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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감춰진 동이의 실체와 한국-부사년(傅斯年)2020-09-09 23: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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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해제   정재서

부사년(傅斯年)<이하동서설>(1934년)은 중국의 고대사, 신화학, 문명사관 등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대사 연구에도 적지 않은 참고가 되었던 중요한 논문이다.

발표한 지 80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이 논문은 여전히 고대 중국 연구자들에게 많은 쟁점을 던져 주고 있으며, 한국사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에도 풍부한 시사를 주고 있다.

1장 박(), (), () : () 곧 은()의 기원과 발전 형세 등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이 동북에서 일어났으며 발해(渤海)와 고대 연주(兗州)가 건국의 중심지라고 전제한 후 은 및 고구려의 난생신화, 시경(詩經), 산해경(山海經)등의 기록을 토대로 은의 기원이 동북에 있음을 논증하고 은()이 선왕 상토(相土)와 건국주 탕왕(湯王), 중흥주 반경(盤庚) 시대에 각기 발전을 거듭하여 세 차례에 걸쳐 강역을 확장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2장 하()의 자취 : 하의 영역을 좌전(左傳), 국어(國語), 시경, 사기(史記), 전국책(戰國策)등에 기재된 궁석(穹石), 도산(塗山), 이락(伊洛), 곤오(昆吾) 등의 지명과 하()의 용례를 통하여 검토한 결과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남쪽 절반, 곧 분수(汾水) 유역과 하남성(河南省) 서부와 중부, 곧 이락과 숭고(崇高) 일대를 포함하고 서(西)로는 섬서(陝西)의 일부분, 곧 위수 하류를 차지하였으며 번성기 때에는 제수(濟水)의 상류, 곧 상구(商丘)에까지 이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영토를 근거로 ()는 서방의 제국 혹은 연맹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3장 하()와 이()의 각축(夏夷交勝) : 명궁 예(羿)의 행적좌전, 초사(楚辭), 산해경(山海經)등의 기록을 대한 분석을 통해 그가 동이(東夷)의 맹주로서 하()를 정벌했음을 논증한 후 좌전등의 고전이 하 중심의 사관으로 예(羿)를 폄하했음을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이하(夷夏) 간의 3단계 투쟁을 초기의 익()과 계(), 중기의 예(羿)와 소강(小康), 말기의 탕()과 걸()의 투쟁으로 정리하고 있다.

4장 여러 이()족들의 성씨(諸夷姓) : 이의 거주지가 동방 및 회수와 제수의 하류 일대에 있었다는 전제하에 좌전, 제왕세기(帝王世紀), 산해경, 사기, 전국책등의 전적에 기재된 이()의 여러 종족들을 소개하고 있다. ()는 진()의 태호족(太昊族)과 공상(空桑)의 소호족(少皞族)의 두 종족으로 나뉘는데, 특히 소호족이 번성하여 영씨(嬴氏), 조씨(趙氏), 기씨(己氏), 언씨(偃氏) 등 많은 성씨를 남겼고, 이들은 진(), () 등의 대국을 비롯해 담(), (), (), (), () 등의 소국을 건설했다고 논증하고 있다. 아울러 ()의 세력이 이처럼 큰데도 춘추, 전국 시대의 사상가들이 하, , () 중심의 왕조체계를 구상하면서 이()를 배제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 총결 부분에서 부사년은 중국의 지형을 크게 동평원구(東平原區)와 서고지계(西高地系)로 나누고 경제적, 문화적 발전 여건이 좋은 동평원구에서 이()와 은()이 성립되고, 지형상 무력이 강한 조건을 지닌 서고지계에서 하()와 주()가 성립되어 이하(夷夏) 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음을 주장하고, 상고 시대부터 한대(漢代)에 이르기까지 동서 간의 대립, 투쟁을 도표화하여 제시한다.

