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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의 초상화≫-형(形)과 영(影)의 예술- 조선미2020-09-06 19: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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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한국의 초상화.hwp (19.06MB)

한국의 초상화-()과 영()의 예술-

저자의 글

초상화란 형과 영의 예술이다. ()이란 그려지는 대상 인물(sitter) 그 자체이며, ()이란 그려진 초상화이다. 즉 실체(實體)와 가상(假象)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가가 어떤 특정 인물을 그려낼 때 그의 외양인 형을 올바르게 포착해낸다면 자연스럽게 이 형과 구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정신이나 마음 같은 내적 요소 역시 화면 위로 끌어 올려져 영으로 비추어진다. 이를 초상화론에서는 전신사조(傳神寫照)’라든가 사심(寫心)’이란 용어로 표현하곤 하였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된다. 1장 즉 서론 부분에서는 한국 초상화 전반의 흐름을 개관하고 우리나라 초상화가 지닌 성격에 대해 기술한다. 2장부터 제8장까지는 초상화의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왕, 사대부, 공신, 기로, 여인, 승려 등 여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 후, 각 유형에 따라 대표적인 걸작들을 총70여 점 선정하여 한 작품씩 차례로 고찰한다.

한국 초상화의 세계

한국 초상화는 그 연원을 살펴본다면 적어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왕의 초상, 어진 : 한국에서 어느 시기에 처음 어진이 제작되었는가는 확언하기 어려우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명백히 왕의 초상화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니 부석사신라왕상’(삼국사기)이나 원주신라경순왕영전중수기’(창암집) 등은 왕의 진영이 사찰에 벽화 형식으로 그려졌음을 말해준다.

어진 제작이란 여염에서와 마찬가지로 왕가에서 왕손들이 조상을 추모하려는 뜻에서 행해졌지만, 한편 제작된 어진을 진전(어진을 봉안하는 구조물)에 봉안함으로써 그 조종(祖宗)이 영수하기를 꾀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공신상 : 공신(功臣)이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공을 세운 인물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신상은 공신에게 공신호를 사여함과 동시에 내리는 포상 내용 중 하나였다. 공신도형에 관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려시대 태조 때부터이다.

공신상은 첫째, 왕명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당대 초상화에 솜씨 있고 명망 있는 화사가 총동원되었으며 둘째, 기록을 통해 제작 시기가 분명히 확인되며 셋째, 공신호 책봉은 1728년 이인좌 난을 평정한 분무공신호로 끝나지만,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라는 이른바 공신상 형식은 조선시대 사대부상에서 더욱 유행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공신상은 18세기 이후 사대부 초상화에서 정장관복본의 확산 및 성행에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고 평가된다.

기로도상 :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공신상과 아울러 기념적 의취를 강하게 띄고 있는 유형으로 기로도상이 있다. ‘기로(耆老)’라 할 때 ()’60, ‘()’70세를 지칭하지만, 기로는 단순히 나이든 노인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기로에 드는 조건은 수(), (), ()을 겸비함에 있었다.

□ 조선 태조 3기로소(耆老所)라는 공적 기구가 설치되었으나 기사(耆社)에 들어온 여러 원로들의 초상화를 조정에서 그리는 것은 숙종 이전에는 없었다. 숙종이 기로소에 입사한 이후에야 비로소 기사에 함께 들어온 신하들을 그려 기영관(耆英館)에 보관토록 했으며, 이때부터 기로도상이 본격적으로 그려졌다.

여인 초상 :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가장 약세를 보이는 유형이 바로 여인의 초상화이다. 여인의 초상화는 안악 3호분, 매산리사신총, 쌍영총의부인상 등 고구려 고분벽화의 총주부부상에서 그 원류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오면 초기에는 왕비 진영이 왕의 초상화와 함께 제작되어, 선원전에 봉안되거나 고려시대 유풍을 따라 원찰에 봉안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왕후의 진영 제작 및 봉안 기록을 전혀 살펴볼 수 없으니, 이것은 당시 내외가 극심했던 당시의 유교적 관념 하에서, 신하로서 감히 중전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린다는 것은 지극히 무례한 일로 간주되고, 따라서 당시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사상의 경화된 관념이 조선 후기 이후 왕후의 초상화를 산출하지 못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승상 : 승려의 초상을 그린 승상은 초상화 가운데 가장 일찍 개화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로서는 삼국시대의 승상 제작에 관련된 확실한 예를 들기 어렵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승상 제작이 활발했음을 비문 및 문헌기록(<육조영당>, 동문선)을 통해 살필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승상에 대한 진찬은 여러 문집(익재집 )에서 산견된다.
고려시대 승상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송광사 국사당의 <보조국사상>, <진각국사상>이 전해 오고 있다.

억불숭유정책을 지향했던 조선조에서도 승상 제작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국의 초상화는 용도가 추모나 감상용이라기보다 향사를 위한 첨배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괘축형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초상화 화면 안에는, 참배자의 시선을 빼앗을 만한 여러 요인을 제거한, 대상 인물 한 사람만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형식적인 면 외에도 조선조 화사들에게 초상화 제작 시 가장 중시한 부분은 그 대상 인물의 외적 닮음만이 아니라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조 화가들에게 요구되었던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있어 ()’, 즉 정신의 의미란 대상 인물의 심층부에 도사린 개별적 특성 내지 심적 경향성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초상화를 첨배하는 사람이 그 인물에 기대하는 모습, 다시 말해 기억하고 숭배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성정이 드러날 때의 용자(容姿)였다.

조선조 초상화에서는 눈앞에 있는 인물을 그대로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은 천연두 자국이나 기미, 주근깨, 반점 같은 피부상의 특징은 물론 눈꺼풀의 묘사나 수염 처리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조선의 초상화에서는 안면의 각도와 동일한 각도로 시선이 처리되며, 눈의 형상도 실제 모습을 그대로 옮긴 듯 과장되지 않게 묘사된다. 이러한 사실적 묘사력은 <이재초상>이나 <황현초상>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나는데, 그야말로 털끝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초상화의 명제를 화사 자신들이 마음 깊숙이 따랐음을 말해준다.

한국 초상화는 왜곡이나 변형을 통한 실제 인물 이상의 희화적 효과도, 또한 특징의 강조를 통한 의도적 과장도 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실제 인물에 대한 사실적 노력만이 극진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융통성이 없고 딱딱한 감을 주지만 어쭙잖은 개성에의 폭주는 방지되었으며, 이 때문에 모든 작품이 도달한 수준의 격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 초상화의 묘는 바로 이러한 재현의 극으로부터 오는 표현력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과 영()의 예술-, 돌베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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