여록

수사고신여록서 최술

돌이켜보면 전국시대나 진한시대에도 공자의 사적을 말하는 가운데 진실과 어긋난 게 흔하거늘, 후세의 경전에 대한 해설도 억측이나 견강부회의 잘못이 없지만은 않으리라. 그러므로 나는 수사고신록을 완성한 뒤에 안자(顔子)와 민자건(閔子騫) 이하 여러 현인들의 자취를 추려 별도로 수사고신여록을 엮고 이를 바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주나라와 진나라 이전의 문헌은 남아 있는 게 드물다. 이제 나는 오직 경전에 보이는 것만 취해 다소나마 순서를 덧붙였으며, 사실이 왜곡된 것은 고찰하고 변증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성인 공자의 도를 지켜낸 공적을 드러내고, 한편으로는 전해지는 과정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을음이 묻은 밥풀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변증함

공자가어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어려움을 당해 이레 동안 굶었다. 이에 자공(子貢)이 슬며시 고한 뒤 농부에게 곡식을 구해왔고, 안회는 밥을 지었다. 그때 그을음이 밥에 떨어졌으므로, 안회가 그을음이 묻은 밥풀을 건져 먹었다. 그런 모습을 본 자공은 안회가 밥을 훔쳐 먹은 것으로 여기고, 방으로 일러바쳤다. 이에 공자는 내가 물어보겠다고 말한 뒤 안회를 불러들여 이렇게 떠보았다. ‘어젯밤 꿈에 옛사람들을 보았느니라. 밥이 다 지어지면 가져오너라. 내가 그분들께 먼저 올리고 싶구나.’ 그러자 안회가 대답했다. ‘그을음이 밥에 떨어졌기에 제가 그 부분을 먼저 먹었습니다. 하오니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다. 하물며 용사행장(用舍行藏)을 같이할 있다던 안연에 대해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안연에게 꿈을 핑계로 삼아 요모조모 살피다니, 어진 사람도 차마 그런 꾀를 내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공자와 같은 성인이 어찌 그러했으랴!

용사행장(用舍行藏) : 공자가 안회를 지목하여 등용되면 도를 실천하고 등용되지 않더라도 조용히 도를 지켜나갈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니라!(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논어<술이편>의 말이다.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시기하고 시험했다는 공자가어의 이따위 이야기는 애초에 오늘날의 백정이나 주막 및 거간꾼들이 하는 짓거리와 다름없다. 비천한 시정잡배들도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할 때가 있는 법인데, 성현에게 그런 행동을 덧씌우고 만 셈이다. , 이런 자들을 어찌 올바른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는 여씨춘추에서 따온 것인데, 어투는 이와 조금 다르다. 여씨춘추에서의 의도는 사람을 제대로 알기 어려움을 밝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오히려 믿을 수 없음을 공자와 안회에 빗대 말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공자가어는 마침내 진짜 있었던 이야기로 여겼으니 잘못이다.

나는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다.
공자가어는 공씨(孔氏)의 유서(遺書)가 아니다. 그것은 위서(僞書)이다. 공자가어사기<공자세가>에 비해 내용이 더욱 비루하다. 하지만 세상의 선비들은 공자가어사기<공자세가>보다 더욱 믿고 있다.
한유(韓愈, 자는 퇴지退之)작은 부끄러움은 아낌을 받지만, 큰 부끄러움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을 받는다고 했는데, 슬프도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증자의 어머니가 베를 짜다 북을 내던졌다는 이야기를 변증함

신서에서의 이야기이다.
증자가 사는 고을에 그와 성과 이름이 같은 정()나라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자 한 사람이 증자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알렸다. ‘증참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베를 짤 뿐이었다. 조금 뒤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 이를 알리자, 증자 어머니는 말했다. ‘내 아들은 사람을 죽일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또다시 사람이 달려와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북을 내던지고 베틀에서 내려와 담을 넘어 달려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전국시대 책사(策士)가 거짓 꾸며낸 이야기로, 사람들이 참언(讒言)에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증자가 어질었기에 거짓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증자처럼 어질었다면 그의 어머니도 그런 자식을 평소에 잘 알고 있었을 터. 어찌 사람들의 헛말에 마냥 속아 넘어갔겠는가!
설원에는 또 고을 이름이 승모(勝母)인지라, 증자는 그 고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거짓 꾸며낸 이야기로 증자의 효성 때문에 가탁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모두 싣지 않는다.