논평 : 부사년(傅斯年)<이하동서설>은 중국의 고대 문명을 남북 간의 이항구조로 파악하던 전통적인 관념을 뒤집고 동서 간의 대립으로 인식을 전환시켰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 곧 동이의 실체를 드러내고 정치적, 문화적 지위를 부각시켰다는 점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부사년이 중국의 하주 중심의 정통 역사관을 비판하고 종래 주변 세력으로 간주되던 이()의 존재와 역할을 새롭게 제기했던 것은 최근 황하문명 중심론이 폐기되고 다원주의적 중국문명론이 정립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선구적 의미를 지닌다.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머리말   부사년傅斯年  

동한(東漢, 25~220) 말엽 이래, 중국사에서 곧잘 남북이 나뉜 것은 정치적인 분열이나 북방 외래 민족에 의한 통제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고대사까지 소급시킬 수는 없다.

, , 3대 및 3대에 가까웠던 시기에 걸친 부족 단위로부터 제국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변천은 황하(黃河) 및 회수(淮水) 유역을 무대로 한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지리상의 형국이란 다만 동서의 분할이 있을 뿐 남북의 구분이란 없었다. 역사는 지리에 기반을 두고 생성된 것이므로, 2,000년 동안의 대치는 동서 간에 발생된 것이지 남북 간에 발생된 것이 아니다.

1. (), (), ()

□ ≪시경(詩經)ㆍ상송(商頌)에서는 상토(相土, 상대商代의 아주 이른 시기의 선왕으로 설의 손자인데, 탕왕 이전이다)는 위세가 당당하여 멀리 해외까지 평정하였다.”고 하는데, “광대한 영토가 황하에 닿아 있다.”는 국가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자면, 가장 가까운 바다는 곧 발해(渤海)’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해외는 요동반도(遼東半島)나 조선의 서북방 지경이다.

상토(相土)동도(東都)는 과거에 태산(泰山)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 서부는 아마 제수(濟水)의 서쪽 기슭까지 이르렀을 것이며, 게다가 일찍이 해외를 평정하였으므로 발해(渤海)를 강역으로 삼았음이 마땅하다.

탕왕(湯王) 시대에는 몽박(蒙亳)에서 건국을 하였으므로 그의 넓은 들(廣野)’이란 곧 이른바 공상(空桑)’일 것이며, 그의 큰 물가(大渚)’란 곧 맹저(孟諸)’[‘맹저(孟渚)’의 다른 표기]일 것이니, 대개 이미 동이(東夷)의 나라와 소호(少昊)의 옛 강역을 취하여 방기(邦畿)’, 방국(邦國)의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북으로 향하여 위()를 봉하고, 서로 향하여 하()를 마주하며, 남으로 향하여 회수(淮水) 유역을 마주하였으므로 개척한 영토가 적지 않다.

반경(盤庚)이 황하를 건너 은으로 천도한 이후 서북을 향한 그의 세력이 더욱 뻗어 나갔다.

상인(商人)이 세웠던 제국은 전성기 때 무력이 몹시 강대하였으며, 패망한 이후에도 쓰러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쪽으로 해동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기양(岐陽: 섬서성 기산岐山 일대)에까지 이르렀던 이 대제국이 당시의 문화 수준에서 건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위대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의 자취[夏跡]

여러 서적에 기록된 ()의 영토에 근거하자면, 하의 구역이 지금의 산서성 남쪽 절반, 곧 분수(汾水) 유역과 지금의 하남성 서부와 중부, 곧 이락(伊洛)과 숭고(嵩高) 일대를 포함하고 있어서, 동으로는 평한선(平漢線)을 넘지 않았고, 서로는 섬서(陝西)의 일부분, 곧 위수(渭水) 하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전체를 두고 말하자면 ()는 실은 서방의 제국, 혹은 연맹으로서, 일찍이 한 차례, 혹은 여러 차례 동방을 압박했을 뿐이다. 이는 상은(商殷)이 동방의 제국으로서, 일찍이 두 차례 서방을 향해 영토를 개척하면서 하를 멸망시키고 귀방(鬼方)을 정벌하였던 것과는 전혀 상반되며 아주 다른 상황이다.

