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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수사고신록≫ 최술 -“천년의 의혹 말끔히 풀어내니”2020-09-24 23: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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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진면목을 복원한 수사고신록이재하

최술은 공자와 같은 성인이 허황된 이야기로 더렵혀져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으며, 학문이 넓고 깊어질수록 의혹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공자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려면 선후를 고찰하여 진위를 명확히 파악해야 하며, 위학(僞學)이 경전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해야 하고, 사설(邪說)이 성인을 무고할 수 없도록 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이야 말로 학자들이 마땅히 해야만 할 의무로 여겼다. 그래서 최술은 벼슬살이의 꿈을 접고 공자의 행적과 논어를 중심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수사(洙泗)’는 공자가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에 학당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쳤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청나라의 고증학은 중국의 고대 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깊이를 더해주었으며, 최술은 실로 방대한 고신록을 완성함으로써 20세기 들어 고증학의 중요 인물로 한껏 각광을 받게 되었다. 최술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시대를 초월한 역사학의 대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

공자의 모습이 기이했다는 설을 변증함

사기<공자세가>에 기록된 정나라 사람의 말은 이렇다.
공자의 이마는 요()임금, 목은 고요(皐陶), 어깨는 자산(子産)과 비슷하며, 허리 아래쪽은 우왕(禹王)보다 세 치가 작았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실려 있는 고포자경(姑布子卿)의 말은 이렇다.
공자는 요임금의 이마에 순()임금의 눈, 우왕의 목에 고요의 입이었다.”
공총자(孔叢子)에 실려 있는 장굉(張宏)의 말은 이렇다.
공자의 펑퍼짐한 눈자위에 기다란 눈과 튀어나온 이마는 황제(黃帝)의 얼굴이며, 긴 팔과 거북이 등에 아홉 자 여섯 치의 키는 성탕(成湯)의 모습이다.”
그리고 효경<구명결(鉤命決)>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공자는 소의 입술, 호랑이의 발바닥, 거북이의 등에 바다처럼 크고 깊은 입이었다.”
후세에 공자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실처럼 믿는 나머지 즐겨 말하곤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요임금이나 순임금 때에는 흙이나 나무로 만든 조상(彫像)도 없었으며, 영정각(影幀閣)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리고 춘추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천칠팔백 년이나 된다. 그렇거늘 그들의 머리ㆍ눈ㆍ목ㆍ입 등의 세세한 모습을 후세 사람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토록 뚜렷이 알 수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똑같은 이마와 눈인데 저쪽에서는 황제를 닮았다고 하고, 이쪽에서는 요순을 닮았다고 한다. 똑같이 우왕을 닮았다고 하면서도 저쪽에서는 몸, 이쪽에서는 목이라고 한다. 똑같이 고요를 닮았다고 하면서도 저쪽에서는 목이라고 했다가, 이쪽에서는 또 입이라고 한다. 설령 그런 모습이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나는 틀린 소리이다.

무릇 성인 공자의 모습이 요임금ㆍ순임금ㆍ우왕ㆍ탕왕과 엇비슷하다 하여 부질없이 덧칠하는 것조차도 무고를 벗어날 수 없거늘, 하물며 소나 호랑이를 닮았다 하니 모욕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한다는 소리가 너무 사리에 맞지 않아 점잖은 사람들로서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바이거늘, 후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정(影幀)이나 소상(塑像)을 만들곤 한다. 너무하구나, 허망한 사람들의 속임수를 곧장 받아들임이!

맹자(孟子)사람들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똑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했으며, 조교(曹交)제가 듣기로 문왕은 키가 10척이고, 탕왕은 9척이었다고 하던데라고 묻자, 맹자는 생김새가 무슨 대수랍니까? 역시 자신이 하기 나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성인이 성인이 되는 까닭은 참으로 생김새에 있는 게 아니다. 생김새에 집착하여 성인을 헤아린다는 것은 천박한 짓거리이다. 하물며 그것이 날조된 것임에야! 그러므로 이런 이야기는 모두 삭제함으로써 성인의 참모습을 보존하련다.

□ ≪사기에 기록된 공자의 이름과 자에 대해 변증함

사기<공자세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니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다. 태어날 때부터 정수리가 오목하게 생겼기에 이름을 구(),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는 공자의 이름과 자 때문에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믿을 수 없다. 더욱이 기도 때문이라고 말해놓고서 또 머리 모양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마천 자신도 이미 확고한 견해가 없음이다. 이제 싣지 않는다.

