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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구범진2020-08-27 20: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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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서언

조선의 인조(仁祖) 14년이자 청의 숭덕(崇德) 원년이었던 병자년(丙子年) 십이월 8(163713), 청군의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정월 30(1637224), 남한산성을 나선 인조는 청의 태종(太宗)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전쟁이 터진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겪었던 것이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치욕 중 하나로 기억되는 참패였기에 이런 의문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전쟁 준비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어찌 이런 참담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나는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의 반복을 막을 수 있도록 역사에서 교훈을 찾기 위하여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당시 조선 위정자들의 전쟁 준비가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안기려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들이 저지른 또 다른 잘못을 지적하여 종래와는 다른 방식으로 평가하고 단죄하려는 마음 또한 없다. 그저 전쟁의 실상을 자세히 규명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의 관심사는 말하자면 전쟁의 진상 규명이다.

서론

현재 병자호란에 대한 통설의 서사에서는 역사적 실제와는 거리가 먼 허위사실이 적잖이 눈에 띈다. 이 책의 각 장에서도 기회가 날 때마다 거듭 강조하겠지만, 통설의 서사에는 사료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막연한 주장들이 발견된다. 설사 근거 사료를 제시했다하더라도 그 사료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신뢰할 수 있는 사료와 합리적 추론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자체의 디테일을 최대한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친정 : 총력을 쏟아 조선 정복에 직접 나서다

절화교서 : 병자년 31일 인조가 팔도에 하달한 교서. 인조의 절화교서는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칭제과정에 동참하라는 후금 사신의 요구를 두고 조정에 척화론이 들끓는 와중에 나왔다. 그 요지는 후금과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듯하니 그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운수 사납게도 이 문서는 평안감사 홍명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만 본국으로 돌아가던 후금의 사신에게 탈취되어, 삼월 20일 홍타이지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절화교서때문에 양국 관계가 곧장 파국에 이른 것도 결코 아니었다.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전쟁 정도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병자년에 한정해보자면, 정작 홍타이지는 조선과의 전쟁을 명과의 전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병자년의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명나라를 먼저 쳤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규모 및 구성은 전쟁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대한 탐구는 오랫동안 방치되어왔다.
1644년 입관(산해관 입관) 이전의 청나라는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니었다. 홍타이지의 부친 누르하치가 처음 군사를 일으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1583, 누르하치 수중의 갑옷은 겨우 13벌이었다고 한다. 갑옷을 갖춘 갑병이 13명뿐이었다는 의미이다.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을 위해 동원한 병력은 갑병을 기준으로 약 34,000(외번몽고 12,000 포함)이었다. 이 숫자는 물론 10만 명을 넘어서는 통설의 수치에 비해 현격하게 적다.
그러나 병력의 많고 적음에 대한 판단은 당시 홍타이지의 동원 가능 병력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 병자호란 무렵 팔기만주ㆍ팔기몽고, 우전초하, 천우병ㆍ천조병의 동원 가능 병력 총수는 31,000~32,000명 수준이었다. 이 가운데 병자호란에 참전한 수는 약 22,000명이므로, 홍타이지는 병력 총수의 약 70퍼센트를 조선 침공에 투입한 셈이다.

병자호란이 홍타이지의 총력전이었다는 것은 과거의 주요 군사작전에 동원한 병력 규모와 비교해 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홍타이지의 군사원정 가운데 사료상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1632년의 차하르 원정이었다. 이 원정에는 외번몽고의 수장들이 대거 참전했다. 만주어 기록에는 나라 안팎의 병력을 합쳐 ‘10만 명이나 집결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확인되는 숫자는 3만여 명 정도에 그쳤다.

따라서 병자년의 시점에서 홍타이지는 역사상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는 총력전으로 조선과의 전쟁에 임했다고 할 수 있다.