3. ()와 이()의 각축[夏夷交勝]

()’라는 글자는 (), () 시대의 문서에 매번 ()’ 자와 같으며, 독음도 역시 ()’과 비슷한 점은 매우 주의할 만하다.

() () 시대의 대사(大事)란 바로 이인(夷人)들과의 투쟁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지금은 실전(失傳)된 것 같지만 경전 속에 흩어진 자료를 한 차례 나열해 보기만 해도 이 사건은 매우 분명해진다. 애석하게도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진정한 고대사가(古代史家)가 아니어서, 비록 예(羿)와 착(), 그리고 소강(少康)의 설화라 할지라도 끝내 한 글자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정의(正義)(사기정의(史記正義)를 말한다. 당대의 장수절이 편찬한 사기의 주석서)의 작자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 걸()을 내쫓은 것은 이()가 하()를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나라 시대의 3단계 대사(大事), 건국 무렵의 익()과 계()의 투쟁이 곧 하와 이의 투쟁이며, 중간 무렵의 예(羿)와 소강(少康)의 투쟁 역시 이와 하의 투쟁이다. 마지막의 탕()과 걸()의 투쟁 역시 이()와 하의 투쟁이다. 그러므로 하대(夏代)에 걸쳐 동서 간의 투쟁이 이처럼 격렬하였는데도 춘추전국 시기의 대일통주의(大一統主義) 철학가들은 모두 이처럼 뚜렷한 역사적 흔적을 말살하고 왜곡시켜 버리고 말았다.

4. 여러 이족(夷族)들의 성씨[諸夷姓]

저마다 다른 이족(夷族)의 성들이 지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동방과 회수(淮水)와 제수(濟水)의 하류 일대에 있다는 점이다.

□ 은인(殷人)들은 본래 이족(夷族)이 아니면서 이인(夷人)과 그 영토를 관리하였으므로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상나라 사람들이 코끼리를 부려 타고서 동이들에게 포악하게 굴었다.”고 하였지만, 비록 춘추 시기 송()의 양공(襄公)에게 이르렀어도 여전히 동이를 잊지 못해 하대(夏代)의 후예들을 산 채로 희생시켜 동이에게 환심을 샀다.

()은 일찍이 부분적으로 이()에 동화되었으니 고문상서(古文尙書)에서는 ()가 이인(夷人)과 함께 지내며, 조상신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은대(殷代) 말엽에는 이미 오방 상제에 대한 종교를 홀대하고 이족(夷族)에 대한 습속으로 개종하였으므로 나라가 망할 무렵에는 비렴(飛廉)이니 오래(惡來)와 같은 이인(夷人)들이 오히려 주()를 위해 죽었던 것이다.

위글에 대한 총체적 결론

지형의 차이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경제생활, 다른 정치조직을 형성하므로 고대 중국에 동서 이원화의 현상이 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동과 서가 서로 투쟁하고 서로 멸망시켜 온 것이 바로 중국의 삼대사(三代史)였다. ()나라 때의 이()와 하의 투쟁에서는 이()는 동()이요 하()가 서(西)였으나, ()나라 때의 하와 상의 투쟁에서는 상이 동이요 하가 서였으며, 다시 주()가 건국되자 이번에는 상엄()이 동이요 주인(周人)이 서였다.

동방과 서토의 지리적 중심지는 동평원구에서는 남쪽의 공상(公桑)을 위주로 삼고, 도읍을 두기도 하던 북쪽의 의()를 다음 중심지로 두었으며, 서고지계에서는 바깥의 낙양을 위주로 삼고, 내지에 있던 안읍(安邑)을 다음 중심지로 두었다. 이는 모두 자연 지형에 근거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므로, 그것의 중요성은 대부분 왕조가 바뀜에 따라 바뀌지 않았다.

4개의 중심지가 중국 고대사에서 지니는 의의를 인식한다는 것은 아마도 중국 고대사의 총체적인 모습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부사년(傅斯年) 지음, 정재서 역주,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감춰진 동이의 실체와 한국-, 우리역사연구재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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