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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해질 무렵≫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 황석영 장편소설2020-08-03 22: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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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이 끝났다.
프로젝터가 꺼지고 영상도 사라졌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다고는 해도 영산은 낙동강 교두보의 안쪽이어서 이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백 년 뒤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모두가 새로운 사람들일 것이다.
집들도 돌담도 오솔길도 모두 사라졌고 내가 태어난 집터에는 나뭇등걸만 남았더라고.
귀찮지만 외출해야 한다.

마지막 대사와 함께 연습도 끝났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배에서 가슴까지 치밀어 오를 적마다 스스로 놀라서 깨었다가 다시 잠들었다.
언제나 지나간 시간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이 그저 희미하다.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거야.
나에게 추억할 만한 연애 사건이라도 있었던가? 추억할 만한 사건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한 두어 명 지나가기는 했다.
그러고는 검은 셔츠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김민우, 그는 나보다 세 살 위였고 나와 비슷한 처지였지만 나하고는 달랐다.

사무실로 최승권이 전화를 걸어왔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유신독재가 시작되어 시국이 어수선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에 휴교령까지 거듭되었으며 학교에 가보면 어느 날 갑자기 구속되어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는 동급생들이 늘어났다.

자물쇠가 두 개나 달린 방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녀는 나에게 뭘 하느냐, 가족은 어디 사냐, 우리 아들과는 어떤 사이냐 따위를 묻지 않았다.

사람의 기억이란 같은 상황을 경험해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무심히 잊거나 당시의 감정 상태에 따라 왜곡된 줄거리로 남아 제각각 다른 얘기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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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2018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 수상!

저물어가는 세대가 들려주는 회한의 목소리
젊은 세대의 가슴 아픈 탄식!
그 쓸쓸하고도 먹먹한 이중주!

황석영, 해질 무렵, 문학동네, 2015

수년 전에 전태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나와서 그에 관하여 증언했다. ()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난 시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
어려운 시절이 오면서 우리는 진작부터 되돌아보아야 했었다.
이것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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