홍타이지는 언제, 무엇 때문에 조선 침공을 결심했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병자년 31일의 절화교서에서 눈을 돌려 사월 11일에 거행된 홍타이지의 칭제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홍타이지의 칭제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존호(尊號)’, 즉 만주어로 큰 이름(amba gebu)’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칭호를 받는 일을 가리킨다. 13세기 초 테무친이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병자년 사월 11일 홍타이지가 존호를 받으면서 내건 명분은 조선 정복’, 몽고 통일, 옥새 획득이었다. 몽고 통일과 옥새 획득은 차하르 정복의 업적을 가리키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복그렇지 않다. 조선정복이란 정묘호란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비록 조선이 수세에 처한 상황이었을지라도 쌍방의 맹약으로 화의가 성립함으로써 끝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자신이 이미 조선을 정복했노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황제 즉위식이라고 부르는 장엄한 의례-홍타이지가 관온인성황제라는 존호를 받은 의식-를 거행하던 현장에 조선의 사신 나덕현과 이확이 있었다. 홍타이지는 황제 즉위식에 이들을 데려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신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릴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홍타이지에 대한 배례(拜禮)를 목숨을 걸고 거부함으로써 한바탕의 소동을 야기했다. 두 사람의 저항은 한마디로 장엄한 황제 즉위식에 흙탕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병자년 칠월 28 인조는 나덕현과 이확의 배례 거부 때문에 화친하는 일이 끊어져버렸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사월 11일의 시점에 양국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렸음을 정확히 짚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홍타이지야말로 애초에 정묘년 이래의 양국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홍타이지의 존호는 논의 당초 조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였다. 그 신하들이 내세웠던 명분은 차하르 정복과 옥새 취득이었다. 자신에게 존호를 바치는 대열에 조선의 왕을 동참시키지는 발상을 내놓은 장본인은 바로 홍타이지였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왜 무리수를 둔 것일까? 명나라가 건재한 상황에서의 칭제가 과대 망상적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홍타이지는 최소한 명의 최대 조공국인 조선의 인정이라도 받아야 그나마 칭제의 명분이 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이 홍타이지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자년 사월 11일의 황제 즉위식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목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월 11일의 장엄한 의식은 미완의 황제 즉위식에 그치고 만 셈이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정묘년의 조선 정복은 사실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조선이 배신했을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침 그는 배신의 증거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절화교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제 일으킬 전쟁은 1627년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 되어야만 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전쟁의 목표는 처음부터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 명실상부한 조선 정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이번에 조선을 확실히 정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칭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정당성을 상실하고 말 터였다. 전쟁의 필승을 위해서는 당연히 최선을 다하는 총력전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정묘호란 때처럼 남에게 전쟁을 맡겨서는 안 되었다. 이견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과를 거둔다하더라도, 그 공적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주장하지 못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이번의 조선 정복은 본인의 정치적 권위가 걸려 있는 사안이었으며, 따라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업적이 되어야만 했다. 홍타이지가 친정을 결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자호란은 잉태당초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홍타이지 본인의 정치적 야망과 어젠다를 군사적 수단으로 달성하는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친정 : 총력을 쏟아 조선 정복에 직접 나서다
기습 : 서울을 급습하여 인조의 강화도 파천을 저지하다
포위 : 조선의 근왕병을 격퇴하고 포위망을 완성하다
조류 : 염화수로의 조류가 청군의 강화도 상륙을 돕다
반전 : 협상으로 전환하여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고 하다
마마 : 홍타이지가 조선의 천연두에 쫓기다
대미 : 삼전도 의례로 전쟁의 막을 내리다

대미 : 삼전도 의례로 전쟁의 막을 내리다

삼전도 의례의 메인 이벤트는 인조의 두 차례에 걸친 삼궤구고두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하늘, 즉 천신(天神)에 대한 삼궤구고두였다. 이때에는 홍타이지 역시 인조 일행과 함께 하늘에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두 번째는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였다. 조선의 왕 인조가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절차였다.

두 의례 모두에서 활쏘기가 거행되었다. 이 활쏘기는 단순히 무예를 겨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옛날 요ㆍ금의 제천의식에서 부수적으로 거행되던 사류(射柳)’라는 이름의 샤머니즘 의식을 계승한 것이다.

또한 홍타이지는 삼전도 의례를 심양에서의 황제 즉위식못지않게 엄숙한 의례로 치르고 싶어했다. 대열을 벗어나거나 갑옷ㆍ투구를 풀고 있었다는 이유로 8명의 최고위 대신들을 처벌했던 것이다.

결국 홍타이지는 미완에 그쳤던 병자년 사월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 정월 삼전도에서 완성’, 그것도 좀더 고차원적으로 완성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홍타이지는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어젠다를 끝까지 잊지 않으면서, 말하자면 수미(首尾)가 상응하는 의례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셈이다.
링컨의 말을 차용하자면,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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