좌씨는 좌구명이 아니다(左氏非左丘明)

유흠(劉歆, 기원전 50?~기원후 23)은 이렇게 말했다.
좌구명의 호오(好惡)는 성인 공자와 같았으며, 그는 공자를 직접 만났다.”
이는 춘추좌전을 지은 사람이 바로 논어의 좌구명이라는 말이다. 이후로 반고(班固)한서에서 공자와 좌구명의 사관의 기록을 보았다고 했으며, 두예(杜預, 222~284)춘추좌씨전집해(春秋左氏傳集解)에서 좌구명이 공자로부터 춘추의 경문을 전수받았다고 했는데, 이런 말은 모두 유흠에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담조(啖助)나 조광(趙匡) 그리고 송나라 정자나 주자 이후로 춘추좌전을 지은 사람은 공자와 같은 시대가 아니며, 논어의 좌구명이 아니라 했다. 심지어 좌구명은 진()나라 사람이라 말하는 자도 있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춘추좌전은 지백(智伯)의 패망으로 끝을 맺었으며, 그것을 도공(悼公, 애공의 아들 영. 기원전 468~431 재위)의 시호(諡號)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가 죽은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난 때이다.(공자가 죽은 기원전 479년에서 지백이 죽은 기원전 453년까지는 26년이다.) 그리고 춘추좌전의 필법(筆法)도 경문의 의미와 맞지 않은 곳이 많다. 따라서 공자와 직접 자리하지 않았음이 매우 분명하므로 논어의 좌구명에 해당될 수 없다.
전국시대 글은 분방(奔放)한데 춘추좌전의 글은 평이하고 간결하여 논어예기<곡례><단궁> 등 여러 편과 가깝다. 따라서 결코 전국시대 글처럼 보이지도 않거늘, 어찌 진나라 때 지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

더구나 사기에서는 춘추좌전을 좌구명이 지었다고만 했지, 어느 때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그가 공자를 만났다는 내용도 없다. 따라서 두 사람의 성명이 우연히 같았던 것인지, 아니면 좌씨춘추라고 전해지기에 사마천은 마침내 이를 억측하여 논어의 좌구명으로 여겨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논어를 해설하는 자들 가운데 좌구(左丘)는 복성(複姓)으로, 공양(公羊)이나 곡량(穀梁)과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춘추를 전한 사람을 말할 때 공양씨의 춘추라거나 곡량씨의 춘추라고 하는데, 이것만은 유달리 좌씨의 춘추라 했지 좌구씨의 춘추라고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춘추좌전을 지은 사람은 좌씨이지만 좌구씨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춘추를 전한 사람이 과연 좌구명인지도 섣불리 결정지을 수 없다.

□ ≪중용은 자사가 지은 게 아니다(中庸非子思作)

세상에서는 예기<중용편>은 자사가 지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은 한결같이 평범하며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으로, 고차원적이거나 원대한 말은 없다. 반면 중용은 유달리 탐색색은(探索索隱)하여 미묘한 이치를 파헤치려 했다. 이는 공자나 맹자의 말과 전혀 다르다.
이것이 그 의심스러움의 첫 번째이다.

탐색색은(探索索隱) : 깊이 숨겨져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고 사물의 숨은 이치를 색출한다는 뜻으로, 주역<계사 하>(繫辭 下)에 나오는 말이다.

논어의 글은 간명하고, 맹자의 글은 곡진하다. 논어는 유자나 증자의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기에 바로 자사와 같은 시대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용의 글은 유독 번거롭고 어려워 위로는 논어와 확연히 다르고, 아래로는 오히려 맹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이 그 의심스러움의 두 번째이다.

재하위’(在下位)부터 열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문구는 맹자에도 보이며, 내용도 대동소이하기에 이를 자사가 맹자에게 전해준 말이라 해석하기도 한다.❶ 하지만 공자와 자사의 명언들이 숱하게 많은데, 맹자는 어찌하여 유독 이 말만 기술했던 것일까? 그리고 맹자는 공자의 말을 기술할 때 한결같이 공자왈’(孔子曰)이라 했는데, 이 말만 앗아다가 자신의 말로 꾸몄을 리도 없다.
이것이 그 의심스러움의 세 번째이다.

❶ ≪중용14장의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은 바로 맹자<이루 상>에서의 居下位而不獲於上, 民不可得而治也와 거의 같다는 최술의 주장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건대 중용은 분명 자사가 지은 게 아니다. 대체로 자사 이후 자사를 떠받들던 사람이 엮었기에 자사의 이름을 가탁했으며, 오랫동안 전해지다 보니 자사가 지은 것처럼 오인되었으리라. 그 속에 들어 있는 훌륭한 말이나 뛰어난 논의는 모두 공자와 자사가 서로 전해준 말이며, 그 가운데 간혹 지나치게 고원(高遠)하고 유심(幽深)한 것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은 여기저기에서 주워 모아 사사롭게 덧붙인 것이리라.

성인의 말씀을 그릇되게 따를 수는 없다(聖言不可謬遵)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의 말이라면 천하와 후세에서 어느 누구라도 마땅히 따라야만 하리라. 하지만 정녕코 그것이 성인의 말이었을 때 그런 것이지, 거짓된 성인의 말마저도 마땅히 따라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살며시 일러주고 싶다. 이제 논어의 원류에 대한 비고(備考)를 기록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지금 전해지는 노논어도 한나라 때 서로 다른 것을 엮은 것이기에 성인 공자의 크나큰 꾀함 가운데에서도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장 들어 있음을 알리려 했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분간해서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술, 이재하 옮김, 수사고신여록, 한길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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