노나라 임금이 잉어를 하사했다는 설을 변증함

공자가어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자는 열아홉 살에 송나라 견관씨(幵官氏)에게 장가들어 1년 뒤에 백어(伯魚)를 낳았다. 백어가 태어나자 노나라 소공(昭公)은 공자에게 잉어를 하사했다. 공자는 임금의 하사를 영광스럽게 여겨 아름을 리(), 자를 백어라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자가어에서는 백어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쉰(공자 나이 70)이며, 안연(顏淵)이 죽었을 때의 나이는 서른둘(공자 나이 62)이라 했다. 또 공자보다 서른 살 어리다 했다.
만약에 공자가 스물에 백어를 낳았다면, 백어의 죽음은 당연히 안연이 죽은 뒤이다. 그런데 논어의 안연의 죽음에 관한 장에 의하면 백어의 죽음은 안연이 죽기 전이다. (논어<선진편>). 따라서 이런 공자가어의 연도는 믿을 수 없다.
이처럼 나이에 관한 공자가어의 기록도 이미 믿을 수 없는 터에, 공자의 아내가 견관씨였다거나 잉어를 하사했다는 이야기 또한 견강부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공자 자신이 나는 젊었을 때 미천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공자가 스무 살쯤이면 아직 벼슬살이에 나가지도 않았을 터, 무슨 수로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잉어를 하사하도록 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제 이런 이야기는 모두 뺀다.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설을 변증함

사기<공자세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궁경숙이 노나라 임금에게 말씀드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기를 간청했다. 그러자 노나라 임금은 이들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필, 그리고 심부름시킬 시중꾼 한 사람을 마련해주었다. 그리하여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묻기 위해 노자(老子)를 만났다. 노자는 공자를 떠나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총명하고 깊이 살피는 데도 죽음에 가까이 가는 사람이 있는데, 남 비판하기를 즐기기에 그러하지요. 많은 지식과 뛰어난 분별력을 지녔는데도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남의 잘못을 들추기에 그러하지요.’”

사기<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는데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일컫는 사람들이란 육신과 뼈가 이미 썩어버렸고, 오로지 그들의 말만 남아 있을 뿐이지요. 내가 듣기로 뛰어난 장사꾼은 깊이 감춰두고 빈 것처럼 꾸미고,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는 어리석은 듯 겉모습을 꾸민다 하더이다. 이제 그대는 교만과 탐욕, 허세와 투지를 버리시오.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라오.’ 이에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새라면 나는 그것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짐승이라면 나는 그것이 재빨리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용에서만은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오르는지를 알 수 없더구나! 아마 저 노자야말로 그런 용과 같은 분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노담(老聃)의 학문에 대해서는 경전에 언급된 게 없으며, 오로지 예기<증문자편>에서만 공자가 예를 논하는 가운데 자주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별다른 내용도 아닌 세간에서 이야기되는 그렇고 그런 것들이다.
전국시대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주장이 함께 유행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옛사람에 의탁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유학자들이 공자를 높이면 양주의 설을 일삼는 자들은 노담에 빗대 공자를 깍아내렸으며, 유학자들이 요순을 높이면 그들은 황제(黃帝)에 빗대 요순을 깍아내렸다. 하지만 황제 때에는 예악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노담은 낮은 지위에 머물렀기에 그 자취래야 양주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지금 사기에 실려 있는 노담의 말도 모두 양주의 말일 따름이며 그 글도 전국시대 제자백가와 흡사해 논어춘추 좌전의 글과 전혀 다르다.
더구나 공자가 교만했던가? 허세를 부리고 투지에 넘쳤던가? 깊숙이 살폈으되 죽음을 가까이하고 지식과 분별력을 지녔으되 몸을 위태롭게 했던가? 노담은 공자에게 이런 말을 일러서 도대체 뭘 어찌하겠단 말인가?
이로 미루어 말하건대 노담이 공자에게 이러쿵저러쿵했다는 말이야말로 부질없는 소리다.

공자는 옛날 현인이나 그 당시의 경대부들을 칭찬하곤 했는데, 그것들은 논어에 빠짐없이 실려 있다. 그런 공자가 과연 그토록 노담을 칭송한 적이 있었다면, 짐작건대 제자들에게 틀림없이 누누이 언급했으리라. 그런데 어찌하여 논어에는 단 한 마디도 싣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는 대체로 공자와 노담이 예에 대해 논의했다는 이야기를 빌미로, 장자나 열자의 무리들이 마침내 덧붙이거나 억지로 짜 맞춰 공자를 깍아내리고 자기들의 주장을 부풀리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사기<공자세가>에서는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잘못 채록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양자운(揚子雲)옛날 양주와 묵적이 성인의 바른 길을 가로막자, 맹자가 명확한 판단으로 그들을 물리쳐 앞길을 훤히 뚫었다고 했다. 대체로 세상에 전해지는 황제와 노자의 말이라는 것들이 바로 양주의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위아(爲我)‘의 말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 때문에 유학자들은 양주를 버려둔 채 노담을 이단의 우두머리라 말한다. 이 얼마나 원통한가!
무릇 노담에 대한 언급은 오직 예기의 내용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존 여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노자와 관련된 이야기나 말은 모두 싣지 않음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의혹을 자르련다.

기장으로 복숭아를 씻는다는 이야기를 변증함

공자가어에는 애공이 복숭아를 하사하며 기장으로 씻어 먹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때 공자는 복숭아와 기장을 함께 먹으며 이런저런 말로 애공을 깨우쳤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춘추시대의 풍습은 그나마 소박했다. 따라서 기장으로 복숭아를 기장으로 씻어 먹는다는 등 그런 일은 틀림없이 없었으리라. 게다가 하찮은 일에 지나지 않으며, 성인의 말은 간결하고 기세가 중후하다. 그런데 하물며 임금을 모시고 음식을 먹는 자리이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쉬지도 않고 변설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는 한비자에서 따온 것인데, 한비가 이끌어온 이야기는 애초부터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헛소리를 지어내 자기 주장의 바탕으로 삼으려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는 더욱 비루하여 깊이 따질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공자가어는 이런 이야기를 싣고 있다. , 도대체 싣지 못할 게 또 무엇이란 말인가!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이 아니다(孔子非生知)

공자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이 아니다. 다만 옛것을 좋아하고 힘써 그것을 탐구했을 따름이다라고 했으며, 자공은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직 없어지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답니다. 현명한 자는 그 가운데 큰 것을 알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자는 작은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러니 스승님께서는 어디에서인들 배우지 않았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공자야말로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이 아니며, 배워서 알게 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데도 정자(程子)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이다, 하지만 배움으로 말미암아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훗날 배우는 사람들에게 힘쓰도록 북돋우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정자가 이렇게 말한 뒤로 마침내 모두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이라 여기게 되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논어의 다른 장이라면 때로는 자신을 낮춰 남을 깨우치기 위한 말도 있다. 하지만 지학장(地學章)’이라면 열다섯 살부터 일흔 살까지의 나이이며, 덕으로 나아가는 차례로 ()’()’불혹(不惑)’에서 불유구(不踰矩)’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공자가 배움에 바탕을 두지 않고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면, 없는 사실에 빙자하여 그런 차례와 공력의 과정을 엮어 후세 사람들을 속였단 말인가!

재아(宰我)내가 보기에 우리 스승님은 요임금이나 순임금보다 훨씬 훌륭한 분이시다!”라고 했고, 자공은 인류가 살아온 이래로 우리 스승님과 같은 분은 아직껏 없었으리라!”라고 했으며. 유약(有若)우리 인류가 살아온 이래로 공자보다 성대한 분은 아직 없었으리라!”라고 말했다. 이처럼 제자들이 공자를 추존(推尊)하는 데서는 조금도 말을 아낀 적이 없지만, 어느 한마디도 공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다고 언급한 적은 없다.
공자 자신이야 간혹 겸손의 의미를 담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제자들까지 공자를 대신해 겸손을 떨 필요야 없다. 공자 자신의 말도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이 아니라 했으며, 제자들도 한결같이 공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자 이후 2천 년이나 뒤늦게 태어난 후세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공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중용에서는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기도 하며, 혹은 배워서 알기도 하며, 혹은 노력을 기울여서 알기도 한다. 그러나 앎이란 점에서는 똑같다고 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것은 힘이 드느냐 안 드느냐의 차이야 있겠지만, 무엇이 높고 낮다는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공자가 비록 배워서 알게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공자의 성스러움에 흠될 게 없으며,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알았다 하더라도 지극한 성스러움에 보탬 될 게 없다. 하물며 공자는 오로지 사람들이 자기를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여길까 염려했으므로, 배워서 아는 사람임을 스스로 밝히기 위해 조바심냈을 정도였다.

맹자는 … ≪맹자의 맨 끝 장에서 공자를 탕왕이나 문왕과 함께 들어서 알게 된(聞知)’ 사람속에 열거했으며, 요임금과 순임금은 그 속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맹자 또한 대체로 공자를 배워서 알게 된 사람이라 여긴 것이다.

나는 성인 공자의 말을 독실하게 믿을 따름이며, 감히 조금이라도 달리 생각하고 싶지 않다. 더욱이 세상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인 공자를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안 사람으로 여기고, 배워서 안 공력을 모를까 염려스럽기만 하다. 때문에 공자를 논의하거나 찬양한 제자들의 말 뒤에 이에 관한 변증을 덧붙인다.

최술, 이재하 외 옮김, 수사고신록, 한길사, 2009

증군자(贈君子) 성정란

뛰어날싸 최선생 그 뜻 예사롭지 않아
세상을 위한 큰 포부 사람들은 모를레라
비분강개로 세상사를 논할 제
그 기세 마치 황하가 동쪽으로 흐르는 듯
…………
장안의 과거길 늘 헛걸음
십 년의 길고 긴 마음고생
그래도 주고받는 술 한 잔에 마음은 느긋하여라
불현듯 날아올라 큰 뜻 펴는 날엔
세상의 허튼 수작 모두 바로 잡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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